지금 내 앞에는
지난 1995년 장성군과 조선대학교 박물관이 펴낸
“장성군의 문화유적”이라는 책자 중, 190 쪽이 펼쳐져 있다.
구체적으론, “나옹대사 석불”(懶翁大師 石佛)에 관한 부분인데
조금 소개하자면 이렇다.
“ 나옹대사 石像으로도 불려지는 이 磨崖弗은 불대산 주봉의 북편 7~8부
능선상에 있는 나옹암 뒤편 암벽에 있다.
1371년에 恭愍王의 王師가 된 나옹(1320~1376)의 제자들이 스승을 추모
하기 위하여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 * * * *
위의 ‘불대산’은 ‘불태산’의 옛 이름이기도하다.
잠시 불태산의 흐름을 살펴보자면.....
‘호남정맥’이 내고장 ‘백암산’을 지나고 ‘곡두재’와 ‘감상굴재’를 거쳐 ‘대각산’을 지나
‘도장봉’에 이르러 정맥은 ‘추월산’으로 보내고 남쪽으로 가지를 친 지맥이 ‘도마산’과
‘투구봉’ ‘병풍산’에 이른다.
여기서 북하면 쪽으로 송대봉과 장군봉을 내려놓고 계속해서 ‘한재’를 지나 ‘병장산’
으로 오르다 방향을 남쪽으로 틀어 ‘마운데미’와 ‘천봉’을 지나 불태산을 일구고
‘이재산성’을 지나고 ‘못재’를 지나 광주의 ‘어등산’에서 맥을 다한 후, ‘황룡강’으로
스며들게 되는 것이다.
위와 같은 흐름을 일러 지리연구가들은 “불태지맥”이요, 또는 “병풍지맥”이라
부르고 있기도 하다.
장성의 진산인 ‘제봉산’은 바로 귀바위봉과 더 멀리론 불태산을 모산으로 하고 있다.
불태산은 여타의 산들에 비해서 아직까지 덜 알려졌고 그래서 아직은 청정지대라
말 할 수 있으리만치 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기도 하다.
그 이면에는. 과거 산 남쪽 “포사격장”의 통제로 인하여 정상일원이 통제되어 있었고
북쪽의 서동골은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인적이 끊어진 때문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속칭, 절골이나 절안으로 불리우기도하는 서동골은
기실, 문화의 보고이기도 한 곳이다.
우선, 매월당 김시습의 시와, 하서 김인후의 시에 나오는 “하청사”를 들 수 있다.
고산자 김정호가1834년에 펴낸 고지도에도 ‘하청사’가 표기되어있는 것으로 봐서
조선 후기까지 절이 존재했음이 분명하다.
그 밖에도 “인월사”를 비롯한 수많은 사찰이 서동골 일원에 있었다고 전 하나
무슨 연유에서인지 지금은 단 하나의 절도 남아있지 않다.
서동 부락의 가장 연장자로부터 들은 애긴즉
일제 때, 그나마 남아있던 부도까지도
지금의 담양 “용흥사”로 실어갔다는 애길 전 해 들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지금의 백양사로 절이 몽땅 이사 갔다는 애기였다.
(용흥사는 백양사의 말사이기도하다)
서동골 일원을 살펴보면 폐사지로 짐작되는 수많은 터를 볼 수가 있다.
이름모를 폐사지에서 유추해보는 서동골 불교의 흥망사는 애잔하기만 하다.
유형적인 문화재는 말 할 것도 없지만 이미 자취를 감추어버린 옛이야기를
추론하는 연구는 우리 세대에게 주어진 임무이기도 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서동골 불태산 7~8부 능선상에 위치한 옛 “나옹암” 터.
그 곳에 가면, 서두에 애기한 “나옹대사 마애불”을 친견할 수 있다.
과거 여러 번에 걸쳐 답사하여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찾아낸
“나옹대사 마애불”
안내자 없이 단 한번에 찾아가기란 그리 쉽지 않은 장소이기도 하지만
위에서 애기한 여러 이유로 잘 보존되고 있던 마애불에 근자들어
그야말로 해괴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 ‘불태산’과 ‘나옹암 마애석불’을 아끼고
사랑하는 나를 비롯, 뜻을 같이하는 여러 사람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른다.
자칭 비구니요, 환갑의 나이라고 주장하는 여자를 비롯 또 다른 여자 몇
사람들이 나옹대사 마애불이 새겨진 절벽 앞에다 하우스를 짓고 근처의
나무들을 모조리 베어내고 간이 화장실까지 지어놓고 아랫동네 남자를
불러올려 구들까지 놓은 다음 가마솥을 걸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서
청정한 불태산을 상채기내고 오염 시키고 있는 기막힌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내 오늘.
