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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기록의 역사 (2)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Martin Luther's 95 Theses · 종교 개혁의 발단이 되다

1517년

 

 

성당의 옆문에 게시되었던 원본은 남아 있지 않지만, 전단 형태의 95개조 반박문 두 개

(하나는 뉘른베르크에 나머지 하나는 라이프치하에)가 보존되어 있다.

또한 7쪽 분량의 4절판 책은 하버드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소속의 한 수도사가 작센의 어느 성당에 가톨릭교회의 관행을 비판한

95개의 조항이 담긴 문서를 계시했다. 그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 일은 세계를 뒤흔들며

유럽의 종교 개혁으로 알려지게 될 일련의 사건을 촉발했다.

 

신성로마제국의 일부였던 작센의 아이슬레벤(현재는 독일)에서 부유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마르틴 루터

(1483~1546)는 경건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수도사이자 학자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는 도발적인 문서를 작성하여 세계사의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쇠망치와 못을 사용해 비텐베르트 캐슬 성당 옆문에 문서 하나를 게시했는데,

교구에 경고하기 위한 것이었다. 라틴어로 'Dsputatio prodeclaratione virtutis indulgentiarum'

('면벌부의 권능과 효험에 관한 95개의 반박')이라고 쓴 그의 주장은 교회 안에서 '논쟁'을 유발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의 '신경'을 자극했다.

 

"진실에 대한 사랑에서, 아울러 진실을 밝히려는 열망에서, 존경스러운 신부이자 신학 석사 그리고

비텐베르크의 평범한 강사인 마르틴 루터는 다음의 주장들을 옹호하고 그 주장들에 관해 논의 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자리에 참석할 수 없고 그와 토론할 수 없는 사람들이 참석하지 않은 채로 토론할 수

있게 할 의도다" 라는 말로 시작한다. 루터는 계속해서 그의 95개 조항을 늘어 놓는다.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시길, '회개하라'(마태복음 4장 17절), 주께서는 믿는 자들의

삶이 되어야 한다고 명하셨습니다 ······."

 

길게 늘어놓은 그의 설명은 가톨릭교회의 모든 성직자들을 공격했으며 친척의 중용, 고리대금업, (면죄

이후에 저지른 죄로 인한 한시적 처벌, 특히 연옥에서의 참회의 사면' 이라고 교회가 규정한) 면죄부

판매를 포함해서 성직자들이 부패와 악행으로 얼룩졌다고 주장했다. 또한 가톨릭의 핵심적인

관행과 신앙의 일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루터는 면벌부 판매를 책임지고 있는 주교와 추기경에게 자신의 반박문 사본을 보냈다.

많은 교회 성직자들이 재정적 지원을 얻는 수단으로 면벌부 판매에 의지해왔다는 사실은

그 문제를 간접적일지라도 누구든 제기해야 할 까다로운 주제로 만들었다. 수도사 루터가

그 관행이 고해와 참회의 본래 의도를 위반하는 것이라고 대담하게 주장하며,

다른 당황스러운 비판들도 함께 늘어놓은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다.

 

몇 개월 안에 그의 통렬한 비난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고, 유럽 전역에 회자되었다.

루터의 문서는 서유럽의 그리스도교 세계 안에서 분열에 불을 지폈고, 가톨릭 정통 교회에

반기를 든 루터와 다른 그리스도교 개혁가들은 신교도, 프로테스탄트로 알려지게 되었다.

 

 

 

 

보름스 칙령

Edict of Worms · 반가톨릭 정신에 기름을 붓다

1521년

 

 

보름스 공의회 직후 발행된 이 '요약본' 보고서는 왼쪽에 요한 에크를,

오른쪽에 루터를 두고 앉아 있는 커를 5세를 보여준다. 루터의 책들이 가운데에 있다.

 

 

보름스 칙령의 속표지.

이 공식 통고는 가톨릭교회에서 루터의 파문을 요구했다.

그리고 루터에게서 공정한 재판의 권리를 박탈했으며,

그의 가르침을 유포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는 독일의 모름스에서 칙령을 발표해 교회의 비판자인 마르틴 루터를 이교도로

규정하고, 그의 글들에 대해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칙령은 정반대의 효과를 냈다. 커지고 있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안에서 반 가톨릭 인사인 루터의 지위를 격상시켰던 것이다.

 

1521년 5월 25일에 황제 카를 5세는 보름스 칙령으로 알려진 공식 법령을 선포했다.

"저주스러운 오랜 이단을 되살려낸 자"이자 "새로운 이단을 고안한 자"로 규정했고,

루터의 모든 책들을 불태우고 그의 재산을 몰수할 것과 체포를 명령했다.

