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성/동학 천도의 세계

동학인 양한묵 선생

 

양한묵梁漢黙

지강, 芝江, 경조, 景朝, 길중, 吉仲

 

 

 

 

 

 

 

 

 

 

 

 

 

 

 

 

 

 

 

 

 

 

 

 

 

 

 

 

 

1862년 4월 29일 전남 해남군(海南郡) 옥천면(玉泉面) 영계리(永溪里)에서 아버지 상태(相泰)와 어머니 낭주(郞州)

 최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제주(濟州)이고, 자는 경조(景朝) 또는 길중(吉仲), 호는 지강(芝江)이다. 

10대조 이래로 능주(綾州)에서 해남으로 옮겨 세거한 향반이었다.

 

전통적인 유학을 공부하였고, 18세 이후에는 불교와 도교, 그리고 천주교와 음양술에 관한 서적도 널리 읽었다고 한다. 

20세에 결혼하여 나주 남평면(南平面) 송촌(松村)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전국의 명산과 사찰을 돌면서 우주의 근본과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고 당시 피폐한 현실사회에 대한 인식도 갖추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92년 관직에 나아가 1894년에는 탁지부(度支部) 주사에 임명되어 능주세무관으로 부임하였으며,

 1897년경 사직하였다. 그 뒤 베이징(北京) 등지를 유람하고 이듬해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국정과 

세계 대세를 살폈다고 한다. 1900년대 초 일본에서 이상헌(李祥憲)이라는 변성명으로 망명 중이던

동학교주 손병희(孫秉熙)를 만나 동학에 입교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직후, 손병희가 국내 정부대신에게 동학의 공인과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상서를 보냈으나 오히려 동학에 대한 탄압이 고조되자, 동학의 정치세력화를 도모하였다. 

이에 일본 체류의 동학지도부는 1904년 7 ・ 8월을 전후하여 국내의 동학세력을 진보회(進步會)라는

 이름으로 전국에서 조직하게 하고 이용구(李容九)를 책임자로 삼았다. 

이즈음 일본에 있던 손병희의 명으로 국내에 파견되어 진보회 관련문제를 처리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용구가 일본군의 비호를 받던 일진회와 제휴하자, 이에 반발한 그는 

그해 12월 일진회 타도를 목적으로 결성되었던 공진회에 참여하였다.  공진회가 해산된 뒤에는

반일진회적인 성격이 강한 헌정연구회(1905년 5월 조직)에도 평의원으로 참여하여

『헌정요의(憲政要義)』의 서문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1905년 8월경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손병희 등 일본체류 동학지도부와 교단문제를 협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해 12월 동학이 천도교로 개편됨과 동시에 손병희로부터 권동진, 오세창과 더불어 

천도교의 근대적 체계를 갖추기 위한 『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 작성을 지시받았다. 

그러나 이 일을 실제로 맡아 행한 사람은 바로 그였다.

 

1906년 1월 손병희를 비롯한 천도교 지도부는 귀국하여 천도교 중앙총부를 설치해 종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해 2월 집강(執綱)으로 우봉도(右奉道)와 현기사(玄機司) 진리과원(眞理課員)에 임명되었다. 

이어 1907년 4월에는 현기사장을, 1910년에는 진리관장 등의 직무를 보았다. 현기사장은 천도교 전반에

 대한 문제와 교리를 담당하는 총무기관의 책임자로 1910년까지 몇 개월을 제외하고는 그 일을 맡았다. 

뿐만 아니라 귀국 직후 손병희로부터 교서(敎書) 편찬 임무를 부여받고 10여종의 교리서를 편찬하였다.

 

이처럼 초기 천도교의 핵심 간부로 교단을 운영하면서 교리 정리와 체계화에 가장 뚜렷한 역할을 하였다. 

아울러 호남학회의 창립에 적극 관여하였고, 대한협회에도 참여하였다. 

천도교의 지도부는 정교 분리를 내세우고 1906년 8~9월 일진회와 결별하였으나, 

정치 ・ 사회문제에는 전직 고관 출신인 권동진, 오세창 등을 표면에 내세웠고, 

교회문제는 주로 그에게 맡기는 형태의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다.

