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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행·여행·풍경

* 김제 귀신사 * 전주 오목대 이목대

 

그 옛날, 절 앞 동네 좁은 길을 따라가다

냇물을 건너 절에 이르던  때를 이제는 잊어주시라... 

신축한 해탈교가 시원하게 절로 안내하고 있었습니다

 

 

 

 귀신사의 모든 것이 변했지만 다행히도,

이 삼층석탑에 이르는 차나무가 자라는 계단길은 여전했습니다.

 

 

 귀신사석수(歸信寺石獸)  전북유형문화재 제64호

 

귀신사 3층 석탑 앞쪽에 놓여 있는 것으로, 웅크리고 있는 사자상 등 위로

남근석(남성의 생식기 모양으로 다듬은 돌)이 놓여 있다.

사자상은 머리를 치켜들고 앞을 바라보고 있는데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남근석은 2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아랫부분은 대나무에서와 같은 옅은 마디를 두었다.
사찰 내에서 이러한 조각상을 찾아보기란 매우 드문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두가지의 설이 제기되고 있다.

 

하나는 풍수지리상으로 이 터가 좋은 형상이 아니어서

이를 누르기 위해 세웠을 것이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원래 남근석을 두는 사찰은 백제 왕실의 내원사찰(內願寺刹)뿐이므로,

이로 보아 이 절은 백제 때의 사찰일 것이라는 설이 그것이다.

만든 시기는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그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과 사실적인 조각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 문화재청 자료에서 발췌 -

 

 

 

 귀신사석탑(歸信寺石塔) 전북유형문화재 제62호

 

바닥돌 위에 여러 장의 돌을 짜맞추어 기단(基壇)을 만들고 그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탑신의 몸돌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선명하게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처마가 거의 평행을 이루다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다.
얇고 넓은 지붕돌의 곡선미와 여러 개의 돌을 짜맞추어 조성된 수법 등으로 보아

백제 석탑 양식을 이어받은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추측된다.


- 문화재청 자료에서 발췌 -

 

 

 

 땅에 묻힌 부분까지는 아직까지 정확하게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모양이나

아무튼 사자로 봐야 할 것인지, 개로 봐야 할 것인지,

아니면 두꺼비로보는 것인지 확실한 결론은 나지 않은 것 같다.

 

느낌상!

민간신앙 등이 결합된 형태가 아닐까 조심스레 진단 해 보지만...

 

 

 

 

 개인적으론, 당연히 국가 보물로 지정 관리 해야 옳다고 보는데

지방문화재 대접으로 그치는 이유가 궁금할 뿐이다.

 

 

 

 

 

방 안의 선객은 과연 어떤 선정에 들어있을까.........?

 

 

 

 귀신사대적광전(歸信寺大寂光殿) 보물 제826호 

 

1592년 임진왜란으로 절은 폐허화되어 1633년, 1657년 다시증건 증수하였으며,

정확한 것은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대적광전은 판석으로 면석을 이루고 그 위에 갑석을 얹은 기단위에 서있는 맞배지붕에

앞면 5칸, 옆면3칸 다포식 공포를 하고 있으며, 건물 양옆에 풍판을 달았다.

앞쪽 처마는 겹처마이고 뒤쪽 처마는 홀 처마로 되어 있는 특이한 건축이다.

 

 법당 안에는 불단에 봉안된 불상이 크기 때문에 천장을 높이기 위하여

고주(高柱) 중간에 보를 꽃아 그 끝이 평주(平柱) 위에 얹히게 한 다음

그 보위에 다시 보를 얹어 고주위에 놓이도록 하였다.

그래서 불상의 머리 옆으로 보가 지나가게 되었다.

 

이것은 곧 이 건물이 본래 증 층 이었다가 나중에 다시 지으면서

지금처럼 단층으로 고쳤다는 뜻도 된다.

실제로 <귀신사증수기>에 보면 법당이 이층이었다는 구절이 있어

이 같은 추측을 뒷받침 해준다.

 

대적광전 창건 이래 여러 차례의 증건, 증수가 있었는데

가장 최근에는 1823년, 1934년 증수되었고 2003년부터 2005년 까지 증수하였다.

