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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추사 (1)

<시경루> 현판, 55×125cm, 1846, 예산 화암사, 수덕사 근역성보관.

 

 

 

<일로향실> 현판, 32×120cm, 1844년 무렵, 대흥사 성보박물관.

 

 

 

<옥산서원> 현판, 79×180cm, 1839.

 

 

 

<잔서완석루>, 31.8×137.8cm, 1850년 무렵, 국립중앙박물관.

 

 

 

<계산무진>(예서), 165.5×62.5cm, 1852~1856, 과천시절, 간송미술관.

 

 

 

<사야>(예서), 92.5×37.5cm, 1852~1856, 과천시절, 간송미술관.

 

 

 

<판전>, 현판, 77×181cm, 1856, 봉은사 경판전.

 

추사가 세상을 뜨기 3일 전에 쓴 것으로 '고졸古拙'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린다는 평가다.

'71살 과천 늙은이가 병중에 쓰다'라는 낙관이 있다.

 

 

 

< 대웅전> 현판, 100×230cm, 은해사 성보박물관.

 

 

 

 

<불광> 편액, 145×169.5cm, 은해사 성보박물관.

 

불광각에 걸려 있던 것으로 지금은 이 글씨만 남아 있고, 전각은 소실되었다.

봉은사의 판전 글씨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강건한 힘이 느껴진다.

 

 

 

<산해숭심> 현판, 은혜사 성보박물관.

 

원래 은해사 말사인 백흥암에 있던 것으로 이 글씨의 원본이라 여겨지는 친필본이 현재 '리움'에 소장되어 있다.

'옛 것을 고찰하여 현재에 증명함은 산처럼 높고 바다같이 깊다'는 뜻.

 

 

 

<산사山寺>  24×87cm, 통도사 성보박물관.

 

과천 시절 작품으로 자신이 예전에 지었던 '산사'라는 시를 적은 것이다.

 

 

 

<간찰> 31.5×420cm, 직지성보박물관.

 

김정희가 영하映河스님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들꽃 피고 새 울어 온통 봄빛이라 사람으로 하여금 어리설키 끝도 없이 몽상케 하는구려, 스님의 글을 보니 ····

관음탱은 그명간 장황이 마무리될 듯하니 오직 (정병과 석장을 지닌) 스님이 한 번 와서 가져가길 기다릴 따름이오.

《화엄론》은 받았소. 매우 고맙소. 나머지는 짐짓 갖추지 못하오.

3월 6일 과천 사람 부침

 

 

 

이 편지는 앞선 편지 이후 영하스님에게 답장이 온 듯한데, 그에 대한 답신을 쓴 것으로 추정한다고.

두 편지의 문투로 볼 때 영하스님과 김정희는 막역한 사이였던 듯.

 

 

 

 

과천에 기증된 후지쯔까 유물들 중 김정희의 친필 간찰들로 '세한도'를 받기도 했던 우선 이상적에게 보내진 것이다.

북청 유배에서 펼려나 과천에 머물던 때 쓴 것으로, 병 든 속을 달래기 위해 버섯을 빌려달라는 것과 차에 대한 이

야기가 적혀있다. 김정희가 위장병에 시달린 사실과 당시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차맛이 신통치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김정희 인장

 

 

<순천 선암사 해붕당 진령 진영> 125×116.5cm, 선암사 성보박물관.

 

 

 

해붕 전령(? ~ 1826)은 '호남칠고봉'으로 학문과 문장이 뛰어났다고. 1815년 이전부터 김정희 가문과

깊은 교분이 있었던 듯. 김정희는 젊은 시절 수락산 학림암으로 해붕을 찾아가 공각空覺을 토론한 바

있으며, 그때 해붕을 통해 평생의 지기인 초의를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그림 상단 우측으로 김정희가

세상을 떠나기 5개월 전인 1856년 해붕의 제자 법운의 청을 받고 지었다는 찬문이 있다.

 

 

<해붕대사화상찬>

선암사 소장의 해붕대사화상 진영의 찬문을 김정희가 직접 쓴 것이다.

이 화상찬의 뒤에는 김정희가 해붕스님의 제자인 호운스님에게 보낸 답장과 초의스님의 발문이 있다.

