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 선언
TheCommunist Manifesto ·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1848년
독일에서 출판되고 런던에서 인쇄된 《공산당 선언》의 초판본
남은 원고의 원본은 마르크스가 휘갈겨 쓴 단 한 페이지 뿐이다.
두 명의 젊은 독일 철학자가 쓴 1만 2천 자의 작은 책자가 역사와 정치 경제에 대해 전혀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그리고 훗날 세계를 휩쓸게 될 운동의 토대가 되었다.
"세계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지금까지 존재하는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다."
이렇게 시작하는 공산당 선언은 1847년에 두 사람의 독일 출신 지식인이자 투사인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쓴 짤막한 목적 진술서이며, 1848년 2월에 런던에서 '공산당 선언' 이라는
제목의 독일어로 처음 출간 직후 영국에서 곧바로 추방된 두 사람은 1848년의 불운한 혁명에
가담했고, 퀼른에서 신문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공산당 선언의 첫 영역본은 2년 후에 나왔고, 훨씬 더 많은 판본들이 향후 30년 동안 독일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영어로 등장했다. 마르크스가 <뉴욕 데일리 트리뷴> 해외 통신원
일을 끝내고 나서 10년이 지난 1872년에 미국에서 첫 출판본이 나왔다.
이 책은 20세기에 이르러서야 대규모 독자들에게 닿을 수 있었고,
지구 전역에서 수많은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켰다.
(열광적인 6주일 동안, 주로 마르크스가 작성한) 두 사람의 분석에 따르면,
지속적 계급투쟁이라는 본질은 주된 생산 양식의 본질에 따라 역사에서 전개된다.
그리하여 농경사회에서 계급 투쟁은 토지 소유주와 경작지에서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졌다.
마르크스와 엘겔스는 산업혁명 중에 제3계급(부르주아 계급)이 등장해 생산 수단을 소유한 반면,
프롤레타리아 계급(노동 계급)은 일할 능력 외에 아무것도 지니지 못했다.
그는 "오늘날 부르주아 계급만이 진정한 혁명 계급이다" 라고 썼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계급이 발전시킨 생산 양식에 '자본주의' 라는 이름을 붙였다.
말하자면 그것은 끊임없이 확장을 추구하는 이윤 추구 시스템이었으며, 그 시스템은
"생산의 꾸준한 혁명적 변화와 모든 사회적 조건들의 끊임없는 방해로" 끊임없이 확장을 추구했다.
《공산당 선언》은 그런 경제 체제가 결국 사회주의에 의해,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공산주의에 의해,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공산주의에 의해 대체될 것이라는 예언과 함께 자본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을
제공했다. "사유재산을 없애련즌 우리의 의도에 당신들은 겁을 먹는다" "그러나 당신들의 기존 사회에서
인구의 10분의 9에게는 사유재산이 이미 사라졌다. 사유재산이 소수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이 나머지 10분의 9의 수중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사유지의 폐지, 생산 수단의 국유화, 소득에 대한 무거운 누진세, 무상 공교육,
아동 노동 금지 같은 몇 가지 단기적인 요구 사항들을 열거했다. 이 원고의 원본은 발견된 것이 없으며,
마르크스가 휘갈겨 쓴 단 한 페이지가 모스크바 기록관에 유일하게 보관되어 있다.
최초의 지하철 시스템
First Underground Train System · 수송 역사상 가장 기발한 아이디어
1585~1863년
피어슨은 북부 메트로폴리탄 철도법을 입안했고, 이는 최초의 지하철 개통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피어슨은 생전에 자신의 기획이 완수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862년 9월 수종으로 세상을 떠났다.
1854년 법안의 원본은 런던의 의회기록관에 보존되어 있다.
킹스크로스 부근을 지나는 메트로폴리탄 지하 철로 건설을 보여주는 판화.
통찰력 있는 한 개혁자가 런던으로 들고나는 대중교통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후 사람들로 북적대는 도시 밑에 지하철도를 건설하려는 꾸준한 노력은 그가 죽기 몇 개월 전
비로소 실현되었다. 세계 최초의 지하철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1850년대 이르러 인구가 250만 명 이상이던 런던은 세계 최초의 거대도시로 발전했으며, 템스 강변의
옛 도심에서 멀리 교외로 뻗어나가며 강력한 제국의 중심이 되었다. 국제 교역의 자리로서 런던은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두시인 동시에 가장 충만한 도시였고, 그 도로는 매일 25만 명의 통근자들과 웅덩이와 먼지
가운데 하루 300만 톤 이상의 분변을 남기는 말들로 북적였다. 들고나는 교통은 악몽이었다.
