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성서원(武城書院) /사적 제166호 / 전북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500
항일 구국 운동을 주도했던 면암 최익현, 돈헌 임병찬 선생 등의 공적을 기리는 병오창의비가 담장 밖 오른쪽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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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祭祀) 모시는 분들의 면모를 한번 살펴보자면...
⊙ 최치원(崔致遠)
경주인(慶州人)으로 자(字)는 해부(海夫)요 호(號)는 고운(孤雲)이니 신라(新羅) 헌안왕(憲安王) 1년(857)에
전라도 옥구(沃溝)에서 태어나 12세 때에 상선(商船)을 타고 당(唐)에 들어가 18세에 진사(進仕)가 되어
현위(縣尉)의 벼슬을 지내고 신라로 돌아오려 할 때
마침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 도통순관(都統巡官)이 되어 유명한 토 황소(討 黃巢)의 격문을 써서
천하에 이름을 떨쳐 전중시어사(殿中侍御使)를 제수 받았다.
그 후 4년을 지나 국신사(國信使)로 헌강왕(憲康王) 11년(885)에 귀국하니 헌강왕과 정강왕(定康王)으로부터
한림학사(翰林學士), 병부시랑(兵部侍郞)으로 태산군수(泰山郡守: 지금의 泰仁)로 부임했다.
진성왕(眞聖王)때 강양군(江陽郡: 협천의 옛 이름)에 있는 가야산에 들어가 그곳에서 남은 생애를 지냈다.
선생은 중국(中國)의 문물(文物)을 동방(東方)의 나라 신라(新羅)에 들여 왔으며 이학(理學)의 유종(儒宗)을 이루었고,
그의 저서에는 계원필경(桂苑筆耕) 등 20권이 있다.
고려(高麗) 현종(顯宗) 11년(1020)에 문창(文昌)의 시호(諡號)를 내렸다.
⊙ 신 잠(申 潛)
고령인(高靈人) 자(字)는 원양(元亮) 성종 22년(成宗 1491) 3월에 서울에서 태어나다.
중종 8년(中宗 1531)에 23세로 진사(進士)시험에 합격하고 중종 14년(中宗 1519)에 문과에 등제(登第)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 檢閱)이 제수(除授)되었다.
예로부터 신하가 입시(入侍)할 때 사관(史館)에 들어가는데 입시하는 사람보다 뒤에 들어갔다가
먼저 나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後入先出).
신 잠은 이러한 사실을 기록하는데 잘못 기록할 염려가 있으니 사람이 먼저 들어갔다가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성종(成宗)은 이에 옳다고 하여 먼저 들어갔다가 뒤에 나오는(先入後出)법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폐지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한때 관(官)에서 파직(罷職)당하고 중종 16년(中宗 1521)에 장흥(長興)으로 유배(流配)되기도 했다가
중종 38년(中宗 1543)에 다시 주부(主簿)로 기용되어 태인 현 감(泰仁 縣監)으로 와서 7년 동안
동 서 남 북의 사학(四學)을 세우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고 명종 7년9明宗 1552)에는
상주 목사(尙州 牧使)로 부임하여 많은 치적을 남기었다.
명종 9년(明宗 1554) 12월 2일에 나이 64세로 세상을 떠나니 다음해 3월에 아차산(娥嵯山)에 장사하였다.
태인(泰仁) 백성들이 선생을 추모하여 태산사(泰山祠)에 배향(配享)하고 선정비(善政碑)를 세웠다.
⊙ 정극인(丁克仁)
영광인(靈光人)이다. 자(字)는 가택(可宅)이며 호(號)는 불우헌(不憂軒)이니 태종 1년 (太宗 1401) 8월 6일에
경기도 광주군 두모포리(京畿道 廣州郡 豆毛浦里: 지금의 서울시 성동구 옥수동)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학문을 하여 세종 11년(世宗 1429) 사마시(司馬試: 進士試驗)에 합격하였다.
