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9. 6
장성공공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조선의 마지막 '딸각발이 선비'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강사 : 전남대학교 사학과 김만호 박사
산앙문(山仰門)
장성고산서원(長城高山書院 )
노사 기정진을 중심으로 이최선·기우만·조의곤·김록휴·조성가·정재규 등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기정진(1798∼1879)은 조선 후기 성리학의 대가이다. 순조 31년(1831) 과거에 급제한 후 많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이곳에서 학문 연구와 후학양성에 힘썼다. 이 서원은 기정진이 조선 고종 15년(1878)에 담대헌이라고
이름짓고 학문을 가르치던 곳이다. 1924년에 후손들이 다시 지었으며, 1927년 ‘고산서원’ 이라고 쓴 현판을 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사당인 고산사를 비롯하여 강당, 동재인 거경재, 서재인 집의재, 내삼문, 외삼문과
장판각 등의 건물이 있다. 장판각에는 기정진의 문집과 목판을 보관하고 있다.
정면에 강당이 자리하고 있고, 좌우론 유생들의 기숙사 건물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하고 있다.
그 뒤편으로 노사 기정진 선생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 '고산사'가 자리한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 ~ 1879)
이학(理學) 6대가의 한 사람이며, 위정척사파의 정신적 지주였다.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蘆沙). 증참판 재우(在祐)의 아들이다. 7세에 이미 맷돌을 보고 시를 지었고, 9세에 경사(經史)에
통했다. 1831년(순조 31)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강릉(康陵)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봉직하지 않았다.
이후 40세 때도 사옹원주부에 임명되었으나 6일 만에 사직했다. 그뒤에도 평안도도사·무장현감·사헌부장령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1862년(철종 13) 삼남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나자 철종은 3정(三政)의
개선책을 듣기 위해 언책(言策)을 모집했다.
이때 〈임술의책 壬戌擬策〉을 작성하여 사대부 풍속의 폐단,
조정의 공경(公卿)·방백·수령·이속의 탐오함, 과거·사관(仕官)의 폐단, 부호들의 토지겸병의 폐단 등을 지적했다.
그리고 군포의 혁파, 환곡의 면제, 민전 제한 등을 그 개선책으로 제기했으나 제출하지는 않았다.
1866년(고종 4)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육조소 六條疏〉라 불리는 첫번째 〈병인소 丙寅疏〉를 올려
외적을 방비하는 대책을 건의했다. 그해 7월 동부승지·호조참의, 10월에는 동지돈녕부사·호조참판·
공조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했다. 이때 국가적 폐습을 비판하고 사대부에게 삼무사(三無私)를
권장하는 2번째〈병인소〉를 올렸다. 1877년 장성 월송(月松:지금의 고산리)으로 거처를 옮겨
담대헌(澹對軒)에서 문인들과 지내다 세상을 떠났다.
노사 기정진이 평생에 걸쳐 궁구(窮
'이(理)'와 '기(氣)'에 대해서 본연의 '성(理)'과 기'(氣)'를 구분하는 것에 반대하고
양자를 합하여 '이일분수(理一分殊)'의 관계로 이해하여 '이(理)'의 분수인 '기(氣)'의 성 속에서 본연의 성을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곧 모든 사물의 개별적인 '이(理)'는 보편적인 하나의 '이(理)'와 동일함을 의미한다.
이는 이황과 이이 이래로 계속하여 '이(理)'와 '기(氣)'를 구분해온 조선 성리학의 관념에서 벗어난 독창적인 학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학문은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 성리학의 저술을 녹여낸 후
자신의 독자적인 궁리와 사색을 통해 완성시켰다는 사실이 돋보인다.
노사의 학문은 스승으로부터 직접 전수받거나 어느 학파에 연원을 둔 것이 아니라, 송대의 학자 주돈이(周敦頤)·장재(張載)·정호(程顥)·정이(程頤)·주희(朱熹) 등의 성리학에 대한 독자적인 궁리와 사색에 의해 완성되었다. 이를 통해 이황(李滉)·이이(李珥) 이후 약 300년간 계속된 주리(主理)·주기(主氣)의 논쟁을 극복하고, 이일분수(理一分殊)의 이론에 의한 독창적인 이(理)의 철학체계를 수립하였다. 그의 철학사상은 우주의 구성에서부터 인간의 본질에 대한 해명, 사단칠정과 인심도심(人心道心) 등 심성의 문제,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의 문제, 선악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이일분수(理一分殊)라는 이체이용(理體理用)의 논리로 일관되어 있다.
