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토 디 본도네 <애도>
파도바의 아레나 예배당을 장식한 그림의 일부다. 조토는 예배당 내부를 프레스코 연작으로 장식했다.
이 연작에는 성모 마리아와 그 부모의 일생, 그리스도의 수난, 그리고 악과 덕을 우화화한 알레고리인물화
연작 등이 포함되어 있다. 서쪽 벽면 거의 대부분을 꽉 채우고 있는 최후의 심판은
이들 장면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전체 연작화의 절정을 이룬다.
이 작품의 가장 큰 성과는 표정과 제스처로 등장인물의 슬픈 감정을 탁월하게 묘사했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뒤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신을 보고
가족들이 애도하는 장면을 모티브로 한다.
작품의 초점은 죽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두 팔로 감싸고 있는 성모 마리아에 맞춰져 있지만,
그 밖의 인물들 또한 이름만 대면 누군지 익히 알 만한 사람들이다.
예수의 오른편의 턱수염을 기른 사내는 니코데무스와 아리마테아의 요셉으로 보인다.
프라 안젤리코 <수태고지>
이 작품은 원래 '코르토나' 라는 이태리 한 마을에 있는 성도메니코 교회의 제단화로 의뢰된 것이다.
15세기 초반 가톨릭 교회는 미술의 주요 후원자 집단이었다. 도메니코회의 수사였던 프라 안젤리코는
자신의 예술적 역량을 종교적 사명감과 결합시켜 초기 르네상스 시기 걸작 중 하나를 탄생시켰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수태고지>, 1472~75년경.
꽃으로 가득 덮인 정원에서 성경을 보던 성모 마리아가
자신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있는 대천사 가르리엘을 놀라서 바라보고 있다.
전통적으로 <수태고지>는 누가 복음의 한 구절(1:26-38)을 그림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대천사
가브리엘이 성모 마리아에게 곧 아들을 잉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반 에이크, <재무상 롤랭의 마돈나>, 1435년경
이 작품에서 반 에이크는 근경의 선명한 색채와 정밀한 세부묘사, 원경의 어렴풋이 멀어지는
효과를 통해 유화물감의 장점을 십분 활용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거울 앞의 비너스>, 1647~51.
이 작품에서 비너스 여신은 여성의 관능적인 미를 표현하기 위한 구실로 사용되었다.
비너스는 침대 위에 기대어 누운 채 아들 큐피드가 들고 있는 들고 있는 거울을 바라보고 있다.
히에로니무스 보스 <지옥도>
미술사적으로 볼 때 히에로니무스 보스만큼 오랜 세월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한 화가도 드물다. 그의 그로테스크한 환상의 세계는
화가는 물론이고 후대의 화가들에까지 모방되며 칭송받아 왔다.
상징주의나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보스를 기꺼이 자신들이
전개한 운동의 선구자로 인정하며 찬양했다.
악마, 괴물들을 환상적인 형태로 구성한 보스의 탁월한 능력으로 인해
지옥도는 오랜 전통을 뒤바꿔놓은 위대한 기념비적 작품이 되었다.
15세기 이탈리아의 필사도.
이 그림은 단테의 「지옥」을 묘사하고 있는데,
지옥의 중앙에서 죄인들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괴물의 모습이 보인다.
지옥의 모습은 구약의 욥기에 등장하는 끔찍한 바다 괴물인 입에서 불을 뿜고
콧구멍으로 뜨거운 연무를 내뿜는 리바이어던으로 자주 묘사되어 왔다.
지옥의 입에 관한 관념은 바로 이 바다 괴물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
이탈리아의 미술사가 조르조 바라리에 따르면, 레로나르도는 이 회화를 4년 동안이나 그렸으며,
결국 완성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화가는 그림을 주문자에게 전해주지 않았고, 자신이 1506년
밀라노로, 그리고 이어서 1516년 프랑스로 이주할 때 가지고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이 초상화를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주문했다는 기록도 있고, 주석가들은 레오나르도가 이 그림
에서 한시도 손을 뗀 적이 없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여하튼 이 작품이 그에게 이토록 특별한
의미를 지녔던 것은 그것이 모범적인 초상화의 전형이어서라기보다는 이상적인 여인상에
대한 레오나르도의 관점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앤디 워홀 <모나리자>, 1963.
워홀은 모나리자가 지니고 있었던 초상화의 지위를 파괴하여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킨 20세기 화가 중 하나이다.
알브레히트 뒤러 <학자들 속의 예수>
예수의 사역이 시작됨을 서술한 복음서의 한 구절을 묘사한 것이다.
열두 살의 소년 예수는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나 그곳에서 어저다 헤어진다.
그러던 어느 날, 마리아와 요셉은 솔로몬의 사원에서 유대의 학자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는
자신의 아들 예수를 발견한다. 예수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아가면서 자신의 주장을 침착하게 전개하고,
그의 주변에는 여러 학자들이 어린 소년을 반박하기 위해 무모한 주장을 늘어놓으면서 일대 혼란이 일고 있다.
비열하게 생긴 한 노인은 예수의 손을 잡아당기면서 그의 말을 끊으려하고, 또 다른 학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전적典籍의 힘을 빌리기 위해 책 속을 열심히 뒤적인다. 다만 좌측에 있는 한 사람만이
현명한 예수의 말에 수긍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그는 책을 덮고 주의 깊게 예수의 말을 경청한다.
뒤러의 동판화 <기사, 죽음, 악마>, 1513.
뒤러에게 주어진 명성의 많은 부분은 판화가로서의 위대한 작업에 기인한다.
뒤러는 두 차례에 걸쳐 이탈리아를 방문했다. 1494년 그는 화가로서의 수련기를 마친 뒤
파토바, 만토바, 베네치아 등으로 여행을 떠났다. 특히 베네치아에 매료된 뒤러는 두 번째로 이탈리아를
방문했던 기간(1505~07)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볼로냐, 밀라노, 피렌체 등을 여행했다.
