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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기록의 역사 (3)

갈릴레오의 대화록

Galileo's Dialogeu · 서양 역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

1632년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을 그린 갈릴레오의 도식은 우주의 중심에 있는 태양을 보여 준다.

1543년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 모델과 차이를 꼽는다면 이 도식에는 1610년에

발견된 목성의 위성 네 개가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지구가 아닌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이론을 제시하면서, 당대의 가장 위대한 과학자는 교회의 독단론을

날카롭게 조롱하는 그의 채치 있는 대화록에서 자신의 주장을 극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끝내 로마 종교재판소에 소환되었다.

 

1632년에 이르러 토스카나의 위대한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이며 철학자인 갈릴레이(1564~1642)는

망원경의 발명과 경이로운 여러 행성의 발견으로 이미 유명인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한 세기나 지난

태양 중심의 우주에 관한 코페릍니쿠스의 이론을 지지하는 그의 입장이 교회의 엄격한 교리와 일치하지 않았고

그래서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할 때까지 결론을 쓰지 않은 채 미뤄두었다.

 

그의 가장 강력한지지자인 ㅂ마르베리니 추기경 마페오가 교황 우르바노 8세로 선출되자 갈릴레오는 자신의

과학적 견해를 표현한다고 해도, 특히 자신의 주장을 익살스럽게 표현한다면 박해를 받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라틴어가 아니라 그의 고향 사투리인 코스카나어로 글을 쓴 갈릴레오는 세 사람의 '가공인물' 사이에 오고 간

재치 있고 불경한 대화 형태로 500쪽 분량의 책을 썼다. 그들은 지구의 움직임, 천체의 조직과 바다의 조수간만

에 관한 나흘간의 합리적인 토론에 몰두했다. 그 대화는 베네치아에서 있었고, 그곳에서 조류의 작용은 중요한

관심사였다. 세 명의 가공인물은 다음과 같다. 학자인 살비아티는 갈릴레오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고 있었다.

사그레도는 진실을 추구하는 부유한 속인으로, 처음에는 그런 문제들에 대해 중립적이었지만 이성을 통해 확신

을 얻게 된다. 그리고 심플리치오는 프톨레마이오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보수적 추종자로, 고집스럽게 교회의

교리를 고수한다. 코페르니쿠스가 1543년 그의 이론을 출판할 때까지 도전받은 적 없었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관은 태양이 아닌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 두었다.

 

시적이기도 하고 교훈적이기도 한 보통의 언어로 들려주는 유쾌한 만남의 이야기는 마음이 편협하고 사고가

합리적이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뼈 있는 말로 장식되었다. 조류에 관한 대화의 마지막 부분은 교회의 교리를

공격하며, 바보의 입으로 교황의 말을 하게 했고, 그리하여 교황을 조종했기 때문에 가톨릭의 성직 계급을 특히

자극했다. 교황 우르바노는 갈릴레오가 교회의 가르침에 반하는 그런 작품을 썼다는 소식에 격노했고, 인흔의

교수 갈릴레오를 성청으로 끌고 와 가능한 고문을 가하라고 명령했다. 로마에서 기나긴 재판이 이어지고, 갈릴

레오는 '심각한 이단 혐의'을 받았으며, 공개적으로 주장을 철회할 것을 강요당했다. 그의 글과 가르침은 금지되

었고 여생 동안 가택연금을 선고받았다. 비록 책은 금서 목록에 올랐지만 갈릴레오의 폭발력 있는 《두 개의 중요

한 세계론에 관한 대화》의 불법복사본이 암시장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서양사상에서 가장 충격적인 작품

운데 하나로 여겨지게 되었다.

 

교회로부터 모욕당하고 불신당한 갈릴레오는 시력을 잃고 1642년에 사망했다.

그의 재판 진행과 주장의 철회에 관한 서류들은 바티칸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 이 책의 초판본은

주요 도서관 몇 곳에 소장되어 있다.

