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연/취월당

기록의 역사 (7)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Empire State Building · 대공황 때 완공된 기업 권력의 새로운 상징

1929년~1931년

 

 

1929년 10월 시어브, 램 앤 하몬 사가 그린 투시도들 가운데 하나

초기 도안은 2주 만에 완성되었다.

 

 

1930년 4월 24일 엠파이어스테이트의 2층이 올려졌다.

1년 후 완공될 것이다.

 

 

노련한 설계에 따라 계획되고 건설된 당시 세계 최고층 빌딩은 치솟아 올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마천루가 되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건축의 기적이자 공학과 건설의 놀라운 위업으로

미국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1929년 주식시자의 붕괴가 임박했을 때 제너널 모터스사와 긴밀히 연결된 일련의 산업가들은 그들의 경쟁사가

소유한 인근의 크라이슬러 빌딩을 압도하는 세계 최고층 건물을 맨해튼에 세운다는 생각에 의기투합했다.

33번가와 34번가 사이 5번가에 자리 잡고 있던 회원 전용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은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미국 기업 권력의 새로운 상징물을 건설하기 위해 철거되었다.

 

이 거대한 건물의 설계사로 시어브, 램 앤 하몬 건축회사가 선정되었다. 윌리엄 F. 램(1893~1952)은 단 2주 만에

설계도를 만들었고, 연필처럼 보이는 아르데코 양식을 채택했다. 램은 노스캐롤라이나 주 윈스턴 살렘의 레이놀즈

빌딩과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에 있는 카류 빌딩의 초기 디자인들에서 영감을 얻었다. 훗날 그의 디자인은

1931년 건축연맹으로부터 금메달을 수상한 것을 포함해 여러 상을 휩쓸었다.

 

2에이커에 이르는 5층 높이의 드넓은 기단 위에 놓일 구조물은 102층짜리 탑이 될 것이었다. 안테나 탑까지의

높이가 1천 454피트에 이르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마천루가 될 것이었다. 돌출된 창은 그 건물의 또 다른

결정적 특징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금색으로 외부 도색을 할 예정이었다.

 

건물 총괄 업체는 스타릿 사로 마천루 건설에서 인정 받는 선두 주자였다. 윌리엄 A. 스타릿은 《마천루와 그 건설자들》

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마천루를 짓는 일은 마치 전쟁을 앞둔 가장 평화로운 시기와도

같다. (···) 그 구성 요소들과 벌이는 투쟁은 흡사 전쟁과 같았다." 1930 · 31년에 이 회사는 이 기획에 관한 노트를

편찬했고,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건설에 관한 기록' 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푸른색 그래프용지에 타자로 치고 세줄

바인더로 묶은 그 노트에는 갈색 판지에 붙인 32장의 흑백사진도 담겨 있다. 글과 사진은 역사적인 마천루의

건설 과정을 단계적으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대공황 초기에 시작된 이 기획으로 하루 3천 400명의 건설 노동자들이 채용되었고, 그 가운데 많은 사람이 유럽 이주민

이었다. 더불어 겁 없는 모호크 인디언 철강 노동자들도 수백 명 고용되었다. 미친 듯이 진행된 시공 기간 동안

최소 다섯 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전체 기획은 놀랍게도 1929년 9월처음 건설 계약서에 서명하고 1931년 5월에 공식적으로 개관할 때까지 고작 20개월

이 걸렸고, 건물은 410일 만에 완공되었다. 최종적인 건축 비용은 4만 948천 900달러(2015년 기준으로 환산하면, 6억

3천 502만 1천 563 달러)였다. 2007년에도 이 건물은 여전히 미국에서 단일한 사무 복합단지로는 펜타곤에 이어 두 번

째로 큰 규모였다. 수많은 책과 영화에서 영원성을 얻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1933년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에서

홀로 비행기의 공격을 막아내던 킹콩 덕에 최고의 유명세를 얻었다.

 

 

 

 

에드워드 8세의 양위 문서

Edward VIII's Instrument of Abdication · 스스로 왕위를 포기한 남자

1936년

 

 

에드워드 8세와 그의 세 동생들이 서명한 양위 문서.