그리하여 그는 우주현상을 이와 기로 설명하던 이기이원관(理氣二元觀)을 극복하고, 인간심성 내지 도덕의 문제를 가치상 우위에 있는 이의 작용으로 해명하고자 했다. 또한 인물성동이의 문제 역시 이의 완전·불완전으로 설명하여 종래의 주리 또는 주기의 심성론과 인물성동이론을 종합하였다.그는 저술은 많지 않지만 성리학사상 중요한 저술들을 남겼다.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나오는 ‘정(定)’자에 대한 해설인 「정자설(定字說)」,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논한 『우기(偶記)』(1845), 이기(理氣) 및 이이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에 대해 평론한 「이통설(理通說)」(1852), 그의 철학에서 핵심이 되는 「납량사의(納凉私議)」(1874, 초고는 1843년에 작성)와 「외필(猥筆)」(1878) 등이 대표적인 저술이다. 그의 철학사상은 제자들과의 문답을 기록한 『답문유편(答問類編)』에도 잘 드러나 있다.
그의 학문과 사상은 손자인 우만(宇萬)과 김녹휴(金錄休)·조성가(趙性家)·정재규(鄭載圭)·이희석(李僖錫)·이최선(李最善)·기삼연(奇參衍) 등의 제자에게 전수되었으며, 많은 학자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저서로는 1882년 『노사집』, 1890년 『답문유편』이 편집되어, 담대헌에서 활자본으로 간행되었고, 1902년 경상남도 단성(지금의 합천군 쌍백면 묵리) 신안정사(新安精舍)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되었으며, 1976년 서울에서 영인본으로 출간되었다.
노노사 선생이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사무사(思無邪)
담대헌澹對軒
강사 : 전남대학교 사학과 김만호 박사
고산사(高山祠)
담장 너머 보이는 불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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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박석무 '고산서원장'이 '한국고전번역원장' 재임시 쓴 글 중에서 간추린 것이다.
성리학, 몸으로 실천한 철인(哲人)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 : 1798~1879)은 철학의 이론을 몸으로 실천했던 탁월한 성리학자였다.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이자
학문의 주조(主潮)이던 성리학은 높은 이론의 관념성 때문에 실천과 실행이 어려웠던 이유로 공리공론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왕조
말기에 혜성처럼 나타난 몇몇 높은 수준의 성리학자들 때문에 성리학은 공리공담(空理空談)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나 망국의 무렵에 나라사랑의 뜨거운
의병운동으로 승화되었다. 그런 운동의 사상과 철학을 제공한 대표적 성리학자가 바로 노사 기정진과 화서 이항로(1792~1868)였다.
노사 기정진은 유리론(唯理論)이라는 최고수준의 주리론(主理論)에 근거하여 행위와
실천이 없는 관념적인 이론은 진리일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지닌 학자였다. 자신이 밝혀내고 찾아낸 진리는 몸으로 실천해 보여야만 그 참뜻이
있다고 믿고, 82년의 평생 동안 가장 겸허하고, 가장 순수한 학자로서의 자세와 처신을 잃지 않았다. 마음과 몸으로 벼슬살이를 멀리하고 오로지
진리탐구에만 일생을 바쳐, 참으로 높은 수준의 성리학 이론을 터득해낸 대표적인 성리학자였다.