 

 

 

 

찰스 1세의 사형집행영장

Executi0n Warrant of Charles 1  · 피의 복수의 서막

 

찰스 1세의 운명을 결정하고, 뒤이은 올리버 크롬웰의 통치를 이끈 문서.

크롬웰의 서명은 왼쪽 끝에서 볼 수 있다. 1660년 왕정복고에 이어 사형집행영장은 그 영장에

서명한 '국황 시해자' 모두를 가려내 박해하는 데 사용되었다.

 

영국내전은 2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올리버 크롬웰이 승리를 거둔 후 청교도들은 찰스 1세가

"이 나라의 오랜 법과 자유의 근간을 완전히 뒤엎고자 한" 그리고 "그 땅에서 내전을 시작하고 지속한 사악한 사람으로"

판명되었다고 주장했다. 의회의 잔당들은 찰스 1세를 중대한 반역죄로 재판에 회부했고, 그의 아들은 망명길에 올랐다.

혼란의 와중에 일단의 위원회 위원들이 국왕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사형집행영장은 이미 작성되었지만, 처형 시기와

장소는 비워두었다. 결국 판결에 찬성한 67명의 위원회 위원 가운데 59명이 영장에 서명했다.

많은 이가 후회하며 살아가게 될 사건의 시작이었다.

 

1649년 1월 30일 추위가 매섭던 오후에 죽음을 앞둔 왕은 단두대에 몸을 굽혔다.

왕이 어찌나 절도 있고 품위 있게 행동했던지, 처형자의 도끼로부터 왕의 목이 떨어져 나왔을 때 군중은 탄식했다.

 

국왕 시해가 있은 후 반역자들의 정부가 전복될 때까지 11년 이상 투쟁이 지속되었고, 그 후 시해된 국왕의 아들

찰스 2세는 의회의 사형집행영장을 사용해 복수에 들어 갔다. 가로세로 17×8인치 크기의 양피지 조각으로 된

그 문서에는 왁스 봉인과 아이언 갤 잉크로 쓴 손 글씨가 포함되어 있다. 비록 곳곳에 손상된 부분이 있었지만

왕의 대리인들이 글씨, 그러니까 59개의 서명을 읽기에는 충분했다.

 

올리버 크롬웰을 포함해 주요 음모자 가운데 세 사람은 이미 죽은 뒤였는데, 그들의 시신을 파내 수의를 매달고

나중에 그들의 머리를 못으로 박아 전시했다. 달아난 열 명은 추적하여 반역죄를 선고한 후 교수형, 창자를 뽑는 형, 

몸을 4등분하는 형을 가했다. 다른 이들은 살해되었고, 또 다른 열아홉 명은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찰스 1세의 참수형은 영국인들이 그들 자신, 왕, 내전과 자신의 나라를 보는 시선을 바꾸어놓은 사건이었다.

역사가들은 충격적인 처형이 강력한 군주국의 이미지를 산산조각 냈다고 주장한다. 잉글랜드 교회는

1월 30일을 영구 애도일로 정했다. 오늘날 이 영장은 의회기록관에 보존되어 있다. 학자들은 계속해서

이 문서가 구성된 방식, 특히 영장 발부와 서명 시기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아이작 뉴턴의 문서들

Isaac Newton Papers · 역사상 가장 타월한 지성을 이해하다

1660~1727년

 

이 두 페이지는 1660년대 중반부터 말에 이르는 노트에서 발췌한 것으로,

이후 미분 이론으로 발전한 뉴턴의 초기 수학적 사고를 보여준다.

뉴턴은 가끔씩 수중에 있던 작은 종잇조각에 상세한 메모와 계산을 적기도 했다.

 

 

아이작 뉴턴(1642~1727) 경은 단연 계몽 시대의 가장 위대한 과학자이자 수학자이며 자연철학자였다.

우주의 중력에 대한 수학적 설명으로 가장 잘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미적분, 고전 역학, 광학, 색채 등 여러

분야에서 거둔 업적으로 존경받아 과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학자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알려

지지 않은 뉴턴의 글들 가운데 많은 것이 그에 대한 평가를 엇갈리게 만드는 '다른 주제들'을 탐구한다.