 

- 자료 인용 -

 

 


 

 

경내에 모아놓은 석부재 들

 

 

 누구의 서체일까?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불상으로서는 1633년 10월에 사찰 건물을 낙성한 낙성문에

덕기 스님이 불상 삼존을 봉안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 늦어도 1633년까지는

이 삼신삼세불이 완성되었든 것은 분명한 것으로서, 소조불로서 비로자나불

[4m28cm(법신불 )], 주존불, 약사여래불, 아미타불 삼신삼세불을 봉안하였다.  

 

 불상의 모습은 얼굴이 길고 통통하며, 체구는 허리가 길고 배가 나온 장신에

무릎이 넓고 낮은 특이한 형태미와 통견의의 독특한 평행 세로선을 보여주고 있다.

 불상은 1980년 금물을 입혔다. 건물내부에 비해 불상이 너무 커서

앞에 선 사람은 머리를 뒤로 젖혀야 불상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이렇게 건물이 터져나갈 듯 큰 불상은 고창 선운사 삼신삼세불 불상(1633-1634년조성)과

부여무량사 소조아미타불상(1633년), 완주 송광사 삼세불상(1641년조성),

충남 갑사 대웅전 삼세불상(1630년전후조성)과, 거의 같은 해에 조성된 것으로
같은 시기에 같은 사람이 만들지 안했나 생각 되는 양식기법이 유사하다. 

 

 대적광전은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연꽃으로 장엄된세계)의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신 건물이다.  천엽연화(千葉蓮花: 천개의 꽃잎을 가진 연꽃)의

단상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 양손으로 지권인(智拳印을 취한 모습이다.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 양손으로 지권인(智拳印)을 취한 모습이다.

 

 

 

 전주객사(全州客舍)  보물  제583호.

 

 객사는 고려·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것으로 관사 또는 객관이라고도 한다.

객사는 고려 전기부터 있었으며 외국 사신이 방문했을 때 객사에 묵으면서 연회도 가졌다.

조선시대에는 객사에 위패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예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사신의 숙소로도 이용하였다.  명나라와 통하는 지방에는 우리 사신을 비롯해

명나라에서 오는 사신도 묵었기 때문에 건물보수에도 큰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국가에 일이 생겼을 때에는 백성과 관아가 같이 의식을 행하였다.

전주객사는 전주서고를 지은 뒤 남은 재료로 조선 성종 2년(1471)에 서의헌을

고쳐 지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객사의 정문은 주관을 앞면으로 하여 내삼문·중삼문·외삼문이 있었으나

원래의 내삼문 안쪽으로 축소되었다.

신주를 모셔두는 방인 감실에는 궐(闕)자가 새겨진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국왕에 대하여 예를 행하기도 하였고(망궐례), 조정에서 사신이 오면 이곳에 묵으면서

임금의 명령을 전하기도 하였다.  전주객사는 중앙에 주관이 있고 좌우에 동·서 익헌, 맹청, 무신사 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 주관과 서익헌, 수직사만 남아있다.

동익헌은 현재 초석만 남아 있으며, 서익헌과 규모가 같으나 도로확장으로 인해 1칸이 부족하다.  

- 문화재청 자료 발췌 -  

 

 

 

  풍패지관(豊沛之館) 

전주객사를 일컫는 말로서,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원지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오목대이목대(梧木臺梨木臺) 시도기념물 
제16호 (전주시)


이목대는 태조의 5대조인 목조 이안사의 출생지로 알려진 곳으로, 고종이 직접 쓴 비문을 통해, 조선 왕조의 시조인 이안사가 이곳에 살았었음을 알게 되었다.

오목대는 후에 조선을 세운 이성계 장군이 당시 군사를 이끌고 잠시 쉬어가던 장소이다. 고종이 직접 쓴 “태조고황제주필유지 (太祖高皇帝駐畢遺址)”라는 비문을 새겨 놓은 비는 광무 4년(1900)에 세운 것이다.

조선시대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 유적지는 조선 왕조의 뿌리를 찾을 수 있는 가치 있는 문화재라 할 수 있다.


  

 

 

  고종황제가 쓴

"태조고황제주필유지" (太祖高皇帝駐畢遺址)
 

 

 

 오목대에서 내려다 본 전주 한옥촌 

 

 

 아름답게 조성된 상가 거리  

 

 

 전주 시내의 해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