문서의 서명은 서리의 윈저 대공원에 있는 에드워드의 집 포트 벨베드르에서 이루어졌다.

 

 

미국인 이혼녀와 결혼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기로 결심하고 이 잉글랜드 국왕은 자신의 책상에 앉아

역사적인 문서에 서명했다. 몇 번 펜을 놀린 후 그는 자발적으로 왕위를 내놓은 영국 최초의 군주가 

되겠다는 의지를 공표하게 될 것이었다.

 

에드워드 8세(1894~1972)는 1936년 1월 20일 부왕 조지 5세가 사망한 후, 아직 대관식을 치르지는 않았지만

잉글랜드의 국왕이 되었다. 그러나 마흔 한 살의 비혼인 그는 윌리스 워필드 심슨이라는 이름이 미국인 이혼녀와

결혼하겠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그녀의 두 번째 이혼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고, 그는 완강한 반대에 직면했다.

종교적, 법적, 정치적 반대가 드셌다. 영국 국교회의 명목상 수장인 국왕 에드워드는 전 배우자가 살아 있는

동안 이혼한 사람의 재혼을 금한다는 교회의 오랜 정책에 부딪쳤다. 또한 다른 장애물도 있었다.

 

수산 스탠리 볼드윈은 젊은 국왕에게 심슨 부인이 왕비로 적합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녀의 불륜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둘러싼 무성한 소문들 중 그녀가 당시 독일 대사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와 로맨틱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FBI 국장 에드거 후버의 비밀 보고가 있었다. 미국 대사 조지프 케네디는 그녀를 '매춘부'로

묘사했다. 그럼에도 에드워드는 두 사람의 관계를 끝내려 하지 않았고, 위기는 정정으로 치달았다.

 

1936년 12월 10일 아침 에드워드는 서리에 있는 자신의 별장 응접실로 형제들을 불러 모았다.

책상에 앉은 그는 법률가들이 내놓은 일곱 장의 양위문서 사본에 서명했다. 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대영제국, 아일랜드, 그리고 바다 건너 영국 영토의 국왕이자 인도 황제인 나 에드워드 8세는 이로써 내 자신과

나의 후손들의 왕위를 포기한다는 철회할 수 없는 결정과 이 양위문서가 즉시 발효되기를 바라는 내 바람을 알린다."

그의 형제들이 증인으로 서명했고, 나중에; 그는 "방 안은 숙연하게 들리는 낮은 중얼거림으로 가득했다" 고 회상했다.

 

다음 날 국왕 에드워드는 자신의 결정을 전 세계 라디오 청중에게 공개했고, 의회는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처리했다.

의회의 양위 법안에 동의함으로써 조지가 취한 첫 번째 조치는 자신의 형에게 윈저 공의 작위를 내린 것이었다.

 

 

공작과 심슨은 1937년 6월 3일 프랑스에서 결혼했고 파리에서 살았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그는 바하마 총독을

지냈다. 그러나 부부는 나치에 동조해 또 다른 충격을 안겼다. 에드워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히틀러가 미국인들을 박살 낼 것이고 (···) 우리가 넘겨받을 것이다."

양위 후 30년이 지나 그는 <뉴욕 데일리 뉴스>에 "독일이 동쪽을 쳐서 공산주의를 분쇄하도록 자극한 것은

영국을 위한 일이자, 유럽을 위한 일이었다" 고 말했다.

 

양위 문서의 사본들은 영국국립기록관에 보존되어 있다.

 

 

 

 

TV 프로그램 편성표

Television Listings · 1936년 11월 2일 오후 3시 세계 최초로 TV 정규 서비스 시작

1936년

 

 

에릭 프레이저에게 특별히 의로한 표지 디자인에는 맬리 팰리의 방송 송출 장치가 그려져 있다.

첫 기사는 "공학자들과 프로그램 설계자들이 몇 개월 동안 시청각 프로그램을 방영할 수 있게

한 이 매력적인 새로운 개발과 씨름하며 얼마나 분주한 시간을 보냈는지"를 설명한다.

 

 

<라디오 타임스>의 "텔레비전 넘버"는 독자들에게

"앞으로 몇 개월 동안 재미가 넘칠 것이며 (···) 여러분은

새로운 예술의 시작을 지켜보게 될 것" 이라고 약속했다.