런던 태생의 찰스 피어슨(1793~1862)은 사명감 투철한 중간 계급의 일원으로, 1816년에 공직에 입문했고,
평생 다양한 사회적 명분에 헌신했다. 산업혁명 이전 그 도시의 모습이 어땠는지를 회상할 만큼 충분히 나이가
들었을 때 그는 거리를 정화할 방법을 찾았다. 철도는 여전히 상대적으로 새로운 것이었다. 1845년 런던 시
법무관이던 피어슨은 미래를 위해 새로운 종류의 무연 철로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1854년에 그는 그 도시의 인구과밀은 점점 늘어나는 '이주민'들의 형편없는 교통 통제에서 비롯된 바가 크가고
주장하는 중요한 조사보고서를 작성했다. 1857년 8월 7일 북부 메트로폴리탄 철도법이 왕의 인가를 얻는데
도움을 주었을 뿐만이 아니라 피어슨은 도시의 금융 중심지에서 북서부로 향하는 메트로폴리탄 철도 건설을
위해 대략 100만 파운드로 추산되는 예산을 설계했다.
지하철도 건설에는 다양한 접근법이 적용되었다. 일부 구간에는 도시 아래를 지나는 터널이 포함되었고, 다른
구간은 기존 구조물들을 제거하고 철로의 기반을 위해 깊은 구더이를 판 다음, 나중에 철로 위에 미래의 건물을
짓기 위해 그 구덩이를 덮는 식으로 만들어졌다. 굴착 기간 동안 수많은 사고와 붕괴, 홍수 등의 불운이 잇따랐
지만, 공사는 1861년까지 거의 완공되었고, 여러 차례의 시범 운행 가운데 첫 번째 시범 운행이 진행되었다.
1862년 5월에재무장관 윌리엄 그래드스톤을 비롯한 유명 인사들을 태운 전 구간 최초의 시범운행이었다.
1863년 1월 9일에 성대한 개통식이 거행된 후 메트로폴리탄 철도는 다음 날부터 대중에 개방되었고,
가스등을 켠 목재 객실에 3만 8천 명의 승객을 실은 그 증기기관차는 패딩턴가와 패링돈가 사이를 운행했다.
세계 최초의 지하철은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처음 12개월 동안 950만 명의 승객을 실어 날랐고
개통 이듬해에는 1천 200만 명을 실어 날랐다.
노예해방 선언
Emancipation Proclamation · 미국 건국이념에 생명을 불어넣다
1863년
1863년 1월의 노예해방 선언문
(원본은 워싱턴 D.C, 소재 미국국립기록관에 보관되어 있다)
노예해방 선언의 인쇄본이 전단지와 팸플릿으로 널리 만들어졌다.
다채로운 색의 기념 인쇄물ㅇ디 <하퍼스 위클리>와 <레슬리즈 일러스트레이티드 뉴스페이퍼>에 실렸다.
1863년 1월 1일을 기해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연방정부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영토의 모든 노예들은
영원히 자유롭다고 선언했다. 노예해방 선언문은 노예제를 불법으로 규정하지 않았지만, 내전이 노예제를
둘러싸고 치러졌다는 것과 남부연합은 연방에 대한 공격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노예제 문제는 건국 이래 줄곧 미국을 괴롭혀왔다. 그럼에도 미국은 이 문제를 회피하며 각 주들이 결정하도록
미뤄두었지만, 남북전쟁은 사태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1862년 9월 앤티텀 전투에서 연방군이 승리를 거둔 후
그리고 남부 반란군에 맞선 링컨의 군사 전략에 중요한 요인이었던 이듀들로 인해,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반란에 가담했던 주들이 1863년 1월 1일까지 연방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 주들에 "노예로 억류되었던 모든
사람들은 자유로우며 지금부터 자유로워질 것" 이라고 선언하는 최후통첩을 하기로 결정했다.