정극인은 평소의 소신이 척불(斥佛)이었는데 당시의 군왕(君王)이 흥천사(興天寺)에 사리전(舍利殿)을
창건하려 하자 조선조(朝鮮朝)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들어 태학생(太學生)들의 권당(捲堂: 동맹 휴학)을
앞장 서서 주장한 탓으로 왕이 크게 노하여 정극인을 참형(斬刑)에 처하라 하는 것을 간신히 사형을 면하고
북방으로 귀양살이를 갔었다.귀양에서 돌아온 그는 처가(妻家: 古縣內에 있는 九皐林氏)가 있는 태인에 내려와
초가삼간을 짓고 그 집을 불우헌(不憂軒)이라 하였다.
그 뒤 문종(文宗)의 부름을 받아 관직(官職)에 나갔고 주위 친구들의 권유로 53세인 1453 년에 문과(文科)에 응하여
급제(及第)하였으며 1470년에 70의 나이로 벼슬에서 물러나 태인에 돌아온 1475년에 동중향음주(洞中鄕飮酒)라는
친목계(親睦契)를 만들어 고현동 향약(古縣洞 鄕約)의 시초를 만들었다.
또한 불우헌가(不憂軒歌), 불우헌곡(不憂憲曲)과 같은 왕의 성은(聖恩)에 보답하는 노래를 읊었고
또한 상춘곡(賞春曲)을 지어 후세에 남기기도 하였다.
그 뒤 1481년 8월 6일에 태인에서 돌아가니 그 나이 81세요 묘(墓)는 지금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은석동에 있다.
⊙ 송세림(宋世琳)
여산인(勵山人)이다. 자(字)는 헌중(獻中)이요 호(號)는 눌암(訥菴)이니 성종 10년(成宗 1479) 12월 14일에
태인(지금의 칠보면 시산리)에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20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장원과(壯元科)에 뽑혀연산 9년(燕山 1503)에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전임하였다.
뒤에 태인에 돌아와 불우헌 정극인이 창설한 향학당(鄕學堂)을 다시 일으켜 향리(鄕里)의 청소년을 교육하였다.
중종 14년(中宗 1519) 1월에 돌아가니 그 때 나이 41세였다.
⊙ 정언충(鄭彦忠)
경주인(慶州人)이다. 자(字)는 양구(良久)요 호(號)는 묵재(默齋)이니 태인에서 태어났다.
인품이 엄중하여 언눌행민(言訥行敏: 말은 더듬고 행동은 민첩하다는 뜻)하였던 바 진사(進士)로서
과거(科擧)에 뜻을 두지 않고서 오로지 도(道)를 구함이 홍범태극(洪範太極)에 힘써
특히 역학(易學)에 정수하여 길흉소장(吉凶消長)의 이치를 능히 풀었으며 진퇴존망(進退存亡)의 기(機)를 구분하였다.
또한 효행이 지극하여 3년간 시묘(侍墓)를 하였다.
일재 이 항(一齋 李 恒)과 더불어 제생의 사우(師友)가 되었으며
향학(鄕學)을 부흥시켜 향리(鄕里)의 후진 교육에 온 힘을 다하였다.
⊙ 김약묵(金若默)
도강인(道康人)으로 자(字)는 태용(太容)이요 호(號)는 성재(成齋)이니
연산 6년(燕山 1500) 2월 1일 곡성(谷城) 관아(官衙)에서 태어났다.
중종 35년(中宗 1540)에 별시(別試)에 급제(及第)하여 명종 4년(明宗 1549)에
청홍도사 (淸洪都事)에 제수(除授)되었으며 다음해에는 한산군수(漢山郡守)가 되었다.
명종 12년(明宗 1557)에 양주목사(楊洲牧使)로 부임하였으며
명종 13년(1558) 7월 15일에 양주 관아에서 59세로 세상을 떠나다.
⊙ 김 관(金 灌)
도강인(道康人)으로 자(字)는 옥(沃)이다.
호(號)는 명천(鳴川)이니 선조 8년(宣祖 1575) 5월 25일에 고현내(古縣內)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효성이 지극하여 가정의 교훈을 이어받아 성장하면서
불우헌, 눌암 등이 세워 내려온 향학당(鄕學堂)의 규약에 따라 학문을 가르쳤다.