 

 

BBC가 시청자들에게 '텔레비전의 마법'을 소개한 후 방송사는 잠재적 시청자들에게 간략한 

프로그램 주간 계획표를 제공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라디오 타임스>의 부록으로 출판되었다.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면 최초의 TV 프로그램 편성표로 매우 흥미롭다.

 

여러 해 동안 새로운 미디어인 텔레비전의 멈춤과 깜빡임을 실험한 후 1936년 BBC는 알렉산드라 궁.

일명 '앨리 팰리'에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국을 짓고, BBC 프로그램 기획자들에게는 9일 안에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개발하라고 지시했다. "신사숙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더할 수 없이 기쁜 마음으로

여러분에게 텔레비전의 마법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라는 아나운서 레슬리 미첼의 말과 함께,

1936년 8월 26일 개막작 <여기서 당신을 보고있습니다>가 첫 전파를 탔다.

 

간헐적인 테스트와 방송을 마친 후 11월 2일 최초의 정규 TV 서비스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최초의 서비스는 240라인을 사용하는 베어드 시스템과 405라인을 사용하는 EMI 마르코니 사 시스템을

주 단위로 번갈아 사용했다. 매일 오후 3~4시 사이, 9~10시 사이 두 차례 방송되었다. 1936년 10월 23일자

<라디오 타임즈>의 "텔레비전 넘버"에서 TV 방영의 개념을 소개한 다음, BBC는 10월 30일부터 시작해서

정기간행물인 <라디오 타임즈>에 부록을 넣어 다음 주의 방송 편성을 알렸다. 주간 TV 프로그램 목록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이어졌고, 일요일에는 TV 방영이 없었다.

 

최초의 광고 프로그램에는 날씨, 음악, "데이지 페인 부인이 다림질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것이다"처럼

여성들의 관심을 끄는 가사 활동 시연과 한 시간 분량의 카바레 쇼가 포함되었는데, 카바레 쇼에서는

버블즈 스튜어트가 '영화배우들의 성대모사'를 할 예정이었다. 존 파이퍼는 런던의 여러 갤러리에서

최근 진행되는 전시회들에 대해 논평할 예정이었고, '철도 경비대원'의 짤막한 공연도 있을 예정이었다.

 

1936년 11월 2일 오후 3시에 세계 최초의 정규 TV 서비스가 예정대로 전파를 탔다. 영국에 방송을 수신할 수

있는 TV 수상기는 고작 100대에서 500대 사이였고, 시청자는 앨리 팰리 방송국에서 25마일 안에 거주해야만 했다.

거대하고 값비싼 수상기는 TV 시청을 부잗르이나 새롭게 누릴 수 있는 호사로 만들었고, 시청자는 TV를 볼 때

마치 연극을 관람하는 것처럼 잘 차려입는 것이 당시 관행이었다.

 

3년 후 BBC 텔레비전 사장 제럴드 코크는 자신이 보기에 TV는 "기본적으로 일시적인 관심사를 위한 매체"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공연 중인 연극의 일부분을 발췌해 스튜디오나 무대에서 곧바로 방영하고,

공연이 끝났을 때 연극 전편을 방영한다면 이 나라의 여가 활동에 대한 리뷰의 일환으로서 매력적인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TV는 본성상 오락보다는 온갖 종류의 정보를 전파하는데에 더 적합하다."

 

TV 편성표를 수록한 <라디오 타임즈>의 초판본은 이제 수집가들의 인기 품목 가운데 하나다.

 

 

 

 

뮌헨 협정

Munich Agreement · 2차 대전이 전주곡

1938년

 

▲▲ '유럽의 평화를 보장' 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뮌헨 협정서와 그에 딸린 편지들.

겨우 7개월 뒤에 독일군 탱크가 체코슬로바키아로 미록 들어오면서, 히틀러는 협정 파기를 알렸다.

윈스턴 처칠은 그 조약이 '영락없는 완벽한 패배'라고 비난했다.