‘조선유학사’라는 저서로 유명한
현상윤(玄相允)은 그의 저서에서 몇백명에 이르는 조선시대의 성리학자 중에서 그래도 학자다운 학문을 이룩한 학자로 여섯 분을 꼽았는데,
퇴계·율곡·화담을 이은 학자로 녹문 임성주와 노사 기정진, 한주 이진상을 거명하였다. 그러면서 서세동점의 위기를 맞은 조선왕조의 마지막 무렵에
진정한 세분의 성리학자로는 노사와 화서 및 한주를 들면서 그분들의 업적으로 성리학의 역할이 그런대로 마무리되었다는 주장을 폈었다. 대체로 옳은
판단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화서는 경기도 출신이고, 노사는 전라도 출신이며 한주는 경상도 출신이었다. 화서는 노사보다 6년
연상이고 노사는 한주보다 20년 연상이지만, 나라가 기울기 시작하던 무렵의 비슷한 시기가 세 학자들의 생존 기간이었다. 서로의 정보교환이나
연락도 없었으면서도, 주리(主理)라는 큰 틀의 이론에 뜻을 같이 하였고, 위정척사의 논리에도 큰 차이 없이 망해가던 나라에 우국(憂國)과
애국(愛國)의 불꽃을 피우게 하였던 점도 큰 차이가 없었으니, 바로 그 시대를 이끌던 진운(進運)에 세 학자들이 앞장선 셈이었다.
-노사의 탄생-
노사 기정진은 정조22년인 1798년 지금의 순창군 복흥면 동산리, 일명 조동(槽洞:구수동)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해 6월 3일 해가 질 무렵이었다. 본디는 아버지 기재우(奇在祐)가 장성군 하남에 거주했으나 임시로 살아가던 구수동에서
태어났으니, 탄생지야 순창군이지만 선대 때부터 살아가던 장성을 고향으로 여길 수 있다. 어린 시절에도 고향인 장성의 하남을 찾은 적이 많았고,
친족들이 대부분 하남에 있었기에 왕래가 잦았다. 더구나 18세에 양친을 잃고 외로운 신세가 되자, 바로 고향인 하남으로 돌아와 그곳을 중심으로
해서 일생을 보냈으니 그곳이 고향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남은 지금의 지명으로는 전남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阿谷里)인데, 그때는 아치실, 즉
아곡(鵝谷)으로 불렀다. 그 아치실은 기씨 이전에 박씨의 마을인데, 한창 잘 나가던 시절에는 ‘아치실 기씨’라는 호칭이 나도록 떵떵거리며 살던
기씨의 명촌이었다. 지금은 노사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거의 폐허가 된 마을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선비의 생활에 넉넉한 삶을
살아가지 못한 노사는 아치실에서도 오래 정착해서 살지 못하고 그곳과 멀지 않은 맥동(麥洞), 매곡(梅谷), 탁곡(卓谷), 여의동(如意洞) 등지를
전전하면서 장년기를 보냈다. 그러던 중에도 마을에서 멀지 않은 산사인 관불암(觀佛菴), 남암(南菴), 백양사 등의 절에서 골똘히 독서하면서
학문연구에 여념이 없었다.
-면암 최익현과 매천 황현이 찾았던 하사리-
노사가 가장 오래 거주하면서 저술활동과
강학을 했던 중심지는 하사리였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장성군 황룡면 장산리(長山里)다. 65세 이후 20년이 넘도록 정착하면서 높은 학문과
사상으로 무장한 사상가 노사는 그곳에서 수많은 저술을 남겼고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래서 77세 때인 노경에야 노령산(蘆嶺山) 아래의
하사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노사(蘆沙)라는 자호로 부르고 ‘노사설(蘆沙說)’을 지어 저간의 입장을 설명하였다. 노문3자(蘆門三子)라
일컫는 대곡 김석귀, 일신재 정의림, 노백헌 정재규를 비롯하여 손자인 송사 기우만은 그들의 학문이 바로 하사리 노사의 문하에서 익어갔었다.
당대의 의기남아 면암 최익현(崔益鉉)이 대원군을 탄핵하다 반대파에 밀려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해배하던 1875년 4월에 노사를 찾아뵙던 곳도
하사리이다. 또 15세의 어린 학동(學童)이던 뒷날의 유명한 지사(志士) 시인이던 매천 황현(黃玹)이 15세의 어린 나이로 노사를 찾아와 학문을
물었던 곳도 바로 하사리였다. 70이 넘은 노학자를 황현이 찾은 때는 1869년의 어느 날이니, 그때 노사는 신동이던 어린 황현을 보고 경계의
시 세편을 지어주었다.
