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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위정척사의 지주 노사 기정진

 

위정척사기념탑(衛正斥邪紀念塔)

 

이 탑은 한말 위정척사정신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탑이다. 

이른바 병인양요(丙寅洋擾)라고 일컫는 사건이 일어나는 등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역사적 현실에서

정통사상의 옹호를 위해 뜻있는 선비들이 외친 위정척사사상은 나라와민족을 보전하려던 유림들의 애국정신이었다.

지금처럼 세계화가 이룩된 세상에서는 정(正)과 사(邪)를 구별할 수 없는 처지이지만, 당시 서양의 침략세력들이

동양을 침탈하던 상황에서는 호국의 정신으로 보면 서양세력은 사(邪)일 수 밖에 없었다.

한말 최초로 서양의 사특한 세력을 배척하고 민족의 정통논리를 보위해야 한다고 1866년[병인(丙寅)] 8월 16일

척사소(斥邪訴)를 올린 최초의   학자는 이곳 장성출신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선생이었다. 그 상소는 어떻게

해야 사를 물리치고 정통논리를 보존할 수 있는가를 밝힌 맨 처음의 상소였다. 이를 뒤이어 경기도의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선생도 같은 상소를 올리면서 호남과 경기도에서 위정척사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위정척사운동은 바로 한말의 의병운동의 정신적 토대가 되어 외세를 물리치고 자주독립을 지키자는 애국운동으로

승화되어 마지막 망해가던 나라에 민족혼을 살아나게 했던 애국 애족의 밑거름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역사의 가르침을 값지게 간직하기 위하여 우리는 맨 처음으로 위정척사정신을 상소로 외친 노사선생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노사선생 묘소 가까운 곳에 이 탑을 건립하여 탁월한 학자의 훌륭한 뜻을 기리고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는 역사교육장으로 가꾸려고 한다.

이 탑을 세우는 데에는 뜻있는 분들의 정성과 전남도 그리고 장성군의 큰 성원이 있었다.

2006년  12월   일

 

위정척사기념탑 건립추진위원회

 

 

 

 

 

 

 

 

 

 

 

 

 

 

 

 

 

 

 

 

 

 

 

 

노사 기정진 선생 묘역

 

 

 

 

 

 

1892년 조성가가 행장을, 1901년에는 최익현(崔益鉉)이 신도비문을, 1906년에는 정재규가 묘갈명을 지었다.

1927년 고산서원(高山書院)이 건립되어 그 사우에 조성가 등 문인 6인과 함께 봉안되었고,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1960년 『노사연원록(蘆沙淵源錄)』, 1968년 『고산서원지(高山書院誌)』가 간행되었으며,

1978년 고산서원 장판각(藏板閣)이 준공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기정진奇正鎭

 

본관은 행주(幸州). 초명은 기금사(奇金賜),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蘆沙). 판중추부사 기건(奇虔)의

후손이고, 아버지는 기재우(奇在祐)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로 권덕언(權德彦)의 딸이다.

 

1815년(순조 15) 양친을 여의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장성 하남(河南)으로 이사하였다. 1828년 향시에 응시하고,

1831년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후 명성이 조정에 알려져 1832년 강릉참봉(康陵參奉)이 주어졌고,

1835년(현종 1)에는 다시 현릉참봉(顯陵參奉)이 주어졌으며, 1837년에는 유일(遺逸: 학식과 덕망이 높아 과거를

거치지 않고 높은 관직에 임명될 수 있는 학자)로 천거되어 사옹원주부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의를 표하였다.

1842년 전설사별제(典設司別提)로 임명되었으나 취임 6일 만에 병을 핑계 삼아 사임하고 귀향하였다.

