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저수지에 돌아드는 아침 햇살... (순창군 북흥면 상송제)
한일합방으로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구하고 배일사상의 고취를 위해
이 지방 출신 독립운동가 김원중이 동지들과 뜻을 모아 1921년 건립 하였다는
영광정(迎狂亭) (전북 문화재자료 134호)
왜인들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김원중이 광인 행세를 한데서
영광정이라 부른다고.
영광정 앞를 흐르는 시내 풍경
쌍치 둔전교 앞, 버스 승강장 옆을 들머리 삼아 장군봉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 2008, 2. 16 토요일
* 전북 순창 쌍치 장군봉(606.3m)
* 쌍치면 둔전교 앞 - 장군봉 정상 - 북릉 - 북재 - 개운치
오늘의 산행로는 쌍치에 거주하시는 고주석 총무님께서 잘 정비 해 놓으시고
저희 '호남지리탐사회를 초청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수고로움에 그저 경의를 표 할 뿐입니다.
꽤, 차거운 바람이 볼을 스치지만 상쾌하기 이를데 없는 오름길
장군봉 정상에의 무자년 시산제 진설
장군봉(606.3m)에서의 기념 컷
그간, 형제분 나란히 독감을 치러내시느라 엄청 고생하셨죠?
그 감기가 무자년의 확실한 액땜이라 여기시고 더욱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언제나 미소가 넘치시는 이름하여 장군봉표 '버터커플' ? ^*^
오른쪽은 백방산, 맨 뒤로는 추월산
멀리 여분산과 회문산에 이르는 라인
저 멀리, 흰 눈을 뒤집어 쓴 내장 연봉
멀리, 안테나를 머리에 얹은 호남정맥상의 망대봉도 눈에 들어옵니다.
'호지탐' 총무님 진행으로 장군봉에서의 무자년 시산제가 시작됩니다
호남지리탐사회를 이끄는 김정길 회장님 이하, 집행부 여러분께서 시산제를 이끄시는 모습
.
박영근 고문님의 축문 낭독
쌍치면의 인사 여러분들 께서도 잔을 올리시고
정성을 다 해 무사 무탈을 기원합니다
작게는
호지탐의 무사무탈 산행에서부터
부디
온 세상이 풍요롭고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천지신명과
각자가 모시는 신들께
정성을 다하여 원 하옵고 비옵나이다.
장군봉 산신령님.... !
호남지리탐사회 미녀 다수 문안입니다요. ^*^
쌍치 장군봉을 지키는 발바리의 위용
시산제를 끝내고 북쪽으로 진행하면서 바라본 장군봉 정상
북사면의 눈을 헤치고 개운치를 향하여 전진
헬리포트에서의 휴식
종암리로 내려서는 지점에서 시산제에 참여 해 주시고 안내까지
맡아 주신 쌍치의 인사분들과는 작별을 고하기로 합니다.
종암리로 내려가시는 쌍치 인사분들의 뒷 모습
계속 전진을 하노라니 어느덧 호남정맥 상의 고당산이 눈에 들어옵니다.
고당산 쪽을 오르다
호남정맥 라인에 당도,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와
오늘 산행의 끝자락 개운치에 내려섭니다.
산을 내려와 찾아간 녹두장군 "전봉준" 피체지
문득, 위의 비문 훼손에 관하여 인터넷을 검색하다 "정읍통문'에 실린
아래의 기사를 보게되었는데 일면, 타당한 면이 있다고 여겨져 여기 소개 해 보련다.
지난 5월 30일 오후 2시 전북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에서 전봉준 장군 피체지 복원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필자는 동학농민혁명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내심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피체지를
어떤 방식으로 복원하겠다는 것인지, 과연 전봉준 장군이체포된 피노리를 복원해서 무엇을 기리자는 것인지 의아해 했었다.
그렇지만 전봉준 장군이 체포된 역사의 현장에 어떤 식이던지 조형물이 건립되어 우리 역사 속에서 다시는 이와 같은
배신의 역사가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남겨주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싶어 준공식에 참석했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어서자마자 눈에 들어 온 피체지 임을 알리는 전봉준장군 '피체유적비’ 에 새긴 글씨를 보고 심히 우려되는바 있어 이 글을 쓴다.
