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제줄풍류(鄕制줄風流) 의 산실 정읍 진산동 '영모재'
2005년 11월 11일 근대문화유산 제213호(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는 현재 영모재 지킴이를 자임하고 있는 이용찬 선생의 지극한 문화재 사랑에 의한 결과라고.
조선조 형식을 건너 일제 강점기 초반 건축물로 보인다.
문간채 좌우로 길상 문양의 꽃벽이 연출되어 있는 모습.
태극문양이 적용된 대문 좌우로 범을 비롯한 각종 민화 형태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솟을대문 공포에 그려진 '옥토끼'
김덕홍의 효행을 기록한 '명정판'이라고.
이는 조선조가 내렸던 '정려'의 격식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대문 좌우 벽에 그려진 각종 그림과 문양
숫해태
솟을대문 기둥 밑으로는 작호도인 까치 호랑이를 비롯해 황·청룡, 해태, 현무, 어해도, 비천상 등
수많은 도교적 장생불사(長生不死)의 이상향적 세계가 흙벽 전체를 벽화로 꾸며져 있다.
정읍 진산 영모재는 오늘까지도 유불선의 이상향과 역사를 간직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출처 : 시사매거진(https://www.sisamagazine.co.kr)
풍류방(風流房) '영모재'
※ 아래 영모재에 관한 해설은 시사매거진에 기고한 이용찬 선생의 글을 옮긴 것이다.
본래 죽산 안씨 집성촌인 진산마을의 죽산 안씨 사당 ‘영모재(永慕齋)’를 조선조 말
정읍현의 의식 음악을 관장하던 이 지역의 호장(戶長) 김평창(본명, 金相泰)이 1885년 매입
재인과 관기를 길러내던 교방(敎坊)으로 사용되며 변천 해온 전북 유일의 풍류방이다.
풍류방이 아닌 ‘영모재’라는 이름 덕에 동학농민혁명기와 6.25 전란 중 보존돼
1894년 김홍집 내각의 신분제 폐지 이후 생계의 위기에 내몰린 정읍현의 관기와 악공들이
관과 민간의 애경사에 출현하여 얻어지는 출연료 생계를 이어가던 최초(最初)의 연예인 기획사인
‘정읍예기조합’으로 이용되다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 시대 교방의 일본식 이름인
정읍 권번(券番)’으로 이용된 바 있다.
이에 따라 해방 이후에는 다시금 정읍 최초의 정읍국악원으로 이용되던 유서 깊은 공간이다.
하지만 이곳이 풍류방 ‘다유락(茶遊樂)’으로 명명되지 못하고 ‘영모재’로 소개되고 명명된 이유는
이곳이 동학농민형명기와 6·25의 전란 속에서도 ‘영모재’라는 이름으로
파괴되지 않고 현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풍류방의 이름 대신 ‘영모재’로 불리며
현재의 근대문화유산 제213호 ‘정읍진산동영모재’로 자리매김 되었다.
재각은 방을 앞뒤 2열로 구성한 겹집형 평면으로 정면 앞줄 오른쪽부터 부엌·온돌방·마루를 두고, 뒷줄에는
온돌방·마루방으로 구성되었다. 대문간채는 관리인이 거주하는 고직사 기능이 통합된 복합 평면으로
근대기 건축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재실의 문은 여닫이와 미닫이로 구성된 삼중의 문으로 되어 있으며,
안쪽에는 산수화가 그려져 있다. 미닫이문에는 아(亞)자와 만(卍)자 모양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한편, 당의 문을 모두 걷어 올리면 대청마루와 방의 경계가 사라지고 삼면이 모두 트인
하나의 넓은 공간이 되어, 풍류 공간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전주 한옥마을 학인당과 구조적으로
유사성을 지닌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재실은 돌과 나무로 된 팔각기둥 형태의 활주가 받치고 있는데,
활주의 상단부에 연꽃 문양을 새겨 놓았으며, 돌로 된 기둥 밑에는 팔괘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영모재의 주련마다 군자를 상징하는 연꽃과 연잎이 그려져 있다.
재실의 솟을대문 벽에 민화가 그려져 있는 점도 독특하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왼편 처마를 떠받친 활주 뒤쪽으로 꽃수술이 달린 아담한 가마가 보인다.
아마도 과거 기녀들이 이용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좀 더 세심한 관리가 필요해 보인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유교적 신분 질서가 점차 붕괴되고 사회적 관습의 가치체계도 신분의 격차를 떠나
양반, 중인, 악사 등 각기 다른 계층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함께 어우러지는 풍류방 활동이 생겨났다.