얼마 뒤 평안도도사, 1857년 무장현감, 1861년 사헌부장령, 1864년 사헌부집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1862년(철종 13) 임술민란이 일어나자, 「임술의책(壬戌擬策)」을 써서 삼정(三政)의 폐단을 지적하고 이를 바로잡을

방책을 제시하려 하였으나, 소장의 말미에 이름을 쓰고 과거시험의 답안지처럼 봉하라는 조정의 지시로 인해

상소할 것을 포기하였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서양세력의 침략을 염려하여 그 해 7월 「육조소(六條疏)」라 불리는 첫 번째

「병인소(丙寅疏)」를 올렸다. 그 내용은 외침에 대한 방비책으로 여섯 가지를 제시하고, 민족 주체성의 확립을 주장한

것으로 당시의 쇄국정책과 보조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후에 나타나는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사상은

이 소장에 이론적 기초를 두고 있다.

 

이 소장이 고종에게 받아들여지고, 조정에서 그의 식견이 높이 평가되어 그 해 6월 사헌부집의, 7월에는 동부승지,

8월에는 호조참의, 10월에는 가선대부의 품계와 함께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그는 동지돈녕부사에 임명되자 이를 사양하는 두 번째 「병인소」를 올렸다. 여기에서는 당시의 국가적 폐습을 준엄하게

비판하고, 지도층인 사대부에게 청렴결백한 기풍이 없음을 우려해 삼무사(三無私: 공자가 사심이 없는 세 가지에 대해

말한 것으로 하늘, 땅, 해와 달처럼 사심 없이 천하를 위해 봉사하는 일. 곧 지극히 공평한 것을 지칭함)를

권장하도록 강조하였다.

 

이어서 공조참판·경연특진관(經筵特進官)에 위촉되었으나 사양하였고, 1877년 우로전(優老典:

나이 많은 사람에게 대우하여 내리는 벼슬)으로 가의대부(嘉義大夫)가 주어졌다.

그 해에 장성 하리 월송( 月松: 지금의 진원면 고산리)으로 이사하였으며,

이듬 해 그곳에 담대헌(澹對軒)이라는 정사를 짓고 많은 문인과 함께 거처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학문세계와 저서

그의 학문은 스승으로부터 직접 전수받거나 어느 학파에 연원을 둔 것이 아니라, 송대의 학자 주돈이(周敦頤)·

장재(張載)·정호(程顥)·정이(程頤)·주희(朱熹) 등의 성리학에 대한 독자적인 궁리와 사색에 의해 완성되었다.

이를 통해 이황(李滉)·이이(李珥) 이후 약 300년간 계속된 주리(主理)·주기(主氣)의 논쟁을 극복하고,

이일분수(理一分殊)의 이론에 의한 독창적인 이(理)의 철학체계를 수립하였다.

 

그의 철학사상은 우주의 구성에서부터 인간의 본질에 대한 해명, 사단칠정과 인심도심(人心道心) 등 심성의 문제,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의 문제, 선악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이일분수(理一分殊)라는 이체이용(理體理用)의

논리로 일관되어 있다. 그리하여 그는 우주현상을 이와 기로 설명하던 이기이원관(理氣二元觀)을 극복하고,

인간심성 내지 도덕의 문제를 가치상 우위에 있는 이의 작용으로 해명하고자 했다.

또한 인물성동이의 문제 역시 이의 완전·불완전으로 설명하여 종래의 주리 또는

주기의 심성론과 인물성동이론을 종합하였다.

 

그는 저술은 많지 않지만 성리학사상 중요한 저술들을 남겼다.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나오는

‘정(定)’자에 대한 해설인 「정자설(定字說)」,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논한 『우기(偶記)』(1845), 이기(理氣) 및 이이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에 대해 평론한 「이통설(理通說)」(1852), 그의 철학에서 핵심이 되는 「납량사의(納凉私議)」

(1874, 초고는 1843년에 작성)와 「외필(猥筆)」(1878) 등이 대표적인 저술이다. 그의 철학사상은 제자들과의

문답을 기록한 『답문유편(答問類編)』에도 잘 드러나 있다.