이탈리아에서의 경험은 뒤러의 스타일에 엄청난 충격과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1510~11.
이 장엄한 작품은 고대 학문이 이룩한 성과에 찬사를 보내기 위해 계획된 것이었다.
<아테네 학당>은 교황이 중요한 문서에 서명을 하던 '서명의 방' 장식을 위해 라파엘로가 그렸던 네 개의
벽화 중 하나이다. 이 그림은 마주보고 있는 벽면에 그려진 <성체논쟁.과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계획 되었는데<성체논쟁>은 성인들과 신학자들이 성체를 찬양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웅장한 건물의 궁륭 아래 모인 고대의 위대한 철학자, 과학자, 사상가들은 상대를 설득시키려는 논쟁 속에서
자신들의 이론을 놓고 토론을 펼치고 있다. 그 구성의 중심에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서 있다. 플라톤은 자신의 저서 「티마이오스」를 들고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다. 이는 '천상의 이데아'라는 자신의 최대 관심사를 뜻하는 것이다. 반면 그의 동료이자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저작 중 하나인 「윤리학」을 들고 있는데, 플라톤과는 반대로
현실 세계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듯 손으로 땅을 가르키고 있다.
라파엘로 <성체논쟁>, 1508~11.
이 작품은 서명실에서 <아테네 학당>의 반대편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로마에 도착한 라파엘로는 화가로서 자신의 시대를 펼쳐 나갔다. 자신의 명성을 굳히게 되는
역사적인 주문인 바티칸의 방 장식 프레스코화를 위임받았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25세였다.
미켈란젤로의 가장 위대한 조각 <다비드>, 1501~04.
강인하고 표현적인 남자 누느는 그의 예술 세계에서 중심적인 주제였다.
16세기에 이르기까지 화가와 조각가들은 사회적 지위가 낮은 장인의 등급으로 취급받았다.
예술가를 바라보는 이러한 시각을 바꾸는 데 미켈란젤로만큼 크게 기여한 예술가도
아마 없을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일생 동안 "신과 같은 존재"로 추앙받았다.
미켈란젤로가 이야기식 구성으로 장면들을 배치한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1508~12, 전체도.
미술사가 바사리는 말한다. "미켈란젤로는 예술가들이 본받아야 할 전형적인 모범으로 신이 세상에 내려준 자다.
예술가들은 미켈란젤로의 행동으로부터 삶의 방법을 매우고, 그의 작품을 통해 진정으로 훌륭한 장인의 역할을
어떻게 수행할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들은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최후의 심판>(1534~41)을 묘사하면서 바사리는 "최고의 지성, 비범한 기품과
지식을 갖춘 예술가"의 작품이라고 극찬하였다.
티치아노 <바쿠스와 아리아드네> 1520~23
그리스 신화 속 비현실적인 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데,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와 카툴루스가 쓴 텍스트에
기초해서 그려졌다. 크레타의 공주인 아리아드네는 자신의 연인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칠 수 있게 도와
주었으나 결국에는 그에게서 버림받는 신세가 된다. 테세우스가 타고 떠나는 배는 아리아드네의 왼쪽 어깨 뒤로
아주 작게 보인다. 그녀가 연인을 잃은 슬픔에 잠겨 있던 중 술을 마시며 떠들어대는 무리가 섬에 도착한다. 술의
신 바쿠스를 선두로 사티로스(바쿠스를 섬기는 반인반수의 숲의 신)와 마이나데스(바쿠스를 따르는 여사제) 들이
그 뒤를 따른다. 그들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야생 동물들을 갈기갈기 찢는 등 광란의 상태에 빠져 있다. 그러나 바
쿠스는 아리아드네의 머리에 있던 왕관을 빼앗아 하늘을 향해 힘차게 내던졌고, 하늘로 날아간 왕관은 아리아드네
를 향한 그의 불멸의 사랑을 상징하는 별자리가 되었다고 오비디우스는 전하고 있다.
티치아노는 르네상스 시대에 가장 위대한 베네치아 화가였다.
그는 조반니 벨리니(1430~1516)의 문하에 있었고 스승의 뒤를 이어 베네치아 공화국의 공식화가로
길을 걷게 되었다. 티치아노는 신화적인 장면들 이외에도 매력적인 제단화와 초상화를 많이 남겼다.
그의 작품은 그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가져다 주었으며 교황과 신성 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 모두로부터
일을 맡게 되었다. 칼를은 티치아노를 아우크스부르크에 있는 자신의 궁으로 초대하여 그에게 팔라티노
백작이라는 직함을 내렸는데, 이로 인해 티치아노는 시대의 가장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
보티 첼리 <프리마베라>, 1478.
고대의 신들은 고도로 복합적인 도덕성과 형이상학적 진리를 구현하기 위해 등장한다.
르네상스 시대 이전의 서양예술은 기독교적 주제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새롭게 부상한 이탈리아 도시의
기품있는 통치자들은 보다 폭 넓은 레퍼토리를 요구한다. 특히 '고대 세계의 재발견'이라는 그 당시 가장
유행했던 지적인 화제들에 대한 그들의 자각을 보여주길 원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르네상스의 후원자
들은 고대의 시각예술보다는 문학 쪽에 흥미가 더 많았다. 그리고 고대 신화들은 당시의 애호가들을 위해
각색되기도 했다. 보티첼리의 신플라톤주의적 신화들과 <비너스의 탄생>, <프리마베라> 등이 좋은 예다.
산드로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1485.
