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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럼·강좌·워크숍

동경대전 강독을 통한 동학사상 연구

사적 제145호, 고창 모양성 牟陽城

 

 

 

 

 

 

 

 

 

 

 

초청 강사: 윤석산尹錫山(한양대학교 명예교수)

 

 

 

 

 

 

 

 

 

 

 

 

 

 

 

 

 

 

 

 

 

 

 

 

 

 

 

 

 

 

 

 

 

 

 

 

 

 

 

 

 

 

 

 

 

 

 

 

 

 

 

 

 

 

 

 

 

 

 

 

 

 

 

 

 

 

질의 응답....

 

 

 

 

 

 

 

 

 

 

 

운곡 람사르습지 술도가에서의 뒷풀이

 

 

 

 

 

 

 

 

아래 내용은 윤석산 주해 《동경대전》 머리말 중에서 간추린 것이다.

 

 

 

 

●  을묘천서는 천주실의인가

 

 

동학 천도교의 종교체험은 매우 사례도 많고 양상도 다양하다.

현대에 들어서도 수련하는 많은 분들이 이러한 체험을 한다. 동학 천도교를 창도하신 수운 최제우 선생이나 그 이후

천도교의 스승님들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식을 넘어서 이분들의 종교체험 또한 깊이 받아들여야 한다.

동학 창도기에 수운 선생은 10년 남짓한 주유팔로(周遊八路)에서 아무런 성과도 없이 용담으로 귀향하였다가 곧

울산 처가 동네로 가서 지내게 되었다. 이때가 1854년이다. 수운 선생이 집안을 돌보지 않고 길을 떠나 10여 년

이라는 세월을 보내게 되자, 살기가 어려워진 사모님이 자손들을 이끌고 친정 동네로 와서 살게 된 것이다.

흔히 울산 유곡동 여시바윗골을 수운 선생의 처가 동네라고 한다. 그러나 수운 선생의 처가 동네는

그곳에서 좀 떨어진 성동(城洞)이라는 곳이다.

 

이곳 성동에 온 수운 선생은 가족들은 처가에 머물러 살게하고 당신의 예의 울산 유곡동(幽谷洞) 여시바윗골에 작은

움막을 짓고 공부를 계속하였다. 천도교 기록에는 초당(草堂)이라고 되어 있는데, 초당이라기 보다는 움막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곳 움막으로 수운 선생을 만나고자 찾아오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고 한다.

찾아오는 사람들은 수운 선생과 때로는 세상사를, 때로는 도(道)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러던 중 어느 선사(禪師, 어느 기록에는 異人 또는 異僧이라고 되어 있다)가 찾아와 책을 한 권 전해주었다고 한다.

이 선사는 금강산 유점사에서 백일의 공을 들이고 탑상에 놓여 있는 이 책을 얻었는데, 세상에 그 내용을 해득해 내는

사람이 없어서, 전국을 두루 돌며 수소문 끝에 수운 선생을 찾아왔다는 것이다.

 

이인이 책을 가지고 온 해가 1855년 을묘년이기 때문에 이 책을 흔히 '을묘천서(乙卯千書)' 라고 부른다.

즉 을묘년에 하늘로부터 받은 책이라는 의미이다. 이 이야기는 동학 천도교의 모든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최근에 이 을묘천서가 하늘에서 받은 천서(天書)가 아니라, 《천주실의天主實義》 라는 설이 제되었다.

이 설을 제기한 이는 도올 김용욱 선생이다. 특히 도올 선생은 이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을묘천서가 《천주실의》라는 나의 주장은 표영삼 선생님도 충심으로 동의하시었고, 윤석산도

그러한 가능성을 배제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동학은 신비로운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윤석산은 전제로 하면서, 《천서》 와 《천주실의》에 관하여 많은 합리적인 담론이 생산될 수 있다고

긍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성주현도 《을묘천서》는 《천주실의》임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 나는 코리안이다 《동경대전》 1, 통나무, 2021년 106쪽

 

그러나 이 도울 선생의 말은 사실과 다르다.