헌법적 귄위도 없이 1세기 이상을 이어온 법과 전통의 가치를 빼앗은 노예해방 선언은 그 대담한 표현에도
불구하고 여러 면에서 제한적이었다. 그것은 연방을 탈퇴한 주들에만 적용되었고, 충성을 유지했던 경계 주들의
42만 5천 명에 이르는 노예들은 외면했다. 또한 이미 북부의 통제 아래 들어온 남부연합 지역들은 제외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노예해방 선언이 약속한 자유는 '연방의 승리'에 달려 있었다는 점이다.
노예해방 선언은 미국에서 노예제를 종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연방에 명분을 위한 도덕적 구실을 제공했으며, 근본적으로 전쟁의 성격을 바꾸어놓았고, 350만 명의
노예들에게 자유를 선언했다. 남부연합에 속한 주들이 순응하기를 거부햇을 때 연방군이 진격할 때마다 자유의
영역이 확대되었다. 또한 노예해방 선언은 흑인들을 연방의 육군과 해군에 받아들여, 해방 노예들이 해방군이
될 수 있다고 알렸다. 전쟁이 끝났을 때 거의 20만 명의 흑인 병사들이 연방과 자유를 위해 싸웠다.
연방을 위한 전쟁은 자유를 위한 전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노예해방 선언은 남북전쟁과
링컨의 대통령직을 모두 설명했다. 다섯 쪽에 이르는 본문은 가느다란 빨간색과 파란색이 리본으로 묶여 있었다.
그 문서는 국무부가 여러 해 동안 보관해온 부피가 더 큰 다른 선언문들과 함께 제본되었다. 다른 기록들과 함께
1863년 1월 1일 노예해방 선언문을 포함한 이 책은 1936년에 미국국립기록관으로 이전 소장되었다.
연방이 내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수정조항 13조는 마침내 미 전역에서 노예제 관행을 종식했다.
노예제의 최종적인 폐지를 알리는 중요한 선례로서 노예해방 선언은 인간의 자유에 관한 미국의
가장 중요한 문서 가운데 하나로 자리하고 있다.
알래스카 매입 수표
Alaska Purchase Cheque · 북미 대륙에서 러시아를 몰아내다
1868년
720만 달러에 해당하는 알레스카 매입 수표와 영수증, 알래스카는 1700년대 이래 1868년
미국에 양도될 때까지 러시아 소유였다. 처음에 알레스카 매입을 비판했던 사람들은 알래스카를 가리켜
"수어드의 냉장고" 라고 칭했다. 그러나 1869~99년 클론다이크 황금 러시는
알래스카를 미국의 귀중한 부속지로 만들었다.
차르Tsar와 여러 해 동안 협상을 벌인 끝에 미국은 러시아 소유의 거대한 북아메리카 동토를 1에이커당
2센트 가격에 매입했지만, 일부 미국인들은 알래스카에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의문을 품었다.
사람들의 의심처럼, 그 수표는 1년 이상 우편 속에 있었다.
러시아 제국은 영국과 값비싼 크림전쟁(1853~56)을 치르느라 현금이 절실했다. 차르의 동생 역시 장차 영국이
캐나다를 경유해 러시아 식민지 가운데 하나(이제는 알래스카로 알려진 동토)를 침공할 경우, 러시아가 이를 방어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리하여 1857년에 러시아는 60만 평방마일 크기의 영토를 미국에 팔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미국은 특히 그곳의 값비싼 바다표범 가죽 산업에 매력을 느꼈고, 북아메리카의
또 다른 지역을 획득한다는 생각에 흡족해했다.
그러나 미국의 내전이 끝날 때까지 여러 해 동안 결정된 실은 아무것도 없었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
러시아의 외무장관 에드워드 드 스퇴클은 미 국방장관 윌리엄 수어드와 협상을 재개했다. 밤샘 회의 끝에
1867년 3월 30일 새벽 4시에 회담이 마무리되었다. 미국과 러시아는 거래를 성사시켰다. 매입 비용은
720만 달러, 1에이커당 2센트로 정해졌다. 상원은 1867년 4월 9일에 37 대 2로 그 조약을 승인했다.
1867년 10월 러시아와 미국의 고위 당직자들이 공식적인 이양식을 위해 시트카의 총독 관저에 모여들었다.
군인들의 행진이 있었고 축포가 터졌으며 러시아기가 내려지고 미국의 성조기가 자리를 대신했다.