 

▲ 체임벌린은 1938년 9월 30일에 헤스턴 비행장에 도착하자마자

환희에 넘쳐 뮌헨 협정서 사본을 흔들어 보였다.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가 뮌헨 협정에 조인한 후 영국 수상 네빌 체임벌린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문서의 사본을

흔들어 보이면서 그 문서가 '우리 시대의 평화'를 보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 제국 아돌프 히틀러 총통이 여전히

정복 전쟁에 마음이 기울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말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ㄴ자고 20년이 지났을 무렵 독일은 다시 전쟁을 시작하려 위협하고 있었다.

이번에 논란이 된 영토는 주데텐란트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조로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이었다.

파시스트인 히틀러는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그곳을 무력으로 차지하겠다고 위협하고 있었다.

 

영국 수상 네빌 체임벌린은 전쟁을 피할작정이었지만, 히틀러가 제1차 세계 대전 후 만들어진 주권국가를

침공한다면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체임벌린은 히틀러에게 비밀 회동을 요청했고, 히틀러

총통을 만나기 위해 뮌헨 외곽 베르히테스가르텐의 바바리아 산지에 위치한 그의 은신처로 갔다. 두 사람은

세 시간에 걸쳐 그 문제를 논의했고, 이후 체임벌린은 내각 소집을 위해 고국으로 날아갔다. 그런 다음 전쟁을

피하기 위한 절박한 노력의 일환으로 추가 협상을 위해 독일로 되돌아갔다.

 

1938년 9월 29일 체임벌린은 뮌헨에서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그리고 프랑스의 달라디에를 만났다.

체코슬로바키아와 소련 대표는 배제되었다. 네 강대국은 히틀러가 추가 영토에 대한 요구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추데텐란트를 즉각 독일에 양도하는 데 합의했다. 회담은 오전 1시 30분에 끝났고,

네 나라의 수반은 뮌헨 협정에 조인했다.

 

체임벌린은 큰 승리를 얻었다고 믿었다. 비행기에 올라 독일을 떠나자마자 기쁨에 들뜬 수상은 헤스턴 비행장

에서 환호하는 군중과 마주했다. 체임벌린은 자신의 외교적 성과를 증명하는 증거로 막 서명을 마친 문서를

공중에 흔들어 보이며, 이것이 평화의 지속을 향한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오늘 아침 독일 총통 히틀러와 다시

대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내 이름 뿐 아니라 그의 이름이 적힌 문서가 있습니다."라며 기쁨에 차서 외쳤다.

 

버킹검 궁에서는 체임벌린을 위한 만찬이 준비되었고, 뉴스는 그를 칭송했다. 그러나 윈스턴 처칠은 그 조약이

"영락없는 완벽한 패배"라고 비난했으며, 독일군은 전쟁이 기다린다는 사실을 깨닫고 점점 더 호전적이 되어

가는 히틀러의 계획을 막기 위해 비밀리에 쿠데타를 준비했다. 주데텐란트가 체코인들에게는 전략적으로 몹시

중요했기 때문에 그들은 이 협정을 영국과 프랑스의 배신으로 여겼다. 그러나 군사력으로 독일에 맞설 수 없었

던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마지못해 조약의 조항들을 받아들이는 데 동의했다.

 

7개월 후인 3월 15일 체임벌린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독일군 탱크가 체코슬로바키아의 다른 지역으로 향하면서 히틀러의 뮌헨 협정 파기를 알렸던 것이다.

영국 수상의 행동은 근대사에서 실패한 '유화정책'의 가장 큰 예로 알려졌다.

 

4개국 정상의 서명이 담긴 뮌헨 협정의 원본은 영국국립기록관에 보관되어 있다.

 

 

 

 

 

독소 불가침 조약

The Hitler - Stalin Non Aggression Pact · 누구도 예상치 못한 두 적군의 동맹

1939년

 

 

▲ 독소 조약은 독일 외무장관 요하힘 폰 리벤트로프와 소비에트 외무장관 바체슬라프 몰로토프가

1939년 8월 23일에 서명했다. 그 불가침조약은 양측 가운데 어느 쪽도 상대의 적과 제휴하거나

그 적을 돕지 않을 것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런던 이브닝 스탠다드>에 게제된 데이비드 로우의 만평(1839년 9월 20일 자)

독일과 소련의 조약을 풍자하고 있다. 폴란드는 엎드린 인물로 표상되어 있다.