 

그의 학문과 사상은 손자인 우만(宇萬)과 김녹휴(金錄休)·조성가(趙性家)·정재규(鄭載圭)·이희석(李僖錫)·

이최선(李最善)·기삼연(奇參衍) 등의 제자에게 전수되었으며, 많은 학자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저서로는 1882년 『노사집』, 1890년 『답문유편』이 편집되어, 담대헌에서 활자본으로 간행되었고, 1902년

경상남도 단성(지금의 산청군 단성면 강누리) 신안정사(新安精舍)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되었으며,

1976년 서울에서 영인본으로 출간되었다.

 

 

 

 

 

 

 

문집 28권, 답문유편(答問類編) 15권, 부록 2권. 목판본. 1882(고종 19) 제자들이 문집 22권을 편집하고,

1890년 ≪답문유편≫ 15권을 완성하여 활자본으로 간행했고, 그 뒤 1902년 목판본으로 중간되었다.

이 중간본은 초간본의 체재와 거의 같으며, ≪답문유편≫에 정의림(鄭義林)의 발문이 있다.

 

이 문집은 시문 등 문예 위주로 편집된 대개의 문집류와 달리 경학(經學) 내지 성명(性命)·이기(理氣)에

관한 철학사상으로 채워져 있는 점이 특징이다.

내용은 문집 권1·2는 시, 권3은 소·사장(辭狀)·책(策), 권4∼15는 서(書), 권16은 잡저, 권17∼20은 서(序),

권21∼23은 기, 권24는 발, 권25는 잠(箴)·축문·제문, 권26은 비(碑)·묘지명, 권27은 묘표, 권28은

전(傳)·행장·유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답문유편≫ 권1∼3은 논도체(論道體)로, 권1 총론, 권2 성명, 권3 심성정(心性情)·형기신리(形氣神理)·

귀신명수(鬼神命數), 권4·5는 논학(論學)으로, 권4 총론·지수(持守), 권5 지행(知行)·출처(出處),

권6∼9는 논경(論經)으로, 권6 소학·대학, 권7 논어, 권8 맹자·중용, 권9 시·서·역·춘추·예기,

권10·11은 논선유서(論先儒書)로, 주자(周子)·정자(程子)·장자(張子)·주자(朱子) 및 제유(諸儒),

권12∼14는 논례(論禮)로, 통례(通禮)·관례(冠禮)·혼례·상례(喪禮)·제례·방례(邦禮),

권15는 논사(論史)·훈문인(訓門人)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집 28권 중에서 12권을 차지하고 있는 서(書)의 대부분은 그가 문인들과 주고받은 성리학적 질의에 관한 것이다.

문집 중의 서·잡저와 ≪답문유편≫은 그의 철학사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하다.

특히 잡저 중의 <납량사의 納凉私議>와 <외필 猥筆>은 그의 ‘이(理)’에 대한 철학사상의 핵심을 담고 있다.

잡저 속의 논의에서 그는 우주만물의 생성변화를 이와 기로 설명하는 이기철학의 이기이원관을 극복하고

유리론적(唯理論的)인 ‘이일분수(理一分殊)’의 논리체계를 정립해 자신의 이의 철학의 기틀을 세우고 있다.

 

<외필>에서는 이를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을 생성, 변화하게 하는 근원적 실재라고 보았다.

또한 <납량사의>에서는 태극(太極) 일리(一理)의 현현(顯現)인 현상계에 대한 설명에서

이기철학에서와 같이 기의 동정운행에 의해 현상계의 차별이 생긴다고 보는 관점을 거부하고,

기의 발동과 운행은 오직 이의 명령이나 시킴에 의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양(陽)이 동(動)하고 음(陰)이 정(靜)하는 것은 한결같이 천명(天命)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며,

동하고 정하는 것이 기라면, 동하게 하고 정하게 하는 것은 이라고 하였다.

<외필>에서도 기는 이에 순종해 발동하는 것이니 기의 발동은 곧 이의 발동이며, 기는 이의 명령에 따라

실행하는 것이니 기의 실행은 곧 이의 실행이라고 주장하였다.