광해 7년(光海 1615)에 진사(進士)시험에 합격을 하였으나 그 때 광해의 난정(亂政)으로 폐모(廢母)에 이르자
향리에서 송치중(宋致仲), 김담(金湛) 등과 송정 십현지회(松亭 十賢之會)를 만들어 초야에 묻히고 말았다.
인조 5년(仁祖 1627) 정묘호란(丁卯胡亂)때 김사계(金沙溪)를 따라 창의(倡義)하여
의곡 (義穀)을 모집하는데 성심을 다하였다.
인조 13년(仁祖 1635) 1월에 60세로 세상을 떠나다.
- 자료 인용 -
을사조약 이래 전북지역 최초로 항일구국 운동의 기치를 내 걸었던 곳이기도 하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그대로 남아 있던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정극인의 묘소를 찾아가다가 잘 못 들어선 길에서 만난 알쏭달쏭한 시설물 (단군성전?)
그런데 이 계곡엔 으리으리한 석물들로 도배가 된 세칭, 여러 성받이 들의 사당이 줄지어 있었습니다
무성리삼층석탑(武城里三層石塔)
(전북 유형문화재 제158호)
바닥돌 위로 1층 기단(基壇)과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려놓은 모습으로, 탑신의 1층 몸돌이 지나치게 크다.
기단과 탑신의 각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에 3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윗면에는 느린 경사가 흐르고 있다. 얇아 보이는 지붕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양 끝에서 살짝 위로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 앙화(仰花:활짝 핀 연꽃모양 장식), 보주(寶珠:구슬모양 장식)가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너비에 비하여 길쭉해 보이며, 기단보다 높은 탑신의 1층 몸돌 탓에 더욱 그러한 느낌이 들고 있다.
1층으로 줄어든 기단, 3단의 지붕돌 받침, 형식적인 기둥조각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이 곳이 옛 백제지역이었던 만큼, 지붕돌의 곡선에서 백제탑의 양식이 살짝 보이고 있어 지역적인 특성을 담고 있다
위와같은 문화재청의 설명에다 더 해지는 사연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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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리 삼층석탑 복원기념비문(武城里三層石塔 復元 記念 碑文)
창설년대는 확실치 않으나 이 탑(塔)의 북편(北便)에 위치하고 있는 좌상 석불(坐像石佛)과 아울러
미루어 볼 때, 삼국시대말엽(三國時代末葉)으로 추정(推定)되는 유서(由緖)깊은 불적(佛跡)이라 아니할 수 없다.
유구한 세월을 내려오다 근세(近世)에 와서 1935년 올해(乙亥)에 때마침 칠보면 주재소(七寶面 駐在所)
신축비(新築費) 부족액(額) 500량(五百兩)을 충당하려고, 본 삼층석탑 (本 三層石塔)을
일본인(日本人)에게 매각(賣却)하여 바야흐로 해채(解體)할 즈음에
본 면 시산리(詩山里) 남양후인(南陽后人) 홍순석(洪淳錫)씨가 경작답(耕作沓) 삼두락(三斗落)을
당시 칠보 금융조합(金融組合)에 저당(抵當)하여 금 오백량(金五百兩)으로 이를 환퇴(還退)하였으니
이제 우리는 그 숭고한 민족정신(民族精神)을 새삼 추모(追慕)하는 바이다.
1975년 을묘(乙卯) 7월에 한때, 칠보국민학교(七寶國民學校) 교정(校庭)으로 이건(移建) 했었으나,
향토문화유산(鄕土文化遺産)을 원형(原形)으로 보호(保護)하자는 중의(衆議)에 따라
1981년 신유(辛酉) 12월에 일본국 동경거주 무성리 출신(日本國 東京居住 武城里 出身)
도강후인 김진섭(道康后人 金鎭燮) 창섭(昌燮) 석공(錫公) 삼형제(三兄弟)가
사재(私財)를 들여, 이에 원위치(原位置)로 복원(復元)하여 영구(永久)히 존립(存立)하게 되었으니,
그 높은 뜻을 새겨 기념(紀念)하는 바이다.
서기 1984년 3월 일
칠보향토문화재보존회장 권 오 중 식
(七寶面文化財保存會長 權 五 重 識)
- 자료 인용 -
嘗春曲의 서정을 느껴보고파 찾아간 정극인(丁克仁)의 묘소
아버지는 부사직(副司直) 곤(坤)이다.