 

아이작 뉴턴의 문서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 이유로 흥미롭다.

유언장도 남기지 않은 채 죽어가면서도 뉴턴은 거의 1천만 개의 단어로 추정되는 어마어마한 양의 육필 원고,

편지 그리고 그 밖의 보고서들을 남겼다. 과학적으로도 수학적으로도 천부적 재능을 보여준 그 기념비적인

작업물들은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나 연금술, 신학, 연대기를 다룬

그의 업적 가운데 많은 부분은 수 세기 동안 베일에 가려진 채로 남아 있다.

 

뉴턴의 문서에 접근했던 사람들 가운데에는 비정통적인 부분들에 대한 그의 폭넓은 관심 때문에 등을 돌린

이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성삼위의 부정처럼 '이교적인' 종교적 관념들의 추구와 함께 성서에 대한 뉴턴의

법의학적 분석은 많은 종교적 순응주의자들을 당혹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연금술 따위의

'기이한' 관념들에 대한 뉴턴의 집착 때문에 그의 과학적 판단에 의문을 품었다. 그에 따른 결과의 하나로, 뉴턴이

남긴 방대한 문서의 흔적들이 전부 정치적 이유들로 수 세기 동안 공개되지 못했고, 까다로운 빅토리아 시대 내내

그런 상태로 남아 있었다. 어떤 탁월한 역사가는 뉴턴의 옛 수학 노트들 가운데 일부가 걱정스러운 신학적 자료들과

뒤섞여 그의 천재적 재능의 학제적 성격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놀랐다.

 

"나는 어떤 가설도 만들지 않는다. 현상에서 연역되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가설로 불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험 철학에 가설을 위한 자리는 없다. 그것의 특징이 수학적이든, 물리학적이든,

신비주의적이든, 기계적이든 간에 관계없다"고 그는 썼다.

 

뉴턴은 케임브리지대학교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공부했으며, 수학과 루카스 석좌

교수를 역임했다. 그러므로 1872년 뉴턴의 친척 가운데 한 사람이 그의 수학과 과학 원고 더미를

케임브리지대학교 도서관에 기증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뉴턴의 문서철을 둘러싸고 오랫동안 나타났던 조심성과 검열이 디지털 시대에는 변하고 있는 듯하다.

케임브리지대학교는 고전적인 뉴턴이 작품들을 포함한 방대한 기록들을 온라인에 게시하고 있다.

그리고 웹을 기반으로 한 또 다른 진취적 작업으로 서섹스대학교를 거점으로 한 '뉴턴기획'이

뉴턴의 가장 중요한 라틴어 원문들을 활용할 수 있게 번역본을 만들고 있다.

 

 

 

 

잉글랜드 권리장전

English Bill of Rights · 영국 헌법의 기초가 되는 역사적 법률 문서

1689년

 

양피지 위에 아이언 갤 잉크로 쓴 권리장전은 '의회의 특권'을 확립했다.

그것은 의회의 잦은 소집, 자유선거와 의회 내 언론의 자유를 허용했다.

 

 

피로 얼룩진 수십 년의 갈등이 끝난 후 명예혁명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이 문서는

왕권의 새로운 한계를 명확히 설명하고 의회의 우위를 확립하면서,

모든 잉글랜드인은 법 아래 동등한 권리를 지닌다고 주장한 의회 법령이다.

 

제임스 2세(잉글랜드의 마지막 로마 가톨릭 군주)는 폐위되었고, 1688년 명예혁명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월리엄 3세와 메리 2세는 공동 군주로서 왕위를 이을 예정이었다. 의회 의원들로 구성된 소규모 위원회가

잉글랜드 지배자들의 오랜 병폐였던 몇 가지 핵심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문서를 입안했다.