 

그러나 루터는 계속해서 교황의 권위를 무시했고 그로 부터 멀어졌다.

얼마간 숨어 지낸 후 그는 비텐베르크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자신의 개혁주의적 이상에 기초한

새로운 교회를 짓는 데 전념했다. 그는 수녀와 결혼하여 여섯 자녀를 두었다.

 

루터의 교회는 그 지역에서 중요한 신앙이 되었고, 그 인기는 확산되었다.

결국 세속 당국은 보름스 칙령을 시행하려는 시도가 현명하지 못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루터교는 계속해서 북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칼뱅주의와 다른 여러 프로테스탄트

종파들을 위한 반가톨릭의 씨앗을 뿌렸다. 마르틴 루터는 1546년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유명한 문서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했던 교회의 설교단 아래에 묻혔다.

 

 

 

 

마젤란의 항해 일지

Journal of Magellan's Voyage · 최초의 세계 일주

1522~1525년

 

 

바에네케 희귀본 도서관에 소장된 피가페타 항해일지 필사본의 한 페이지.

마젤란의 세계 일주에 관한 피가페타의 기록에는 23개의 지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지도에는 남아메리카의 남쪽 끝과 원정 중 발견되어 '마젤란 해협'이라 불리는 곳이 나타나 있다.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학구적인 동료 선원 한 사람이 대서사시 같은 그들의 세계 일주 항해,

마젤란의 목숨을 앗가가고 세계사의 경로를 바꿔놓은 그들의 장엄한 여행에서 겪은 사건들을 상세히 기록했다.

3년의 호된 시련 끝에, 배에 올랐던 237명의 선원 가운데 18명만이 살아 돌아왔다.

 

페르디난드 마젤란(1480~1521)은 포르투갈의 탐험가로, 국왕 카를로스 1세(카를 5세)의 명령에 따라

에스파냐를 위해 중요한 인도 원정에 나섰다. 1519년 8월에 총 237명이 다섯 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출발했다.

선원 대부분은 에스파냐인이었지만, 서로 다른 계급의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포르투갈인, 이탈리아인, 그리스인,

프랑스인도 섞여 있었다. 그 가운데 마젤란과 가장 가까운 사이였던 사람은 그의 처남이자 기한계약고용인이던

안토니오 피가페타(1490 · 1491~1534)였다. 그는 베네치아 출신의 학자로 마젤란의 조수 역할을 했고, 그들이

처음 원주민과 접촉했을 때 마젤란의 밀사 역할을 했다. 그는 또한 그 원정의 공식적인 연대기 작가였다.

 

마젤란은 항해 도중 필리핀에서 원주민들과 벌인 전투에서 살해되었다. 피가페타는 슬퍼하며

이 일을 설명했고,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을 맺었다. "그들은 우리의 진정한 안내자를 살해했다."

지휘관이 사망한 후, 나머지 원정을 이끈 사람은 후안 세바스티안 엘카노였다.

두려움, 굶주림, 질병, 전쟁, 살인의 악몽을 견디고 살아남은 사람은 인원의 7퍼센트뿐이었다.

쇠약해진 엘카노와 피가페타를 포함해 비쩍 마른 그의 선원들은 출발한 지

정확히 3년 만에 유일하게 남을 배를 타고 세비야에 도착했다.

 

많은 역사가들은 마젤란의 원정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항해라고 여긴다.

그 항해는 유럽을 출발해 서쪽으로 이동해 아시아에 도달한 최초의 사례였다.

또한 악조건 속에서도 4만 3천 400마일이라는 경이적인 거리를 항해해 지구를 일주한

이 최초의 항해는 선박조종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이었다.

 

비록 원본은 유실되어 남아 있지 않지만, 1522년부터 1525년 사이에 피가페타가 쓴 탁월한 설명은

네 개의 필사본으로 남았다. 프랑스어로 쓰였고, 여러 장으로 구성되었으며, 아름다운 지도가

풍부하게 수록된 가장 정교한 사본이 예일대 바이네케 희귀본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놀랍게도 《마젤란의 첫 세계 일주 일지》는 18세기까지도 완간되지 않았다.

 

피가페타가 쓴 직접적이고 읽기 쉬운 글에는 탐험가들이 세계를 돌며 마주쳤던

장소와 문화 들 가운데 일부에 관한 매력적인 설명이 담겨 있다.