산드로 보티첼리는 당시 최대 후원자 중 한 사람이었던 메디치家의 로렌초 디 피에르 프란체스코를 위해서
자신의 최 전성기에 이 그림을 그렸다. <프리마베라>, <팔라스와 켄타우로스>와 함께 빌라 디 카스텔로라는
돈 많은 청년이 피렌체 외곽에 새로 지은 호화저택에 걸기 위해 주문되었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거대한 조개껍질에 실려 해안가로 밀려오는 사랑과 미의 여신
비너스(그리스에서는 아프로디테)를 그리고 있다. 비너스는 바다 거품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서풍의 신 제피
로스는 입김을 불어 비너스를 해안가 쪽으로 이끌고, 봄을 의인화한 젊은 여인 플로라가 꽃 문양이 수 놓인
긴 원피스로 비너스를 감싸주려 한다. 신화의 장면들은 주로 장식적인 목적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보티첼리
가 상대했던 후원자들은 고대 그리스 신화를 그 당시 유행했던 신플라톤주의와 결합시키고자 했던 당대 최고
의 지식인 집단이었다. 이러한 배경 아래 보티첼리는 이 그림에서 비너스를 영적인 속성과 감각적 속성이 조
화롭게 결합된 이상적인 인간성으로 나타내는 고도로 복합적인 알레고리를 창조했다. 로렌초의 스승이었던
마르실리오 피티노는 어린 제자에게 "너의 두 눈을 비너스에 고정시켜라. 비너스는 곧 휴마니스트스이니라.
휴마니스트는 최고의 단정함을 지닌 님프로, 천상에서 태어난 신에 의해 최상의 사랑을 받기 때문이다.
그녀 자체는 절제와 정직, 매력과 광휘다. 오! 어느 것이 이보다 더 아름답겠는가!"
라고 가르침으로써비너스라는 테마를 더욱 확장시켰다.
보티첼리는 비너스를 인간 본성의 상반되는 양편 사이에 위치시킴으로써 두 가지 개념을 조화시키고자 했다.그
림의 좌측에 서로 껴안고 있는 연인은 감각적인 열애를 상징하는데 생식력과 관계된 그들의 결합은
주위에 흩날리는 꽃들로 한층 더 강조된다. 이에 반해 오른쪽의 여인은 분명 순결해 보인다.
비너스는 우아와 고상함의 전형이다.
보티첼리는 우아하고 고상한 얼굴과 정숙한 품행의 속성을 보여줌으로써 순결한 처녀로 나타내려 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아담의 창조>, 1511.
서양미술사의 최고 걸작이라 평가되는 작품이다.
무려 4년(1508~12) 에 걸쳐 완성하였다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로
창세기의 내용에 근거, 아홉 개의 큰 그림으로 되어 있다.
창조의 첫째 날을 묘사한 <빛과 어둠의 분리>로 부터 시작해서 인간의 타락을 보여주는 <술취한 노아>로 끝난다.
이 장면드 중 6일째 되던 날 하느님이 아담을 창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네 번째 장면이 가장 유명하다.
사실 이 장면은 너무도 익숙한 나머지 작품을 구성하는 혁명적인 성질을 간과하기 쉽다.
아담의 창조를 비롯한 여타의 구약성서 이야기들에서 미켈란젤로가 하느님을 묘사한 장면들을 보면,
엄격하고 역동적인 에너지로 가득 찬 모습으로 그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느님의 강인하고 역동적인 동작은 아담의 나른한 모습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미켈란젤로는 또한 하느님을 천사들에게 둘러 싸이게 함으로써 그에게 위엄을 부여한다.
날개 없이 그려진 이들은 여러 지품천사들을 포함하여 근육질의 젊은 남자, 아름다운 여자의
형상 등 다양한 유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모두는 천사의 무리를 대표한다.
하지만 그림에서 이들이 정확히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들 중 일부는 하느님을
떠받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이는 하느님의 옷 속에 숨어 있거나 그의 움직임에 따라
함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그림의 가장 인상적인 요소는 창조의 행위 그 자체다.
천장의 다른 그림들을 보면 하느님의 옷에 소매가 있지만, 여기에서는 오른팔의 소매가 없는데
이는 아마도 하느님의 완벽한 근육의 힘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아담을 향해 쭉 뻗은 그의 손은 아담의 집게손가락에 거의 닿을 듯하다. 서정적이긴 하지만
이 부분은 하나의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아담은 분명 살아 있는 상태이므로, 만약 손가락이
이미 접촉된 것이 아니라면, 곧 이어질 접촉은 아담에게 생명을 불어넣기 위한 것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학자들은 연약한 인간의 육신이 하느님의 손가락에 닿음으로써 어떻게 활력을 얻게되는가를 묘사한
라틴 송가 "영혼의 창조자여 오소서"에서 미켈란젤로가 영감을 끌어냈을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한스 홀바인 <대사들>, 1533.
이 그림은 영국으로 파견되었던 프랑스 대사인 장 드 댕트빌이 주문한 것으로, 그림 왼쪽에 위치한 인물이 바로 그이다.
함께 있는 사람은 그림이 그려졌던 1533년에 런던을 방문한 그의 친구로 라보르의 주교 조르주 드 셀브다.
실제 인물의 크기와 비슷하게 제작되었으면서도 아주 세밀하게 묘사된 이 대작은 결코 평범한 초상화가 아니다.
홀바인은 이 두 인물 사이에 천구의, 지구의, 휴대용 해시계를 비롯한 다양한 천문 도구와
류트, 피리를 비롯한 여러 악기를 탁월하게 배치했다.
대개 이러한 종류의 물건들은 인생의 무상함과 인간의 모든 노력이 결국 공허하다는
사실을 강조했던 정물화의 한 양식인 바니타스 속에서 주로 묘사되어온 소재들이었다.
이러한 테마는 전경의 바닥에위치한 이상한 형태의 이미지에 의해 한층 강조된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죽음의 상징이었던 해골의 형상이다.
홀바인의 이 그림은 다소 어두운 메시지로 시작되지만 동시에 종교적인 위안을 제시한다.
옆으로 루터파 찬송가인 "영혼의 창조자여 오소서"가 펼쳐져 있고,
화면 상단 왼쪽 구석에는 반쯤 가려진 십자가가 있다.
이 초상화는 폴리시에 있는 댕트빌의 가족들이 살던 성에 걸기 위해 그려졌다.