보배로운 소년이 행전도 안 치고 찾아오니
놀랍기도 하지만 걱정도 되는구나
쉽게 얻은 것은
잃기도 쉬운 거니
연잎 위의 물방울 구슬 자세히 보라
(贈黃玹三首)
천재적인 시인 매천의 모습을 보고 재주만 믿고
경솔할까 걱정되어 경계의 시를 주었다. 그래서 매천도 그의 유명한 ‘매천야록’의 맨 끝 부분에 자신의 일생을 간략히 기술하면서 “15세에
노사선생을 찾아가 뵈었더니 기특한 소년이라고 칭찬해주었다”라는 내용을 자랑스럽게 적고 있다. 하사리는 지금 흔적이 없다.
-중암
김평묵과 영재 이건창이 찾았던 고산리-
이유야 알 수 없으나, 78세의 노인 노사는 그해 겨울에 오늘의 ‘고산서원(高山書院)’이
있는 장성군 진원면 고산리로 이사와 마지막으로 학문을 마무리하고 제자들에게 도를 전한 뒤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노사는 1875년 겨울에
이사와 1879년 12월 29일 생을 마치던 날까지 4년이 넘도록 ‘담대헌(澹對軒)’이라는 강학소를 짓고 거기에서 거처하면서 학술서적을 저작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아치실이나 하사리는 노사의 흔적도 전해주지 못하지만, 이곳 ‘담대헌’의 건물은 덩실하게 솟아있고, ‘고산서원’이 우람하게 서
있어서, 노사의 유적지는 이곳에 이르러야만 명확하게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은 ‘고산서원’의 강당으로 사용되는 담대헌, 마루에 올라
앉아 있노라면 툭터진 남쪽으로 아스라이 광주의 무등산이 보이고, 무등산 자락의 장망봉도 희미하게 보이는데, 그곳에는 노사의 부모님 묘소가 있다.
노년에 성묘하기도 어려워, 불효막심한 자신을 책하던 무렵, 그곳으로 이사와 부모님 묘소를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기에, ‘담대헌’이라는 이름을
걸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노년기의 작품인 ‘담대헌기’에는 그의 간절한 부모님 생각이 은은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곳 담대헌에도
명인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병자수호조약(1876)을 결사반대했던 최익현은 흑산도로 귀양갔다가 1879년 3월 해배되어 귀경하던 때에
병중에 신음하던 노사를 담대헌으로 찾아뵈었다. 도를 듣지 못하고 얼굴만 뵙고 떠나던 면암은 시를 지었다.
도학(道學)이 남쪽
고을에 있어 성망이 무거운데
공자처럼 사모한 사람 누구이던가
두 번째 찾아왔으나 도 못 듣고 얼굴만 뵈오니
50 되도록
배움 없는 사람 후생이 부끄럽네
(‘拜蘆沙奇丈’)
노사에게 도를 얻어듣지 못한 아쉬움을 토로한 면암의 시는 노사의 학덕이
어느 정도로 높았나를 간접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노사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담대헌은 적막하지 않았다. 노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
소선생(少先生)인 노사의 손자 송사 기우만이 담대헌의 주인이 되어 학자들을 맞이하였다. 1884년 12월 척사위정운동을 주도하다 전남 무안의
지도(智島)로 귀양갔다 돌아가던 당대의 학자 중암 김평묵이 노사의 유촉을 찾아 담대헌을 방문하였다. 화서 이항로의 수제자로 노사의 학문이 스승의
학문과 같은 내용이라며 극구 찬양하던 김평묵은 송사 기우만과 몇 밤을 새우며 ‘노사집’을 읽어가자 숭모의 정을 금치 못했다. 뒷날 노사의
주저(主著) ‘외필(猥筆)’이라는 글에 찬양의 발(跋)을 담았던 사람도 김평묵이었다.
그 뒤 1895년의 어느 날, 전남 보성으로
귀양갔다가 해배되어 돌아가던 희대의 문장가 영재 이건창(1852~1898)은 노사 학문의 보금자리인 담대헌을 찾았다. 송사 기우만과 함께 밤을
새우며 ‘노사집’을 읽어가던 영재는 노사의 깊은 학문에 탄복하면서 아낌없는 찬양의 시를 지었다.
