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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사진으로 기록한 현대사의 맨 얼굴 (1)

디트로이트의 노동자 파업

밀턴 브룩스 / 디트로이트 뉴스(1942년)

 

헨리 포드는 노동조합과 타협하느니 공장을 폐쇄해버릴 것이라고 늘 주장하고 있던 터. 하지만 시대는 바뀌고 있었다.

노동자 측이 거리에서 과격한 방법으로 요구사항을 관철할 수 있게 되면서 조합 활동의 많은 부분이 여러 해 동안

폭력으로 덤철됐다. 제너널 모터스와 크라이슬러는 노동조합에 항복했다. 하지만 헨리 포드는 협상이라는 개념을

용납할 수 없었다. 감시원들과 다투던 남자가 저지선을 뚫고 공장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곤봉이 등장하자

브룩스는 앞으로 나갔다. 남자는 방어하려고 했지만 감시원은 곤봉을 휘둘렀다.

이 사진은 플리처상 사진 부문의 첫 수상작이 됐다.

 

 

프랭크 노엘 / AP (1943년)

 

일본군이 말레아시아의 정글을 헤치고 남쪽으로 밀고 들어오고 있을 무렵, 노엘은 일본군 바로 몇 발자국 앞에

주둔하던 영국군을 취재하고 있었다. 노엘은 본사의 지시에 따라 버마로 가는 화물선에 탑승했으나 항구를 벗어

난 지 500킬로미터도 되지 않은 인도양에서 일본군의 어뢰 공격을 받고 구조선에 올라 타 5일을 표류한다.

퓨류하던 또 다른 구조선이 노엘이 타고 있던 배로 다가왔고 그 중 한 인도 선원이 물을 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노엘과 동료들도 줄 것이 없었다. 그 가망없는 상황도 노엘의 사진에 대한 본능을 막지는 못했다.

 

 

 

타라와

프랭크 필란 / AP (1944년)

 

뉴욕 센트럴파크의 절반 크기의 산호섬인 타라와는 아름다운 열대항구에서 벌어진 전투를 기록한 것이다.

해병대원들은 화염방사기로 화염을 분사한 다음 환기 구멍과 포열이 나와 있는 구멍으로 수류탄을 넣어 일본군이

구축해놓은 사격 진지를 점령했다. 그 모든 것이 필란의 사진에 고스란히 담겼다. 섬에는 4천8백명의 정예 일본군과

약 2천명의 한국인 건축인부들이 있었다. 그 중 목숨을 건진 사람은 일본인 17명과 한국인 129명뿐이었다.

미군 역시 천 명이 넘는 해병대원들이 목숨을 잃었고 2천백여 명이 부상했다. 사상자의 17퍼센트라는 믿을 수

없는 수치였다.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매 시간마다 40명의 해병대원이 죽거나 부상당한 것이다.

 

 

 

영웅의 귀환

얼 벙커 / 오마하 월드헤럴드 (1944년)

 

오마하에서 남동쪽으로 8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아이오와주의 빌리스카는 주민 1천백여 명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로 대초원에서 거의 눈에 띄지않는 곳이었다. 1943년 7월 15일, 로버트 무어 중령이 머나먼 전장에서

빌리스카로 돌아왔다. 《오마하 월드헤럴드》는 얼 벙커에게 '진정한 영웅'으로 떠오른 무어의 취재를 맡겼다.

무어와 아이오와 출신 병사들은 '사막의 여우'라고 불리던 롬멜이 이끄는 강한 기갑부대와 북아프리카에서

맞붙었고, 철수하라는 명령까지 두 개의 기갑사단을 막아냈다. 무어에게는 수훈십자훈장과 귀국 명령이 내려졌다.

전쟁영웅 무어를 태운 기차가 무어의 아내 도로시와 일곱 살 된 딸 낸시, 그리고 환호로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무어가 기차에서 내렸다. 낸시를 보자 무어는 짐과 장비를 떨어뜨렸다. 아이는 군중 속에서 달려 나가

아버지의 품에 안겼고 도로시 무어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오섬의 성조기

조 로젠털 / AP (1945년)

 

이오섬(유항도)은 일본 본토에 속한 섬이었다. 수천 년의 일본 역사에서 외국 군대가 일본 본토를 침략한 적은 없었다.

약 7만 명의 군인)미군 5만 명과 일본군 2만2천명이 격돌했다. 한 달 동안의 전투에서 40퍼센트에 가까운 인원이 전

사했다. 거의 7천명의 미군과 2만 명이 넘는 일본군 수비대가 사망한 것이다. 로젠털은 스리바치산 꼭대기에서 폭격

으로 떨어져 나온 6미터 길이의 파이프에 성조기를 묶고 있는 일단의 해병대를 만났다. 이오섬에 있던 사람들이 이

사진의 영향력을 알게 되기까지는 2주가 걸렸다. 성조기를 계양했던 군인 중 세 명은 이 사진을 보지 못했다. 계속된

전투에서 전사했기 때문이다. 네 번째 군인은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다. 영상을 촬영했던 게나우스트는 자신이 찍은

198프레임이 전쟁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에 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것을 모른 채 일본군의 라이플총에 맞아

전사했다. 이 사진은 가장 성공을 거둔 제7차 전시채권 모금 활동의 상징이 됐고 루스벨트 대통령은 성조기를 게양한 

해병대원들을 귀국시켜 채권 집회에서 연설을 시키자고 주장했다. 이 광경이 찍힌 우표발행과 버지니아주

알링턴에 청동기념비도 세워졌다.