 

잡저의 <정자설 定字說>은 <태극도설> 중의 ‘정(定)’자에 대한 해석이며, <우기 偶記>는 사단칠정

(四端七情)을 논한 것이고, <이통설 理通說>은 이기 및 이이(李珥)의 이통기국(理通氣局)에 관한 논의이다.

그의 이존무대(理尊無對)의 이기관은 “이는 시키는 자(命物者)요, 기는 시킴을 받는 자(被命者)이므로, 그 지위가

평등할 수 없다.”고 본 이황(李滉)의 입장과 일면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황이 이를 기의 우위에 두면서도

그 기능면에서는 이도 발동하고 기도 발동한다는 이른바 ‘이기호발(理氣互發)’을 주장한 데 비해, 그는 기의 발동은

오직 이가 유행하는 손발이나 이 속의 일이라고 봄으로써 기의 독립적인 기능을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이기호발’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이황의 ‘이발(理發)’을 옹호한 반면, 이이의

‘기발(氣發)’을 비판하였던 것이다.

 

그의 이함만수(理涵萬殊)의 심성론(心性論)도 이일분수의 논리와 이존무대의 이기관에 근거한 우주구성의 원리에

입각하고 있다. 장재(張載) 이래 정자·주자·이황·이이와 같은 이기철학자들은 마음은 이 그대로의 성과 이와 기의

합동으로 일어나는 정을 통합한다(心統性情)고 보았으며, 인성(人性)을 본연의 성과 기질의 성으로 양분해

본연의 성은 순수한 이 그대로의 성이요, 기질의 성은 기의 맑고 흐리고 순수하고 잡다함에 따라서

달라지는 성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그는 이기이원관에 의하여 본연의 성과 기질의 성을 구분하는 것을 반대하고, 양자를 이의 일(一)과

분수(分殊)의 관계로 이해해 이의 유행인 기질의 성 속에서 본연의 성을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본연의 성과 기질의 성의 관계를 본원(本源)의 일리(一理)와 분수의 만리(萬理)의 관계로 보고,

이의 분수인 기질의 성 속에서 이의 일(一)로서의 본연의 성을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또 순선(純善)한 정(情)인 사단과 선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는 칠정을 모두 이 속의 일로 보고,

사단을 ‘이발’, 칠정을 ‘기발’이라고 보는 이기호발설을 반대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은 그 묘맥(苗脈)을 달리하기는 하지만

모두 이의 유행을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인심을 ‘기발’, 도심을 ‘이발’이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호락논쟁(湖洛論爭)의 중심과제가 된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와 심체선악(心體善惡)의 문제에 대해서도

자신의 이일분수(理一分殊)의 논리에 의해 이해하였다.

호락논쟁은 권상하(權尙夏) 문하의 한원진(韓元震)과 이간(李柬) 사이의 왕복토론에서 발단된 것이다.

한원진의 설을 지지하는 호론(湖論)에서는 인성과 물성은 다르며 아직 발동하지 않은 심체(心體)에 선악이 있다고

주장하는 데 반해, 이간을 지지하는 낙론(洛論)에서는 인성과 물성은 같으며 아직 발동하지 않은

심체는 선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호락논자들의 인물성동이에 대해, 만물은 그 근원을 같이하므로 이의 본연에서 보면 인성과 물성의

차이가 없지만, 각 개체에 주어진 분수의 이에는 편전(偏全)의 차이가 없을 수 없다고 하여 그 논쟁을 매듭지었다.

그의 학문은 스승으로부터 전수받거나 영남학파니 기호학파니 하는 연원을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주(周)·장(張)·정(程)·주(朱) 4자의 서(書)를 읽고 독자적인 궁리와 사색에 의해 완성된 것으로서

이 문집 속에 체계화되어 있다.

 

해설 : 다음 백과

 

 

 

 

노사 선생 묘역 아랫쪽으로 후손들의 묘소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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