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 임자도 홍매화 정원
진도 어디에선가 옮겨왔다는 홍매.
행여 냉해라도 입을세라 대나무 발을 쳐서 매서운 바닷바람을 막아놓은 듯.
'홍매정원'의 얼굴 마담 수준의 대접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이던데
굴취와 옮겨 심은 토양에 대한 스트레스인지, 상당수의 가지가 고사한 가운데
전체적인 수형과 수피등을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살피진 못했지만
글쎄올시다! '고매' 수준이라기엔...?
수형을 비롯한 전체적인 정황상 언뜻 살구나무가 연상되던데...
누군가의 대화에 응대하다가 꽃의 향기 여부는 살피지 못한 채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해남 '보해매원' 등 여기저기에서 옮겨왔다고 들었다.
본디 꽃 감상으로 심은 매화(梅花) 라기 보다는 열매(梅實)를 얻기 위해 식재되었을 터.
'백억동산百億園'은 그만큼 많은 돈을 들여 조성했다는 얘긴 것 같고
'서포'는 매화 기증자의 아호를 새긴 것이라고.
수양 청매
수양홍매
이곳의 홍매는 모조리 '접'을 붙여 놓은 듯.
매림 사이를 거닐다가 갓 꽃대를 밀어 올린 튤립 한송이를 만났다.
매림 맨 뒷편 언덕에 식재된 향나무 들.
우리네 토종 동백은 단 한그루도 보이지 않고
개량종인 이른바 '카네이션 동백' 일색.
본디 '매원'에서 길러진 수형인지라 '고태미'와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
'수양매'
매화정원 바로 옆에 자리한 튤립정원.
신안을 상징하는 '민어' 조형물
드넓은 대광해수욕장을 배경으로 내달리는 준마 상.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 적거지謫居地
조희룡의 매화벽(梅花癖)
나는 매화를 몹시 좋아하여 스스로 매화를 그린 큰 병풍을 눕는 곳에 둘러 놓고,
벼루는 매화시경연(梅花詩境硯)을 쓰고, 먹은 매화서옥장연(梅花書屋裝煙)을 쓰고 있다.
바야흐로 매화 시 백 수를 지을 작정인데, 시가 이루어지면 내 사는 곳의 편액을 '매화백영루(梅花百詠樓)'라고 하여
내가 매화를 좋아하는 뜻을 쾌히 보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쉽게 이루어내지 못하여 괴롭게 읊조리다가
소갈증이 나면 매화편차를 마셔 가슴을 적시곤 한다.
현재 이루어놓은 것이 칠언율시 오십 수인데, 또 다시 시상(詩想)이 고갈된 것을 깨달았다.
정희 한차례 고취(鼓吹, 음악)를 들어 시상을 윤택하게 하고자 한다
19세기 여항문인(閭巷文人)이었던 우봉의 삶과 예술에 가장 크게 영향을 준 것은 당연 신분제.
영 · 정조 연간의 통청(通淸) 운동을 비롯, 숫자상의 양반은 많아졌지만 사회 정점에 있는 극소수 양반들의
위세는 여전 했던 것. 20세기 전반까지도 향촌 사회에 반상을 구별하는 유습이 남아 있었음을 떠올리면
우봉이 살던 당시의 정황은 미루어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다.
이런 와중에, 이른바 중간 계층에 속하던 사람들이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신분에 대한 울분과 격정을 글과 그림으로
표출하기 시작한다. 19세기 문화의 다채로움 속에는 이들의 활약이 활발했음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 핵심에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치운(致雲), 호는 우봉(又峰)·석감(石憨)·철적(鐵笛)·호산(壺山)·단로(丹老)
또는 매수(梅叟)라 일컫는 여항문인 조희룡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
조희룡은 조선 개국공신 조준(趙浚, 1346~1405)의 15대 손으로 본디 명문가의 후손이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여항인으로 전락했다.신분상의 변동은 있었지만 여전히 그는 문인으로서의
교양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매우 풍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신분상의 이중성은 그의 문학과 예술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만구음관萬鷗碒館
'일만 마리 갈매기 울음을 듣는 집'이라!
자신의 처지를 빗대는 당호를 내걸고 3년여를 매화에 매달렸다는 우봉.
조희룡이 평생 교분을 쌓은 벽오사 동인들 대부분이 김정희의 영향을 받은 추사파 서화가로 불린다.
그러나 조희룡의 유배 죄목에 조희룡이 추사 김정희의 '복심(腹心)' 즉 가장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으로 적혀 있을 만큼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스승과 제자를 넘어서는 관계였을 거라는 추론.
조희룡 《사군자병풍》중 <매화>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60×35cm, 삼성미술관 리움
일각에서는 추사와 우봉의 관계가 사제 관계일 뿐 아니라, 주공(主公)과 겸인(傔人)이라는
중층적 관계였을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한다. 18~19세기 서울에서 겸인은 흔히 문하인(門下人),
혹은 문객(門客)으로도 불리며 독특한 사회계층의 하나로 존재했다.
조희룡 《홍매대련》 (부분) 개인 소장
그렇다고 조희룡이 김정희의 겸인이었는지 확실치는 않다.
다만 중인임에도 김정희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를 가게 될 정도였으므로,
그가 김정희의 정치적 실무를 대행했을 가능성을 배제 할 수 없다는 점.
<홍매도> 조희룡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16.6×21.7cm, 서울대학교박물관
《홍백매도팔곡병》 조희룡
종이에 채색, 124.8×46.4cm, 국립중앙박물관
옛 문인들이 매화(梅花)를 꽃 중의 으뜸으로 꼽았던 것은 무엇보다도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향기로운 꽃을 피우는 매화의 고고함에 대한 의취(意趣) 에 방점을 찍고 있다.
꽃이 성글고, 나무가 오래되고, 가지가 마르고, 꽃봉오리 진 것을 네 가지 귀한 요소(四貴)로 꼽고
완상의 요점으로 삼았다. 한 마디로, 고태미 물씬 풍기는 고매(故梅)여야 한다는 이구동성의 합창이라고 보면 틀림 없다.
<매화서옥도> 조희룡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106×45.4cm, 간송미술관
조희룡 매화서옥도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매화서옥도>이다.
우측 암벽에 적힌 발문 내용은 이렇다.
좀먹은 상자에서 한 장의 묵은 종이를 발견했는데, 이십 년 전에 내가 그린 매화서옥도였다.
대개 유희스런 필치이지만 자못 기이한 기운이 있고, 연기 그을음에 절어서 거의 백 년쯤 된 옛 그림 같았다.
그림으로 된 매화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랴?
펼쳐보고 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삼생석(三生石) 위에 있는 느김이 든다. 단로.
조희룡이 본격적으로 괴석을 모으고 이를 그림으로 그린 것은 유배지인 임자도에 있으면서부터였다
유배생활의 답답함을 괴석 채집으로 보냈고, 그렇게 모은 괴석이 대숲 속에 작은 산을 이루었다고 했다.
위창 오세창의 조희룡 평문(評問)
유재소의 <수수계정도> 상단에 기록
오세창은 『예림갑을록』의 유재소 그림 위에 쓴 글에서 조희룡을 "묵장(墨場)의 영수(領袖)"라 칭하였다.
대부분이 화원이거나 직업화가인 이들 사이에서 중심 역할을 한 조희룡에 대한
매우 적절한 칭호였다는 것이 후학 들의 공통된 의견이라고.
인용: 이선옥 著 『우봉 조희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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