표영삼 선생이나 성주현 선생의 말은 내가 알 수 없다.

그러나 나에 관한 말은 사실과 다르다. 2020년 3월이나 4월쯤으로 기억되는데,

도올 선생과 나는 《동경대전》 독회를 하며, 《천주실의》에 관하여 이야기를 했다.

그때 도올 선생이 "수운이 천주실의를 읽었을 것이고, 주유팔로 때 중국도 다녀왔을 것이다." 라는 말을

했다. 그래서 나도 도올 선생의 그 말에 "수운 선생이 《천주실의》를 읽었을 것이라고 말을 했을 뿐이다.

만약 그때 도올 선생이 《천주실의》가 《을묘천서》이다" 라고 말했다면,

나는 이에 대하여 "그렇지 않다" 고 단호히 내 의견을 개진했을 것이다.

도올 선생의 《도원기서》 = 《천주실의》 설은 이번에 처음 나온 것도 아니다.

처음 그 설을 제기했을 때 나는 이미 이와 같은 도올 선생의 그러한 견해에 관하여 두 번이나

그와 다른 견해를 밝히는 글을 써서 발표를 한 적이 있다. 그러니 도올 선생이 최근에 발간한 책에서

"윤석산도 그러한 가능성을 배제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동학은 신비로운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윤석산은 전제로 하면서,

《천서》와 《천주실의》에 관하여 많은 합리적인 담론이 생산될 수 있다고 긍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라고 한 부분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는 점을 밝혀 둔다.

 

내가 볼 때 동학은 수운 선생의 신비체험, 결정적인 종교체험이 없었다면 결코 창명(創明)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동학에서의 종교체험은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나는 《을묘천서》는 실제 책이 아니라, 수운 선생이 겪은

신비체험이라고 본다. 동학 천도교의 가장 오랜 역사서인 《도원기서》에도 을묘천서는 신비한사건이라는 관점에서

기술되어 있다. 책을 전해준 선승(이인)과 수운 선생과의 '만남과 헤어짐'을 매우 신비하게 묘사하고 있다.

 

"을묘년 봄 3월에 이르러 봄잠을 즐기는데 꿈인지 생시인지 밖으로부터 주인(=수운: 필자 주)을 찾는 사람이 있었다.

(중략)

"선사가 사양하고 계단을 내려가 몇 걸음 가지 않아, 문득 사람이 보이지 않게되었다.

선생은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여겼으나, 이내 그 선사가 신인(神人)임을 알게 되었다.

 

즉 을묘천서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여몽여각(如夢如覺)의 사이' 라든가,

문득 사람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식으로, 모두 현실이 아닌 꿈이나 신비한 이야기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신비함으로 시작하여 신비함으로 끝이 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수운 선생의 노승과 만남과 헤어짐이 신비한 이야기로 되어 있다는 점은 바로 을묘천서 자체가

수운 선생으 신비체험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도올도 저서에서 거론한 바와 같이 《천주실의》는 이미 17세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당시의 학자인 이수광과 유몽인이 자신들의 저서인 《지봉유설(芝峯類設)》과 《어우야담(於于野談)》에

각기 다른 관점으로 이를 다루고 있다. 또한 18, 19세기 학자인 다산(茶山)뿐만 아니라, 다산보다 앞 세대 인물인

유학자 신후담(愼後聃)이나 신서파(信西派)를 막론하고 폭넓은 영향을 끼치고 있던 천주교리서였다.

즉 《천주실의》는 이미 17, 18세기부터 조선의 많은 유학자들이 탐구 대상으로 삼고 있던 책이다.