그 문서를 기록한 후 피가페타 자신의 운명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인디오 말살

Destruction of the Indies · 인간 보편의 권리를 말한 최초의 유럽인

1542년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의 '의견 진술서'는 1542년에 카를 5세에게 보내졌다.

이 문서에는 정복, 개종, 종속과 노예제를 포함해서 '신세계 인디오들'에 대한 에스파냐의 정책을 문제 삼고 있다.

 

 

 

라스 카사스의 《서인도 제도의 파괴에 관한 간략한 설명》 표지

 

 

한 콩키스타도르가 아메리카에서 자국의 무자비한 식민지 정책과 관련해 심경의 변화를 경험했다.

에스파냐의 원주민 학살과 노예화에 관한 그의 기록은 인디오들의 절멸을 막는 데 도움을 주었지만

또 다른 잔혹행위, 바로 아프리카 노예무역의 성장에 기여했다.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1484~1566)는 1502년 히스파니올라섬(현재의 도미니크 공화국과 아이티)으로

이주한 에스파냐 태생의 식민지 정착민이었다. 그의 부친 페드로는 콜롬버스와 함께 항해했다.

아들은 그곳과 서인도 제도의 다른 지역에서 노예 습격과 원주민 학살에 가담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목격한 수많은 잔혹 행위들에 소름이 끼쳤고 훗날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나는 여기서 살아 있는 것을 전혀 볼 수 없거나, 볼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없는 정도의 잔혹함을 목격했다."

 

1515년에 이르러 신세계에서 에스파냐가 자행한 일들은 불법이며 부당하다고 확신하게 된 라스 카사스는

그런 행위를 합법화하는 엔코미엔다 체제('위탁'을 뜻하며 국왕이 식민지 정복자들에게 원주민을 위탁하는 제도로,

정복자들은 원주민을 보호하고 종교적으로 교화하여 문명화하는 책임을 지는 대신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했다)

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는 1523년에 도미니쿠스회 수도사가 되었고, 자신이 직접 목격한 사건들을

토대로 인디언에 대한 끔직한 학대 행위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에스파냐 국왕인 카를 5세 앞에 나서서 직접 청원하기 위해 탄원서를 에스파냐로 가져갔다.

 

그의 청원에 감동한 황제는 1542년 11월 20일, 신법으로 알려진 일련의 조치들을 취했다.

그 법은 모든 인디오들을 노예로 취하는 것을 금지했고 엔코미엔다 체제의 점진적인 폐지에 착수했으며

히스파니올라, 푸에르토리코, 자메이카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인디오들을 강제 노역에서 면제시켰다.

황제는 또 일부 억압적인 식민 관료들을 해임했다.

그러나 개혁은 신세계로 돌아간 노예 소유주들의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비록 일부 비평가들은 라스 카사스가 아프리카 노예무역에 기여했다고 비난했지만, (그는 한때 서인도 제도

원주민들 대신 아프리카 노예의 사용을 옹호했다) 그는 결국 그런 관행에 대해서도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날 그는 노예제의 초기 반대자 가운데 한 사람이자, 보편적 인권의 시조 가운데 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레고리우스력

Gregorian Calendar · 3천 300년마다 1일의 편차로 오차를 줄이다

1582년

 

 

교황 칙서의 원본은 바티칸 문서고에 보관되어 있다.

라틴어 제목 인터 그라비시마스는 그 문서의 도입부를 요약한 말로

"우리의 가장 심각한 근심 가운데" 라는 뜻이다.

 

 

크리스토퍼 클라비우스(1538~1612)는 첫 작성자

알로이시우스 릴리우스(1510~76) 사후에 그레고리우스 달력의 시안을

수정하는 데 도움을 준 수학자이자 천문학자다.

 

 

카이사르 시대부터 민간에서 사용하는 기존 달력의 오류를 추적해낸 이후, 교황은 대단히 실용적이고

정치적인 의의를 지닌 문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그의 명령은 가톨릭교회와 교황 국가 너머에는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그렇다면 다른 이들은 언제, 어떻게 반응하게 될까?

 

157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가 된 이래 우고 본캄파니(Ugo Boncampagni, 1502~85)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 자극받은 트리엔트 공의회의 권고 사항에 따라 가톨릭교회의 개혁을 추구해왔다. 그의 조치들

가운데 가장 널리 영향을 끼친 것은 기원젅 46년에 도입된 율리우스력의 오류를 수정하려는 노력이었다.

 

비록 율리우스력이 음력보다 월등하다는 점이 증명되었지만, 천문학자들은 1년을 365.25일로 계산하면

11분 10초가 크기 때문에 128년마다 하루씩 늦어진다고 결론지었다. 이는 교회에 신학적 문제를 일으켰다.