 

 

 

 

 

 

와인코프 호텔의 화재

나널드 하디 / AP (1947년)

 

아마추어 사진가인 하디가 찍은 것으로, 256명의 투숙객 중 118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으로 호텔 소유주도

14층의 스위트룸에서 아내와 죽은 채 발견됐다. 하디는 사진을 현상한 뒤 젖은 수건에 감싸 서둘러 애틀란타의

AP 사무소에 보냈다. 하디의 사진 중 세 장이 전 세계로 전송됐고 하디는 아마추어 사진가 중

처음으로 플리처상을 받았다.

 

 

 

소년, 권총 그리고 소란

프랭트 쿠싱 / 보스턴 헤럴드 (1948년)

 

쿠싱의 사진은 인질 사건이 드물던 시절에 인질극의 실제 상황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뿐만 아니라 사진기자들이 흔히 사용하던 스피드르래픽은 렌즈 기능이 제한적이어서 촬영자가 피사체와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하는데 인질극에서는 보통 그만큼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쿠싱의 재기 넘치는

발상과 인내심이 보기 드문 비범한 사진을 탄생시킨 것이다.

 

 

 

베이브의 은퇴

냇 페인 / 뉴욕 헤럴드 트리뷴(1949년)

 

거구 베이브, 타격왕, 홈런왕으로 불리던 허먼 루스의 마지막 출전 모습을 찍기 위해 양키 스타디움에 배치된

사진기자 냇 페인이 새로운 아이콘을 탄생시겼다. 베이브는 건강이 악화된 상태였고, 15년 정도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그가 활약했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던 관중들이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베이브가 수많은 관중의 환호

를 받는 순간, 페인은 루스 뒤에서 선수뿐 아니라 등번호도 카메라에 담았다. 베이브 루스는

냇 페인이 사진을 찍은 지 두 달 후 세상을 떠났다.

 

 

 

구사일생

빌 크라우치 / 오클랜드 드리뷴 (1950)

 

쳇 더비는 농약 살포 비행사였다. 캘리포니아 북부의 농지 위를 전화선과 송전선, 큰 나무를 날쎄게 피하며 날아다녔다.

그리고 에어쇼에서 공연을 해 부수입을 얻었다. 전후에 에어쇼는 일요일 오후의 인기 있는 오락거리였다. 관중들은 낡은

전투기가 나는 모습과 더비 같은 조종사들이 공중제비, 윙 워킹, 저공비행 등이 곡예를 펼치는 모습을 구경했다.

더비의 공연은 그의 가장 멋진 묘기로 절정을 이루었다. 날렵한 복엽기가 연기를 내뿜으며 거꾸로 공중제비를 돌아

하늘에 연기로 커다란 원을 그렸다. 더비가 공연을 마친 뒤 1분 후에 B-29 폭격기 세대가 대형을 지어 하늘 높이

굉음을 내며 날아오르기로 돼 있었다. 각 폭격기는 4개의 엔진출력을 최대한으로 높여 은빛 새처럼 반짝이면서

날아가는 모습을 보여 줄 예정이었다. 크라우치는 적당한 각도로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폭격기가 계획

보다 1분 더 빨리 공항을 가로지르며 날아올랐다. 폭격기의 날개는 비행기를 겨우 1.5미터 떨어져

아슬아슬하게 비껴간 것이다.

 

 

 

대동강 다리

맥스 데스퍼 / AP (1951)

 

데스퍼는 사진기자로 활동하는 동안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오키나와, 마닐라 전범 재판, 히로시마에 원폭 투하를

마치고 돌아오는 에놀라 게이의 승무언, 페허가 된 히로시마, 전후 인도에서의 시민투쟁이 만들어낸 킬링필드

같은 사건을 연이어 카메라에 담았다. "하지만 파괴된 대동강의 다리를 건너 탈출하는 피난민들은 특별했다"

라고 회상한다. 이 사진으로 그는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태클당한 조니 브라이트

돈 울탕, 존 로빈슨 / 디모인 레지스터 (1952)

 

1951년 10월 21일 토요일 디모인의 드레이크대학교 미식축구 팀은 오클라호마농업 · 기계칼리지(현재의 오클라호미주립

대학교)와 원정 경기를 하고 있었다. 브라이트는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 당시의 대학 선수들과 달랐다. 바로 흑인이었던

것이다. 1950년대 초에 흑인 선수는 대학미식축구 경기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퍽!~  오클라호마의 수비수인 윌뱅크스 스미스가 브라이트에게 세게 부딪쳤다. 스미스는 풀백을 상대하지 않고 공을

이미 패스한 무방비 상태의 브라이트를 기습 공격한 것이다. 스미스가 주먹과 팔쭉으로 브라이트를 세게 쳐서 브라이트의

턱이 깨졌다. 그러나 그는 일어나 공을 들고 달리다가 또 한 번 세게 부딪쳤고 이번엔 일어나지 못했다.