 

위원회는 제임스 2세가 왕위를 '양위'했기 때문에 의회가 그 후계자를 지명하고, 제임스 2세가 저질렀던

것과 같은 군주의 권력 남용을 막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고 선포하는 문서를 작성했다. 법령은 의회의 권한과

인민의 시민권을 명시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계몽사상가 존로크가 주장한 정치적 이상들 가운데 일부를

반영하고 있었다. 로크는 제임스 2세가 영국을 통치하는 동안 네덜란드에 망명해 있었다.

 

1689년 12월 16일에 통과된 권리장전은 제임스 2세가 저지른 열두 가지의 구체적인 잘못을 명시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의회가 반드시 지녀야 한다고 주장한 권리들을 확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 법령은 왕권에 일정한

제한을 가했고, 왕이 법을 정지시키거나 새로 만들거나, 세금을 인상하거나, 평화 시 상비군을 증대하는 일에

의회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명시했다. 인민이 박해받지 않고 왕에게 청원할 권리를 부여받은 것이다. 의회는

자주 개회해야 한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교도에게는 왕위 계승이 금지되었다.

 

새로운 군주들은 권리장전을 포함한 의회의 법에 복종을 맹세할 것을 요구받았다. 그리고 군주들은

"우리는 당신이 우리에게 부여한것을 감사히 받아들인다"고 말하고 그에 따랐다. 군주들은 또한 프로테스탄트

종교의 보호를 맹세해야 했다. 이 문서는 영국인의 권리와 자유의 근간이 마그나 카르타와 합쳐졌고, 나중에

미국독립선언문, 프랑스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미국권리장전과 그밖에 시민권의 다른 이정표들을

만드는 데 영감을 주었다. 이 문서는 영연방의 모든 영역에서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국부론

The Wealth of Nations · 경제학의 출발점

1776년

 

《국부론은》 그 저자에게 근대 경제학의 아버지라는 평판을 안겼다.

초판본은 오늘날 10만 달러 이상에 판매되기도 한다.

 

 

자신의 걸작을 들고 있는 애덤 스미스.

초판본은 6개월 만에 매진되었다.

 

 

초기 산업혁명의 경제 · 사회적 영향을 연구한 후, 스코틀랜드의 정치경제학자이자 도덕철학자인 애덤 스미스는

부의 본질과 원인에 관해 혁명적인 새로운 이론을 제시했다. 그는 사람들이 정부의 간섭 없이 더 나은 지위를

얻을 수 있게 허용하는 것만으로 모두에게 이로울 것이라고 주장한다.

 

18세기 후반 동안 잉글랜드를 포함한 유럽 여러 지역에 퍼져 있던 지배적인 정치경제 이론은 중상주의였다.

그것은 국가의 부가 그 국경 안에 머무는 금과 상품의 양에서 도출된다는 주장이었다. 중상주의 체제는

가치 있는 식민지와 강력한 상단의 확립, 그리고 국가의 무역 우위를 가능하게 해줄 유용한

국내 산업의 개발을 수반했다.

 

이는 경쟁 국가들을 압도할 만큼 국가의 권력을 증대하기 위해 국가 경제에 대한 정부의 상당한 규제를

요구했다. 그러나 1776년 스코틀랜드의 도덕철학자 애덤 스미스(1723~900는 노동에 근거한 전혀 다른 기준으로

국가의 부를 규정한 새로운 정치경제 이론을 주장했다. 출판사에 보내기까지 15년 이상 원고를 작성하느라

고군분투한 스미스는 《국부의 본질과 원인에 관한 탐구》라는 제목으로 900쪽에 이르는 대작을 1776년 3월 9일에

선보였다. 이때는 사회정치적으로 대격동의 시기, 다시 말해 계몽사상의 절정기이자 산업혁명 초기였으며 미국 혁명

의 분출기였다. 그리고 그의 새롭고 체계적인 정치경제는 중요한 순간에 근대 자본주의와 경제의 태동을 알렸다.

 

중상주의 이론과 반대로, 스미스는 자유무역이 노동에 더 많은 부의 창출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국가의 부를 증대

시킨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중에게 개선의 열쇠는 노동 분업과 다른 수단에 의한 노동력, 생산성, 노동인구의 증대

라고 주장한다. 이기적인 행동은 부도덕하다는 그리스도교의 전통과 결별한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쓴다.