홀바인은 지구의 위에다 이곳을 포함시켰다.
작품은 영국으로 되돌려지기 전인1808년까지 프랑스에 있었고,
1890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가 이를 정식 구입하였다.
조지 고워 <무적함대가 있는 초상화>, 1588.
엘리자베스의 통치권과 영국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퇴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그려졌다.
대중매체의 출현 전에는 초상화가 통치자의 이미지를 조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지금껏 그려진 강한 인상을 주는 왕족의 이미지들은 대부분은 홀바인이 그린 것이다.
초상화는 왕가의 결혼이 정치적 동맹의 역할을 하던 당시의 중요한 외교적 수단이었다.
홀바인의 신부 그림들은 단 세 작품만이 남아 있다. 이 중 최고의 작품을 꼽자면, 결국에는 헨리와
결혼하지 않았던 밀란의 공작부인 크리스티나의 화려한 초상화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그림은 화가가 모델과 함께할 수 있었던 시간이 단 세 시간뿐이었다는 점 때문에 더욱 유명해졌다.
홀바인이 그린 초상화 중 가장 불명예스런 작품은 아마 헨리 8세의 네 번째 부인이었던 클레베이
앤 초상화일 것이다. 왕은 결혼 전에 홀바인이 실물보다 예쁘게 그린 초상화만 보았을 뿐이라.
실제로 앤을 만났을 때 "뚱뚱한 플랑드르 암말"이라고 하며 혐오감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피터르 브뤼헐 <눈 속의 사냥꾼들>, 1565.
이 광할한 겨울 풍경은 풍경화 역사에서 하나의 이정표가 되는 작품이다.
브뤼헐이 이 그림을 그릴 당시만 해도 풍경이라는 주제는 진지한 화가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저급한 장르로
인식되었지만 그는 이러한 풍토를 바꾸는 데 크게 공헌했다. 그리하여 부뤼헐은 네덜란드와 저지대 국가의
미술계를 지배하는 풍경화의 전통에 초석을 놓았다.
오늘날 이 그림은 <눈 속의 사냥꾼>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작품은 일년의 12개월을 나타내는
연작화 중 하나다. 열두 달 그림들에 대해 일부 비평가들은 여섯 점으로만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지만,
아마도 원래의 구성은 열두 점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느 쪽이 옳든, 현재는 다섯 점만 남아 있다.
<눈 속의 사냥꾼>은 부유한 안트베르펜 은행가인 니콜라스 용헬링크가 주문한 것이다.
이 열두 달 작품은 바로 그의 호화로운 대저택에 걸기 위해 제작되었다.
랭부르 형제의 <매우 풍요로운 시간>91413년경에 시작함) 중 7월의 장면이다.
양털을 깎는 모습과 추수하는 장면으로 묘사되었다,
서양미술에서 계절의 묘사는 프레스코화와 모자이크를 특징으로 하는 고대 로마와 폼페이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계절을 주제로 한 후대의 많은 작품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화가들 또한
상징적인 형상으로 특정 계절을 나타냈다. 그들은 특히 개별 신들의 초상을 주로 사용하였다.
봄은 비너스나 플로라, 여름은 게레스, 가을은 바쿠스, 겨울은 볼카누스나 보레아스로 대표되었다.
엘 그레코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 1586.
엘 그레코의 대표작으로 몽상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다소 섬뜩한 신비주의적인 스타일이 엿보인다.
반 종교개혁이 정점에 달했을 때 그려진 것으로 본래 톨레도의 산토 토메 교회에서 거행되었던
스페인의 귀족, 돈 곤잘레스 루이스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에서 일어났던 일을 보여주는데,
그 착상이 놀랍도록 기발하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오르가스는 신앙심이 강하고 자비로웠던
사람이라 신이그의 장례식에서 보상을 내리기로 결정했다고 전한다.
그림을 들여다 보면, 하늘이 열리고 성 스테파누스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지상으로 내려와
백작의 영혼을 인도할 천사의 모습도 그려넣었다. 확실하게 신원이 파악되는 사람은 극소수이지만
대부분의 조문객은 실제 인물의 초상인 것으로 판단된다. 성 스테파누스(왼쪽에 있는 젊은 성자)의
뒤쪽에서 화면 바깥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는 인물이 바로 이 그림을 그린 엘 그레코의 아들인 조르주로
알려져 있다. 조르주는 손가락으로 기적의 장면을 가리키는데, 이는 바로 여기에 교훈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림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일종의 반종교개혁 선전이다.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믿음만이
구원을 보장한다고 주장한 것과 달리, 가톨릭 교회는 자애와 선행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로렌초 베르니니 <성녀 테레사의 엑스터시>, 1645~52.
베르니니는 테레사가 신의 환영 속에서 완전히 압도당하며 느낀 고통과 희열을 표현하고 있다.
독일 신학자인 마르틴 루터(1483~1546)는 1517년 가톨릭 교회의 실정을 비판하는 95개 조항으로
종교개혁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그리고 뒤이은 프로테스탄트의 발생은 종교미술에 커다란 충격
을 가져왔다. 많은 예술작품들이 교회에서 사라지거나 파괴되었고, 새로운 제단화의 주문은 엄격히
제한되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는 자체적으로 개혁 프로그램을 마련하며 이러한 도전에 대응하였
다. 이를 위한 대부분의 법령들은 1545년에 처음으로 열렸던 교회지도자들의 모임인
트렌트 회의에서 결정되었다.
새롭게 만들어진 여러가지 종교 법안들은 반종교개혁의 선봉 격으로 실행되었다.