더구나 수운 선생은 울산 여시바윗골에서 선사로부터 천서를 받기 전 10여 년을 전국을 떠돌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각종 가르침을 접했다. 다시 말해 당시의 주류 학문이던 유학의 한게를 절감하고, 그 대안이 될 새롭고

근본적인 가르침을 찾아다니면서, 이러한 많은 가르침이 과연 세상을 올바르게 구할 수 있는 가르침인가 고뇌

하던 한 사람의 젊은 지식인이었다. 따라서 수운 선생은 울산에 오기 이전에 이미 당시에 새로운 기운으로, 새

로운 학문적, 영성적 체계를 내세워 밀려들어오던 서양, 서학의 가르침을 접하고 탐구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아, 을묘년(1855) 어느 선사가 수운 선생에게 가져다분 '해석하기 어려운 책'을,

새삼 이미 2세기 그 이전에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또 그동안 많은 유학자들에 의해 해석이 되고

또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천주실의》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또한 선생이 울산 여시바윗골에서 받은 것은 '을묘천서', 곧 하늘에서 받은 책(天書)이라고 한 표현은

20세기 초에 천도교단에서 발행한 역사서에 처음 나온다.

이와 같은 사실을 두고 천도교인들이 수운 선생에 대한 신비감을 높이기 위하여 동학 천도교의

역사서를 기술하면서 을묘년 사건을 왜곡하여 '천서(天書)' 로 꾸민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견해이다. 좀 더 상새하게 자료를 살피지 않아서 일어난 오류이다.

수운 선생 당시에, 수운 선생을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목으로 체포하려고, 조정의 명을 받고 경주로

내려온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가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 '을묘천서'에 해당되는 일이 기록되어 있다.

수운 선생이 동학을 펴던 당시 조정의 명을 받은 선전관 정운구는 수운 선생을 체포하여 심문하라는 어명을

받고 한양을 떠나 경주부를 향해 갈 때, 문경 새재를 지나면서부터 본격적인 탐문 수사를 시작하였다.

특히 경주부에 이르러서는 사람을 시켜 시장이나 절간 등지를 드나들면서, 수운 선생과 동학에 관한 일들을

염탐했다. 이러한 염탐을 하던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을 사람들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5,6년 전에 울산으로 이사를 간 다음 무명을 팔아서 살다가 근년에 이르러 홀연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어 치성을 드리고 돌아오는 길에 공중으로부터 문득

책 한 권이 떨어지는 것을 얻어서 공부를 하였다. 사람들이 진실로 어떤 형태의 문자인지 알지 못했다.

나만이 홀로 좋은 도(善道)라고 하였다. 《고종실록》

 

이렇듯 수운 당대에 수운 선생을 체포하러 온 선전관이 조정에 올린 관변기록에까지 이 문제를 기술한

것으로 보아, 수운 선생이 세상을 떠돌다, 울산 근처에서 '신비한 책을 얻는 신비한 체험'을 한 것은

당시로서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이야기는 관에서 수운 선생을 체포하기 위하여 

민간에서 수집한 것으로, 수운 선생 스스로 자신의 가르침을 펴면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한 것으로 되어 있다.

 

특히 수운 선생이 하늘에서 받았다는 책에 관해 "사람들이 그것이 어떤 형태의 문자인지 알지 못했다." 는

기록은 의미심장하다. 《천주실의》는 한문으로 기록되었고,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 알고 있는 책이다. 그런데

'어떤 모양의 문자인지 알지 못했다.' 라는 기록이 수운 선생이 하늘로부터 받았다는 책이 일반적인 글자로 된

평범한 책이 아닌, 신비한 책이라는 뜻이 된다. 또한 수운 선생이 만약에 《천주실의》를 받아 읽고는 《천서》를

받았다고 했다면, 수운 선생이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수운 선생이 《천주실의》를 얻어서

읽고는, 이를 신비한 책을 얻은 것인 양 꾸며서 '하늘에서 받은 천서(天書)' 라고 했다면, 이는 지탄받을 일이다.

따라서 '을묘천서'를 《천주실의》로 보는 견해는 동학 천도교는 물론 수운 선생의 동학 창도 역사에

매우 위험한 견해가 아닐 수 없다.

 

을묘천서는 실제로 어떤 책을 받았다기보다는, 지금까지 많은 연구자들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수운 선생이

제세(濟世)의 뜻을 품고 세상을 떠돌며 구도의 길을 걷다가 체험하게 되는 신비체험, 곧 종교체험의 한 현상이다.

