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륜산頭崙山 대흥사大興寺
능수겹도화
초의선사 좌상坐像
서산대사 탄신 505주년 대흥사 표충사 춘계 제향이 있다 해서 찾아갔건만
이미 끝난 뒤였다는 사실.
표충사
서산대사의 위국충정을 기려 1669년에 건립한 사당으로
사찰 경내에 유교형식의 사당을 겸한 예는 우리나라에서 보기드문 독특한 예이다.
정조 12년(1788) 왕이 표충사라 사액하였으며 대사의 7세법손인 천묵에 의해서 건립되었으며
나라에서는 매년 예관과 헌관을 보내 관급으로 제향케 하였다고.
청허당 서산대사 휴정을 주벽으로
서산대사의 제자 사명당 유정과
뇌묵당 처영대사를 배향하고 있다.
표충사 경내의 비각에는 2기의 비가 있다.
이 중 1기는 표충사건사적비로 높이 316㎝로 사각형 비좌에 비신과 이수를 갖추었다.
聖上十六年壬子五月日, 西山六世法孫蓮潭有一謹撰, 應雲登旿謹書
(성상십육년임자오월일, 서산육세법손연담유일근찬, 응운등오근서)라는 내용으로,
정조 16년(1792), 찬자는 연담유일, 글씨는 응운등오가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른 1기는 서산대사표충사기적비로 높이는 364㎝이며 사각형 비좌에 비신과 사각형의 지붕돌을 올렸다.
비신측면에 「숭정기원후삼신해월립」이란 명문으로 보아 정조 15년(1791)임을 알 수 있다.
청허당 유정은 임진왜란 때 80노구를 이끌고 구국운동의 선봉에 나서 활약한 승병대장으로
선조가 「국일대선사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란 긴 호를 내렸다.
다성(茶聖)으로 추앙되는 초의(草衣) 의순(意恂)
초의선사는 불문에 몸담고 있었으나 그 테두리에 그치지 않고 유학, 도교 등 당대의 여러 지식을 섭렵하며
다산 정약용이나 추사 김정희, 자하 신위 같은 학자나 사대부들과 폭넓게 사귀었고 범패와 서예, 시, 문장에도 능했다.
그는 차(茶)와 선(禪)을 하나로 보아 「동다송」에서 ‘다선일미(茶禪一味)’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한잔의 차를 마시는 데서도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맛본다고 하였으며 차는 그 성품에 삿됨이 없어서
어떠한 욕심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것이며 때묻지 않은 본래의 원천과 같은 것이라 하여
‘무착바라밀(無着波羅蜜)’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가 지은 「동다송」은 동다(東茶) 즉 우리나라 차에 대한 예찬을 담고 있는 것으로
차의 효능과 산지에 따른 품질, 만들고 마시는 법 등을 적은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차에 관한 책이다.
차는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주로 불가의 학승들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초의선사는 중년 이후 큰 절의 번거로움을 피해 일지암을 짓고 40여 년간 은거하며
차와 더불어 지관(止觀)에 전념하다가 81세로 입적했다.
삼층석탑과 자산홍의 콜라보.
이른바 '동국진체東國眞體 '를 완성시켰다는 원교 이광사의 [대웅보전] 현판.
양명학자(강화학파)이자 현대 한국학의 시조로 평가되는 원교.
오음정서五音正序, 원교서결圓嶠書訣 등의 저술을 남겼다.
[무량수각] 제주 유배 이전 추사의 서체라고.
너무도 부드러운 연녹색 사월의 물감이 풀려나가는 두륜산 팔레트.
월출산月出山 무위사無爲寺
대흥사(大興寺)의 말사로, 선각대사 형미(迥微, 864~917)가 주지로 있던 시기를 전후하여 창건 및 중창되었다.
조선 세종(世宗, 재위 1418~1450) 12년(1430)에 극락보전이 건립되었고,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木造阿彌陀三尊佛坐像)과 함께
아미타여래삼존벽화(阿彌陀如來三尊壁畫), 백의관음도(白衣觀音圖) 등 극락보전에 29점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15세기 후반에 수륙사(水陸社)로 지정되었다.
비록, 이번 봄의 매향梅香은 친견치 못했지만 '무위매'의 안위는 살펴야겠기에...
무위사 '극락보전' 주위로 접근금지 금줄이 쳐졌다.
아마도 전체적인 해체와 보수가 예정되어 있는 듯.
형미대사비
월출산 오름길 초입에 선 동백.
극락보전의 맛배와 측면의 분할.
무위사 경내를 나서 차에 오르자마자 내리기 시작하는 비.
당초 예정했던 동선과는 많은 차이가 나고 말았지만, 그런대로 4월의 정취만큼은 만끽할 수 있었다.
애당초 강진땅에 자리한 '남미륵사'를 제일 먼저 찾아갔지만
도저히 진입불가라는 판단.
이른바 '서부해당화'의 자지러진 꽃잔치를 보기 위해 새벽부터 몰려든
엄청난 차량과 인파를 도저히 헤쳐나갈 자신이 없었기에 그만 패스하고 만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