이들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것이 1534년 성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에 의해 설립된 제수이트,
즉 예수회다. 이들의 영향력은 주로 교육 분야에서 발휘되었지만, 그들은 그 일환으로 많은 새로운
예술작품들을 의뢰하였다. 후원이 얼마나 왕성했던지 한동안 바로크 양식이
제수이트 양식이라 불려질 정도였다.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는 낡고 상투적으로 변해가는 많은 종교미술이 묵인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기독교적 주제들을 부흥시키기 위한 의식적인 시도들이 생겨났다. 음란하거나 부적절한
것이 묘사되지 못하도록 주제에 대해 주의 깊은 감시가 이루어졌고, 때로는 이러한 방침을
강제하기 위해 종교재판 등의 강력한 절차를 동원하기도 했다. 이와는 반대로, 마치 감상자 자신이
그림 속에 일어나는 일을 겪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강렬한 감동을 자아내는 새로운
유형의 이미지를 장려하는 계획적인 노력도 생겨났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잔 로렌초 베르니니의 <성녀 테레사의 엑스터시>(1645~52)이며,
이 작품은 테레사가 가슴에 천사의 화살을 맞고 신의 환영을 경험하는 희열의 순간을 보여준다.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힌 성 베드로>, 1600~01.
성 베드로의 참혹한 순교 장면에서 보이듯 종교적 주제를
대담한 감각과 사실적인 묘사로 풀어냈다.
성 베드로는 네로 황제의 박해기간 중에 로마에서 생을 마치게 되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운명에 처하기에는 자신이 부족한 존재라는 생각에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히겠다고 자청했다.
카라바조 <사도 바울의 개종>, 1600~01.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힌 성 베드로>와 쌍을 이루는 작품으로, 사도 바울은 등이 땅에 닿도록
쳐진 채 순간적으로 자신의 눈을 멀게 한 천국의 빛을 향해 팔을 뻗으며 극적으로 주제를 표현하고 있다.
카라바조는 구성에서도 극적인 효과를 강조하면서 그림에 충격적 효과를 더했다.
대부분의 라이벌 화가들이 종교적 장면을 실제의 환경에 배치한 데 반해, 카라바조는 극적인
화면구성으로 처리했다. 시선을 분산시키는 배경이나 보조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가 그린 장면들은 어둡고 폐쇄적이며 그 종작 하나하나가 감상자들의 눈에
너무 가깝게 다가와 마치 바로 눈 앞에서 대면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 <십자가에서 내려짐>, 1611~12.
다재다능한 능력으로만 보자면 루벤스를 따라올 화가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는 신화화, 초상화, 풍경화에 특히 두각을 나타냈으며 어둡고 감동적인 종교적 장면을 그리는 데도
탁월한 솜씨를 발휘했다. 장엄한 분위기의 이 작품은 그리스도의 수난 중에서도 가장 감동적이다.
잔인하기 그지없는 적대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십자가에 달리심>과는 대조적으로, 이 작품은
지지자들 가운데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무한한 보살핌 속에서 그의 지친 몸이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순간 주변은 애정과 슬픔으로 가득찬다.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누구인지는 쉽게 확인된다.
파란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는 사도 요한의 맞은편에 서 있다. 그들 아래로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발을 떠받치고 있으며, 마리아 클레오파스(성모 마리아의 여동생)는 위를 올려다보고 있다.
더 위쪽 양옆의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은 요셉과 니코데무스로, 요셉은 예수의 시신을 장사지낸
자이고, 니코데무스는 개종한 바리새인이었다. 꼭대기에는 일꾼 두 명이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돕고 있다. 이 장면은 복음서의 기록과 일치하게 황혼이 질 무렵을 배경으로 그려졌다.
흐란스 할스 <웃고 있는 기사), 1624.
모나리자 이후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초상화를 들라면
아마도 이 <웃고 있는 기사>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림 속 인물의 신원은 알려져 있지 않고 그림의 제목 또한 의문으로 남아 있지만,
여태껏 초상화의 주인공 중 가장 애정이 느껴지는 인물 중의 하나라는 건 확실하다.
기사의 사치스런 의복이 이 그림에서 눈에 띄는 특징 중
하나다, 시선을 사로잡는 소매에는 상징적 문양들의 현혹적인 배열되어 있다.
타오르는 뿔 모양과 화살, 벌, 연인의 매듭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열정과 고난을 상징하는 것들이다.
프란스 한스 <결혼한 부부>, 1622.
할스는 남편과 아내 모두에게 비덩형성을 부여하였다. 초상화와는 달리, 그들의 얼굴은 따뜻한 미소로
생기가 넘쳐나며 자세는 편안해 보인다. 미소 짓거나 웃는 얼굴을 주로 묘사한 할스의 창작 경향은
그의 생활 습관과 관련하여 여러 의견들이 분분하게 된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할스가 그린 초상화 중 유독 술에 취해 기분이 얼큰해진 술꾼들의 초상화가 많다는 사실은, 이를
빕증할만한 뚜렷한 증거는 없지만, 할스 자신이 술꾼이었다는 소문이 퍼지는 데 크게 한몫했다.
안토니 반 다이크 <찰스 1세의 기마초상화>, 1637~38.
영국 궁정 수석화가로 일하며 찰스 1세(1600~49) 왕실과 밀접한 교류를 가졌던 시기,
모습을 왕의 모습을 수많은 장면으로 그려냈다.
왕은 니치에서 만든 훌륭한 갑옷을 입었고 시종은 왕에게 투구를 건네주려 한다.
니콜라 푸생 <아르카디아의 목자>, 1638.
이 그림은 무덤의 비석 주위로 모여든 아르카디아의 목자 무리를 보여준다.
아르카디아는 원래 고대 그리스의 지명이었지만, 시인들에 의해 '영원한 지상 낙원'으로 묘사된
상상 속의 지명이기도 했다. 이 무덤에는 "ET IN ARCADIA EGO"라는 라틴어 비문이 적혀 있는데
이 비문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수많은 학문적 논쟁이 있어 왔다. 이 문구는
고대부터 사용된 것이 아니라 푸생의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클로드 로랭 <시바 여왕의 승선을 준비하는 항구>, 1648.
금빛으로 뒤덮인 고전 건축의 이상화된 세계는 로랭의 고전주의의 시적인 요소의 전형을 보여준다.