이때 수운 선생이 만났다는 이인도 많은 연구자들의 견해와 같이 자신의 안에 있는 '원형(archetype)으로서의 자신'

이며, 융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개성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안에 있는 자기, 곧 신을 만나는 종교체험이라고 하겠다.

 

즉 수운 선생은 울산 여시바윗골에서 이인으로부터 천서를 받는 신비체험을 하게 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차원에서

깨달음을 추구할 수 있는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게 된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이때 '새로운 차원'이란 다름이 아니라,

지금까지 자신의 밖에서 도(道)를 구하는 방식을 버리고 자신의 안에서 도를 구하는 방식을 택하게 된 것을 말한다.

달리 말하면 기존에 세상에 존재하던 사상이나 종교 등으로부터 도를 얻고자 했던 방식을 버리고 기도를 통해

하늘, 또는 한울님이라는 절대적 존재로부터 도를 얻고자 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라고 하겠다.

또 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을묘천서 이전까지는 무신론(無神論)의 입장에서 가르침을 얻고자 했다면,

이후부터는 유신론(有神論)의 입장에서 신으로부터 도(道)를 받고자 했던 것이다.

 

이처럼 수운 선생은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세상이라는 일상적 차원에서,

지금까지 세상에 있는 기존의 가르침 가운데서 이 세상을 구원할 방법을 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세상을

떠돌았지만, 을묘천서 이후 기천(祈天)을 통하여 하늘 또는 한울님이라는 일상을 뛰어넘는 차원에서 지금까지

세상에 없었던 전혀 새로운 가르침, 새로운 도를 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즉 구도의 방법이나 대상 등이

을묘천서를 기점으로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전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을묘천서 이후의 변화는 수운 선생이 용담에서 경신년(1860) 4월부터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동학을 이 세상에 탄생하는 중요한 바탕이 된다. 을묘천서는 바로 이 점에서 수운 선생, 

그리고 동학에 있어서 결코 함부로 예단해서 안 되는 중요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 동학 천도교 신의 이름은 '한울님' 이다.

 

 

신적(神的) 존재는 개념화가 불가능하다. 인간은 신을 개념적으로 알 수 없고 다만 신체험(神體驗)을 함으로써

신적(神的) 생명을 나누어 받고 각지(覺知)할 수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신이란 이렇다 또는 저렇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개념화한 것은 어느 의미에서 자연과 신을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인간의 자기중심적 교만으로부터 

긴인한 것이다. 신의 이름을 짓거나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다.(김경재, 「최수운의 신개념」, 《최수운 연구》)

따라서 하나의 종교 체제를 창시하는 이만이 자신이 깨닫고 체험한 신을 중심으로 신을 개념화할 수 있고 또

그 이름을 지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동학 천도교의 신에 관하여 온전히 말하기 위해서는 수운 선생이 '체

험한 신'은 어떤 분인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 또 동학 천도교 신의 이름 역시 마찬가지로 '체험한 신'에 걸맞은

이름이어야 한다. 마음대로 이름을 지어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신의 이름은 그 종단이 섬기는

신이어야 하며, 나아가 그 종단의 정체성과도 깊은 연관을 갖는다. 잘 아는 바와 같이 경신년(1860) 4월 수운 

선생이 종교체험을 한 것은 곧 수운 선생이 신적 체험을 한 것이다. 수운 선생은 종교체험을 통해 한울님을

시고 있다는 '시천주(侍天主)' 를 중심 사상으로 삼게 되었다. 즉 종교체험을 통해 깨달은 시천주(侍天主)',

중에서도 '모심'의  '시(侍)' 야말로 수운 선생의 신체험을 가장 구체적으로 나타낸 말씀이라고 하겠다.