"인간의 이기심은 신의 섭리다." 정부가 자유로운 경쟁에 개입하는 것을 막기만 해도 시장은 산업의 문제들을

해결할 것이며, 최대 효용이 달성되고 부가 증대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미스의 책은 자본주의의 선언서가 되어버렸지만 그가 비판적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우리의 상인과 주인들은

가격을 높이고 상품 판매를 감소시키는 고임금의 여러 나쁜 효과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다."  "그들은 높은 이윤의

나쁜 효과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거둔 이익의 치명적 효과에 관해서는 침묵한다.

그들은 오직 다른 사람들의 치명적 영향에 관해서만 불평한다." 

 

스미스 생전에 국부론의 5판이 발행되었고, 그는 부자가 되었으며 명성을 얻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원고를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다른 어떤 소유물보다 소중히 여겼다. 그러나 그의 유지에 따라 원본은 1790년 스미스

사후에 소각되었다. 자신의 이론을 지키려는 이기심이 초래한 행동이었다.

 

경제학에서 그렇게 큰 영향을 준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장 바티스트 콜베르, 데이비드 리카르도,

토머스 맬서스는 모두 스미스의 책이 그들의 사유를 형성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마거릿 대처는 핸드백 안에 이 책의 사본을 넣고 다녔다.

이 작품과 스미스의 이론은 계속해서 찬사와 비판을 받고 있다.

 

 

 

 

미국 헌법

Constitution of the United States · 미국의 근간이 되는 문서

1787년

 

펜실베이니아 주의회 보조 서기 제이콥 살루스는 30달러를 받고

이 문서의 4천 543자를 모두 "또박또박 옮겨 적었다.."

 

 

5개월에 걸친 긴 논의 끝에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필라델피아 제헌회의는 다섯 쪽짜리 양피지 문서를

만들었고, 참석한 55명의 대표 가운데 39명이 이 문서에 서명했다. 신생 국가의 정부가 어떻게 운용될지를 설명한

미국 헌법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우리 인민은 ······."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문서, 그리고 세계를 변화시킨 중요한 법적, 행정적 문서는 미국의 독립 전쟁을 종식시킨

파리 조약 이후 4년이 지난 1787년 9월 17일에 조인되었다. 서명자들 가운데는(로드아일랜드를 제외한) 13개 식민지

모두에서 파견된 대표들이 포함되었으며, 제헌회의의 가난한 서기 윌리엄 잭슨도 포함되었다. 그는 이 문서의 권위를

검증하며 마흔 번째 서명자가 되었다. 미국 헌법이라는 명칭을 얻은 이 문서의 목적은 각 주를 대표하는 제대로 된

연방정부의 윤곽을 그리는 것이었다. 폭넓은 논의를 바탕으로 필라델피아 제헌회의에 파견된 대표들은 기존 연합규약

에 수정조항을 덧붙이는 것만으로는 새로운 국가에 충분치 않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리하여 그들은 완전히 새로운

구조의 최상위 법을 처음부터 만들어내야 했다.

 

그 결과로 만들어진 문서는 세 갈래, 즉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가 행사할 권력의 분립 원칙을 명확히 했다.

4조부터 6조까지는 연방의 개념, 그리고 중앙기구와 관계에서 각 주의 권리와 책임을 명기했다.

그리고 7조는 헌법의 인준 절차를 확립했다.

 

미국 헌법은 공포된 후 27개의 수정 조항이 추가되었다. 처음 10개는 권리장전으로 알려진 것으로

1791년에 발효되었으며, 개인의 자유와 정의에 대한 구체적인 보호를 확고히 하였고 정부 권한에 제한을 두었다.