‘납량사의’ 읽으며 마음 기울인
지 오래더니
담대헌에 오르자 사모의 정 새롭도다
사방을 둘러 싼 고산(高山)은 공경의 뜻 더 일고
성긴 대밭에서는 가난이
흐르는구나
정밀한 마음으로 얻어낸 도는 옛 사람을 능가하고
박학(樸學)으로 가문 이은 손자가 있네
탄식하노라 오늘의 만남
어이 쉽게 얻으리
돌아가서는 당연히 이야기 진진하리라.
(노사선생 고택을 지나며 손자 송사와 함께)
예나 이제나
가난한 노사의 집안, 가난이 흐른다는 대밭만 지금도 성긴 모습으로 대바람 소리만 내고 있었다.
한말의 거유이자 의기의 사나이들인
면암 최익현, 중암 김평묵, 영재 이건창 등이 찬양해마지 않던 노사의 학문. 그들의 찬양이 있었기에 외롭지 않게 ‘고산서원’의 우람한 모습이
호남학을 상징해주고 있다.
최초의 척사위정 주장…국시로 세우다
노사 기정진은 성리학사에서도 독특한 이론을 전개하여 가장 철저한 주리론(主理論)의 제창자이자,
견고한 일원론으로 유리론의 체계를 세워, 아무도 넘볼 수 없는 학문영역을 개척한 학자였다.
노사 기정진의 묘소와 묘전비. “하늘이
우리의 도를 도와 선생을 낳으셔, 정기를 모아 진실로 대성하셨네”라는 비문은 제자 정재규가 썼다.
-노사학파의
형성-
신실인 고산사에 배향(配享)된 제자 학자들의 면면이
바로 노사학파의 거장들이다. 우선 노문3자인 대곡 김석귀, 노백헌 정재규, 일신재 정의림 수제자 세 분에, 손자인 송사 기우만까지 네 분의
학자가 모셔져 있고, 또 다른 네 분의 학자들이 연달아 자리하고 있다. 월고 조성가, 석전 이최선, 신호 김녹휴, 동오 조의곤이 그들인데 모두가
당당한 학자들이었다. 1960년에 노사의 후학들에 의하여 간행된 ‘노사선생연원록’이라는 제자록에 의하면 친히 글을 배운 제자가 600여명에
이르고, 그들 제자의 제자들까지 합하면 6000여명에 이르는 대학단이 형성되었다고 여겨진다. 배향된 8명은 그 중에서도 대표자였다.
- ‘납량사의’와 ‘외필’-
노사 선생의 묘소 곁에 최근에 세운 척사위정탑.
노사 학문의
정수(精粹)는 누가 뭐라 해도 높은 수준의 성리학이다. 그런 성리학의 대표적 저술은 ‘납량사의(納凉私議)’와 ‘외필(猥筆)’이다. 46세의
왕성한 장년기의 저작인 납량사의는 그 당시 논쟁의 중심에 있던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주장이다. 이기(理氣)를
이원론(二元論)으로 잘못 해석하여 인(人)과 물(物)의 성에 대한 이동(異同)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유리론, 즉 이(理) 하나일 뿐이라는
일원론(一元論)의 입장인 노사는 인물성동이론의 어떤 것도 반대하면서 자기대로의 유리론을 주장하였다.
죽음을 몇 달 앞둔 81세의
말년에 저작한 ‘외필’은 주기론(主氣論)을 철저히 배격하느라 율곡 이이의 학설에도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 이기론으로, 뒤에 큰 파란을 일으킨
논문인데, 기(氣)란 이(理)의 대칭일 수 없는, 이(理)의 예속물이라고 설명하여 새로운 이기론을 세운 학술이론이었다. 치밀했던 노사는 46세
때의 저술인 ‘납량사의’를 77세 때에 다시 수정하여 새로운 이론을 보강하였고, 81세 때의 ‘외필’은 죽음이 임박한 때에 저술하여 당대의
석학들인 김석귀, 정재규, 정의림 등 세 제자에게 보여준 뒤 그들도 의심 없이 독실하게 믿겠다는 약속을 받은 뒤에야 세상에 내놓았던 글이었다.
80평생 가슴 속에 품고 있던 학문이론을 더 이상은 감출 수가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밖으로 알리지 않을 수 없어 사람들에게 보인다는 참으로
겸손하고 신중한 자세로 자신의 학설을 주장하던 모습이었다.