 

 

 

 

 

 

 

 

 

 

 

 

 

 

 

 

 

 

 

 

 

 

양한묵 선생이 1919년 독립선언서 날인 당시 사용한 인장.

 

 

 

「양한묵 심문조서」(경성지방법원, 1909. 12. 29)

 

 

 

 

 

1909년 12월 22일 이재명(李在明)의 이완용(李完用) 처단미수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가 

불기소처분으로 석방되었다. 그가 체포될 때, 천도교에서는 그를 현기사장직에서 신설된 진리관장으로 

옮기게 하였다. 진리관은 천도교 중앙총부의 기구를 개편하면서 교리문제와 관련된 현기사 진리과를 폐지하고

신설하였던 것인데, 주로 담당한 사업은 진리 강해 ・ 교서 저술 ・ 역사 편찬 ・ 교리 설명 ・

윤리 제정 ・ 공첩 작성 등으로 주로 교리문제와 관련된 기구의 책임을 맡겼다.

 

석방 직후인 1910년 4월 손병희는 각지 교인들에게 49일 기도를 지시하고, 

양한묵 등과 과천 관악산 삼성암에서 수련기도회를 가졌다. 

그해 5월 손병희의 지시로 일시 향리로 돌아가 있었는데, 정양을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1911년 이후 도사로 있으며 두드러진 교회 활동을 하지는 않았으나,

 1912년 발간된 상당수의 교리서가 그의 저술로 알려져 있어 교리연구에 대한 위치는 여전하였던 듯하다. 

그러나 1910년대 초부터 이돈화(李敦化)와 같은 새로운 교학자들의 대두는 

그의 위치가 전과 같지 않았음을 시사해준다.

 

1917년 천도교 중앙총부 안에 교리연구부가 설치되어 도사를 비롯한 원로들이 교리연구를 하게 되자, 

여기에서 크게 활동하였다. 『천도교회월보』 1918년 4월호부터 연재된 『교리연구부』의 교리 논의에 

그가 주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일합병 이후 교회의 중심에서 멀어진 후, 

도사의 직임을 가지고 원로들과 함께 교리를 연구하고 한시를 짓는 것으로 소일하였다. 

『천도교회월보』에 발표한 한시만도 80편을 넘었다.

 

 

 

 

 

 

 

 

 

 

양한묵 선생 간찰

 

 

 

 

 

1919년 3 ・ 1운동 발발에 앞서 천도교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천도교측에서 서명한 인물은 15명이었는데, 그 대부분이 교회의 원로였다. 3 ・ 1운동으로 체포되어

 서대문감옥에 수감된 지 2개월 뒤인 1919년 5월 26일 향년 56세로 옥중 순국하였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유일한 옥사였다. 유해는 현재의 금호동인 수철리(水鐵里)의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가 1922년 5월 천도교측의 주선으로 화순군 도곡면 선영으로 이장되었다.

 

 

 

 

 

 

1920년 5월 22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던 상하이(上海)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의 참석 하에 상해거류민단 주최로

 양한묵 등 순국제열추도회가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서 천도교인 신숙(申肅)은 『고 양한묵선생의 역사』를 읽었다.

 

천도교의 기본사상으로 ‘인내천(人乃天)’을 처음으로 제기한 인물로서, 서양문물을 수용하여 종교의 발전을 사상의 

변화와 진화로 이해하는 동시에 기존의 보수적인 동학교도들을 의식하여 교리서에는 ‘유불선(儒彿仙) 합일’과 

‘성경신법(誠敬信法)’과 같이 전통 동학교리를 오히려 강조하여 윤리 ・ 도덕적인 실천덕목들을 

신앙의 방법으로 내세웠다.

 

또한 교리서들을 통하여 손병희 중심의 교권 확립에 진력하여 교주들의 호칭을

 대신사(大神師) ・ 신사(神師) ・ 성사(聖師)로 정착시켜 신비주의적인 권위로 천도교를 장악하는데 일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천도교 간부들

(뒷줄 왼쪽 양한묵 선생, 1904)

 

 

 

 

 

 

 

 

 

 

 

양한묵 선생에 대한 해설과 일부 사진은 '다음 백과' 를 참조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