나머지 조항들은 대부분 노예제에서 해방될 권리, 여성의 투표권 등 새로운 민권을 규정하고 있다. 법원은 거대하고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하나의 기구를 확립했다. 그 기구의 해석은 헌법의 의미에 추가되고, 미국이 지속적으로

기능할 수 있게 헌법에 하나의 '살아 있는 문서'를 만들었다. 미국 헌법은 세계 곳곳에서 다른 헌법과

선언서들의 발전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미국의 근간이 되는 문서로서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양피지로 된 이 문서의 원본은 1846

년 한 출판업자가 찾아낼 때까지 여러 해 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전쟁중이던 1812년 영국인들이 워싱턴을 불태웠을

때에도 다행히 그 문서는 파괴되지 않았다. 1883년에 또 다른 추적자가 국무부, 전쟁부, 해군부 공동 건물의 벽장

바닥에 있는 작은 철제 상자에서 보관되어 있던 양피지 두루마리를 찾아냈다. 결국 의회 도서관에 미국독립선언문과

함께 보관되었고, 나중에 포트 녹스로 이전되었다. 현재는 헬륨 가스 안에 보관되어 있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Declaration of the Rights of Man and of the Citizen · 새로운 국가로 향하는 첫걸음

1789년

 

이 그림은 장 자크 프랑수아 르 바르비에가 1789년에 그린 것으로,

가장 널리 복제되어 보급된 프랑스 인권선언문의 판본이다.

 

 

미국 혁명에서 영감을 받은 일단의 프랑스 귀족들이 라파예트 장군의 지휘 아래 자유, 재산, 안전, 억압에 대한

저항에 관해 확립된 보편적 권리들을 선포한 정치 선언문(프랑스 혁명의 근거가 된 글)을 작성했다.

 

1789년 7월 11이, 국왕 루이 16세에 맞선 무장 반란이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라파예트 장군(1757~18340은

미국 혁명에서 승리한 반란군을 도운 프랑스군 장교로서, 새로 결성된 국민의회에 손으로 쓴 짤막한 문서 하나를

가져왔다. 그는 다른 프랑스인 몇 사람과 그의 친한 친구이자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 토머스 제퍼슨의

도움을 받아 그 문서를 작성했다.

 

독립선언문의 주 저자이기도 한 제퍼슨은 아메리카 헌법을 위한 권리장전을 오랫동안 주창해왔다.

7월 8일 제임스 메디슨이 뉴욕에서 그 조항 가운데 일부르 도입하면서, 이제 그 노력들이 결실을 맺을 참이었다.

제퍼슨과 라파예트는 제퍼슨이 파리에 머무는 동안 프랑스를 위한 유사한 선택지들을 노의한 적이 있었다.

 

프랑스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은 루소와 몽테스키외가 꿈꾸었던 많은 이상들을 구체화했다.

그리고 미국의 독립선언문과 헌법이 그랬던 것처럼, 그것은 시민들이 기댈 수 있는 "간단하고 거스를 수 없는

원칙들"과 함께 "자연적이고, 양도할 수 없는 신성한" 권리들을 규정했다. 17개 조항가운데 첫 번째는

"인간은 권리에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주장이었다. 이 문서는 "사회적 차별은 일반선 위에서만

확립될 수 있다" 그리고 "정치적 결사의 목적은 인간의 자연적이고 절대적인 권리를 보존하는 것이다" 라고

선언한다. 그 권리는 "자유, 재산, 안전, 억압에 대핝 저항"으로 규정된다. 주권은 개인이 아니라 국가에 있다.

"자유는 사회가 해로운 행위들을 금지하는 일만" 할 자유에 있다. "법은 일반의지의 표현이다." 그리고 모든

시민은 정부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임의체포와 구금은 불법이다. 용의자는 유죄가 확인될 때까지 무죄를 추정한다.

사람들은 그들의 의견이나 종교적 시각 때문에 박해받아서는 안 된다. "따라서 모든 시민들은 자류롭게 말하고

글을 쓰고 출판할 수 있지만 법이 규정하는 바에 따라 이런 자유의 남용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정부의 비용은

동등하게 부담해야 한다. 시민은 공무원들에게 회계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 법의 지배와 권력의 분립 모두 필수적

이다. 그리고 재산은 "침해할 수 없는 신성한 권리"로 생각한다.

