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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동학 천도의 세계

대전 골령골 한국전쟁 민간희생자 추모제

골령골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 사건 '충격적인 기록'

 


대전광역시 동구 산내에는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집단학살지로 알려진 곳이 있다.

뼈와 영혼이 산처럼 쌓여 골령골이라 이름 붙은 곳. 전쟁의 참상과 비극을 끌어안고 있는 골령골에는

총 8개 학살지가 있다.길이 30m에서 180m에 이르는 구덩이 여러 곳에서 최대 7천명이 희생된 것으로

파악된다. 각각의 구덩이를 연결한 길이가 무려 1km에 달해, 골령골은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 되었다.





죽음의 블랙박스, 기밀 해제 문건과 18장의 사진

골령골 민간인 학살사건이 세상에 본격적으로 드러난 것은 1999년 미국의 기밀 문건이 해제되면서다.

1950년 9월, 미군 중령 에드워드는 ‘한국의 정치범 처형’이라는 제목의 보고서와 18장의 사진을

본국으로 전송했다. 미군이 촬영한 사진에는 골령골에서 사람들이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총살,

구덩이에 파묻힌 모습이 낱낱이 기록돼 있었다. 또한 에드워드 중령의 보고서는 이 처형이 한국

최상부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기록해 충격을 던졌다.


그해 여름의 비밀, 무덤의 주인은 누구인가



7월 1일 새벽, 대전형무소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오늘 새벽 미명을 기해서 대규모 적의 공습이 예상...좌익 극렬분자를 처단하라”

당시 대전형무소에는 전국에서 모인 정치범들이 대거 수감돼 있었다. 제주 4.3사건, 여순사건 관련자들이

대표적이다. 전쟁이 발발하자,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은 아군의 위협이자 처단 대상으로 분류됐다.

좌익으로 분류된 재소자들은 대한민국 헌병에 의해 골령골 숲속으로 끌려갔다. 형기를 거의 마친

이들까지도 헌병의 총구에 희생, 구덩이에 묻히고 말았다.



골령골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대전형무소 재소자들만은 아니었다. 사전 구금된 국민보도연맹원들도

골령골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좌익 전향자들로 구성된 반공단체다.

하지만 정부는 보도연맹원들이 북한군에 가세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내세우며 체포를 명령하고, 정

당한 재판과정 없이 골령골에서 처형했다.



골령골에서의 죽음의 행렬은 그해 여름 약 한 달 동안 계속됐다.

남겨진 자들, 치유되지 못한 아픔

골령골 사건이 발생한 지 71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오랫동안 골령골 사건은 터부시됐고,

유가족들조차 숨죽이며 상처를 쉬이 드러내지 못했다.

좌익의 집안이라는 세상의 오해와 차별이 원인이었다.



골령골에서 큰 오빠를 잃은 열네 살 소녀 신순란은 어느덧 여든다섯 살의 노인이 되었다.

그녀는 수십 년 동안 오빠의 일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채 가슴 속에 응어리진 한을 품고 살아야 했다.

71년 전 골령골에서 상부 명령으로 방아쇠를 당겨야 했던 젊은 교도관은 평생을 죄책감과 트라우마

속에서 보내야 했다. 이 잔혹한 비극의 책임은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푸른 눈의 안내자, 데이비드 밀러

대전광역시 동구청에서 국제특보로 일하고 있는 영국인 ‘데이비드 밀러’는 골령골 사건을 세상에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푸른 눈의 이방인이 머나먼 한국 땅에서 벌어진 비극을 주목하고 연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밀러의 눈에 비친 골령골 사건은 이념이 아닌 인권과 인간성의 문제다.

밀러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골령골 사건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만나게 된다.

 


출처 : 미디어리퍼블릭

 

 

 

 

 

 

 

골령골의 비극에 대한 이해

 

 

 

십자가를 배경으로 쌓여있는 유해 발굴 상자

 

 

 

강사 : 오마이뉴스 심규상 기자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까지 3차례에 걸쳐 국민보도연맹원과

대전형무소 수감 정치범을 대상으로 최소 4000여 명, 최대 7000여 명의 대량 학살이 벌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해자들은 충남지구 CIC(방첩대), 제2사단 헌병대, 대전지역 경찰 등으로 민간인들은 북한군 남하 시 동조할 것을

우려해 법적 절차 없이 집단 살해됐다. 당시 미군은 학살 현장을 참관해 학살을 지원

또는 묵인, 방조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약 1킬로미터에 이르는 발굴 현장

 

 

 

안타까움을 넘어 그저 통탄의 긴 한숨만이...

 

 

 

 

 

 

 

 

 

 

 

추모제 진행

 

 

 

'동학실천시민행동' 백선기 상임대표께서 부복을...