울탕과 로빈슨은 치밀한 계획에 따른 고속 연속촬영으로 일련의 사건을 필름에 담았다.

 

 

 

 

아들라이의 구두

빌 갤러거 / 플린트 저널

 

1952년 노동절에 찍은 것으로 대통령 후보 아들라이 스티븐슨과 그의 낡은 구두에 시선이 닿는다.

인간미 넘치는 사진으로 각인되어 퓰리처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바다에 쓸려간 아이

존 콘트 /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1955)

 

1954년 4월 2일, 자연은 두 얼굴의 모습을 모두 보였다.

바닷가의 소란스러움에 콘트는 카메라를 들고 달려 나갔다. 19개월의 사내아이가 파도에 휩쓸린 것이다.

그날 늦게, 1.6킬로미터 떨어진 바닷가에 서 아이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바버라 드라이브의 기적

조지 맷슨 / 뉴욕 데일리 뉴스 (1956)

 

1955년 11월 2일, 하늘에서 본 이스트 메도우즈의 롱아일랜드 지역을 사진기자 맷슨이 날고 있었다.

멀리 교차된 거리에서 연기 기둥이 솟아올라 살펴보기로 한다. 그것은 거대한 B- 56 폭격기가 교외의

거리에 추락해 박살이 난 것. 훈련을 마치고 근처 미첼공군기지로 회항하던 중 기체 고장으로 추락한 것.

바로 앞 메도우브록 병원을 약 150미터 차이를 두고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안드레아 도리아 호의 침몰

해리 트래스크 / 보스톤 트래블러 (1957)

 

항구를 향하고 있던 안드레아 도리아 호는 바다에서 9일을 항해한 뒤 다음 날 아침 뉴욕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도리아 호는 이탈리아 최고급 정기선으로 미술관과 여러 개의 수영장 그리고 극장을 갖추고 있었다.

스웨덴과 미국을 오가는 정기선 스톡홀름 호 역시 고급 선박으로 그날 아침 뉴욕을 출발해 코펜하겐으로 가는 중이었다.

스톡홀름 호는 도리아 호보다 작고 좁았으며 뱃머리는 스칸디나비아의 바다에서 자주 부딪히는 빙상을 깰 수

있도록 강화 처리가 돼 있었다. 두 배는 모두 낸터컷 섬과 바다의 타임스스케어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밤 11시 22분에 스톡홀름호가 안드레아 도리아 호를 들이받았다. 스톡홀름 호의 뱃머리는 호화증기선을

9미터나 뚫고 들어갓다 안드레;아 도리아ㅏ 호의 전체 폭의 3분의 1을 뚫어버린 것이다. 배 측면은 12미터나

갈라졌다. 이내 약 95만 리터에 달하는 바닷물이 안드레아 도리아 호에 밀려들었고 침몰이 확실했다.

새벽녘까지 1,640명의 생존자가 대서양에서 구조되었지만 52명은 실종됐다. 안드레아 도리아 호가 68미터

깊이로 가라앉기 직전인 최후의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으며 후일 "슬픈 고별이었다"라고 회상했다.

트래스크는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학위도 받았다.

 

 

 

 

차이나타운의 소년과 경찰

빌 비율 / 워싱턴 데일리 뉴스 (1958)

 

워싱턴 D.C.의 협승상인연합은 차이나타운에 새 건물이 개관할 때마다 축하행진을 벌이기로 했다.

《워싱터 데일리 뉴스》의 사진기자 빌 비울은 중국인들의 행렬 속에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경찰관 모리스

칼리네인이 다치는 사람은 없는지 확인하면서 행진을 주시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특히 두 살 된 앨런 위버가 신이 났다. 컬리네인은 소년을 보고 위험을 직감, 앨런에게 허리를 구부리고 위험을

말해주고 있었다. 비올은 자신이 그 장면을 제대로 포착했는지 궁금했다. 사무실에 돌아온 비올은 필름을 현상

해본 뒤 편집자에게 "내가 진짜 사진을 건진 것 같다"라고 말했다. 신문사는 이 사진을 사진 콘테스트에 출품해

연이어 상을 받았다. 누구나 탐내는 퓰리처상도 포함됐다.

 

 

 

작은 빨간색 수레와 죽음

윌리엄 시먼 / 미니애폴리스 스타트리뷴 (19590

 

37년 동안 《미니애폴리스 스타트리뷴》의 사진기자로 일했던 시먼은 후일

"내가 찍은 가작 비극적인 사진이었다" 라고 회상했다.

 

 

 

성에서 일어난 처형

앤디 로페스 / UPI (1960)

 

쿠바 마탄사스에 있는 산 세베리노 성은 어느 모로 보나 전형적인 성이었다. 이 성은 풀헨시오 바티스타 대통령의

군사기지였ㄷ. 하지만 1959년 1월 1일부터는 바르부도스(쿠바혁명군)가 장악했다. 로페스는 정의를 실현하는 카스

트로의 사진을 찍기 위해 이 성에 와 있었다.  성에서 벌어지는 재판을 취재할 권한을 얻었고, 마침 민간인을 잔인

하게 다룬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신부 앞에 무릎을 꿇은 장면을 찍은 것이다.