이러한 풍류방의 운영은 몇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가능한 일이었는데, 문화적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경제적 안정은 물론이거니와 학문과 사회문화적 교양을 지녀야 했으며 실학의 영향으로 음악활동을
펼칠 수 있는 악(樂)에 대한 실질적인 실기 능력이 요구되었다.
당시의 풍류를 즐기던 공간으로 정읍의 진산동에 있는 '영모재(永慕齋)'는 한국풍류의 본고장인 호남의
풍류를 이해할 수 있는 곳으로 정읍예기조합 소속 기녀들의 기예능을 심사하는 곳이기도 했다.
오늘날 향제줄풍류가 이 곳 영모재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후 '아양정' 풍류방과 '이심정'의 풍류방으로 이어졌다.
영모재의 풍류방은 기예를 배우고 행하는 장소로 사용되었으나 한국전쟁 이후 방치되었던 것을
최근 이용찬씨가 발굴하여 문화재로 등록하였다.
영모재는 구한말 강원도 평창군수를 지냈던 정읍의 부호 김평창(본명 김상태)이 1885년 죽산 안씨의
사당을 사들여 1915년 솟을 대문과 다채로운 민화 벽화들을 그려넣는 등 현재의 풍류방 형태로 개축하였다.
현재 광산김씨의 재실인 '영모재'로 등록은 되어 있지만 매입후 재실의 기능은 하지 않고
김평창에 의해 풍류방의 기능으로 사용되었다.
이곳에 그려진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유행하던 민화벽화들은
당시 풍류방의 전형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채널코리아뉴스 이근섭 시민기자 rmstjq25@naver.com
학을 타고 하늘을 날며 젓대를 부는 신선
저 멀리 삼정산과 내장산 라인이 시선에 들어 온다.
율려춤의 창안자 이규선 선생의 부름을 받고 오늘 이 자리에...
정읍향제줄풍류( 鄕制줄風流)는 현악기를 중심으로 편성된 현악(絃樂) 영산회상(靈山會相)을 말한다.
풍류객들이 풍류방(風流房)에서 많이 연주하였기 때문에 ‘풍류’라고 하고, 중앙에서 수행된 경제와 대비하여 지방에서 전승되어 온
현악기가 중심을 이루기 때문에 ‘향제줄풍류’라고 한다. 조선 시대부터 전승되어 온 향제줄풍류는 근대에 이르러 명맥이 흐려졌는데,
호남 지역 정읍 인근 지역에서 향제줄풍류 연주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전통문화를 견인하고 있다. 정읍향제줄풍류는 지역의
줄풍류에 국한되지 않고 영호남 지역에 아울러 영향을 끼친 줄풍류이다. 아양율계(峨洋律契) 이후 초산율계(楚山律契)를 조직한
정읍의 풍류방은 시단(詩壇)과 가단(歌壇)의 확산과 혼합의 양상으로 조선 후기 예술의 최대 부흥기를 이루었다. 초산율계가
우리나라 풍류의 침체기에 인근 율계들을 포괄하면서 향제줄풍류의 전통을 지속시켰다.
당시 줄풍류는 정읍에 거주하였던 추산(秋山) 전용선(全用先) [?~?]에 크게 의존하였다.
대부분의 율객들이 전용선의 제자이거나 주변 인물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보아
전용선은 정읍 줄풍류 문화의 중대한 토대라고 할 수 있다.
풍류적 기제(技題), 시(詩), 서(書), 화(畵), 악(樂) 그리고 아양정에서 풍류할 때
언제나 ‘재비’가 참여한 것으로 보아 가무(歌舞)도 혼합된 것을 알 수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일제 강점기 내장사 대웅전을 배경으로 찍은 이 사진의 발굴자가
바로 영모재 지킴이 이용찬 선생으로 이 사진의 발굴로 여러 의문점이 일거에 해결되었다는 설명.
영모재 내실
영모재 지킴이 이용찬 선생과 방문객과의 다담.
작년 가을 하동 방아섬과 내장산 추령에서의 만남과 인연을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현소 선생님의 단소 연주
줄풍류는 거문고, 가야금, 대금, 피리, 해금, 장구가 기본이 되고, 여기에 단소와 양금이 곁들여지기도 하는
실내악 규모의 관현악 편성이다. 정읍향제줄풍류는 조선 후기와 20세기 초에 성행하였던 기악곡인데,
처음에는 가야금, 거문고, 해금, 대금 등 소수의 악기로 구성하였으나
단소산조(短簫散調)를 중심으로 활성화되었다.
향제줄풍류는 일반적으로 ’지방에서 전승되는 현악 영산회상’을 일컫는다.
조선 시대 선비들 사회에서 수용 및 발전되어 온 정악의 대표 영산회상이었다.