 

 

 

제향

 

 

 

 

 

골령골에 집결한 '동학실천시민행동'의 추모제

 

경향 각지에서 모인 '동학실천시민행동' 회원 일행들이 한국전쟁 전후 남한 내 단일지역

최대 민간인 집단희생지로 알려진 대전 산내골령골을 찾아

그들의 혼을 위로하고 추모제를 올렸다. 

 

 

 

김홍수 작가의 희생자 추모 헌시 낭독

 

 

 

 

 

때는 바야흐로 1950년, 경인년 호랑이해였어. 왜놈들 물러간 해방 뒤 우리는 남과 북으로 갈라져

맨날 서로 못 잡아먹어 그렇게 안달복달을 하더니만 결국은 3.8선이 무너져 6.25 인공난리가 났소.

이른바 남북전쟁, 즉 한국전쟁이 시작이었지. '전쟁 나면 즉각 처 올라가 개성 가서 점심 먹고 저녁은 평양 가서 먹자'고

그렇게 큰소릴 치던 리승만 박사가 사흘 만에 서울을 뺏기고 남몰래 한강다리를 건너 여기 대전으로 피난 온 후

리 박사는 뒤통수가 몹시 간지러워지고 뒤가 몹시 급해 가는 곳마다 적극적으로 한데 짜고 뭉쳐서 오히려 달려들까 봐

미리 요시찰을 강화하고 좌익 불순분자를 처단하라는 명령을 내리자마자 바로 여기 골령골은

슬픔의 골짜기, 눈물의 골짜기가 되었다네.

- 제발 그만 혀. 나 무서워. 이러다 다 죽어!
오징어게임 아니, 헌병대와 미군의 합작으로 이 살인 게임은 바로 그렇게 시작되었대요, 글쎄.
전국에서 예비검속으로다가 이른바 보도연맹 사건으로 또 그렇게 대전형무소서 감방 살던 이들이

한 해 동안 대여섯 차례에 걸쳐 6000여 명이나 죽여 여기 묻혔대요, 글쎄.

좁은 구덩이에 사람들을 몰아넣고 5열 종대로 무릎을 꿇려 앉힌 다음 옆 사람과 어깨동무를 한 상태에서

이마를 땅바닥까지 숙이게 한 다음 드르륵 빠방빵 총을 갈겼대요, 글쎄.

그 길로 사람들은 영영 돌아올 수 없는 저승길로 갔대요.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 하네요.

영문도 모르고 여기 골령골로 끌려와 수많은 사람이 죽은 뒤부터 사람들이 죽는 거를 '골로 간다'라구 했대요. 글쎄.

까닭은 글쎄. 왼쪽이라구 또 빨갱이라고 때론 손가락 총으로 지목당해서 가만히 귀 기울이면

지금도 억울한 백성들의 한 맺힌 목소리가 들려와요.

- 지발 살려줘유. 난 왼쪽두 빨갱이두 아녀유. 보도연맹? 난 그런 거 몰라유. 옆집 사는 마을 이장이 가입허믄

고무신두 주고 비료두 준다 해서 도장 한 번 찍은 거빢에 무슨 죄가 있대유?

- 안녕하우꽈? 지들은 제주서 와씸. 겐디 이른바 4.3 빨갱이랍서. 울 하르방 뭐랜 햄신디 살다 보믄 심이 들어도

착하게 살다보믄 저승길가멍도 나 호구시픈 모냥으로 갈 수 있다구 했는디 난 왜 이 모냥 이꼴마씸.

- 거시기 말여. 지들은 여수· 순천이 고향이랑께. 쟈들을 어뜨케 해브까잉. 하나도 모름시로 무조건 제주도

한겨레 4.3빨갱이를 토벌하러 가라는 걸 안 가겠다고 여·순반란군이라구 하제. 마구 빨갱이 폭도라 하제.

이르케 몰려 죽은 게 넘 너무 억울하당께.

- 우짜노. 믄소리고? 우덜은 갱상도 머스마라예. 빨치산두 아니고 불순분자도 아니라예. 근

디 먼 친척이 독립운동했다고 거기다 오죽카면 친일파 싸고도는 리 박사도 나쁜 놈이라 캤더니

10년 더 꼽징역을 받아 서울 서대문형무소서 8년이나 징역 살다 즌쟁통에 뭐라카노 풀려나 좋다커니 하고

고향 가다 저기 대전역서 영문도 모르고 끌려왔다카니.



- 나 안 죽었어요. 총 맞아 반신불수로 평생 고생하느니 차라리 나 좀 한 방 더 쏴서 아예 죽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