 

 

 

무대 위의 암살

나가오 야스시 / 마이니치 신문 (1961)

 

1960년 일본의 주요 정당의 지도자들이 연설을 한 미일 상호방위조약에 대해 토론을 벌이는 장소에서 광적인 우익

열성분자였던 오토야가 사회당 위원장 아사누마 이네지로를 찌르는 장면이다. 사진기자 나가오는 퓰리처상 최초로

미국인이 아닌 일본인 수상자가 됐다. 후로 야마구치는 사무라이 복장을 하고 자살했다.

 

 

 

두 명의 외로운 남자

폴 바티스 / AP (1962)

 

1961년 4월은 아이젠하워가 두 번의 임기를 마치고 케네디 대통령이 취임한지 몇 달밖에 되지 않은 무렵이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피그만 침공이 대실패로 끝나 그 여파로 곤경에 처해 있었다. 격분한 카스트로는 정치적 선전

을 펼쳤고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이 사건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흐루시초프와 카스트로가 UN회의장에서 만나

서로 포옹했던 것이 불과 몇 달 전의 일이었다. 세계대전 때 유럽에서 연합군을 이끌었던 군인 출신 대통령은

이제 막 취임한 젊은 대통령과 캠프데이비드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이 문제에 대해서 국가적인 통합을 이루기를

원했다. 두 사람은 언론과 경호원들을 뒤로한 채 작은 오두막을 향해 굽이진 오솔길을 걷기 시작했다. 바티스타

가 그 장면에서 가장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젊은 대통령과 이제 나이가 든 군인이

몹시 외 로워 보였다는 점이다.

 

 

 

혁명과 사면

엑토르 론돈 / 라 페푸블리카 (1963)

 

1950년대와 1960년대의 남아메리카에서 혁명은 목숨을 건 활동이었다. 1962년 6월 초 베네수엘라의 민선 대통령인

로물로 베탕쿠르는 5년 임기 중 4년차였다. 빈곤과 번영이 공존하는 가운데 카루파노에서 폭동이 일어나 진압된 것이

  불과 한 달 전이었다. 6월 4일에 푸에르토카베요에서 또 다른 폭동이 일어났다. 론돈은 "사방에서 탄환이 빗발칠 때

나는 한 신부가 죽어가는 사람에게 종부성사를 하기 위해 거리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라고 회상했다.

부상당한 군인을 붙잡고 있는 파딜랴 신부의 모습을 담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사진이다.

 

 

 

전 세계로 생중계된 오즈월드 저격

로버트 잭슨 / 댈러스 타임스헤럴드

 

케네디 암살 이틀 후인 1963년 11월 24일, 잭슨은 시 교도소의 지하에 있었다.

그날 잭슨은 오즈월드가 나타나는 것을 찍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경찰은  일요일 오전 9시 15분 오즈월드가 시 교도소에서

군 교도소로 이송될 때 촬영을 허가하기로 했다. 시간은 계속 흘러 11시가 훌쩍 났다. NBC의 카메라가 생중계를 하고

있었다. 잭슨이 오즈월드가 프레임 안에 들어오도록 하기 위해 왼쪽으로 몸을 약간 기울였을 때 "잭, 이 개자식!" 이라는

고함이 들렸다. 그리고 총성이 주차장에 가득 울려 퍼졌다. 오즈월드는 심음소리를 내더니 쓰러지려 했다. 오른쪽

수사관은 가려져 보이지 않았고 왼쪽 수사관은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오즈월드가 다시 문으로 끌려가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범인을 덮쳤다. 잭슨은 다시 셔터를 눌렀지만 충전할 시간이 충분치 않아 스트로브가 터지지 않았다.

로버트 잭슨은 잭 루비가 리 하비 오즈월드에게 권총을 발사하는 모습을 불과 3미터  떨어진 곳에서 촬영한

이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베트남 사진보도

호르스트 파스 / AP (1965)

 

1964년에는 전 세계의 신문에서 파스의 이름이 들어간 전쟁 사진을 자주 볼 수 있었다.

파스의 사진은 진흙투성이 삼각주에서의 전투,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들, 네이팜탄의 희생자, 잔인한 고문 장면,

여기저기 부러진 피투성이의 부상자들, 헬리콥터의 산악지대 공격, 거리 폭동, 사이공과 다른 도시에서 벌어진

갑작스러운 테러리스트의 공격 등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에서는 전쟁 취재에 관해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베트남에서 일하는 작가와 기자들을 지지하거나 비판했다.

 

 

 

폭격으로부터의 도피

사와다 교이치 / UPI (1966)

 

아이들을 데리고 강을 건너오고 있는 두 명의 여성을 찍은 것이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 미군의 폭격을 받자 도망 나온 사람들이었다.