거기에는 다른 내용의 글씨와는 차이 나게 큰 글씨로 “정읍 고부출신 경경천의 밀고...”운운 하는 글귀가
강조하듯 새겨져있어 이곳 피노리가 전봉준 장군이 체포된 안타까운 역사의 현장이기에 이러한 시설물을
만들었다기보다는 밀고자가 순창 피노리 사람이 아닌 정읍 출신인 것을 강조하기 위해 만든 시설물처럼 보였다.
이는 순창군에서 의도했건 아니건 간에또 다른 지역 갈등을 유발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우려가 매우 크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전봉준 장군은 공주 우금치 전투 패전 이후 11월 27일 태인 전투를 마지막으로
후일을 기약하면서 농민군을 해산시키고 수하 몇 명과 함께 11월 29일 정읍 입암산성으로 몸을 피해 하루 밤을 지냈다.
전봉준 장군은 당시 모리오(森尾)가 이끄는 일본군 부대와 이규태(李)의 관군이 입암면 천원에 서 추격해 온다는 정보를 듣고 다시 11월 30일
백양사(白羊寺)로 피신하여 하룻밤을 지내고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에 도착하여 옛 친우였던 김경천(金京天)을 찾았다.
상금에 눈이 어두워진 김경천은 전봉준 장군을 맞이해 놓고 전주감영 퇴교(退校) 한신현(韓信賢)에게 밀고하자 한신현은
김영철(金永澈), 정창욱(丁昌昱) 등 마을 사람을 동원하여 전봉준 장군을 체포하였다.
이렇듯 피노리는 갑오년 당시 민중들의 가슴에 큰 희망이자 횃불이었던 전봉준 장군이 체포된 역사의 현장이다.
물론 대대로 그 땅에 살면서 그 동안 오명을 감내한 피노리 사람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사람이 한 행위를 부끄러워 여겨야 하지 땅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간 피노리 사람들이 겪었던 아픔이 컷 다면 더더욱 그 아픔을 이웃 고을인 정읍으로 떠넘기는 태도는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입장을 바꾸어서 정읍에다가 시설물을 만들어 한신현, 김영철, 정창욱 등을 순창 출신 인물이었다고 강조하면 되겠는가?
갑오년 전봉준 장군을 비롯한 동학농민군들은 결코 자신의 아픔을 타인에게 넘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봉건 압제와 외세로부터 고통 받는 백성을 구하고자 스스로를 희생하셨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계승해야 할 희생정신이요 애국애족의 정신 아닌가?
정작 강조되어야 할 것은 밀고자의 출신 지역 따위가 아니라 이런 정신이 되어야 하지 않은가?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것 또한 큰 용기이다.
이웃 고을과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을 야기 시킬 수 있는 시설물을 바로잡아주길 간절히 바란다.
필자 순창군이 처음 가졌던 순수한 의도를 믿고 싶다.
그래서 그 믿음이 현실이 되어 역사의 현장 피노리가 잘못된 역사는 다시는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주는
산교육장이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야말로 그 동안 피노리 사람들이 그간 감내한 오명을 씻을 수 있는 길이라고 믿는다.
-
(사) 정읍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이사장 조 광 환
작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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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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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을 혁명이라 박박 우겨대는 자 들로 넘쳐나는 세상 입니다.
차제에
무엇이 혁명이고
무엇이 반란인지를 한 번쯤 되새겨봐야 하지 않을까요?
녹두장군이 체포되었다는 주막의 재현
아마도, 밀고를 형상화 시켜 놓은 듯...
이 곳, 피체지를 찾아
신고와 밀고의 차이점도 다시 한번 극명하게 떠 올려 봅니다.
한 말의 풍운아요, 시대의 혁명가 였던 전봉준의 민중사랑 정신
그가 못 다 이룬, 미완의 혁명 완성을 위하여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호남인들이여.
분투하고 또 분투 할 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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