이 '시(侍)' 에 관하여 수운 선생은 직접 "시라는 것은 안으로 신령이 있고, 밖으로는 기화의 작용이 있어,

세상의 사람들이 옮기지 못함을 각기 아는 것(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

이라고 해의 하였다.(《東經大全》 · 「論學文」) 

 

한울님을 모셨다는 '시(侍)'는 안으로는 한울님의 신령한 영이 있음을 깨닫고(內有神靈),

밖으로는 나의 기운과 한울님 기운이 융화일체를 이루는 것을 체득하며(外有氣化) 이러한 한울님 영과

기운은 본래적인 것이기 때문에 결코 옮기지 못한다는 것을 각기 깨닫는 것(各知不移)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때 안과 밖은 몸의 안팎을 말한다. 따라서 수운 선생이 체험한 신은 다만 사람의 몸 안에서만 신령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몸 밖에서 기운으로 작용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내 몸의 안팎 모두에 신이 자리

하며 작용을 한다는 말씀이 된다. 다시 말해 수운 선생이 체험한 신은 머나 먼 초월의 공간, 세상 밖에서 계시

를 보내는 신이 아니라, 몸의 안팎에 계시면서 작용하고 활동하는 신이라는 말씀이다. 이때 나의 몸을 중심

으로 하는 안과 밖에란 단순히 몸 안의 정신 또는 마음만도 아니고, 몸 밖의 하늘만도 아니다.

몸 안과 몸 밖의 하늘과 땅의 유형, 무형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이 살아가는 땅, 하늘과 그

사이 천지만물, 만물만사 어디에나 신이 자리하고 또 작용하고 있다는 말씀이 된다. 공간적으로 틈도 없고

여지도 없고, 시간적으로도 언제나 신이 자리하고 있으며, 또 작용하고 있으며, 지속할 것이라는 말씀이 되기

도 한다. 동학 천도교에서는 하늘과 땅, 만리만사와 고금왕래 모두를 포함하는 이름이 있다. 이것이 '무궁한 울',

곧 '한울' 이다. 《용담유사》· 《흥비가》 마지막 단락에 나오는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내 아닌가" 중의

'무궁한 이 울'이 바로 '한울'인 것이다. '무궁한'의 순수 우리말이 '한' 이기 때문이다. 이 '한울'에 수운 선생의

표현과 같이 한자어로는 '주(主)', 곧 '높임을 칭하는 것이며 부모와 한가지로 섬기는 것'을 뜻하는 말인 '님'을

붙여 '한울님' 이라 이름한 것이다.

 

그러나 목판본 《용담유사》가 발견이 되면서 회오리 바람이 불어왔다.

계미판(1883년) 목판본 등의 '아래아' 표기를 따라 현대적 표기인 '하날님', 또는 '하늘님'으로 표기하고

호명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또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날님' 또는 '하늘님'의 현대적 표기인

'하느님' 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러므로 천도교단이 한때 신의 이름으로 혼란을 겪기도 하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때 제기된 '하날님', '하늘님', '하느님'은 동학 천도교의 신의 이름으로는 적당하지 않다.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수운 선생이 체험한 신은 다만 하늘에만 계신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하늘에만 계신

신의 이름인 '하느님'으로 부르는 것은 타당하지를 않다. 하느님은 '하늘' 과 '님' 의 연결로 'ㄹ' 이 탈락되며

생긴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판본 등을 보고 동학 시대에 하날님, 하늘님으로 부르던 동학

의 신의 이름이 천도교로 대고천하(大告天下) 하면서 '한울님'으로 바꾸어 불렀다는 것이 하늘님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다시 말해서 의암 선생이 천도교로 대고천하 하면서 스승님들의 시대에 부르던 신의 명칭

(하날님, 하늘님)을 바꾸었다(한울님)는 것이다. 과연 의함 선생이 스승님들이 부르던 신의 이름을 바꾸었을까?

수운 선생이나 해월 선생이 부르던 신의 이름을 의암 선생이 불경스럽게 임으로 바꾸어 불렀다는 말인가? 그렇

지 않으면 동학의 정신과 어긋나는 신의 이름을 쓰고 있던 수운 선생이나 해월 선생의 견해를 의암 선생이 바로 

잡았다는 이야긴데, 이 두 이갸기 모두 어불성설이며 불경스럽기 그지없다.