 

 

<호운스님에게 보낸 편지>

 

<초의스님 발문>

 

 

 

<반야심경첩> 25.4×14.2cm, 리움미술관, 보물 제547호.

 

한 면에 3행씩 1행 8자의 구성으로 반듯한 구양순체를 기반으로 써 내려갔다.

 

 

 

<해인사 대적광전 중건 상량문> 95×483cm, 해인사 성보박물관.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조선 순조 18년(1818)에 쓴 해인사 대적광전 상량문으로 『완당집』에 실려 있다.

당시 추사의 아버지 김노경(金魯敬, 1766∼1840)은 경상도 관찰사로서 해인사 중건에 관여하였다.

이때 김정희가 해인사 중창을 위한 권선문(權善文)과 대적광전 상량문을 지었다고 한다.

 

이 상량문에는 『법화경(法華經)』 화성유품(化城喩品)의 8방16불(佛)의 명호(名號)와 『아미타경(阿彌陀經)』의 8방 불의

명호를 육위사(六偉詞, 상량문 끝에 붙이는 노래)로 적고 있는데. 이는 화재를 진압하는 하나의 비방이었다고 한다.

이 상량문은 1971년 대적광전 보수 때 발견되었으며, 그 원본은 꺼내어 해인사 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이를 그대로 쓴

모본과 보수기(補修記)를 그 자리에 넣었다. 감색 비단에 금니로 쓰여진 해서체의 글씨로 추사 초년의 대표작이다.

 

비단의 크기는 세로 95cm, 가로 483cm이다. 글자 크기는 세로 4.1cm, 가로 3.5cm로 상태는 비교적 양호하고

중간 중간 금니자(金泥字)가 탈락된 부분이 있다. 전체의 글은 총 67줄로 한 줄에 20자이다.

 

이 상량문의 글씨는 추사체의 모습을 상당히 느끼게 하면서도 부분적으로 획에 살이 많아, 추사체가 완성되기 이전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므로 書者는 추사 김정희로 판단된다. 이 글이 추사 김정희의 문집인 《완당집》에

실려있는 것으로 보아 選者도 추사 김정희라 하여야 할 것이다. 상량문 포장에 김노경이 지은 것으로 표현된 것은,

이 상량문이 추사가 자신의 아버지를 위하여 代作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 상량문의 앞부분은 변려문으로 되어 있으나 해인사 자체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보다는 불교 일반에 관한 폭넓은 지식이

문장화되어 있다. 육위사 부분은 일반적으로 上·下·東·西·南·北을 韻字로 하는 詩로 구성되는데, 이 상량문의 육위사

부분은 압운하지 않은 오언시로 되어 있으면서, 시의 첫글자를 각각 상·하·동·남·서·북으로 하고 있는 특징이 있다.

 

 

 

 

그윽이 헤아리건대 대운大雲이 널리 덮임에 화택火宅이 서늘한 데로 돌아오고 법월法月이 겹바퀴가 되매 보찰寶刹은

상서가 솟았도다. 삼독三毒을 없애고 삼계三界를 뛰어나니 다시 환희의 하늘을 보고, 십덕十德을 나타내고 십문十門을

증명하니 길이 견뢰의 땅에 정했구려. 붉은 불똥은 양구陽九의 액을 그치고 금속金粟은 대천大千의 인연이 묘용妙用을

허공에 나타내는 것은 법해法海의 서로 이음이요, 만 가지 행실의 공덕이 진체眞諦를 진찰塵刹에 관통하는 것은

밀인密印의 서로 전함이라 하였소.....

 

 

 

<도원행桃源行> 149×32.5cm, 은해사 성보박물관.

 

과천 시절의 것으로 당대의 시인 왕유의 '도원행'의 마지막 구절을 적은 것이다.

 

 

 

 

 

 

 

<청련시경> 현판, 49×192cm, 개인 소장.

 

김정희의 예서체 편액으로 서울 봉원사 대방에도 같은 내용의 현판이 있다.

 

 

 

<간찰> 28.5×48.5cm, 아모레퍼시픽미술관.

 

김정희가 과천에서 초의스님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며 보고 싶으니 빨리 와 주십사 하는 내용이다.

 

북청에서 돌아오니 스님과의 거리가 가까워진 듯한데 그래도 천리나 되는 먼 길입니다.