한참을 헤멘 끝에 찾을 수 있었던 정극인의 묘쇼
그의 묘 양 옆에 서 있는 망부석의 특이한 문양과 색감이 시선을 끕니다.
정극인의 묘소에서 내려다본 모습
정순왕후(貞純王后)태생 유지비와 비각
칠보면(七寶面) 시산리는 조선조 6대왕 단종(재위 1452~1455)의 비(妃)인
정순왕후 여산송씨(礪山宋氏)가 탄생한 곳이다.
정순왕후는 세종 22년에 여랑부원군 현수(玹壽)의 딸로 태어나 단종 2년 1월에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해에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잃고 세조 2년에 노산군(魯山君)으로 되어
영월로 귀양을 가니 왕비도 부인(夫人)으로 강봉(降封)되었다.
단종이 돌아간 뒤에 동대문밖 연미정동(宴尾亭洞)의 청룡사에 초옥을 지어
정업원(淨業院)이라 하였다.
그가 중종 16년 6월 4일에 82세로 세상을 떠나니 대군부인의 예로 장례를 지냈다.
숙종 24년에 단종이 복위되자 단종의 신위와 함께 창덕궁에 봉안하였다가 종묘 영녕전에 옮겨 모셨다.
‘정순왕후유허비각’이 시산리 동편마을에 세워졌다.
태인향교의 만화루(萬化樓)는 정순왕후로 인해서 건립된 것이다.
비각 안의 유허비
향약 [鄕約]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자치규약) 동각
시행주체 ·규모 ·지역 등에 따라 향규(鄕規) ·일향약속(一鄕約束) ·향립약조(鄕立約條) ·향헌(鄕憲) ·
면약(面約) ·동약(洞約) ·동계(洞契) ·동규(洞規) ·촌약(村約) ·촌계(村契) ·이약(里約) ·
이사계(里社契)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렀다.
시행시기나 지역에 따라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유교적인 예속(禮俗)을 보급하고,
농민들을 향촌사회에 긴박시켜 토지로부터의 이탈을 막고 공동체적으로 결속시킴으로써
체제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목적에서 실시되었다.
16세기에 농업 생산력의 증대, 이에 따른 상업의 발달 등 경제적 조건의 변화로 향촌사회가 동요하고,
훈구파의 향촌사회에 대한 수탈과 비리가 심화되었다. 이에 중종대에 정계에 진출한
조광조(趙光祖) 등의 사림파(士林派)는 훈척들의 지방통제 수단으로 이용되던
경재소(京在所) ·유향소(留鄕所) 등의 철폐를 주장하고 그 대안으로서 향약의 보급을 제안하였다.
이것은 소농민경제의 안정을 바탕으로 한 중소지주층의 향촌 지배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일단 좌절되었으나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한 선조대에 와서 각 지방의 여건에 따라
서원(書院)이 중심이 되어 자연촌, 즉 이(里)를 단위로 시행하였다.
이 시기에 이황(李滉) ·이이(李珥) 등에 의해 중국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의 강령인
좋은 일은 서로 권하고, 잘못은 서로 바로잡아주며, 예속을 서로 권장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도와준다는 취지를 살려 조선의 실정에 맞는 향약이 마련되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사족세력은 하층민들을 통제하고 사족 중심의 신분질서를 강화할 목적에서
양반신분의 상계(上契)와 상민신분의 하계(下契)를 합친 형태의 동약(洞約)을 만들었다.
보통 몇 개의 자연촌을 합친 규모로 운영되었으며, 목천동약(木川洞約)과
영조 때의 퇴계학파 최흥원(崔興遠)이 이황의 《예안향약(禮安鄕約)》을 증보하여 사용한
《부인동동약(夫仁洞洞約)》이 유명하다.