본래는 ‘영산회상불보살(靈山會上佛菩薩)’이라는 가사를 노래하던 단악장의 가곡과 시조 등의 성악곡이었으나
유교를 중요하게 여기던 조선 중기의 사회 풍조 속에서 가사가 생략된 기악곡으로 변화하였고,
양반층 전유물이던 예술을 중인층도 향유하면서 향제줄풍류가 성행하였다.
조선 전기의 영산회상은 현재의 영산회상의 첫째 곡인 상연산과
같은 것이었고, 현악 영산회상은 악곡 구성에 따라서 민영산화상, 잦은 영산회상,
별곡, 뒤풍류·천년만세로 나뉘어져 있다.
정읍향제줄풍류의 첫 번째 곡 상영산(上靈山), 즉 본영산은 본풍류에서 뒤풍류까지 연주된 악곡의 출발점이며,
영산회상 관련 파생곡들에 영향을 준 중요한 악곡이다. 향제줄풍류는 조선 후기 지역 사회의 음악 동호인 모임인
율계(律契)를 중심으로 전승되었다. 그 결과 대부분은 명맥을 소실하였으나 가야금 산조 명인들과 거문고 산조 명인들에
의하여 전승된 정읍향제줄풍류의 전통만이 허창으로부터 시작하여 전계문(全桂文)[1872~1940]과 전계문의 제자인
단소의 명인 전용선이 명맥을 이어 우리나라 근대 향제줄풍류의 실질적인 개척자 역할을 하였다.
단소 전용선, 거문고 명인 김용근, 임석윤(林錫潤)[1908~1976], 대금의 명인 편재준(片在俊)[1913~1976] 등이
정읍향제줄풍류 전통의 중심에 서서 1985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리향제줄풍류와 구례향제줄풍류에 실질적인
영향을 주었다. 전용선은 아양율계와 초산율계의 음악적 지도자로서 줄풍류의 전승과 보급에 앞장섰다.
초산율계는 지금까지도 율회를 열고 있는 향제풍류 연주 단체이다. 초산율계는 우리나라 국악이 전반적으로
침체기를 맞아 지리멸렬한 상황에 놓인 인근의 율계들을 포섭하면서 향제 풍류의 전통을 지속시켰다.
초기 초산율계는 전용선에 크게 의존하였고, 대부분의 율객들이 전용선의 제자이거나 같이 활동한 인물이었다.
초산율계의 활동은 정읍향제줄풍류의 근간이 되었고, 훗날 다양한 지역 향제줄풍류의 토대가 되었다.
정읍향제줄풍류는 정읍에 국한되지 않고 다른 지역의 풍류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음악적 특징과 활동한 인물 그리고 지역의 풍류 활동에 미친 영향 등을 고려하면 음악적 중요성이 높다.
초기 정읍향제줄풍류의 주체로 출발점에 있던 전계문은 재인 계열의 춤꾼이었다.
김소란의 춤을 무보로 정리하여 1955년 간행된 정경태의 1995년 「국악보(國樂普」 반주 음악에서도
정읍 풍류단의 명단을 찾아볼 수 있듯이, 정읍향제줄풍류는 다양한 타악기, 관악기와 함께 춤이 어우러진 국악의 한 장르이다
그리고 판소리, 시나위, 산조 등 다양한 한국 전통 음악에 풍류가 편입되어 있다.
따라서 전통 음악을 보존하고 보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우리나라 무형 문화유산의 핵심이기도 하다.
풍류에는 음악적인 중요성 이외에도 다양한 문화적 전통과 역량이 담겨 있다.
향제줄풍류에 관한 연구는 당시 사회의 문화적 환경과 예술적인 가치들을 보존하고,
우리의 문화유산을 풍성하게 재현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삼월 삼짇날의 만남을 기약하며...
창졸지간에 방문케 된 정읍 영모재.
과거, 그저 단순한 문중 재실로 여겼기에 그냥 동네 앞을 지나치기만 했던 불찰을
오늘에서야 바로 잡을 수 있었음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
건축, 미학, 예술사 등등 다방면에 걸쳐 우리네 문화유산에 대한
이내 안목의 다양성을 틔우고 교정하고 수 있었던 기회였기에 말이다.
무언가를 접하고 느껴본다는 게 그리 녹록치 않음을 절감했다는 뜻.
예정에 없는 방문이었기에 카메라를 지참치 못한 점이 아쉬울 뿐.
대신 폰 사진으로나마 대충 영모재의 느낌을 이 자리에 옮겨 본다.
한 달여 후 삼짇날의 풍성한 문화 마당이 기다려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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