그러나 아직은 하원의 예산 승인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1868년 7월 14일에 113 대 48로 마침내
예산안이 통과되었다. 드 스퇴클에게 지불할 720만 달러 수표는 1868년 8월 1일까지 발행되지 않았다.
미국인들은 러시아인들이 사용했던 알류산 열도의 명칭인 '알래스카'를 채택했다. 매입과 함께 미국은
58만 6천 412평방마일의 미답지, 그러니까 무려 텍사스 두 배 크기의 땅덩이와 약 7만 명가량의 인구를
얻었다. 주민 대부분은 이누이트와 알래스카 원주민들이었고, 수천 명의 러시아 모피상들도 있었다.
이 거래에 대한 반응은 엇갈렸다. 반대론자들은 거래를 가리켜 "수어드의 어리석음" 이라거나 "수어드
의 냉장고" 라고 불렀다. 그렇지만 1896년 클론다이크 금맥 발견으로 대부분의 비판자들이 알래스카
에 금전적 가치가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고, 수어드에 대한 평가도 달라졌다.
알래스카는 1912년에 미국의 영토가 되었고, 1959년 1월 3일에 주로 승격했다.
전략적 중요성이 처음 인식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군이 알류산 열도를 침략했을 때였다.
그리고 그 군사적 가치는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긴장되었던 냉전 기간에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훗날 세라 페일린이 주장했듯이 그녀는 자신의 집에서 러시아를 볼 수 있었다.
전쟁과 평화
War and Peace · 문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
1869년
《전쟁과 평화》 수기 원고의 한 페이지.
"거칠게 흘려쓴 문장들로 뒤덮인 이 마법사의 주문서, 서로 충돌하는 수정 사항들,
가장자리를 떠다니는 신비스러운 풍선, 지면 위를 기어 다니는 성마른 첨가 부분들을"
공들여 옮겨 적은 사람은 바로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였다.
톨스토이와 함께 있는 안톤 체호프(왼쪽) 체호프는 톨스토이의 업적에 경외심을 느꼈다.
"문학계에 톨스토이가 있기에 작가가 되는 일이 쉽고 만족스럽다. (···) 그는 모든 이를 만족케 할 업적을 이뤘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체호프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톨스토이는 언젠가 체호프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보게, 나는 자네의 연극이 싫다네. 세익스피어는 나쁜 작가였네, 나는 자네의 연극이
세익스피어보다 훨씬 더 나쁘다고 생각하네."
한 러시아인이 지금껏 창작된 것 가운데 가장 많은 분량의 원고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격렬한 원고를 판독할 수
있는 사람은 그의 아내뿐이었고, 그녀는 남편을 도와 50만 단어가 넘는 최종 원고에 도달할 때까지 일곱 번이나
초고를 옮겨 적어야 했다. 많은 비평가들은 이 작품이 세계 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서사 소설이라고 말한다.
레프 톨스토이 백작(1828~1910)은 1805년 차르 알렉산드르 1세의 치세에서 시작해 1812년 나폴레옹의 파괴적인
러시아 침공 직후인 1813년에 끝나는,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 시대를 배경으로 한 문학 작품을 준비하면서 몇 년 동안
각고의 시간을 보냈다. 이 러시아 대가는 문서 기록과 다른 자료들을 성실히 조사했고, 자신이 크림 전쟁에서 겪은
군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세세한 사건들을 조합해 넣어 가능한 한 사실적인 전개를 만들어냈다. 또한 피로 얼룩진
나폴레옹 전쟁의 실제 사건들에 휘말렸던 러시아의 다섯 귀족 가문에 대한 정교한 허구적 서사를 지어냈다. 이 작품에
서는 작가가 만든 대규모의 가공 인물들과 나폴레옹을 포함해 160명에 이르는 실제 인물들이 상호 작용한다. 부분적
으로는 역사적 연대기이고, 소설인 세련되고 시적인 톨스토이의 작품은 러시아어뿐만 아니라 프랑스어로 쓴 몇몇 문단
들로 철학에 관한 톨스토이의 독특한 논의를 포함시켰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고약한 필체는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어서, 심지어 그 자신조차 읽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의 필경사이자 편집자로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지칠 줄 모르는 그의 아내 소피아 톨스토이(1844~1919) 뿐이
었다. 전기 작가인 트로야트는 훗날 "거칠게 흘려 쓴 문장들로 뒤덮인 이 마법사의 주문서, 서로 충돌하는 수정 사항들,
가장자리를 떠다니는 신비스러운 풍선들, 지면 위를 기어 다니는 성마른 첨가 부분들을 판독하기" 위해 애썼던 그녀
의 '고군분투'에 대해 설명했다. 무수한 변화를 통합해 넣는 과정에서 톨스토이와 함께 작업하면서 수기 원고의 각
페이지를 초고로 옮겨 적은 사람이 바로 소피아였다.