클로드 로랭은 고전주의 풍경화를 대표하는 화가로, 그의 작품은 특히 후대 영국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주로 성경이나 신화에서 주제를 빌려왔지만,
그의 작품에서는 고대 황금기의 이상화된 장면이 특히 두드러진다.
렘브란트 판 레인 <야간 경비대>, 1642.
오늘날 이 그림은 <야간 경비대>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 제목은 엄밀히 말하자면 잘못된 표현이다.
이 그림 위에 쌓여 있던 먼지와 유약을 제거해보니 그 아래에는 밤이 아니라 낮의 장면이 드러났다.
그리고 이 장면은 사실상 경비의 장면도 아니었다. 렘브란트의 인물들은 하고 다양한 행동을 취하고
있다. 그중 일부는 실제이나 다른 일부는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르란스 할스 <성 게오르기우스 민병대 장교들의 연회>, 1616.
프란스 할스는 형식적이지 않은 구성과 활기찬 처리방식으로 집단 초상화의 새로운 장을 개척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궁정의 시녀들>, 16956.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 그림은 서양회화의 위대한 명작들 중의 하나다.
그림 속 인물들의 신원은 확실하지만, 이는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다.
벨라스케스의 복잡한 구성은 다양한 의미들을 암시한다. 이 그림은 확실히 등장인물들의 행동
그 자체를 다루고 있으며, 또한 화가로서 벨라스케스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 듯하다.
얼핏 스페인의 왕 펠리페 4세의 딸인 금발의 마르가리타 공주를 그리고 있는 것 같다.
그녀는 화면 구성의 중심에서 이목을 끄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맨 오른쪽에는 어린 꼬마
니콜라스 데 페르투사토가 있고, 그 옆으로는 난쟁이 마리-바르보라와 시녀들이 공주를
둘러싸고 있다. 그녀 뒤에는 수녀와 경호원이 어두운 부분에 서 있고, 멀리 방 끝에는
궁정 시종장이 계단에 서서 어깨너머로 이들을 흘깃 쳐다본다.
이 시종장의 자세는 화면 바깥에서 무언가 흥미로운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암시한다.
문 왼쪽에 위치한 거울이 수수께끼의 열쇠일 것이다. 거울에는 붉은 커튼 주름 아래에 있는
광과 왕비의 모습이 비치고 있다. 그들은 공주 초상화를 그리는 이 방에 잠시 들른 것일까?
이 그림은 공주의 초상화로 왕실 공문서에 기록되어 있었다. 이 그림은 그려진지 약 2백
여 년이 지난 1843년에 이르러 전적으로 오해 때문에 붙여진
<궁정의 시녀들>이라는 제목을 얻게 되었다.
얀 페르메이르 <우유를 따르는 하녀>, 1658~60.
빛과 질감의 섬세한 차이를 묘사하는 페르메이르의 특별한 재능이 돋보이면서도
그의 평온한 세계관이 집약된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방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빛을 묘사한 방식이다.
벽에 걸려 있는 바구니와 놋쇠 주전자의 일부만을 비추지만, 바로 그 위에 있는
조그마한 그림은 그늘진 어둠 속에 있다. 같은 방식으로, 테이블을 가로질러
명멸하는 햇빛을 나타내기 위해 페르메이르는 빵, 바구니, 그리고 질그릇
주전자에 흰 물감으로 얼룩점을 더해놓았다.
얀 스테인 ,사치를 조심하라>, 1663년경
북적대고 어수선한 집안의 모든 것을은 저마다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피터르 브뤼헐 <농부의 춤>, 1567년경.
이 장면은 당시의 여러 속담을 참조하여 인간의 어리석음을 강조하였다.
카날레토 <대운하에서 펼쳐지는 레가타>, 1735.
베네치아는 카날레토의 시선을 통해 언제나 우리 앞에 그 실체를 드러낸다.
이 그림은 카날레토가 그려낸 고향의 가장 인기 있는 풍경 중 한 장면을 보여준다.
카날레토의 전매특허인 선적인 엄밀함과 꼼꼼한 세부묘사로 그려진 이 풍경은
연례 보트 경기의 백미인 곤돌라 경기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윌리엄 호가스 <계약결혼>, 1743.
"유행에 따른 결혼"이라는 표제를 단 여섯 점의 그림들 중 첫 번째 것으로, 그 당시 유행하던
결혼관계를 풍자적으로 보여준다. 이 연작은 스콴 더 드 경의 겉멋만 든 아들과 평범한 중인
계급의 신부의 불행한 중매결혼 이야기를 소개한다.
토머스 게인즈버러 <앤드류 부부>, 1748~49.
이 그림은 실물과 꼭 닮게 그려내는 게인즈버러의 정교한 능력뿐만 아니라,
풍경화가로도 성공할 수 있었던 그의 재능을 함께 보여준다.
이 젊은 부부는 로버트 앤드류와 그의 부인 프란시스 카터다.
프란시스 헤이만 <아내 마가렛, 누이 마가렛 로저와 함께 있는 조지 로저>, 1748~50년경.
오늘날의 기념사진을 연상시키는 '가족단란도'는 두 명 혹은
그 이상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일종의 집단 초상화로, 여유로운
태도로 서로 대화를 하거나 사교를 나누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그네>, 1766.
약간의 장난기가 어려 있는, 경괘한 분위기의 에로티시즘은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의
프랑스 사회에서 만연했던 화려하고 경박한 로코코 양식의 전형이다.
줄리앙 남작은 주교가 그의 정부가 타고 있는 그네를 밀고, 자신은 덤불 속에 느긋하게 누워
프랑스 성직자의 세입징수 장관직을 맡으며 주교의 존재는 이빨 빠진호랑이처럼
하찮은 놀림감으로 전락했음을 의미한다. 프라고나르는 주교의 역할을 배제한 채,
이 그림을 좀 더전통적인 테마인 한 쌍의 젊은 연인이 나이 든 남편을 속이는 내용으로 변형시켰다.