또한 1571년(선조 4) 이이는 《여씨향약》 및 《예안향약》을
근거로 《서원향약(西原鄕約)》과 이를 자신이 수정 증보하여 1577년에 《해주향약(海州鄕約)》
을 만들었는데, 이들 향약은 조선후기에 가장 널리 보급된 한국 향약으로서는
가장 완벽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7세기 후반부터 유향(儒鄕)이 나누어져 사족의 영향력이 약화된 반면에,
면리제(面里制)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수령권(守令權)이 강화되어,
지방관이 주도하여 향약이 확산되어 갔다. 면을 단위로 하여
기존의 동계 ·촌계를 하부단위로 편입시켜 신분에 관계없이 지역주민 전부를 의무적으로 참여시켰다.
18세기 중엽 이후 재지사족을 매개로 하던 기존의 수취체제가 수령에 의한 향약의 하부구조로서
공동납체계 속에 포함되면서 그 성격이 변모되어갔고, 동계운영에 있어서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하층민의 요구와 입장이 첨예하게 표출되었다.
이 과정에서 하층민이 참여하기를 꺼리거나 하계안이 없어지는 현상이 일반화되어,
사족이 주도하는 동약에서의 운영권은 기층민간의 생활공동체로서의 촌계류(村契類) 조직과
마찰을 일으키고 점차 기층민의 입장이 반영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19세기 중 후반 서학(西學) ·동학(東學) 등 주자학적 질서를 부정하는 새로운 사상이 등장함에 따라
향약의 조직은 위정척사운동에 활용되었다.
식민지 시기에는 일본측에서 미풍양속이라는 미명 아래 식민통치에 활용하였다.
- 자료 인용 -
향약 동각으로 통하는 대문
향약에 대한 자료을 좀 볼 수 있을까 하여 알아보았더니
정해진 날에만 열람이 가능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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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풍양속(美風良俗)의 근본으로 주민자치(住民自治) 사회규범(社會規範)이었던 우리나라 최초(最初)이면서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태인 고현동 향약'은 현재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에서 행한 향약을 말한다. 원래 현아(懸衙: 군 소재지)의 소재지를 현내면(縣內面)이라고 하는데 본래 시산리(詩山里)는 태산현(泰山縣)의 고을터로 현내면(縣內面)으로 부르다가 태종(太宗) 9년에 인의현 (仁義縣)과 합하여 태종 16년에 고을터가 거산리(居山里: 현 태인면)로 옮겨지면서 태인은 현내면(縣內面)이 되고 시산리는 고현내면(古縣內面)이 되었다. 고현동각(古縣洞閣)은 조선시대 태인 오학당(五學堂) 중 하나인 남학당(南學堂)에서 유래되고 남학당은 성종(成宗)때 정불우헌(丁不憂軒)의 향학당(鄕學堂)에서 비롯되니 고현동각 은 향학당에서 시작된 것이다. 불우헌 정극인(不憂軒 丁克仁)이 1470년(成宗 1年) 벼슬을 그만두고 나와 1475년(成宗 6 年 乙未)에 학당을 설치하고 청소년을 교육한 것이 향학당이니 여기에서 중국(中國) 남전(藍田)의 여씨(呂氏) 향약(鄕約)과 같은 고현동약(古縣洞約)을 만들어 향풍(鄕風)을 바로잡고 동민의 화합을 도모하는 향음예(鄕飮禮)를 실행했으니 우리나라 향약의 선구였다. 그 후 30년이 지나서 1500년(中宗 5年, 庚午)에 일찍이 이조좌링(吏曹佐郞)을 지낸 눌암 송세림(訥庵 宋世琳)이 고향에 돌아와서 정극인의 향약을 중흥시켜 강당(講堂)과 동서재(東西齋)를 세워 젊은이들을 가르쳤다. 또 1543년(中宗 38年)에 영천 신잠(靈川 申潛)이 태인현감(泰仁縣監)으로 와 사학당(四學堂: 태인을 포함해서 오학당)을 세웠는데 남학당(南學堂)을 세우지 않은 것은 고현내(古縣內)에 흥학당(興學堂)이 있었던 탓이다. 