초고는 1863년에 완성되었고, 최초의 발췌문이 2년 뒤에 '1805' 라는 제목의 한 잡지에 수록되었다.
더 많은 연재 부분들이 이어졌지만, 톨스토이는 그 이야기에 만족하지 못했고 끊어지지 않는 판본을 원했다.
그래서 그와 소피아는 1866년부터 1869년 사이에 전체 소설을 여러 차례 다시 썼다. 기념비적인 작업이었다.
1869년 마침내 '전쟁과 평화'라는 제목으로 최종본이 출간되었다. 일부 비평가들은 처음에 이 책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반 투르게네프,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구스타브 플로베르, 빅토르 위고와 그 시절 주요 작가들은
이 책의 등장을 환영했다. 《전쟁과 평화》의 위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졌다.
1910년 세상을 떠나면서 톨스토이는 거대한 원고 더미를 남겼다. 16만 5천 장의 원고와 1만 통의 편지가
포함된 원고였다. 《전쟁과 평화》는 여전히 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걸작의 하나로 남아 있으며
여러 차례 무대와 스크린으로 옮겨졌다.
축음기
Phonograph · 소리를 기록하고 재생하다
1878년
에디슨은 1878년 2월 19일에 '축음기, 혹은 말하는 기계'로
제200.521호 특허장을 받았다.
1878년 자신이 발명품을 자랑스럽게 선보이는 에디슨
열정적인 발명가 토머스 알바 에디슨(1847~1931)은 전신과 전화를 통한 음성통신을 개선할 목적으로
뉴저지 주 멜노 파크에 위치한 자신의 실험실에서 끝없는 실험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 일에서 착안해 그는 은막을 입힌 실린더에 인간의 목소리를 기록할 기계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그 개념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누군가가 송화구에 대고 말을 하면서 기계의 핸들을 돌리면 목소리의 진동이
바늘을 떨리게 하고, 녹음 바늘에 의해 진동이 실린더에 새겨지면서 독특한 흔적을 만들게 되고,
이렇게 만들어진 소리를 나중에 재생할 수 있다.
에디슨은 그 장치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기계공 존 크루시와 함께 작업했다.
이 장치가 조립되었을 때 발명가는 새 기계가 작동되는 동안 어떤 단어들을 녹음했다.
그는ㅁ 그 기계에서 "메리에겐 작은 양이 한 마리 있었다네, 그 털은 눈처럼 희었고 ·····." 라고 말하는
자신의 독특한 목소리가 되풀이되는 소리를 듣고 놀랐다. 훗날 에디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렇게 놀랐던 적은 없었다. 모두가 놀랐다."
1877년 12월 24일 대중들에게 장치를 선보인 후 그는 미국 특허청에 '소리 기록' 을 의미하는
그리스 단어에서 따온 '축음기' 라는 이름을 붙여 그 발명품의 특허를 출원했다.
그는 신청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오랜 실험을 거듭한 끝에 인간의 목소리가 만들어낸 진동을
기록할 수 있는 진동판이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 중첩된 진동을 내지 않으며 각 진동은 분리되어 있고
개별적이라는 것, 그래서 인간 목소리의 음들을 기록하고 재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특허장은 은박을 입힌 실린더에 소리를 기록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명기했다.
축음기는 은박 대신 왁스 실린더 사용을 포함해 그 후로 많은 변화와 정련을 거쳤지만, 에디슨은 백열등,
무비카메라 등의 많은 중요한 발명을 포함해서 1천 개 이상의 특허를 받은그의 오랜 이력 가운데
에디슨은 축음기를 가리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 자신의 '아기'라고 불렀다.
인용: 스콧 크리스텐슨 著 · 김지혜 譯 <세상을 바꾼 100가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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