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창오리 떼의 군무를 따라 태인 땅에 들어 섭니다.
맹렬한 기세로 하늘을 나는 가창오리의 모습을 바라보노라니
마치 정읍 들판을 달리는 성난 동학혁명군의 함성이 귓전에 들려 오는 듯...
.
녹두장군 전봉준의 한이 서린 태인 들녘.
마치,미완의 혁명에 대한 미련 때문에 다시 찾아온 고혼을 보는 듯!
이 곳, 전투를 마지막으로 입암산으로 몸을 피한 전봉준가인봉 너머 청류암에 들러
맑은 샘물 앞의 바위에다 부지깽이로 두어자 글씨를 남긴 뒤,
순창의 친구 집을 찾았다가 주민의 밀고로 관군에게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어 한 많은 이승을 하직하게 되었다고 역사는 적고 있는데...
성황산을 등지고 들어선 태인 향교의 만화루 앞에 섰으나
더 이상의 진입엔 실패하고 맙니다.
꽁꽁 걸어 잠근 문이라...!
그렇다면, 이 곳의 공자님께서는 대인기피증 이라도 있으신게지요?
125m 높이의 나즈막한 태인의 진산, 성황산 들머리
3.1 운동 기념탑과 위패 봉안소를 마주 하게 되는데,
그 곳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여기는 정읍인의 애국충정의 얼이 서린 곳 구국 일념으로 항일 투쟁에 몸 바치신 님 들의
높은 충혼의 뜻을 기리고자 성황산 기슭 양지 바른 이곳에 시민의 이름으로 위패를 봉안하니
해와 달이 이 언덕을 영원히 밝혀 주리라
잠시 시 한 수 읊조리다보면 나타나는 성황정, 그 곳에는 이런 奉立記가.
- 성황정 봉립(奉立)에 부치는 글 -
여기는 우리 고향 성산(聖山) 성황산의 정상이다.
북으로는 비옥하고 드넓은 호남평야를 이고 서쪽으로는 오늘도 유유히 동진강의 푸른물이 서해로 흐른다.
동으로는 멀리 모악산과 상두산을 다독이며 남으로는 회문산과 내장산이 크막하게 자리한 노령의 산줄기
그 중심에서 방울 튀어 오른 성황산은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선비문화의 중심지 태인의 불멸의 영산이다.
우리들의 유년시절'하늘과 바람과 사랑과 미움'을 일깨워준 우리 모두의 영원한 어머니 이시다.
달하, 먼 발치로 내다보고 섰는 호곤한 꿈빛의 고향 어머니시여 !
이 나라의 가장 선하고 착한 백성들이 들꽃처럼 모여서 사는 곳, 오오 태인이여 !
3.1 운동의 횃불을 밝힌 선열들의 거룩한 넋이 깃든 여기 성황 능선에
우리들의 작은 열망과 정성을 한데 모아 이 팔각정과 비를 세우나니 여기에
오르는 이 들의 가슴마다 수수만년 향토의 사랑과성황산 같이 드높고 넓은 호연지기를 배워라.
자그만 언덕 수준의 성황산 이지만 사방이 들판인지라 눈 맛이 시원 할 텐데
뿌연 일기 탓에 그리 썩 시야가...
성황산을 병풍삼아 들어선 태인면 일대.
근자의 동학혁명을 비롯, 증산도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고비마다 모두들 이 성황산에 올라 해결책을 모색 했다고.
얼쑤~~~
태인의 영광이 다시 재현되길 염원하는 주민들의 농악 한판 이런가....?
가던 발길을 멈추고 신명나는 놀이패의 장단에 끼어드니 어깨춤이 저절로.
'호남제일정' 이라는 현판에서 과거 태인의 위세를 미루어 짐작 해 봅니다.
보물 제289호. 피향정 (彼香亭) 이 정자는 원래 헌강왕대(857~860 재위)에 최치원(崔致遠)이
태인(泰仁)의 현감으로 있을 때 세운 것이며, 1716(숙종 42), 1882년(고종 19)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평면구조는 앞면 5칸, 옆면 4칸으로 된 단층 팔작지붕 건설이다.