-병인양요에 올린 상소-
공리공담의 성리학을 뛰어넘어
깊숙이 연구해낸 성리학의 높은 학문을 실천으로 옮긴 학자가 기정진이었다. 69세이던 병인년에는 병인양요라는 전대미문의 난리가 일어났던 해다.
서양의 군대가 강화도를 침범하면서 세상이 요동칠 때, 그런 소식을 들은 노사는 나라를 근심하고 걱정하느라 식음을 전폐하고 병환에 이를 지경이
되자, 견딜 수 없는 애국심에서 곧장 임금에게 상소를 올린다. 이름 하여 ‘병인소(丙寅疏)’라는 참신한 내용의 상소였다. 그해 7월의 일인데,
이른바 척사위정(斥邪衛正)의 논리를 설파한 국내 최초의 상소였다. 같은 때에 화서 이항로도 비슷한 내용의 척사위정의 상소를 올리는데 그때는
9월의 일이었으니 노사보다는 2개월 뒤의 일이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논의가 외적과 싸우지 말고 화의(和議)를 이루자며 전쟁을
피하자던 주장이 대세를 이루던 때에, 노사는 결사반대하고 전쟁을 위한 군비강화책을 열거하고 나라 안에서는 정치를 제대로 하고, 나라 밖의 외적은
반드시 물리쳐야 한다는 척사론을 폈다. 노사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외적과 싸워 물리쳤고, 노사는 벼슬이 올라 공조참판이라는 고관이 내려지기도
했다. 바로 그 상소가 천하에 노사 기정진의 이름을 알린 상소였고, 최초로 척사위정의 이론을 온 국민에게 알린 글이었다.
-장엄하고 아름다운 노사의 최후-
노사 기정진은 천재였다. 큰 선생 아래에서 글을 많이 배운 적도 없으나 4~5세에
이미 글을 해독하고 지을 줄을 알았으며, 7세에 지은 ‘하늘을 읊음(詠天)’이라는 시는 온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시가 되었다.
‘사람들의 선악(善惡)에 따라 빠르게 보답한다네’(隨人善惡報施速)라는 글이 어떻게 7세 아동에게서 나올 수 있겠는가. 하늘은 인간의 선과 악에
따라 지체없이 상을 내리고 벌을 준다는 뜻이니, 7세에 이미 세상의 이치를 터득했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다. 그가 11세에 지었다는
‘춘추정기(春秋亭記)’라는 글은 노성의 학자도 짓기 어려울 만큼의 높은 수준의 글이었다. 15세에 일어난 평안도의 홍경래난에 대하여 예언했던
이야기도 그만큼 사리판단에 밝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명분이 없는 민란은 승리하기 어렵기 때문에 오래가지 못하고 난이 평정된다고 노사가
말했다고 전해진다.
학자로서의 학문이 대체로 이룩된 20대 후반인 29세에는 최초로 서울 나들이를 떠났다. 당대의 학자이자
문장가인 대산 김매순(臺山 金邁淳)을 찾아 보았고 충청도로 내려오면서는 강재 송치규(剛齋 宋穉圭)를 찾았다. 당시에 가장 큰 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이유다. 마침내 34세의 나이로 진사과에 장원한다. 연천 홍석주(淵泉 洪奭周) 같은 높은 수준의 학자가 시관(試官)이던 때문에 그래도
노사가 진사에 장원으로 합격을 했다고 전해진다. 아버지의 유언으로 진사과에 합격하자 그는 끝내 과거에 응시하는 일을 중단했으나, 노사에게는
그때부터 벼슬길이 열렸다. 35세 때부터 나라의 부름이 있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응하지 않았다. 45세에 내린 전설사(典設司) 별제(別提)에 겨우
6일 동안 근무했던 것이 그의 벼슬살이의 전부였다.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60세에 내린 고향 근처의 무장(茂長)현감이라는 벼슬도
완곡하게 거절하였고 산림(山林)의 벼슬인 장령(掌令)이나 집의(執義)는 물론 69세 때의 동부승지나 호조참의 등도 모두 거절하였고 재신(宰臣)의
지위인 공조참판이 내려졌고, 79세에는 호조참판에 임명되었어도 모두를 사양하고 학문연구에만 생애를 바치고 말았다.
