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혁명 위령탑(東學革命 慰靈塔)
우금치 전적지를 찾은 일행
'동학기행' 일행이 드리는 심고心告
우금치 전적지牛金峙 戰蹟地
1894년 10월 23일부터 25일, 11월 8일부터 11일까지
동학군과 관군의 격전이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장소.
1894년 10월 16일경 전봉준과 손병희가 각각 이끌던 남접과 북접의 동학군은 논산에서 합류하였다.
같은 달 21일 2만여 명의 동학농민군은 서울 진격로에 있는 충청감영 소재지 공주로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세 길로 나누어 공주를 압박한 동학군은 이인역, 봉황산, 효포 등지를 차례로 점령하였으나
25일에 감행한 웅치 공격은 관군과 일본군의 저항으로 실패하고 만다.
관군측의 병력도 증강되어 경리청 소속 부대 외에 일본군 1개 대대까지 가세하여 2천여 명에 달하였다.
경천점으로 후퇴하였던 동학군은 11월 8일 2대로 나누어 공격을 개시하여 판치와 이인을 점령하였다.
전력을 재정비한 양측은 다음날 효포로부터 웅치와 우금치에 이르는 30리 전선에서 대격돌하였다.
우금치는 전봉준 휘하의 동학농민군 주력 1만여 명이 40∼50차례에 걸쳐 돌격전을 감행한 고개였다.
그러나 동학군은 우세한 화력을 가진 관군과 일본군의 저항과 반격으로
이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이후 전라도 쪽으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우금치 혈전은 동학혁명전쟁의 승패를 가른 결정적인 대회전이라고 할 수 있다
삼례에서 제2차로 기포한 전봉준(全琫準) 등 남접과 보은에 집결한 손병희(孫秉熙) 등
북접은 협력해 충청감영 소재지이며 서울로의 북상 길목인 공주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10월 9일 논산에서 합류한 4만 명의 양측 주력부대는 노성(魯城)을 거쳐 공주에서 30리 떨어진
경천(敬川)에 주둔하였다. 여기에는 낙오한 청군(淸軍)도 40∼50명 가량 가담하였다.
이에 대항해 구상조(具相祖) · 성하영(成夏永)이 이끄는 경리청(經理廳) 병정과 장용진(張容鎭) 등의
통위영(統衛營) 병정을 중심으로 한 관군 810명과 우영장(右營將) 이기동(李基東)이
지휘하는 감영병이 주둔하고 있었다.
동학군은 공주를 부여와 논산 양 방면에서 협공한다는 작전계획을 세우고,
10월 23일 이인(利仁)쪽부터 공격해 들어갔다.
이 날 관군은 패퇴하였고, 공주감영과 10여 리 되는 효포(孝浦)까지 빼앗겼다.
24일과 25일에는 관군의 응원군과 일본군 1개 중대 100여 명이 가세해 더욱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특히, 효포의 후면에 있으며 공주감영과 직통하는 웅치(熊荳)를 둘러싸고 공방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동학군은 그 대다수가 죽창으로 무장했기 때문에 잘 훈련되고 우세한 화력을 가진
관군과 일본군의 상대가 되지 못하고 패하였다.
다시 노성과 논산 초포(草浦)로 후퇴해 전열을 가다듬은 뒤, 이인과 우금치를 거쳐 공주로 들어가는
통로를 주공격로로 삼고, 웅치를 비롯한 몇 개의 통로를 보조공격로로 잡아 공주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11월 8일 동학농민군의 한 부대는 경천에서 판치(坂荳)를 거쳐 공주성의 남동쪽으로 진격했고,
다른 한 부대는 이인에 주둔하고 있던 관군을 남서쪽에서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오후 3시경 제1대는 먼저 판치를 넘어 효포를 공격해 관군의 관심을 그 쪽으로 돌렸다.
동시에 제2대 1만여 명은 이인에 주둔하고 있던 관군을 향해 진격하였다.
총지휘를 맡은 일본군 대위 모리야(森尾雅一)는 280명의 경리청병을 우금치산으로
후퇴시키고, 일본군 1개 소대와 함께 우금치를 수비하였다.
밤새 불을 피우고 총과 포를 발사하는 등 날카롭게 대치하고 있던
양군은 날이 새자 결전의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11월 9일 오전 양군의 배치를 보면, 동학군은 동쪽의 판치부터 서쪽의 봉황산까지
40∼50리에 걸쳐 포진했고,특히 주력부대는 우금치산 전방 500m에 있는 산 위로 전진해갔다.
통위영병과 감영병은 전면과 오른쪽 방어를 맡아 금학동 · 웅치 · 효포 · 봉황산에, 그리고 경리청병 일부와
급파된 독립19대대 중로분진대를 중심으로 한 일본군은 우금치산과 견준산(犬浬山)에 분산 배치되었다.
오전 10시 동학농민군은 우금치를 향해 공격을 개시했고, 동시에 삼화산(三和山)에 진을 쳤던
1만 여명의 동학농민군도 오실(梧室) 뒷산을 향해 전진하였다.
고지전(高地戰)적인 양상을 보인 전투에서 지세 상 유리한 곳에서 수비하던
관군과 일본군은 대포를 비롯해 각종 화기를 돌격하는 동학군에게 퍼부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굴하지 않고 계속 공격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공방전이 오후까지 이어졌으나, 관군의 공격적인 방어를 막지 못한 동학군은
패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전투로 1만여 명이었던 동학농민군은 1차 2회 접전 후
3,000여 명밖에 되지 않았고, 다시 2차 2회 접전 후에는 500여 명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수적으로 열세였던 관군도 감히 더 이상 그들을 추격하지 못하고 정세만 살피고 있었다
한편, 효포쪽을 공략하던 동학군은 관군의 방어가 소홀하면 그 틈을 타서
산봉우리를 점령하는 등 하루종일 파상적인 공격을 가하였다.
커다란 희생을 치렀으면서도 관군과 일본군의 견고한 수비를 돌파하지 못한 동학군은
결국 11일 오후에 노성과 논산쪽으로 완전 후퇴하기에 이르렀고, 전봉준은 조선사람끼리
싸우지 말고 척왜(斥倭)와 척화(斥和)를 하자는 격문을 발표하였다.
또, 효포에 주둔하고 있던 수천 명의 동학군도 사기를 상실해 변장한 관군 10여 명에게 기습당하고
계룡산 방면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공주를 점령한 다음 서울로 북상하려던 동학군은
이렇게 우금치에서 좌절당하고 말았다.
공주 송산리 고분

'탐매와 동학기행'에 대한 회고의 자리
귀한 시간을 내어 뉴욕에서 날아 오신 원종일 선생님 부자와 일포 선생님.
부디 기억에 남는 여행이셨길 바랍니다.
특히 미국에서 태어나 자라 온 원기연 군에게는 금번 답사가
대한민국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모두 모두 고맙습니다.
부디 일상 모두가 행복과 건강이 함께하는 나날 하시길...
- 長城人 茶泉 心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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