스님은 산속에서 초목과 벗하며 살아온 분이니 세속에 찌든 이 몸보다는 건강이 좋을 것입니다.

상좌를 데리고 지팡이를 날리며 한번 찾아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큰눈이 내리고 차를 마침 받게 되어

눈을 끓여 차맛을 품평해보는데 스님과 함께하지 못함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요즘 송나라 때 만든 소룡단이라는 먹을 하나 얻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특이한 보물입니다.

이렇게 볼 만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런데도 오지 않으시겠습니까? 한번 도모해보십시오.

너무 추워 길게 쓰지 못합니다.

 

소동파의 생일날(12월 19일) 과천 사람이

 

 

 

<동다송東茶頌> 초의 의순, 18.5×11cm, 아모레퍼시픽미술관.

 

동다송은 홍현주(정조의 사위)가 다도를 알고자 부탁하여 초의스님 저술한 책이다.

17절 492자의 시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다도관을 피력하였다.

 

 

 

<초의시고草衣詩藁> 1906년, 반곽 21.4×15.4cm, 동국대학교도서관.

 

고종 28년(1891) 초의의 문집으로 4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지암시고' '초의음고'라고도 한다.

권두에는 홍석주의 서문과 신위의 서가 있고, 권 말에는 윤치영의 발문과 1875년 신현구가 쓴 발문, 신관호의

발문 등이 있다. 본문에는 차에 대한 사상 및 선관을 나타낸 시와 함께 홍석주 정약용 김정희 등

당대의 유명인사들과 주고 받은 서문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완당법서첩> 35.8×19.9cm, 직지성보박물관

 

이 첩에는 김정희가 쓴 반야심경의 탁본이 수록되어 있다. 김정희는 사경을 많이 하였으나 특히 불교의

요체를 담은 반야심경을 즐겨 해서체로 쓰곤했든데 이 반야심경의 마지막에는 이것을 쓰게 된

이유를 밝히는 제문이 있다.

 

세속의 때에 절은 이 몸이 배껴 썼으니 이 경이야말로 곧 불구덩이 속에서 피어난 연꽃으로 곧, 더러운 세상에서

언제나 깨끗함을 간직한다는 뜻이다. 호경금강에게 비웃음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단파거사가 초의의 

정송(독송용)을 위하여 썼다. 

 

 

 

<다암서첩茶菴徐妾>

 

조선 후기 호의縞衣스님 및 초의스님과 유학자들의 교류내용이 구체적으로 실린 간찰 16편을 모은 서첩이다.

이 가운데 <일로암>은 김정희가 일지암의 초의스님에게 반야심경이 담긴 첩을 보내면서 쓴 편지로 추정된다.

김정희는 '선사께서 날로 무량수경을 외우며 축원해 주시는 힘을 입어 편안히 살 수 있으니 기쁘고 고맙습니다.

다만 나그네의 회포는 한곳에 오래 머물러 있음에 더욱 괴로울 뿐입니다' 라는 심경을 적고 있다.

 

 

 

<문수보살도> 초의 의순, 37.2×30cm, 범어사 성보박물관.

 

이 불화초는 초의 스님이 그린 것으로 전한다. 화면 위 양쪽에 '문수'와 '관음'이라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관음보살도도 함께 그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자 모습은 해학적이며 그 위에 탄 문수보살은

연꽃을 들고 있다. 필선이 활달하고 자유롭다.

 

 

 

 

 

 

 

 

 

 

<문경 김룡사 화악당 지탁 진영> 113×83.3cm, 견본채색, 직지성보박물관.

 

화악 지탁(1750~1839)은 진영에 적힌 '화엄종주'라는 칭호대로 화엄학의 대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뛰어난 문장력을 갖추고 유학에도 밝아 사대부와의 교류가 두터웠다. 일반 진영에서는 보기 드물게

정면상으로 제작되었으며 상단 왼편으로 법손인 혜소스님의 제찬이 적혀있다.

 

 

 

<화악대사 영찬 현판> 김정희, 29.7×131.8cm, 직지성보박물관.