 

이 선언문은 1789년 8월 26일에 국민의회의 승인을 받아 프랑스 혁명의 근간이 되었으며,

새로운 국가 헌법을 향한 첫걸음이 되었다. 손으로 쓴 원본은 루브르에 보관되어 있다.

 

 

 

 

루이지애나 매입

Louisiana Purchase · 1에이커당 4달러에 미국으 두 배로 불리다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의 범위를 보여주는 지도.

조약으로 보장된 영토에는 오늘날의 루이지애나, 아칸소, 오클라호마, 캔자스, 콜로라도,

아이오와, 네브래스카, 와이오밍, 몬태나, 노스다코타와 사우스다코타 주가 포함되었다.

 

 

뜻밖의 상황에서 신생 미국은 나폴레옹으로부터 방대한 프랑스의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헐값에 사들여

크기를 두 배로 늘렸다. 그런데 제퍼슨 대통령의 유례없는 매입 문서는 대법원과 의회에서 지지를 받게 될까?

 

1801년 임기를 시작한 직후 새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직면한 중요한 국가 안보와 무역의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미시시피 강, 특히 뉴올리언스 항구(미국이 아닌 프랑스 소유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에 관한 것이었다.

 

나폴레옹이 북아메리카에서 프랑스 식민 제국의 부활을 은밀히 모색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제퍼슨은

그 지역과 관련해 미래의 어떤 갈등도 피하고 싶었고, 미국의 우방이자 동지인 프랑스와 관련된 갈등은 특히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파리 공사 로버트 리빙스턴에게 미시시피 남부 지역의 토지를 사들이는 거래를 시도하고,

실패할 경우 프랑스롭무터 미국의 자유로운 항해와 보관소에 대한 권리를 결정적으로 보장받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제퍼슨은 또한 200만 달러에서 1천ㅁ나 달러 사이의 액수로 뉴올리언스와 서플로리다의 매입을 협상하고자 그의

친구 제임스 먼로를 프랑스에 전권대사로 파견했다. 먼로는 프랑스에 도착해 나폴레옹이 다른 곳에 필요한 자금

때문에 북아메리카 제국이라는 그의 꿈을 포기한 사실을 알았다. 상황이 전개되면서, 프랑스인들이 루이지애나

영토 전체를 매입하는 데 얼마를 지불할 의향인지 물어왔을 때 미국인들은 크게 놀랐다.

 

합의는 신속하게 도출되었다. 루이지애나 매입 합의서로 알려진 공식 문서는 양여 조약과 거래의 재정적 측면을

설명한 두 개의 협정서로 이루어졌다. 1803년 4월 30일 파리에서 프랑스 측 대표 프랑수아 바르베 마르부아와

미국 측 대표 리빙스턴과 먼로가 조약 서류에 서명했다.

 

뉴올리언스 항구와 플로리다에 1천만 달러를 지불하는 대신 서쪽으로 미시시피 강에서 로키 산맥에 이르는

82만 8천 평방마일이 넘는 엄청난 영토에 1천 500만 달러를 지불했다.

그 지역은 서유럽 전체보다 더 컸고, 사실상 1에이커 당 4달러의 가격에

미국 전체 크기를 두 배로 늘리는 일이었다.

거래 소식이 바다를 건너 워싱턴에 도착하는 데 몇 주가 걸렸고, 이 거래는 7월 4일이 되어서야 발표되었다.

 

신생 국가의 헌법에는 그런 매입 관련 조항이 없었기 때문에 루이지애나 매입 조약은

대법관 존 마셜의 최종 승인과 상원의 인준을 받기까지 면밀한 검토를 거쳤다. 하원 역시 그 예산을 승인했고,

미국 역사상 폭력을 동원하지 않고 가장 큰 토지를 획득하는 일은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메리워더 루이스의 지출명세서

Meriwether Lewis of Expenses · 신세계 북미 탐험에 관한 기록

1803년

 

이 초기 구매 목록(위쪽)에 '인디언 선물'로 배정된 116.68달러는 루이스의 최종 지출 목록에서

696달러로 올랐다. 알코올이 값진 상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루이스는 원정을 시작하기 전에

대원들의 식사(위스키 120갤런)에 더해 '강한 독주'(브랜디) 30갤런을 구입했다.