미군이 그 마을을 공격한 것은 베트콩이 그곳을 미해병대의 진지를 공격하기 위한 기지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여성들은 그 폭격의 의미를 이해했다. 미국인들이 베트콩의 존재를 알고 있기 때문에 공격이 누그러지지 않으리라고

짐작했던 것이다. 이 사진은 1966년 사와디에게 퓰리처상을 안겨준 사진들 중 가장 중요한 사진이다.

1970년 10월 사와다는 신임 지국장과 함께 캄보디아 프놈펜 남쪽의 위험지대인 루트 2에 있었다.

다음날 사와다와 국장은 가슴에 총을 여러발 맞은 상태로 발견됐다. 그해 캄보디아의 전투에서는 두 사람을

포함해 24명의 기자가 사망하거나 실종됐다.

 

 

 

51번 고속도로에서 총에 맞은 메러디스

잭 도넬 / AP (1967)

 

제임스 메러디스에게는 꿈이 있었다. 흑인시민들이 선거인 명부에 등록해 지역선거와 총선에서 투표하도록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 목표였다. 미국 동남부 지역의 중심부를 걸어서 무사히 통과하면 자신의 꿈이 실현되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노란색 피스헬멧을 쓰고 지팡이를 든 채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미시시피주 잭슨까지 51번 고속

도로를 따라 354킬로미터를 걷는다는 계획을 세웠다. 미시시피주에서 제임스 메러디스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62년에 메러디스는 미국 대통령과 보안관 538명, 전투원 2만 2,000명의 도움을 받아 흑인으로서는 처음

으로 미시시피대학교에 입학했다. 나중에 메러디스는 미시시피주를  떠나 아프리카에서 지내다가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도넬은 메러디스가 고속도로를 기어가면서 "오 마소사! 오, 오!"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구조대가 와서 매러디스를 멤피스의 병원으로 옮겼다. 총알 파편 대부분은 제거되었으나 메러디서는 평생 몸 속에

파편을 안고 살아야 했다. 이 사건으로 '블랙파워'라는 흑인해방운동의 새로운 슬로건이 탄생했다.

 

 

 

생명의 키스

로코 모라비토 / 잭슨빌 저널 (1968)

 

1967년 7월 17일의 플로리다는 전형적인 여름 날씨였다. 

모라비토는 전신주 꼭대기에서 기술자들이 수리를 하고 있는 광경을 보면서 사진이 나올 만한 장면을 찾고있던차

작업을 하던 팸피언은 잘못해서 활선을 건드렸다. 그러자 2,100볼트의 강한 전기가 몸에 흘러 기절한 채 전신주에

거꾸로 매달렸다. 이 광경을 목격한 톰슨과 동료들은 촌각을 다투는 사태라는 것을 알고 챔피언의 몸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었다. 다행히 톤슨은 목숨을 건졌다. 1면에 크게 인쇄된 이 사진은 당시 독자들이 흔히 보던 베트남 전쟁이나

공민권 운동, 거리의 시위 장면과 크게 대조를 이루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구하는

희망적인 장면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고요한 비, 고요한 시간

사카이 도시오 / UPI (1968)

 

격렬한 교전 중 정적이 감도는 이면을 섬세한 통찰력으로 촬영한 이 사진들은

퓰리처상 특집사진 부문을 수상했다.

 

 

 

사이공식 처형

에디 애덤스 / AP (1969)

 

1968년 베트남의 음력설인 텟 전날 밤, 베트콩이 대규모 강력한 기습공세를 벌였고 베트남 전역에서 전투 수준이

급격하게 과격해졌다. 공격대원들은 도시로 잠입했는데 심지어 사이공에 있는 미국 대사관의 벽을 폭파시키고

마당까지 들어갔다가 해병대원들과 헌병들에게 목숨을 잃기도 했다.

애덤스는 거리 끝의 어떤 문에서 두 명ㄷ의 군인이 포로 한 명을 끌어내는 것을 보았다. 군인들은 베트콩 침투요원

으로 보이는 남자를 밀치고 잡아당겼다. 나는 한 사람이 내 카메라의 파인더 왼쪽으로 들어온 것을 봤다.

그 사람은 권총집에서 총을 꺼내더니 위로 들어올린 다음 관자놀이에 발사했다.

이 사진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론은 뒷날 준장으로 승진했지만 이 사진은 평생 그를 괴롭혔다.

 

 

 

품위

모네타 슬리트 / 에보니 (1969)

 

1968년은 나쁜 일들이 이어진 해였고 사진기자들은 비극적 사건들을 기록했다. 베트남에서는 구정공세가 일어났다.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됐고, 시카고의 정치집회에서 학생들이 시위를 일으켰다. 러시아는 체코에서 일어난 혁명을

진압했다. 그리고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멤피스의 한 모텔 발코니에서 보좌관과 함께 서 있다가 저격당해

사망했다. 테네시주의 저임금 근로자들의 시위를 지지하러 온 비폭력주의자가 총에 맞아 쓰러진 것이다.

킹의 장례식은 애틀랜타의 에벤에셀 침례교회에서 열렸다. 고인이 목사로 있던 교회였다. 장례는 간소하게

치르기로 했다. 조객은 당연히 일반 신도들이었지만 휴버트 험프리, 로버트 케네디, 재클린 케네디도 참석했다.