 

 

적대자인 두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와 요제프 스탈린 사이의 불가침 조약으로 세계는 다시 한 번 충격에 빠졌다.

그들은 각자 당면한 팽창주의적 관심을 위해 서로에 대한 증오심을 접어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조약의 비밀 의정서는 훗날 훨씬 더 불리한 것으로 드러났다.

 

1939년 8월 23일에 독일과 소비에트 연맹의 지도자들이 어느 쪽도 상대의 적과 제휴하거나 적들을 돕지 않기로

보장하는 불가침 조약에 서명하면서, 나치와 공산주의자들이 모스크바에서 악수를 했다. 중요한 두 협상자,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와 소련 외무장관 바체슬라프 몰로토프가 환호한 그 문서에 스탈린도 서명했고,

나치와의 합의에 미소 지으며 사진 촬영까지 했다. 언론 역시 스탈린이 히틀러의 환심을 사기 위해 최근 그의

유대인 외무장관 막심 리트비노프를 해임했다고 보도했다.

 

소비에트 국민과 나치당원들 모두 그 친선외교에 당황했다. 유럽 전역의 정치인들은 그보다 더 놀랐다.

그 조약이 그들을 또 다른 세계 대전으로 몰아넣을 작용과 반작용의 연쇄반응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몇 주 후 독일은 서쪽에서 폴란드를 침공했고, 그로부터 16일 후 소비에트 군대가 동쪽에서 휘몰아쳐 마치

두 마리 늑대가 죽은 짐승을 나눠 먹듯 폴란들를 분할했기 때문이다.

 

쓰러지는 도미노의 연쇄가 영국까지 밀어닥쳤다. 그곳에서 체임벌린의 뮌헨 협정은 순식간에 잊혀졌다.

독일은 폴란드 서부,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프랑스, 덴마크,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노르웨이를 연이어

기습 공격했다. 소비에트는 필난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와 루마니아 일부를 합병했다.

10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1941년 6월 22일 바바로사 작전에서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히틀러 스탈린 조약은 사라졌고

궁극적으로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훨씬 더 파괴적인 갈등이 시작되었다.

 

1945년 5월 독일이 패비하자, 포로로 잡힌 독일인 서기에 의해 리벤트로프가 보관해 두었던 불가침 조약의

마이크로필름 사본을 담은 보관함이 미군에 넘겨졌다. 거기에는 합의에 관한 비밀 의정서 사본

(양측이 시종일관 은폐해왔던 의정서)이 담겨 있었다.

 

이 비밀 문서는 루마니아,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핀란드를 독일과 소련의

'영향권'으로 분할했고 이는 잠재적으로 그들의 '영토와 정치의 재편'을 예고했다. 이 문서는

스탈린과 히틀러가 서로의 팽창주의적 의도를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이 조약은 1946년 <세인트 포스트 디스패치>와 <맨체스터 가디언>에 의해 처음 공개되었다.

나중에 그 문서의 복사본들은 여러 학술서에 재수록되었다. 원본 문서의 소련 측 사본이 1992년에

기밀이 해제되었고, 1993년에 러시아의 한 과학 저널에 공개되었다.

 

 

 

 

대일 선전포고

Declaration of War Against Jaoan · 미국을 2차 대전으로 끌어들인 사건

1941

 

연필로 수정한 연설 원고

 

루즈벨트가 1941년 12월 8일 대일 선전포고에 서명하고 있다.

 

 

일본이 갑작스럽게 진주만을 공격하자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감동적인 연설

가운데 하나를 작성했고,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1941년 12월 7일은 치욕으로 남게 될 날임을 (···) 어제와

오늘의 사실들이 증언합니다. 미국 국민들은 이미 여론을 형성했고, 우리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대해

이 결정이 의미하는 함의를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1941년 12월 7일 오후 루스벨트 대통령은 전쟁부 장관의 전화를 받았다.

일본 제국이 하와이 진주만 해군 기지에 주둔한 미 태평양 함대를 공격했음을 알리는 전화였다.