그 뒤 고현동약지(古顯洞約誌)에 의하면 향학당(鄕學堂)은 뒤에 무성서원(武成書院)이 되고, 1485년(成宗 14년)에 월연대(月延臺)에서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향학당 자리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향학당을 흥학당(興學堂)으로 이름을 바꾸었는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이 지나 향약(鄕約)이 침체하여지자 1724년(景宗 4년 甲辰)에 뜻있는 동네 노인들의 마련으로 양사제(養士齎)를 만들었으며 영조(英祖) 40년 경에는 현감 조정(縣監 趙晸, 호는 柱湖)이 이를 남학당(南學堂)이라 하여 보수(補修)하였다. 이로부터 120년이 지난 뒤 남학당이 퇴폐하여지니 1844년(憲宗10년, 甲辰) 송언호(宋彦浩, 宋世琳의 九世孫), 김구흠(金龜欽, 金世의 七世孫) 등이 주동이 되어 10년에 걸쳐 중건 (重建)을 하니 그 때가 철종(哲宗) 5년이었다. 이 때부터 남학당은 동각(洞閣)으로 불리워지고 완전히 동약(洞約)의 전당으로 되었으며 무성서원은 교육기관의 일을 맡았기 때문에 남학당은 교육과 동약의 실천을 위한 동각의 구실을 했던것이다. 지금의 건물은 1873년(高宗 10년)에 중건(重建)한 것이다. 1475년(哲宗 6년)에 정극인의 동약은 30년 뒤에 송세림이 정비하고 여러차례에 걸쳐 증보(增補)를 수번하여 현재의 고현동약지(古縣洞約誌)가 계속되고있다. 이 향약(鄕約)은 이퇴계(李退溪)와 이율곡(李栗谷)의 향약보다 90년이나 앞서있는 것이다. |
- 자료 인용 -
동각 건너편에 늘어선 비
김동수 가옥 / 정읍시 산외면 (주요민속자료 제26호)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상류 주택으로 모두 99칸이나 되는 건물이다. 건물은 바깥 행랑채, 사랑채, 안 행랑채, 안채, 안 사랑채, 사당, 호지집 등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주위의 울타리 담은 동·서가 65m, 남북이 73㎝이다. 건물 배치의 구도를 보면┌┐형의 안채와 맞은편└┘형의 안 행랑채, 안채, 좌측의 ─ 자형의 안 사랑채, 그리고└┘형의 행랑채 등이 있으며, 사랑채는 안채 동서쪽을 담으로 둘러 격리시켰다. 건축 연대는 확실히 밝힐 수 없으나, 영조(1725∼1775)무렵 서울에서 내려온 사대부가 새로 터를 닦아 세운 것으로 추측되며, 건물에 따라 연대의 차이도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 자료 인용 -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ㅁ자 형태의 공간이 나타나고 사랑채 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바깥 사랑채
맘껏 굽은 조선 향나무 한그루가 사랑채로 통 하는 담장 옆에 서 있다.
안 행랑채
여 종들이 기거하던 방과 소년이 공부하던 책방, 안 변소, 곡간 등으로 구성
바깥 사랑채와 안채를 구분 짓는 건물이기도 하다.
안채
안주인의 공간,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큰 방, 작은 방, 양 측엔 부엌
큰 방은 시어머니, 작은 방은 며느리가 기거하였다고
사당
맛배 지붕의 홑 처마로 되어 있으며 유일하게
두리 기둥을 사용하였다고.
오래된 영산홍과 우물과 장독대가 있는 후원의 모습
안 사랑채
안주인의 손님들이 유숙하던 곳. 부녀자들이 명절 때 이 곳 에서 놀기도 하였고
출가했던 딸이 해산을 하던 곳 이기도 하다
바깥 행랑채
솟을 대문을 중심으로 문간방, 마굿간, 곡간, 부엌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문간방은 청지기가 딸린 하인이,
문간 사랑방은 청지기가 기거하였다.
아흔 아홉칸 김동수 가욱을 나와 바라본 노비들의 집
마치, 영화 세트를 돌아본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아마도 사람이 전혀 기거하지 않기에 그리 느껴지는 것이리라.
집 앞, 도로가의 수 백년 묵은 느티나무 고목이 말라 죽은 모습으로 서 있었는데
저 으리으리한 대 저택의 흥망성쇄를 모조리 지켜 봤을 터....
사람 내음을 전혀 느낄 수 없음은 뒷산의 정기와 약발이 고갈되었다는 뜻일까?
가까운 시일내로 뒷산이나 한 번 올라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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