 

필자는 지난 2003년 1월 상제교(上帝敎) 교주인 구암 김연국(金演局, 1857~1944)의 막내아들인 당시 82세의 

김의경 옹을 만나 인터뷰를 하던 중,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즉 김 옹이 대화 중에 '한울님' 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놀라, 시천교, 상제교에서도 '한울님' 이라고 부르느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김의경 옹은

어려서부터 상제교 본부가 있던 계룡산에서 자랐고 도(道) 생활했던 사람이다. 그러므로 천도교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상제교에서도 순수하게 '한울님' 이라고 불러왔음을 알 수 있다. 구암

김연국은 어떤 인물이며 또 상제교는 어떤 종단인가? 의암 선생은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로 대고천하

한 이후, 그때까지 본인이 재임하던 대도주(大道主) 직을 구암 김연국에게 전수(傳授)한다. 그러나 김연국은 

몇 달 지나지 않아 친일파인 이용구 등의 꼬임에 빠져 시천교(侍天敎) 대례사로 옮겨가게 된다. 이때가 1908년

이다. 그 후 김연국은 시천교에서 몸을 빼내 상제교를 세워 계룡산으로 신도들을 이끌고 들어갔다. 김연국은

암 선생보다도 더 일찍 동학에 입도한 사람으로 일찍이 해월 선생을 모시고 목판으로 경전을 간행하는 사업을

주도적으로 했던 동학의 중요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더구나 의암 선생, 송암 손천민(孫天民 ?~1900) 등과 함께

해월 선생의 명을 받아 삼인공동 지도체제를 이루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김연국이 천도교 대도주직을

내려 놓고 시천교로 갔다는 사실은, 결국 개인적인 사정도 있었겠지만 당시 지도체제의 핵심인 의암 선생의 여러

노선과 입장이 불일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더욱이 구암은 의암 선생이 해월 선생으로부터 도통을 전수받은 

직후에도 의암의 도통 승계에 한때 이견을 보인 전력도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만약 의암 선생이 스승인 해월 선생이 사용하던 '하늘님' 또는 '하날님' 을 임으로 바꾸어

'한울님' 이라는 명칭으로 바꿔서 사용했다면, 의암 선생과 의견이 달리하던 김연국이 시천교나 상제교 등으로

간 후에도 의암 선생이 임으로 바꾼 '한울님' 이라는 명칭을, 의암 선생을 답습하여 그대로 사용했겠는가?

이는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도 납득을 할 수 없는 이야기가 된다.

따라서 상제교 등에서 김연국이 '한울님' 이라고 사용을 한 것은 해월 선생 시대에도 '한울님' 이란 명칭을 사용

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김연국이 해월 선생의 지도를 받아 오랫동안 동학교단의 중추적인 지도자로

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정황이라고 할 수 있다. 수운 선생 이후 동학교단의

실체 호칭이 '한울님' 이었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중략)

 

1905년 천도교로 대고천하 한 이후, 천도교단에서는 기관지를 간행한다.

1910년에 창간된 《천도교회월보》에서 한울님의 호칭은 '한을', '한우님' 또는 '한울님' 등으로 표기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혼란스러웠던 19세기 표기법을 정착시키는 과정이라고 할 수가 있다.

또한 1900년대 초만 해도, 의암 선생 외에도 해월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천도교의 중요한 인사들이

많이 교단에서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도교 신(神)의 명칭을 스승인 해월 선생이

쓰지도 않은 '한울님' 으로 고쳐서 쓸 수가 있겠는가? 이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의암 선생은 동학을 천도교로 대고천하하고, 교단 체제를 정비하면서, 실제적인 호칭인 '한울님' 의 표기를

연철에 의한 표기가 아니라, '한을', '한우님'을 거쳐 최종적으로 '한울님' 으로 정착시킨 것으로 판단된다.

동학 천도교 신의 이름은 예나 지금이나, 수운 선생 시절이나 지금이나 '한울님' 이었음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