대법원 판사, 상원의원, UN 관료도 왔고  애틀란타에서 온 수천명의 일반인도 있었다.

슬리티가 교회 안에 자리를 잡았을 때 검정색 옷을 입은 코레타 스콧 킹이 눈에 들어왔다. 네 자녀 중 한 명

인 버니스가 코레타 옆에 앉아 있었다. 슬리티는 잡지사의 기자였지만 그의 사진이 널리 배포되고 많은

신문에 실려 퓰리처상 수상 자격을 얻었다. 그리고 그는 흑인 최초의 퓰리처상 수상자였다.

 

 

 

- 연작 사진 -

캠퍼스에 등장한 총기

스티브 스타 / AP (1970)

 

1960년대 후반 전국 대학의 학생운동가들은 기성세대에게 자신들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학내시위, 연좌농성,

폭동, 사무실 점거 등의 전술을 채택했다. 학생들의 주장은 참전이 잦고 인종주의가 팽배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이

넘치고 학계와 정게의 유착이 심하단은 것이었다. 많은 미국인들은 고충과 분쟁이 끊이지 않는 것처럼 느꼈다.

 

 

 

계절 노동자들의 물결

댈러스 키니 / 웨스트 팜 비치 포스트

 

계절 노동자들은 매년 1월 남부에서 일을 시작해 작물이 무르익는 시기에 맞춰 북쪽으로 옮겨간다.

고된 노동으로 그들은 미국인들에게 풍성한 저녁식탁을 제공한다.

 

 

 

 

 

 

 

 

켐퍼스에서의 죽음

존 필로 / 프리랜서 사진기자 (1971)

 

1970년 5월 4일 오하이오주의 켄트주립대학교에서 일어났던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애당초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말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그날 일어난 사건들과 이를 기록한 한 장의 사진은 나라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

4월 30일, 닉슨 대통령이 미군을 공격한 무리들의 성역을 소탕하기 위해 캄보디아를 침공할 것이라고 선언

하자 격렬한 학생 시위가 일어났다. 학기가 끝나기 전에 75개의 대학이 폐쇄됐다.

 

 

 

창고에 사는 사람들

잭 다이킹거 / 시카고 선타임즈

 

뉴스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를 기록한 사진에 수여하는 퓰리처상의 초기 수상작이다.

시카고 근방의 정신지체 장애인들을 위한 링컨공립학교와 딕슨공립학교에서 찍은 사진들은 예술적인 동시에

섬뜩함을 지니고 있어 시카고 시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다. 중요한 점은 이 사진으로 기금이 늘어나고

입법자들이 정신지체 장애인들의 처함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는 점이다.

 

 

 

경마장에서의 복수

호르스트 파스, 미셀 로랑 / AP (1972)

 

1971년 12월 17일, 서파키스탄이 인도 군대와 지역 게릴라군의 연합군에게 항복했고 새로운 국가인

방글라데시의 수립이 보장됐다. 하지만 방글라데시에는 무자비한 살육의 상처가 남았다.

12월 18일, 디카 경마장에서 새로운 국가의 시작을 알리는 집회가 열리기로 돼 있었다. 정치지도자 중

한 명이 연단에서 내려와 총검이 꽂인 무기를 집어 들었다.

 

 

 

전쟁의 상흔

데이비드 홈 케널리 / UPI (1972)

 

UPI는 케널리의 베트남전 사진 모음을 퓰리처상 경선에 출품했지만 그중 한 장의 사진이 퓰리처상 위원회의 특별한

관심을 끌었다. 당시 정부는 물론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던 문제를 강렬하게 형상화한 사진이었기

때문이다. 베트남의 포좌에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한 미군 병사의 모습이 담겨 있다. 폭탄과 총격에 박살나고 초록색

잎이 다 떨어져 나간 나무들 사이에 조용히 서 있었다. 뒤쪽으론 전투의 화염이 떠돌았다. 전쟁의 상흔이 남은 풍경

과 군인의 자세는 1971년 마ㄹ이 사람들이 베트남을 다룬 기사를 받아들이는 인식 바로 그대로를 포착했다.

 

 

 

네이팜탄을 맞은 트랑방의 소녀

닉 우트 / AP (1973)

 

남베트남군의 비행중대가 나타나 베트콩의 진지 쪽으로 급강하했고 우트는 폭격기가 치명적인 네이팜탄을

떨어뜨리는 광경을 찍었다. 하지만 착오가 있었는지 불덩어리가 우군과 민간인들 위로 떨어졌다. 훗날 우트는

"뜨거웠다. 매우 가깝게 뜨거운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정말 가까웠다" 라고 회상했다. 마을에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와 고속도로를 달렸다. 그 중에는 불이 붙은 옷을 황급하게 벗어 던져 벌거벗은 어린

여자 아이도 있었다. 아이는 뜨거워! 뜨거워!라고 베트남어로 울부짖었다. 아이의 등은 네이팜탄에 화상을

입어서 우트가 물통의 물을 부어줬다. 우트는 아이를 사이공의 병원에 데려다주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이 사진은 벌거벗은 아이를 둘러싸고 약간의 논쟁이 있었으나 뉴스로서의 가치가 인정되어 전 세계로

전송됐고 전쟁의 참상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아이콘이 됐다.