부분적으로 '부활절' 이라는 중요한 축일의 결정이 춘분과 달의 위상에 기초했기 때문이다.

 

그레고리우스의 참사관들은 교황에게 열흘을 지워 부활절 시기를 조정하고 그와 함께 다른 문제들도 해결해

달라고 청했고, 교호항은 두 사람의 유력한 천문학자 알로이시우스 일리우스와 크리스토퍼 클라비우스에게

계산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로 결정했다.

 

1582년 2월 24일 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는 부활절 계산에 중요한 절기들을 '제 위치'로 되돌려놓기 위해

달력을 '복원하는' 칙서를 발표했다. 그 문서는 할 일이 무엇이며, 왜 해야 하는지를 라틴어로 정확히

설명하고 있었다. 윤년의 수가 줄었고, 부활절의 날짜는 새로운 방법에 따라 정해질 것이었다.

"신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현실적으로 가장 큰 걱정거리는 조정을 위해서는

1582년 10월 4일 다음 날이 1582년 10월 15일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칙서는 성직자들에게 계획을 실행하라고 명령하고 있었지만,

거기에 쓰인 교황의 언어는 그의 통제를 받지 않는 민간 당국에도 그런 변화를 주문하고 권고하고

추천할 만큼 세심했다. 사실 가톨릭을 받아들이지 않은 몇몇 국가의 통치자들은 처음에는 그런 조치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영국 의회는 1750년까지 그레고리우스력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1752년에야 잉글랜드와 그 식민지들에서 이를 시행했다.

 

많은 잉글랜드의 신민들은 달력에서 11일을 빼라는 정부의 요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메리카의 과학자이자 정치인인 벤저민 프랭클린은 "9월 2일에 잠자리에 들어 9월 14일까지

일어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늙은이게겐 반가운 일이다" 라는 말로 그레고리우스력을 지지했다.

 

 

 

 

킹 제임스 성경

King James Bible · 국교회의 수장으로 성경을 다시 만들다

 

 

판화로 제작된 킹 제임스 성경의 속표지는 삼위일체,

곧 성부, 성자, 성신의 이미지를 담은 최초의 사레였다.

 

 

가죽으로 장정된 희귀본 킹 제임스 성경은 왕의 아들,

웨일스 공 헨리 프리드리히의 것으로

워싱턴 국립 주교좌 희귀본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통치자의 정치적 교려에 의해 수정이 이루어지고 위원회에 의해 번역되었지만, 킴 제임스 성경은

지금껏 만들어진 것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기록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문학의 걸작, 언어의 승리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죽음으로 잉글랜드의 왕위를 차지한 직후 제임스 1세(1566~1625)는 교리상의

까다로운 문제들과 관련해서 햄튼 궁정에서 잉글랜드 교회 대표들과 청교도 지도자들을 만났다.

그는 1568년에 발행된 기존의 영역본 성경을 대체할 새로운 성경 번역본을 만들겠다는 뜻을 전했고,

이 일이 서로 다른 프로테스탄트 분파들을 하나로 묶어줄 것이며 그의 다른 정치적 목적들을 달성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제임스는 그리스어, 히브리어, 아람어, 라틴어 성경의 새로운 번역

을 명령했고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웨스트민스터에서 온 47명의 정평이 난 최고 학자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소집했다. 그들의 부지런한 작업은 곳곳에서 국왕의 목적에 맞게 확실한 의미들을 모호하게

할 필요가 있었고, 그 과정은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수정을 의미했다. 인쇄술의 새로운 발전과

잉글랜드의 식민화와 헤게모니를 이용하기에 완벽한 시기이기도 했다.

 

새로운 번역 작업은 세익스피어, 벤 존슨, 프랜시스 베이컨 경과 같은 저자들이 최고의 작품을 내고 있던

잉글랜드 문학의 르네상스기에 이루어졌다. 위원회가 내놓은 킹 제임스 성경의 최종본은 이 위대한 작가

들의 작품과 필적할 만한 것이었다. 승인된 후 그 책은 국왕의 출판업자 로버트 바카에 의해 1611년

완전한 2절판 성경으로 처음 출간되었다. 길이 16인치의 가제본 성경은 10실링에 판매되었고, 제본된

성경은 12실링에 판매되었다. 킹 제임스 성경 혹은 흠정역으로 알려진 그 작품은

잉글랜드의 언어, 문화, 정치에 뚜렷한 영향을 끼쳤다.