정자의 바닥은 지상으로부터 142㎝ 정도 떨어져 있으므로 막돌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그 위에 석조로 된 28개의 짧은 두리기둥을 놓고, 다시 그 위에 목조로 된 두리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간단한 초익공계(初翼工系)로 기둥머리는 창방(昌枋)으로 결구하고, 창방 위에
굽받침이 없는 주두(柱頭)를 얹어 주심도리(柱心道里)와 장여[長舌]를 받치고 있다
. 정자 내부는 다시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구획하여 고주(高柱)를 세우고
둘레에 세워진 변주(邊柱)와 퇴량(退樑)을 연결했다.
가구(架構)는 7량(七樑)으로, 퇴보나 대들보 밑에는 초각(草刻)된 보아지가 있고,
중앙 고주와 대들보 사이에는 아름답게 휘어진 충량(衝樑)이 걸쳐 있다.
(자료 인용)
원래는 이 정자의 앞 뒤로 상. 하 연지(上,下蓮池) 가 있었으나
지금은 하연지만 남아있다.
정자를 떠 받치고 있는 석주 주춧돌을 비롯
여러 형태의 돌 들을 조합하여 세운 게 매우 이채롭습니다.
천장은 연등천장이지만 양 협칸은 귀틀로 짠 우물천장으로 되어 있다.
신라시대 최치원이 이 곳 태산 군수로 재임시
저 앞의 연지를 소요하고 정자에 올라 시를 읊었다는 애기가 전 한다고.
근래들어 연지를 새롭게 정비한 듯,예전 사진을 보니
저 앞의 둥그런 섬에 정자가 보이고 연꽃이 가득한 모습이던데.
섬으로 들어가는 돌다리도 감상의 포인트.
연지에서 바라 본 피향정. 이불피(被)와 향기향(香)이라.. .
연지의 섬 안에는 머리가 잘려나간 문신석으로 보이는 자그만 크기의 석상이 두 기 있었는데
무슨 사연인지 몰라도 둘 다 목이 잘린 모습인지라 웬지 살벌한 느낌.
피향정 담장 아래쪽에 늘어선 각종 비석 들 자세히 살피노라니 그
중, 맨 왼쪽엔 갑오농민전쟁의 원초를 제공한 민초들의 흡혈귀 조병갑이 세운
까만색의 비 하나가 눈길을 끕니다.
조병갑의 아버지인 태인 군수 조규순의 '영세불망비'
조병갑이 자신의 아버지의 영세불망비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고부 농민들로부터
1천 량을 수탈하여 세웠다는 문제의 비.
왼쪽 위 귀퉁이가 약간 떨어져 나간 모습인데 차라리
이런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는 보물로 지정하여 후세에 길이 전 해야 하지 않을까?
성황산자락 중앙부의 산정가든 옆에 자리한 바위를 찾아가면 창암 이삼만과 쌍벽을 이루었다는
예서체의 달인 동초 김석곤(金晳坤 1874, 고종11년~1948년)의 각서를 만날 수 있다
잠시 그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자.
본관은 김해이고 字는 천안(薦按) 號는 동초. 눌어(東樵. 訥語)
진사 연추의 아들로 태어남.
명산을 두루 찾아다니며 山水를 즐겼다.
수당 김교운과 종유하며 도의를 강론하니 사람들은 그를 소요처사라 불렀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부자집 아들로 학식이 매우 높았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의 어지러운 사회에 빌붙어 살기를 원치 않았고, 경승지를 찾아다니며
암벽에 글을 쓰고 다른 이를 시켜 글자를 새기고 다니는 등 당대의 풍류객으로서 유명.
위의 바위에 새겨진 동초(東樵)의 암각서
산자락이 온통 파 헤쳐진 태인 항가산 자락의 다천사 (茶泉寺).
설 다음 날 정읍을 지나니 고속도로가 정체되기 시작한다.
태인으로 빠져 국도를 탈 생각으로 톨게이트를 빠져나오는데
엄청난 개체수의 가창 오리가 하늘을 날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넋을 놓고 가창오리의 군무를 감상한 연 후 차에 다가가니,
하체 아래로 아스팔트위에 부동액 물이 약간 떨어져 있는게 보인다.
결론부터 얘기 하자면 가창 오리가 날 살려 준 셈이다.
까딱 잘 못 했으면 엔진을 볶아 먹을 뻔 했으니 말이다.
문제는 명절 뒷 날이어서 문을 여는 정비센터가 없다는 점.
별 수 없이 차는 버려두고, 배낭과 가방과 카메라를
지고 걸고 들판을 걸어가는데.
그 날 따라 하늘의 가창오리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더라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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