장성인 모두와 불태산의 문화유적을 사랑하고 아끼는 관계자와 강호제현께
엎드려 청 하노니,
장성군정 관계자를 비롯, 문화유산을 아끼고 사랑하는 이 모두가 분연히
나서서 소중한 문화유산인 “나옹대사 마애불”을 종교를 빙자한 잡인들로부터
보호하는데 앞장 서 주실 것을 부탁드린다.
아울러
한 때, 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한 전력이 있으리만치 불태산 ‘나옹대사 마애불’은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고 있다는 점을 모두들 인식하고
관계자들은 “나옹암지”를 점령하고 사유화 시켜가는 저들을 하루속히 불태산에서
끌어 내리고 의법 조치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
연전 경상도 어느 지방을 돌고있을 때 였다.
평소 불태산을 아끼고 사랑하는 지인으로부터의 다급한 전화
" 빨리오셔야겠습니다,"
나옹대사 마애불을 찾았더니 웬 보살들이 뭔가 일을 꾸미고있노라는 내용의 전화.
별 바쁘지도 않은 주제에 차일피일 미루다 오늘에야 현장 확인에 나선다.
들머리에 당도하니 대우 윈스톰 한 대가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데
그 보살인지 하는 여자의 차가 틀림없을터.
그렇다면 분명 산 위에 있다는 얘기렸다.
동네 후배를 불러내어 산을 오르는데
아뿔사.....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던 길이 그 동안 얼마나 오르내렸는지
가히 고속도로 수준이다.
나옹암지 초입을 올려서려는데 비닐 움막이 보인다
감이 온다,,,, 측간이 분명.
나옹암지에 올라서 바라보니
이 무슨 불태산사변이란 말인가...?
득달같이 절벽으로 달려가 나옹대사 마애불의
이상 유무 부터 살핀다
댜행이도 마애불엔 별 이상이 없어보인다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렸다는 애기....?
커다란 나무를 베어내고 조망을 확보해 놓은 모습
이 자리에서의 해넘이 감상은 감히 필설로 형용키 어려울만큼 아름답기 그지없다.
자칭 여승이라 주장하는 문제의 인물
나옹암지 부근은 원시림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청정지대다
최고의 석간수요, 기막힌 물맛의 나옴암지 샘
예전 한 때, 내가 낙엽을 퍼내어 깨끗하게 청소해 놓은 적이 있었다.
이런짓을 말려야 할 아랫동네 사람이 올라와서
아예 구들까지 놓아주고 불까지 피우고 있는 한심한 작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아예 텃밭까지 조성
부지런히 산 위로 져 나른 모습
먀애불이 있는 절벽 쪽으로 연통을 내 놓고
구들을 달구고 있는 모습이다.
아궁이에다 솥까지 걸고 장작을 지피는 모습.
먹고 마시고 나면 자연스럽게 뒤따르는건 배설문제
오염은 불을 보듯....
이 기막힌 현장을 떠나면서 다시 한번 뒤돌아본 나옹암지
계곡을 내려오며
용초폭포
인월사(印月寺) - 김시습 -
산 속에 노스님 한분이 계셔서
외모는 늙었어도 참으로 기이하네.
나를 맞아 하는 말이 들을수록 신기하니
대나무 가지에는 찬 눈이 뿌린다.
차림새가 정말 맑고 시원하니
시축과 의발로 단출하구나.
스스로 말하기를 차츰 늙어가니
금빛 주장자도 걸어두고 싶다네.
샘물가 바위에 느긋하게 머물면서
평생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다네.
저 산 남쪽 산기슭에 올라가니
봉우리가 깊어 한적하기 그만일세.
갈대를 꺾고 나무를 베어내어
맑은 시냇가에 얼추 집을 지었네.
그대에게 번거롭게 쉬어가길 청하노니
내 누추한 오막살이를 빛나게 해 주시오.
내가 그 때 마침 잠깐 짬이 났기에
'인월'이라 편액을 써서 걸게 하였네.
저 만 길 깊은 연못을 바라보니
바람은 잔잔한고 물빛은 정말 맑구나.
가을달이 물 바닥에 찍힌 것처럼
빛나고 빛나며 밝고 맑구나.
부딪쳐도 흩어지지 않고
흔들어도 떨어지지 않네.
노스님의 마음에 견줄 만하니
도심과 의리가 더욱더 격렬해지네.
활연히 깨우쳐서 근원에 꿰뚫었으니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겠구나.
삼라만상의 맑은 속을 고요히 보았으니
내 마음 한 바탕에 새겨두었네.
도저한 경지를 끝내 이름할 수 없어서
암자의 이름으로 삼아 그 뜻을 담았네.
뒷날 집착을 끊고 보게 된다면
이 또한 볼품 없는 군더더기 짓이겠지.
* 위 시는 불태산 인월사를 찾아온 금오신화의 저자 매월당 金時習이 남긴 시 이다.
이 시를 통해 지금은 자취조차 남아있지않은 "印月寺"의 편액도 그가 적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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