그네는 그 자체로 불륜의 전통적인 상징이었다.
화가는 매혹적인 세부묘사로 이러한 관념을더욱 부추겼다.
여인이 장난스럽게 공중으로 차올린 신발은 그녀가 순결을 잃었음을 의미한다.
반면 그녀의 애인의 뻗은 팔은 명백하게 남성의 성기를 함축한다.
심지어 화면 왼쪽의 큐피트조각상도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대고
비밀스런 신호를 보내며 음모의 분위기에 가담하고 있다.
벤저민 웨스트 <울프의 죽음>, 1770.
미국인 벤저민 웨스트는 영국 신고전주의의 선구자로, 영국에서 역사화로 성공적인 삶을 산
최초의 화가였다. 웨스트는 그림의 주제를 영국의 역사 중 최근에 일어났던 사건들에서 가져왔다.
1759년 제임스 울프 대령은 퀘백의 요새를 포획하면서 프랑스와의 유명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는 캐나다의 지배권을 놓고 벌인 두 강대국 사이의 전쟁뿐 아니라 7년간의
전쟁에서 패권을 차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핵심적인 사건이었다. 이 핵심적인 전투에서
승리하기는 했으나 울프는 안타깝게도 승리가 눈앞에 왔을 때 죽음을 맞이했다.
존 싱글턴 코플리 <1781년 1월 6일 페이어슨 장군의 죽음>, 1783.
코플리가 그린 위대한 역사화 중 하나인 이 작품은 저지섬에서 프랑스 군대를 물리친
영국군을 기념하는 한편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젊은 페이어슨 장군에게 경의를 표하는 그림이다.
이 작품은 극적인 색채와 고결한 근대의 영웅을 그린 웨스트의 양식을 한층 더 발전시킨 것이었다.
자크 - 루이 다비드 <마라의 죽음>, 1793.
프랑스 화가 다비드만큼 시대정신을 완벽하게 담아낸 화가도 드물 것이다.
그는 프랑스 혁명의 격동기를 살았고, 그 격렬한 여파의 한가운데에 속해 있었다.
주요 정치적 지도자들과의 직접적인 친분과 아울러, 혁명 운동에 열정적으로 투신함으로써
다비드는 당시의 흥분과 공포를 담아내는 데 있어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이 그림은 프랑스 혁명 중에 일어났던 가장 핵심적인 사건을 기리고 있다.
"민중의 친구"라는 별명이 있었던 마라는 프랑스 혁명 후에 설립된 새로운 정치기구인
국민공회의 일원이자 급진적인 자코뱅 공화당을 이끈 지도적 인물이었으며, 로베스피에르.
당통과 함께 프랑스 공화정을 실질적으로 운영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반대 세력에 대한 급진적인 숙청은 두려움과 함께 원한을 불러일으켰고,
급기야 1793년 7월 13일 목욕을 하던 중 살해되고 말았다.
그를 암살한 자는 온건파였던 지롱드 당을 지지하는 샤를로트 코르데라는
젊은 여자였는데, 이 사건 후 나흘 뒤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한동안 이 그림은 성화와도 다름없는 지위를 차지했다.
이 그림은 그 운명적인 욕조와 함께 루브르의 안뜰에서 전시되었다.
그러나 다비드의 인기가 떨어진 후에 <마라의 죽음>은 작가에게 돌려보내졌고,
그는 그것을 가지고 브뤼셀로 망명한 뒤 그곳에서 여생을 마쳤다.
다비드의 <호라티우스의 맹세>, 1789.
극적인 장면을 포착한 이 그림에서 드러나는 엄격한 양식과 고대 로마적 주제는
1780년대 말 프랑스 혁명의 분위기를 전형적으로 대변한다.
장 - 오귀스트 - 도미니크 앵그르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 1808.
앵그르는 고전적인 조각상과 비견될 만큼 고요함과 웅장함을 드러내는
기념비적인 누드화를 창조해냈다. 언뜻 구성은 매우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듯하지만
앵그르의 이 그림은 사실 미세한 복잡성으로 가득 차 있다. 배경 또한 불가사의하다.
워싱턴 알스턴 <달빛 풍경>, 1819.
은색으로 빛나는 달빛이 화면에 몽환적인 느낌을 줄어넣고 있다.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 1819.
동요하는 영혼들, 공포에 질린 표정과 죽음을 예견하는 섬뜩한 분위기, 격정적인 기운은
이 작품을 당시를 대표하는 가장 기억할 만한 작품 중 하나로 만들었다.
1816년 프랑스의 군함 메두사호는 세네갈로 항해하던 중 난파되었다.
배에는 얼마 되지 않는 구명보트만이 준비되어 있었기에, 승선자들 중 일부는 하나의 보트에
밧줄로 연결된 뗏목으로 옮겨 타야만 했다. 그러나 뗏목이 연결된 보트의 사령관은 자신의 안전
만을 생각하며 뗏목을 연결한 밧줄을 끊고 달아났다. 아르고스 함대에 의해 구출되기까지
약 12일간의 끔찍한 나날 동안, 이들은 뗏목 위에서 굶주림과 공포에 시달려야만 했다.
149명의 승선자 중 고작 열 다섯 명만이 구조되었으며 그나마 다섯 명은 육지에 도착하자마자
운명을 달리하였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프랑스로 돌아온 두 명의 생존자가 폭염 · 기아 · 식인
행위 등을 담은 자세한 삽호와 함께 사건에 대한 자신들의 경험을 책으로 펴냄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로써 정부는 경력이 적고 무능한 인물을 메두사 군함의
사령관으로 위임한 사실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는 거센 압력을 받았다.
존 컨스터블 <건초마차>, 1821.
비평가들은 커스터블의 작품이 마치 풀 위의 이슬을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생생한 느낌을 준다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세부묘사에 기울인 작가의 헌신적인 점이 돋보인다.