 

화악 지탁스님이 입적한 지 몇 년 후에 스님이 제자들이 진영을 만들자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김정희가 그에 대한

기념의 글을 쓴 것이다. 주요 내용은 김정희 스스로 화악스님의 진영에 대한 의미를 대새겨 보는 것으로 시작하여,

문도들이 진영을 제작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다시 진영의 의미에 대해 한 번 더 강조하면서 스님의 모습을 회상

하는 것으로 글을 맺고 있다. 이 글은 스님이 입적한 후 11년이 지난 1850년에 지은 것이다. 

진영에 대한 글을 현판으로 새긴 것과 김정희가 찬한 글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양산 통도사 성담상게 현판> 김정희 , 1855년, 32×55cm, 통도사 성보박물관.

 

성담 의전스님은 김정희와 권돈인 등 유학자들과도 깊은 친분이 있던 대강백이다.

진영에 대한 찬으로, 김정희가 70세인 1855년 2월에 쓴 과천시기 글이다.

<백파비>에 버금가는 행서체 글씨이다.

 

 

 

 

<임하록 목판> 21.7×45cm, 대흥사 성보박물관.

 

연담 유일스님(1720~1799)의 문집인 《연담대사임하록》은 4권 2책으로 가경 4년(1799) 해남 미황사에서

개간하여 해남 대둔사(대흥사)로 이전하였던 판목이 전한다. 유일스님은 대흥사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대흥사 12대 종사를 엮임한 인물이다. 문하였던 초의스님이 대흥사 13대 종사로 주석하던 시절, 친분이

있던 김정희에게 스승의 탑비 마지막에 삽입되는 운문인 명사를 부탁한 것이 《완당전집》에 남아있다.

 

 

 

<육조정상탑 탁본> 김정희, 28.6×146cm, 개인 소장

 

하동 쌍계사 육조정상탑전에 걸려 있는 현판의 탁본이다. 육조정상탑전은 중국 불교 선종의 6대조인

혜능대사의 정상 즉 두개골을 모시고 있는 건물이다. 건물 안에는 7층 석탑이 있는데 이 탑은 1800년대에

목암사의 석탑을 용담스님이 옮겨 놓은 것으로 이후 육조정상탑으로 불리고 있다.

 

 

 

 

<세계일화조종육엽 탁본> 김정희, 29.5×156.8cm, 개인 소장.

 

하동 쌍계사 육조정상탑전에 걸려 있는 또 다른 현판 중 하나이다.

불교의 선종은 달마대사를 시조로 하여 6대조 혜능대사로 선맥이 이어지는데 이 같은 선종의 역사를 담은

표현으로, 불법의 세계(한 송이 꽃)가 초조 달마대사에서 6조 혜능대사까지 이어졌다는 의미이다.

 

 

 

 

<장성 백양사 만암 횡액> 김정희, 23.4×114cm, 백양사 성보박물관.

 

김정희는 백파스님과 교분이 두터웠다. 김정희가 제주에서 유배를 마치고 백양사에 잠시 들러 쓴 것으로

후일 백파스님의 문손 중에서 '불법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에게 주라고 하면서 설두, 다륜, 환응, 만암 등

법호 5개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설두는 설두유형(1824~1889), 환응은 환응탄영(1847~1929), 석전은 석정

정호(1870~1948), 만암은 만암종헌(1875~1957)에게 각각 주어졌으나 오직 만암이라는 글씨만 만암스님

이 소장하다가 동국대 박물관에 맡긴 것을 백양사로 다시 찾아왔다고 한다.

 

 

 

 

<장성 백양사 만암당 종헌 진영> 81× 51.3cm, 백양사 성보박물관.

 

만암 종헌스님은 장성 백양사에서 득도한 후 강원과 암자 등에서 공부와 수행을 거쳐 해인사의 강사로

이름을 날렸다. 백양사에 오래 머물러 목양산인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1928년부터 3년 동안 현재의 동국대학교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 초대 교장을 역임하였다. 백양사 주지로 취임하여 중창 불사를 이룩하고 후진양성에

전력했다. 해방 후에는 호남고불총림을 결성하여 불교정화작업을 시작하였다. 1952년에 대한불교조계종

제2대 종정으로 추대되어 5년동안 재직하면서, 출가승 본위의 종단 출범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인용 : 봉은사와 추사 김정희 / 추사 평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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