루스벨트는 링컨이 섬터 요새 전투 이후 자문단을 소집했던 바로 그 방으로 부통령과 행정부, 자문단을

즉각 소집했다. 또한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들을 놓고 저울질 하기

시작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연설문 담당자에게 그날 밤 대국민 라디오 연설문을 작성하라고 지시한 후,

의회에 전할 단도직입적인 감정적 호소문을 받아쓰게 했다. 그의 비서관 그레이스 톨리가 타자하고 복사했다.

연설문의 단순하고 직설적인 접근법은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을 연상시켰다.

 

다음 날 루스벨트는 새로운 군사 정보를 가미해 원고를 수정했고, 문체와 내용을 거듭 살핀 뒤 연필로 수정했다.

그날 오후 대통령은 대일 선전포고에대한 동의를 얻기 위해 의회에서 연설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연설을

시작했다. "어제 1941년 12월 7일 이제 치욕 속에 살게될 날에 미합중국은 일본 제국의 해군과 공군으로부터

고의적인 기습 공격을 받았습니다." 장중한 연설은 7분 동안 이어졌다.

 

연설이 끝나자마자 상원은 88대 0으로, 하원은 388 대 1로 선전포고를 승인했다.

재닛 랜킨(공화당, 몬타나)만이 반대했는데,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에 미국이 개입하는 것에도 반대했던 인물이다.

의회가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데 고작 33분이 걸렸고, 루즈벨트는 오후 4시 10분에 결의안에 서명했다.

 

 

 

 

반제회의 의정서

Wannsee Protocol · 역사상 가장 체계적이고 잔인한 대량 학살 작전

1942년

 

 

15쪽 분량의 문서 가운데 여섯 쪽은 최종 해결안에서 제거될 유럽 유대인의 수를 열거하고 있다.

영국에서만 33만 명이었고, 총 1천 100만 명이었다.

 

 

반제회의 후에 하이드리히가

마르틴 루터에게 보낸 편지

 

 

히틀러의 측근들 가운데 선별된 사람들이 '유대인 문제 최종 해결안'의 이행 계획을 조율하기 위해

베를린 외곽의 한 저택에 모였다. 그들의 행적을 감추기 위한 특급 보안 조치가 취해졌지만,

범죄를 입증하는 하나의 기록이 살아남았다.

 

1942년 1월 20일 고위급 나치당원과 독일 정부 관료 15명이 반제의 고급 저택에 모였다.

참석자들 가운데는 외무부, 법무부, 국무부의 고위급 대표들과 나치친위대ㅣ 장교들이 포함되었다.

 

히틀러로부터 직접 임무를 부여받고, 헤르만 괴링이 서면 인가를 받아 움직인 제국보안본부장인 나치

친위대장 라인하르트 아이드리히는 유럽의 독일 점령지에 남아 있는 대부분의 유대인을 폴란드로 추방해

절멸하려는 계획을 모든 필수 부서들이 수행할 수 있게 위해서였다. 그 모임은 세계 역사에서 가장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대량 학살 작전'이 될 것이었다.

 

제국보안본부 제4국 B4(유대인) 부서의 책임자 나치 친위대 중령 아돌프 아이히만이 준비한 통계 자료를

사용해서, 하이드리히는 유럽에 거의 1천 100만 명의 유대인이 있으며, 그 가운데 절반은 아직 독일인이 

장악하지 못한 나라에 있다고 보고했다. 반제회의 의정서는 유대인들을 절멸하기 위한 상세하고 순차적인

계획에 착수했다.

 

이 정책 결정은 이미 최고위층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이드리히는 유럽의 유대인들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몰아넣어 그들을 체계적으로 살해할 폴란드의 살해 지점들로 보낼 방법을 구상했다. 그는 또한 누구를

제거할지 정확한 용어로 규정했다. 이 의정서는 점령지의 수백만 명에 이르는 또 다른 사람들을

'자연적 원인(대규모 기아, 유기, 질병)으로 제거할 것을 요구했다.

 

90분에 걸친 회의에는 세세한 계획과 기록이 포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임무를 맡은 관료들은 나중을 위해

은폐할 목적으로 이 계획을 모호한 관료적 용어로 표현하려고 애썼다. 그들의 완곡 어법('최종 해결안'

같은 용어의 사용에서 볼 수 있듯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참석자에게 그 메시지는 명확했다.