 

 

 

 

메이플라워 서약

Mayflower Compact · 신대륙 최초의 헌법

1620년

 

 

윌리엄 브레드포드의 일기에는 메이플라워호 승객 가운데 한 사람이 작성한

메이플라워 서약의 유일한 필사본이 담겨 있다.

 

 

메이플라워 서명자들을 그린 19세기 회화

 

 

아메리카의 무인지대이자 무법지대에 상륙하는 모험을 감행하기 전, 메이플라워호에 승선한 대다수의 승객은

서명자들을 "식민지의 공공선을 위한 (···) 정의롭고 평등한 법" 을 시행할 하나의 "민간 정치 기구"로

묶어주는 서약서, 다시 말해 법의 지배 아래 함께 살아가겠다는 서약서를 작성한다.

 

폭풍우에 시달린 메이플라워호의 3천 마일에 이르는 대서양 횡단은 쉽지 않았다.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든 사실이 있다면, 늦가을 아메리카 해안에 도착했을 때 선장은 자신들이 현장에

규정된 허드슨 강 어귀가 아닌 케이프 코드에 있음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그는 바다에서 더 위험한

시기를 겪는 대신 육지에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계획의 변경은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배에 타고 있던 105명은 이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두고 서로 의견이

엇갈렸다. 그 가운데는 박해를 피해 유럽을 떠나온 41명의 잉글랜드 청교도들, '성인'을 자처하던 칼뱅주의

비국교도들이 있었다. 나머지(청교도들이 '이방인'이라 불렀던) 사람들 가운데에는 잉글랜드 상인, 장인,

숙련공과 연한계약 노동자들과 4명의 어린 고아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방인들 가운데 일부는 이제 육지에 발을 들인 이상 더는 그 어떤 법에도 지배받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해운법과 버지니아 사의 관할권 모두 그곳에서는 더 이상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배를 떠나는

순간 그들은 어떤 법적 권위 아래에도 놓이지  않을 것이었다. 예를 들어 하인들은 법적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고 이것은 다른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었다. 전망은 무시무시했다.

 

청교도 지도자들은 정부 권위의 대안을 만드는 것이 시급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배에 있던 성인 남성들

모두(청교도와 이방인들 모두)에게 성문화된 하나의 합의서를 작성하자고 설득했다. 일부 분리주의 교회의

계명에서 발견되는 사획셰약 사상을 근거로 문서를 작성한 청교도들은 이 합의서가 모든 서명자들을 구속

하게 될 '식민지 공공선을 위한 (···) 정의롭고 평등한 법' 을 확립하기 위한 '민간 정치 기구'를

구성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성인 남성들 41명이 그 문서에 서명하기 위해 배의 작은 선실로 모였다.

역사가들이 메이플라워 서약이라고 이름 붙인 이 합의는 아메리카 역사에서 자치 정부에 관한

최초이자 가장 잘 알려진 표현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필요에 의해 탄생한 메이플라워 서약은

법의 지배라는 관념과 민주주의의 몇 가지  기본 원칙들을 모두 표상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2절판 초판본

Shakespeare's First Folio · 세계에서 고증이 가장 정확한 책

1623년

 

 

마틴 드로사우트가 그린 셰익스피어 초상은 그를 가장 정확히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셰익스피어의 친구이자 동시대인이었던 벤 존슨은 초상화 맞은편에

판화가가가 "생명을 불어 넣기 위해 자연과 경쟁" 했다고 적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사후, 극단의 단원으로 가장 가까운 그의 친구들 가운데 두 사람이 그의 놀라운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탄생한 셰익스피어의 걸작 희곡집은 잘 간직되었고, 어느 감정사에게서

"세계에서 가장 고증이 정확한 책" 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는 영문학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지만, 그의 두 동료 배우이자 가장

친한 친구인 존 헤밍스와 헨리 콘델의 노력이 없었다면 그런 평판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들은 몇 년 동안

"오로지 아주 소중한 친구이자 동료인 우리의 셰익스피어를 기리고자, 감히 그의 희곡들을 내놓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헤밍스와 콘델은 세상을 떠난 작가의 (소네트와 시를 제외하고) 희곡 가운데 36편을 수집하고 편집하면서

여러 해를 보냈다. 셰익스피어의 희극 원본이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을 고려할 때 두 사람이 공들여 마련한

희극, 역사극, 비극의 판본은 무대에서 공연된 셰익스피어의 원본 희극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남아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꾸준히 새로운 번역으로 거듭나며 현대의 관객들이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 졌지만,

2절판 초판본이 없었다면 그런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인용: 스콧 크리스텐슨 著 · 김지혜譯 <세상을 바꾼 100가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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