노사의 생애에
말년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시골의 노학자로 과거에도 합격하지 못했지만 승지·참의·참판의 벼슬이 내려져도 전혀 응하지 않고, 77세에는 그의
대표적 논문인 ‘납량사의’를 수정하여 다시 쓰고, 81세에는 ‘외필’이라는 독특한 유리론의 이기철학을 완성하였다. 79세에 병자수호조약이
이룩되자 병이 나도록 우국충정을 이기지 못했으나 면암 최익현이 도끼를 들고 반대상소를 올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기쁜 표정을 지으며, “우리나라에
사람이 없다는 비웃음은 받지 않겠다”고 말하며 부끄러움을 이기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79세 때의 시조가 전해진다. “공명(功名)도
너 하여라 호걸도 나 싫으며, 문 닫으니 심산(深山)이요 책 펴니 사우(師友)로다. 오라는 곳 없건마는 흥 다하면 갈까 하노라”라는 시조 한
수는 그의 마지막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웠나를 반증해주고 있다. 학문의 높은 수준에, 아무런 미련 없이 아름답게 생을 마치겠다는 그의 뜻이 담겨
있다. 81세, 죽기 1년 전에야 생애의 대작인 대표적 논문을 저작한 그의 삶이 너무나 멋지지 않는가.
-노사의 묘소와
척사위정탑-
노사의 학문과 사상을 이으며 학문이 강해지던 곳이 ‘고산서원’이라면, 노사의 가장 뚜렷한 유적지는 그의 묘소다.
당시의 행정구역은 영광군 지역이었으나, 지금의 행정구역은 장성군 동화면 남산리의 황산(凰山)마을이다. 몇 년 전에는 전국의 유림들이 성금을 바쳐
세운 ‘노사선생 신도비’가 우람하게 서 있다. 학자이자 의병대장으로 생전에 가장 노사를 숭앙했던 면암 최익현이 지은 글에 근래의 서예가 여초
김응현이 쓴 글씨다. 14세에 결혼하여 세상을 떠난 뒤 함께 합장으로 계시는 부인은 울산김씨로 하서 김인후 선생의 후손이다. 노사의 제자 중에
영남의 학자로 가장 큰 명성을 얻었던 노백헌 정재규가 지은 묘갈명이 새겨진 비가 우뚝 서 있다. “하늘이 우리의 도(道)를 도와 선생을 낳으셔,
정기(正氣)를 모아 진실로 대성(大成)하셨네”(天相斯道 正氣之會 展也大成)라는 찬사로 정재규는 선생의 높은 학문의 완성을 찬양하였다.
고산서원에는 노사의 학문이 살아서 강해진다면 묘소에는 노사의 혼이 잠겨 있다. 더구나 최근에는 이 나라에서 최초로 척사위정의 논리를 주창한
공로를 잊지 않기 위해, 묘소 곁에 척사위정탑이 장엄하게 세워져 후인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있으니, 역사의 땅이자 사상의 고향은 지나는
행인들의 마음을 되살아나게 해주고 있다.
박석무(한국고전번역원장)
노사 선생 신도비
朝鮮國蘆沙奇先生神道碑銘
朝鮮國嘉義大夫戶曹㕘判經筵特進官蘆沙先生神道碑銘幷序
(조선국가의대부호조참판경연특진관노사선생신도비명 병서 )
資憲大夫議政府贊政月城崔益鉉撰
(자헌대부 의정부찬정 월성 최익현 찬)
安東金膺顯書幷篆
(안동 김응현 서병전)
오른쪽 면에는 後學月城崔昌圭謹識(후학 월성 최창규 근지) 追記(추기)가 있고
말미에 檀君紀元 四千三百三十年 丁丑 十月(단군기원 4330년 정축 10월) 이라 새겨져 있다.
노사 선생 묘역
'조선 노사 기선생 묘갈명 병서'(왼편)
찬 - 정재규, 전서 - 오준선, 서 - 삼종손 기재.
※ 기재는 을사오적 암살단의 주역 기산도(1878~1928)의 아버지이자
녹천 고광순의 사위로 을사오적 군부대신 이근택의 암살을 기도한 의사(義士)이기도 하다.
위정척사 기념탑
Tears Of The Ocean - Keiko Matsu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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