 

 

윌리엄 클라크와 함께 태평양을 향해 서쪽으로 가는 장대한 육로 탐험을 시작하기 전에 제퍼슨의 부하들은

의회가 구매를 승인해야 할 모든 장비와 보급품의 목록을 상세하게 준비했다.

전체 예산의 3분의 1 가까이가 '인디언 선물'로 쓰일 계획이었다.

 

루이지애나 매입을 위한 최종 협상이 여전히 진행 중일 때 제퍼슨 대통령은 또 다른 대담한 계획을 진행했다.

미시시피 강 서쪽 지도에 실맂니 않은 방대한 북아메리카 대륙의 탐험에 관한 계획이었다.

1802년 가을에 그는 비서이자 제자인 메리웨더 루이스(1774~1809)에게 원정대의 인솔을 맡겼다.

천문학, 항해, 측량, 지리학, 식물학, 동물학, 공학, 생물학, 의학, 글쓰기, 정치, 예술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루이스는 해외의 강대국들이 그들의 활동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기밀을 유지하며

대통령과 은밀히 교신하기 위해 암호 사용법을 익혔다.

 

루이스는 탐험의 사소한 것들까지 기록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임무를 위한 연방 기금을 받기 위해 우선 그는 장교 한 사람과 열 명에서 열두 명의 병사들이 황무지를

횡단하는 데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고 지원하기 위한 예산을 바탕으로 비용을 산정해야 했다.

 

그의 상세한 계산에 따르면, 의복, 총기, 탄약, 의료용품, 캠핑 용품, 과학 도구들에 2천 500달러,

'인디언을 위한 선물'에 696달러가 책정되었다. 특히 이 점은 인디언들과 거래에서 영국, 프랑스, 스페인보다

더 유리한 위치를 얻겠다는 희망과 더불어, 아직 알려지지 않은 서부 지역의 아메리카 인디언 부족들과 외교

관계를 여는 데에서 루이스의 임무가 갖는 중요성을 제퍼슨이 인정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대통령은 루이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당신들이 지나게 될 땅의 주인들에게

우리가 그들의 아버지와 친구가 된다는 사실을 알리시오."

 

인디언 관련 업무에 대한 제한된 이해를 바탕으로 제퍼슨은 우호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의례적인

선물을 주는 일이 따를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미국인들이 어떤 대접을 받게 될지 알 수는 없었다.

1803년 초 의회의 승인과 함께 루이스와 윌리엄 클라크 장군은 디스커버리 원정대로 불리게 될 탐험대의

수장으로 공식 임명되었다. 원정은 1803년 5월 미시시피 강에서 시작해 로키 산맥을 넘어 1805년 11월 7일

태평양이 보이는 곳에 도달할 때까지 서쪽으로 진행되었다. 그런 다음 그들은 1806년 9월 23일에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로 돌아왔다. 당시에는 명쾌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원정대는 육로로 대륙을 횡단하는 일이

쉽다는 것을 입증했고, 24개 이상의 원주민 부족들과 만났으며, 영토의 지도를 그리고 그 땅에 대한

법적 권리를 확립했다. 그러나 서부 영토를 가로지르는 수로를 찾는 임무는 실패했다.

 

루이스는 1809년 총상으로 사망했다. 전쟁부에 맞서 그가 설계한 예산의 지급을 주장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가 자살했는지 살해되었는지는 끝내 확인되지 않았다.

메리웨더 루이스 문서는 미국국립기록관에 보존되어 있다.

 

 

 

 

인용: 스콧 크리스텐슨 著 · 김지혜譯 <세상을 바꾼 100가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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