그들은 유럽 내 유대인들의 학살을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결국 아무도 멈추지 않았고, 참석자들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업무로 돌아가기 전 코냑과 담배를 즐겼다.

그 문서의 살인 본색을 감추기 위해 회의 보고서는 용의주도하게 표백되었고, 특급 기밀인 의정서의 각 사본은

엄격히 통제되었다. 1942년 6월 하이드리히가 암살된 후 나치는 그들의 죄를 입증하는 반제회의 문서들이 모두

폐기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47년 뉘른베르트 국제전범재판소에서 한 검사가 독일 외무부에서 압수한

서른 개의 사본 가운데 제16호 문서 '마르틴 루터의 사본'을 확보했고, 확실한 증거가 되었다.

 

회의 장소였던 반제 저택은 현재 홀로코스트 기념관이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

Anne Frank's Diary · 전쟁의 희생양이 된 소녀

1942~1944년

 

 

빨간색과 흰색의 체크무늬 일기장은 안네가 1942년 6월 12일에 생일 선물로 받은 것이다.

안네는 가상의 친구들에게 보내는 일련의 편지 형식으로 일기를 썼다. 그 친구들 가운데

그녀가 가장 좋아한 것은 고양이 '키티'였다. "가장 좋은 것은 내모든 생각과 느낌을

적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나는 질식했을 것이다.

 

 

가족과 함께 다락방에 숨어 있던 어린 유대인 소녀가 일기장에 자신의 가장 내밀한 생각들을 드러냈고,

그것은 홀로코스트 기간의 삶에 대한 가장 유명한 설명이 되어 수천맘 명의 사람들에게 읽혔다.

 

안네 프랑크(1929~44)는 십대의 독일게 유대인으로, 홀로코스트 기간에 나치가 점령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숨어 있어야 했다. 열세 번째 생일 선물로 일기장을 맏은 직후 소녀는 1942년 6월 14일 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가족과 다른 네 명의 도망자들과 함께 아버지의 사무실 책장 뒤에 마련된 비밀의 다락방에 갇힌 채

자신의 느낌들을 계속 적어나갔다.

 

이 어린 소녀의 일길는 몇몇 가상의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었고, 그녀는 함께 숨은 도망자들과

연루자들의 신원을 감추기 위해 가명을 사용했다. 다른 많은 평범한 십대들이 그렇듯이 안네는 삶에 대해 변화하는

생각은 물론이고, 가족에 대한 혼란스러운 감정, 그맘때 있을 법한 로맨틱한 감정으로 힘들어했다.

 

그러나 안네의 남다른 깊이와 뛰어난 문학적 재능은 그런 고통에 직면해 그녀가 보여준

낙관적 태도와 함께 그녀의 글을 문학적이고 역사적인 보물로 만들었다.

 

그녀는 체포 직전에 이렇게 썼다. 

"나의 모든 이상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

 

 

그 이상들은 너무 부조리하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사람들이 진정 선하다고 믿기에 내 이상들을 고집한다.

(···) 나는 서서히 황폐해져가는 세계를 지켜보고 있다. 언젠가 우리를 파괴할 천둥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수백만 명의 고통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하늘을 올려다볼 때면 나는 모든 것이 더 나아지고, 이런 잔인함 역시

끝날 것이며, 평화와 안정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느낀다.

 

 

안네는 은신처에서 2년 1개월을 보내다가 발각되어 강제수용소로 압송되었다.

다락방에 숨어지내던 여덟 명 가운데 그녀의 아버지만이 살아남았다.

안네는 1945년 3월 베르겐 벨젠 강제 수용소에서 티푸스로 숨졌다. 그녀의 나이 겨우 열다섯이었다.

 

나중에 프랑크 가족의 친구가 다락방에서 일기장을 발견했고, 전쟁이 끝난 후그녀의 아버지에게 전달했다.

딸의 일기를 읽은 오토 프랑크는 일기장을 간직했다가 출판했다. 그 일기는 1947년 암스테르담에서 처음

세상에 나왔고, 1952년 미국과 영국에서 '안네 프랑트: 어느 소녀의 일기' 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 작품의 엄청남 인기에 자극받아 만들어진 연극과 영화는 여러 상을 수상했다.