들라크루아 <키오스 섬의 학살>, 1824.
당시 실제 있었던 사건을 토대로 대학살을 자유분방하게 묘사한 이 작품은
비평가들의 분노를 사긴 했지만, 낭만주의 운동이 추구했던 가치를 고스란히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된다.
토머스 콜 <우각호> 1836.
미국의 풍경화파는 과거에서 뿌리를 찾기보다는 미래를 지향했는데, 콜은 이것이 유럽의
전통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 확신했다. <우각호>는 대중에게 처음으로 소개되었을 당시
그다지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사실 작가 자신조차도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애셔 듀랜드 <동인>, 1849.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 중 오른쪽은 토머스 콜이며 그 왼쪽은 윌리엄 컬런 브라이언트로
이들은 거대한 자연 앞의 왜소한 존재로 표현되고 있다.
조셉 말로드 윌리엄 터너 <눈보라; 항구를 빠져나가는 증기선>, 1842.
보는 이의 마음을 휘저어놓을 듯한 이 걸작은 터너가 화가로서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에 제작된 작품이다.
전성기 시절 그는 더욱 야심찬 주제들을 다루곤 했는데 그 누구도 터너만큼 확신에 찬 태도로 폭풍의
실제적인 격렬함을 그럴듯하게 포착해내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터너는 바다를 표현하는 데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화가였다. 그는 평온한 물결과 황금빛 일몰의 고전적이고 평온한 장면에서부터
격렬히 날뛰는 급류에 이르기까지 모든 상황에 놓인 바다 풍경을 묘사했다.
이 작품은 사나운 폭풍우를 바라보는 터너의 가장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터너는 작품 안에서 어부의 운명을 묘사하는 데 집중하기 보다는,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이
큰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있다는 착각이 들도록 계획했다. 격렬히 몸부림치는 파도와
아찔한 회오리바람이 부는 바다 한가운데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과
배의 모습은 화면에 거의 보이지 않는다.
존 마틴의 <진노의 날>, 1815~53.
터너와 동시대 인물인 존 마틴(1789~1854) 또한 터너와 유사한 방식으로 작품을 제작했다.
<진노의 날>에서 그는 성서의 주제에 기초한 대홍수 사건을 서사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귀스타브 쿠르베 <목욕하는 여인들>, 1853.
쿠르베는 리얼리즘 운동을 주도한 선구적인 인물로, 리얼리즘은 전통적인 규범에 도전한
19세기 프랑스 미술계의 흐름이었다. 이런 이유로 그는 현대 미술의 발전에 앞장선 독창적이고
생산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미술의 관습을 깨뜨렸으며, 이로 인해 당시
예술을 향유하던 사람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아드리안 브로베르 <농부의 식사>
에두아르 마네 <풀반 위의 점심식사>, 1863.
오늘날 마네는 인상주의 계열을 대표하는 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는 인상주의와는
매우 다른 배경에서 화가 경력을 시작했다. 1863년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 작품이 파리에
전시되자 관객들이 분노하는 소동이 벌어졌고 이 사건으로 마네는 화단의
문제아로 주목받게 되었다.
르네상스의 유명한 작품 <전원음악회>는
자신의 작품을 위해 참고한 그림 중 하나다.
단테 가르리엘 로세티 <성스러운 베아트리체>, 1864~70.
로세티는 이 작품이 죽은 아내 엘리자베스 시달(1829~62)에 대한 추억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원했다.
외견상 이 작품은 이탈리아의 시인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영원불멸의 소녀 베아트리체를 모델로 삼고 있다.
단테와 베아트리체라는 주제는 단텐에 대한 로세티의 평생에 걸친 열정의 산물이자 유대감의 표현이다.
단테의 시는 로세티가 그린 수많은 위대한 작품들에 영감을 불어넣는 소중한 원천이었다.
에드가 드가 <리허설>, 1874.
드가의 작품 중에서도 생략된 부분이 가장 많은 그림이다.
그림에서 관람객의 눈에 드러난 장면은 극히 한정적이다. 대부분의 댄서들은 나선형의 커다란
계단에 가려져 있고, 이로 인해 화면 왼편 대부분은 상당히 어둡게 처리되었다.
마찬가지로 발레를 지도하는 교사는 화면 오른쪽 상단 부분에 마치 숨어 있는 듯이 조그맣게 그려졌다.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검정과 금빛의 야상곡 : 떨어지는 불꽃>, 1875.
휘슬러의 지 작품은 예술적인 취향과 자유의 범위를 공개적으로 다투었던 유명한 재판의
주재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현대 미술의 발전에 획기적인 사건으로 남아 있다.
그림은 언뜻 추상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이 장면은 런던의 가장 유명한 놀이 장소인
크레모네정원의 불꽃놀이를 묘사한 것이다.
피에르 - 오귀스트 르누아르 ,물랭 드 라 갈레트에서의 무도회>, 1876.
인상주의가 여전히 논란에 휩싸이던 시기에 완성된 작품이다.
르누아르의 이전 작품들에 비해서는 전반적으로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빛의 처리는 여전히
일부 관객들을 불편하게 했다. 특히 전경에서 확연히 드러난 얼룩진 햇빛의
효과에 대해서는 많은 말들이 있었다.
존 싱어 사전트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 1885~86.
사전트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의 초상>, 1888.
자제하는 듯하면서도 강한 인상의 이 이미지는 가드너의 단순한 자세,
검은색 가운과 하얀 피부의 대비, 풍부한 색감과 자유로운 느낌의 배경
등과 어우러져 화면의 중심을 이룬다.
폴 세잔 <생 빅투아르 산>, 1885~87.
폴 세잔은 인상주의와 입체주의를 잇는 현대 미술의 중요한 개척자로 평가받는다.
세잔은 특히 풍경화와 생 빅투아르 산을 그린 연작을 통해 이러한 대업을 달성했다.
참고도서: 이에인 잭젝 著. 유영석 易 <가까이서 보는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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