 

 

 

탄생

브라이언 랭커 / 토피카 캐피털저널

 

출산은 모든 이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일 중 하나이지만 1972년 이전에는 신문에 실린 사진으로 촬영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랭커의 친구 린다와 제리 코번 부부는 라마즈법으로 아이를 출산하기로 했다. 라마즈법은 당시

새롭게 소개된 분만법이었다. 부부가 재키 린 코번이라고 이름을 붙인 여자아이가 태어났을 때 랭커는 사진을

찍었다. 사진이 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신문에 이 사진이 실린 것은 출산 그 자체만큼이나

놀라운 개가였다. 출산하는 동안 남편이 아내와 함께 있는 일이 흔해졌고 그 뒤 수년간 다른 사진기자들이

랭커의 취재를 따라했다.

 

 

 

할리우드 - 너무나 사실적인

앤서니 로버츠 / AP (1974)

 

무대는 할리우드의 한 할인점 외부 주차장이었다. 스물두 살의 젊은 여성 엘런 셀던이 주차장을 걷다가 생판

모르는 사람인 에드 피셔에게 갑자기 붙들렸다. 피셔는 셀던을 바닥에 내동댕이친 뒤 몸 위에 올라타고 목을

움켜 쥐었다. 보안요원 조지 더비가 셀던의 비명을 듣고 현장으로 왔다. 더비는 피셔에게 당장 셀든을 풀어

주라고 말했지만 피셔는 칼을 꺼내 여자를 위협했다. 더비는 자동소총을 꺼내 차 뒤에서 피셔의 머리에 겨냥

하면서 여자를 놓아주라고 재차 요구했다. 피셔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비는 권총을 발사했다.

 

 

 

영웅의 귀환

샐 비더 / AP (1974)

 

로버트 스톰 중령은 북베트남에서 격추당한 미 공군 조종사였다. 포로수용소에서 5년여를 보낸 뒤 풀려났다.

1973년 3월 17일, 트래비스의 활주로에서 그의 가족과 만나는 모습이다. 사진에 담긴 기쁨이 영원했으면 좋으련만,

오래 떨어져 있었던 데다 포로 생활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스텀 부부는 그해에 이혼했다.

 

 

 

화재의 끝

제럴드 게이 / 시애틀 타임스

 

게이는 폐허가 된 집과 시커멓게 탄 목재, 공중에 떠 있는 짙은 먹구름같은 자욱한 연기를 보았다.

이른 아침 햇살이 어슴푸레하고 흐릿한 안개 같은 장막을 드리웠다. 소방관들은 집을 구하는 데 실패했지만 게이는

불이 난 후 꼬박 5시간 동안 일에 매달리는 그들의 에너지에 놀랐다. 소방관들은 마지막 불꽃의 흔적과 달아오른 목재

들을 깨끗하게 없애고 연기로 그을린 벽 몇 개를 무너뜨렸다. 그을음이 잔뜩 묻은 얼굴에 역력한 피로가 이른 아침 햇살에

드러났다. 이 장면에서 게이가 본 것은 지옥의 문에 대한 공격에서 실패한 소방관들의 함울함이었다.

불과 소방관은 퓰리처상 60년사에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한다. 수상작 중 여섯 작품이 화재 현장 혹은 목숨을 걸고

자신의 일과 싸우는 소방관들의 모습을 담았다.

 

 

 

보스턴의 화재로 무너진 발코니

스텐리 포먼 / 보스턴 헤럴드아메리칸

 

포먼은 외면했다가 다시 발코니를 올려다봤다. 세 사람이 모두 떨어졌을 것이라고 짐작했지만 소방관은

마지막 순간에 사다리를 붙잡아 매달려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열아홉 살의 여성 다이엔 브라이언트는

떨어져서 목숨을 잃었다. 조카인 아이는 다이앤의 몸 위에 떨어졌다. 그래서 충격이 완화돼 심각하게

다치지 않아 회복됐다. 이 사진으로 많은 도시에서 발코니 검사가 엄격하게 이루어져 결국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상기시켰다.

 

 

 

강제버스통학

《루이스빌 쿠리어저널》의 사진기자들

 

연방법원이 명령한 강제버스통학 조치

(버스를 이용해 흑인 학생들을 백인 학교로, 백인 학생들을 흑인 학교로 통학시켜 보스턴 내

공립학교의 흑백 학생 비율의 균형을 맞추려던 시도)가 실제로 시행될 것인지 여부가 아니라

신문사의 기자들이 그 사건을 어떻게 취재할지였다. 그 중 대표적인 사진이으로 만약 이 조치가 없었다면

비어 있었을 교실에서 한 흑인 어린이와 백인 어린이가 악수를 하는 상징적 장면이다.