지금까지 그녀의 책은 67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3천만 부 이상 팔렸다.

원본은 네덜란드 전쟁기록과에 유증되었다.

 

 

 

 

독일의 항복 문서

Germany' s Instrument of Surrender · 나치, 세계에 무릎 꿇다

1945년

 

 

항복 문서는 1945년 5월 8일 유럽 중앙 시간으로 오후 11시 31분을 기점해 모든

육 · 해 · 공군의 작전을 중지할 것을 독일에 명령하고 있다.

사진은 5월 7일 이른 시간에 랭스에서 이 문서에 서명하고 있는 요들의 모습이다.

 

 

프랑스 북부에 위치한 아이젠하워 장군의 본부에 엄숙한 표정의 승전국과 패전국 장군들이 독일의 무조건

항복을 위해 모여 앉았다. 그러나 문서에 서명한 다음 날 소련은 베를린에서 더 공식적인 항복을 요구했다.

1945년 5월 7일 프랑스는 랭스의 한 고등학교에서 제3제국의 갑작스러운 항복을 위해 자리를 마련했다.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된 그곳은 무장병과 지프차, 어두운 표정의 나치 장교 무리로 북적였다. 평범한 탁자를

사이에 두고 지도로 뒤덮인 벽을 따라 밀집 대형으로 늘어선 적군 병사들이 경멸에 찬 차가운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독일군은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장갑을 끼고 있었다.

 

자리에 앉은 이들 가운데는 네 연합국, 즉 프랑스, 영국, 소련, 미국의 대표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알프레트 요들

대장이 이끄는 독일 파견단이 나란히 자리했다. 요들들 대장이 이끄는 독일 파견단이 나란히 자리했다. 요들은

독일 육군을 대표해 서명 권한을 부여받았다. 아이젠하워는 자신이 대리자로 육군 중장 베델 스미스를 파견했다.

스미스는 차분해 보였지만 그곳에는 혼란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 소련 측이 다음 날 베를린에서

두 번째, 더 공식적인 항복이 있어야 한다며 원하는 바를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영문으로 작성된 항복 문서는 지휘관 가운데 한 사람의 영국인 비서 수전 히버트가 서둘러 타자했고,

공식 조인식의 참관인에 포함되었다. 항복 문서의 조항들을 이해했는지 묻는 질문에 요들은 "네"라고 답했다.

항복 문서는 독일이 장악하고 있는 '육상과 해상과 공중의 모든 군대들' 연합국원정군최고사령관과

소련최고사령관에게 동시에 무조건 양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항복 문서의 조항들을 준수하지 않는

독일 군대가 있다면 응분의 처벌을 받게 될 것이었다.

 

요들은 현지 시간으로 오전 2시 41분 첫 번째 항복 문서에 서명했고, 계속해서 다른 언어로 된 사본들에

서명했다. 그런 다음 그는 결과를 알리기 위해 자리를 뜨겠다고 알린 후 문서를 받아들고 이렇게 말했다.

 

 

이 서명으로 독일인과 무장 군대는 좋든 싫든 승자들의 손에 넘겨졌다.

5년 이상 지속된 이 전쟁에서 독일 민족은 세계의 다른 어느 민족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루었으며, 동시에 더 많은 고통을 받았다.

 

 

조약의 조인식이 끝나자마자 연합통신 기자가 엠바고를 어기고 전화로 급히 기사를 송고했다.

소련이 베를린에서 두 번째로 더욱 공개적인 항복을 연출한 다음날인

5월 8일은 유럽의 승전일로 공식 기념되었다.

 

요들은 이후 뉘른베르크에서 전쟁범죄로 재판에 회부되었고,

유죄를 선고받아 교수형에 처해졌다.

 

 

 

인용: 스콧 크리스텐슨 著 · 김지혜 譯 <세상을 바꾼 100가지 문서>

 

 

 

'자연 > 취월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차선가 현판식  (0) 2021.09.12
기록의 역사 (8)  (0) 2021.09.09
기록의 역사 (6)  (0) 2021.09.06
기록의 역사 (5)  (0) 2021.09.05
기록의 역사 (4)  (0) 2021.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