 

 

 

방콕의 잔인한 정치

닐 올레비치 / AP (1977)

 

1976년 10월 6일, 닐 올레비치는 우익 학생들과 좌익 학생들 간의 충돌을 취재하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뒤 타이 정부는 좌익 쪽으로 흘렀고 이를 우려한 보수파들이 쿠테타를 계획할 정도에 이르렀다.

전 독재자인 타놈 키티카촌이 방문차 타이로 돌아오자 격분한 좌익은 그의 추방을 요구했다. 무장한 지지자들의

도움으로 우익 학생들이 좌익 학생들을 공격해 탐마삿대학교의 캠퍼스가 피바다가 됐고 충돌이 끝나기도 전에

사망자가 수십 명, 부상자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

 

 

 

군중 속의 얼굴

로빈 후드 / 뉴스 프리 프레스

 

베트남 전쟁은 과거가 되었지만 전쟁의 기억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때는 1976년이고 전쟁이 끝난 지 겨우 1년밖에 되지 않았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미 대사관 옥상에서 허둥지둥 이륙하던 헬리콥터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후드는 행렬이 지나가는 길에서 한 베트남 피난민 가족이 행진을 지켜보며 새로운 고국의 국기를 흔들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러다가 후드는 군용 망토와 군용 셔츠를 입고 있는 한 남자를 보았다. 아시아의 전쟁에서

다리를 잃어 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의 무릎 사리에는 아이가 포근하게 안겨 있었다. 그 남자는 베트남인들이

성조기를 흔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새로운 땅에 온 베트남인 가족과, 그들을 위해 싸웠지만 평생 부상을 안고

살아갈 전사가 함께한 완벽한 공동체였다. 남자의 이름은 에디 로빈슨이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시간

존 블레어 / UPI의 프리랜서 사진기자 (1978)

 

 

로디지아의 오지

J. 로스 보먼 / AP (1978)

 

1977년 로디지아군의 용병 대부분은 전투에 단련된 거친 미국인들이었다. 이들을 베트남의 논과 고지에서

게릴라전을 익혔고 용병의 생활방식을 좋아했다. 그중 가장 거친 용병들이 세계 최후의 전투기병대라고 불리던

그레이스 스카우트였다. 로디지아 오지의 벽촌에서는 인구의 4퍼센트에 불과하지만 95퍼센트의 흑인들을

지배하는 백인들에게 분노하는 세력이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그레이스 스카우트의 기본 임무는 이 험학한

지역들에 트럭과 헬리콥터로 말을 공수하고 일단 현장에 도착하면 게릴라들을 찾아 수색섬멸 작전을 펼쳐

소탕하는 것이었다. 보먼은 불과 스물세 살에 퓰리처상을 받은 최연소 수상자이다.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참상

톰 켈리 / 머큐리

 

 

호메이니의  메세지

익명의 사진가 / UPI (1980)

 

1979년 아야툴라 호메니니 통치하의 이란은 논의의 여지가 없었다. 이란의 문화적 소수집단인 투르드인은 경제,

문화유산, 종교 문제를 논의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쿠르드인게게 호메이니는 시아파 이슬람교도들이 신의 대리인

이라고 생각하는 또 다른 독재자일 뿐이었다. 호메이니의 철학은 쿠르드인의 생활방식을 용납하지 않았다. 호메이니

의 혁명정부는 자신의 정책을 따르게 하기 위해 쿠루드스탄에 분대를 보내 '인종청소'에 돌입하게 된다.

 

 

 

목장 위의 고향

어윈 해글러 / 타임스헤럴드

 

20세기의 퓰리처상 수상작은 한 번만 제외하고 모두 특정 뉴스나 역사적 사건 또는 현재의 사회적 문제나 동향을

기록했다. 그 하나의 예외가 바로 어윈 해글러의 카메라가 찍은 사진이다. 해글러는 현대의 사진기법을 이용해

독자들을 사라져가는 그리운 옛 시절로 데려갔다. 해글러가 카메라에 담은 것은 미국의 고전적인 카우보이였다.

 

 

해글러는 흑백 촬영을 고집했다.

 

 

 

 

컬러 사진과 디지털 사진, 여성 사진기자 그리고 아프리카를 담은 수상작 들

해변에서의 처형

래리 프라이스 / 스타텔레그램

 

래리 프라이스가 아리베리아에 간 것은 선교사들을 촬영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구테타의 마지막 단계,

즉 정부가 주도하는 집단 처형 장면을 취재하게 됐다. 프라이스는 톨버트의 각료들이 기진맥진해 보였다고 했다.

어느 한 사람도 말을 하거나 반항하지 않은 채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조용히 기다렸다. 그 운명은 일제사격으로

찾아왔다. 기쁨에 넘친 군중들은 뒤얽힌 세체 주위의 모래 위에서 춤을 추었다.

 

 

1980년 4월 12일 이른 시간에 대통령의 정원으로 쳐들어가 톨버트 대통령을 암살했던

도 상사 역시 10년 후에 처형자의 총탄에 쓰러졌다.

 

 

 

 

The Pulitzer  Prize - Winning  Photographs  1942 - 2011

인용 : 핼 부엘 지음 / 박우정 옮김 《퓰리처상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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