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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럼·강좌·워크숍

길 위의 인문학


길 위의 인문학

"文不如長城"  서원에서 삶의 지혜를 배우다


2016. 6. 14(화)

장성공공도서관



- 조선 선비의 표상을 찾아서 -

강사 : 강기욱 고봉학술원(재) 기획실장


서원은 창조적 소수를 위한 조선선비의 최고 교육의 장이었다.

서원에는 스승이 없다. 나만이 나를 가르칠 수 있다.

나는 나를 가르치는 유일한 스승이다. 인간은 인간을 가르칠 수 없다.

조선은 이 세상에서 철학자가 오백년을 통치한 유일한 나라이다.

조선은 왕들의 나라가 아니고 양반 관료사회 - 사대부들의 나라였다.

 왕이 사대부에게 죽임을 당하는것은 다반사였다.

조선 27왕 중의 11명의 왕이 의문사한 자료가 이를 뒷받침한다.

이는 왕이 사대부에게 군림하지 못했던 증거이다.

퇴계는 성학십도를 통해 치열한 자기연마와 인격완성의 길을 제시했다.

조선사대부들의 공부 과목은 첫째가 천문학이다. 천문학은 인문학이다.

우주적 자아의 완성을 통해 인간이 우주적 존재임을 확신했다.

이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사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공부였다.

둘째는 지리학이다. 역사지리, 인문지리, 풍수지리 등

인간의 삶에 관계되는 모든 지구적 지식의 총체를 일컬음이다.

셋째는 인사학이다. 인사학은 내 몸에 대한 성찰 즉 한의학이다.

이는 인체의 본질에 대한 지식을 공부한다.


남명 조식

나의 글은 비단을 짜되 완성을 보지 못한 것과 같고,

퇴계의 글은 베를 짜되 완성을 본 것과 같다.

군자는 경으로서 안을 곧게하고, 의로서 바깥을 바르게 한다.

산천재를 짓고 왼쪽에 경을 써 붙이고 오른쪽에 의를 써 붙였다.

경의 상징으로 성성자를 차고 다니고, 의에 상징으로 칼을 차고 다녔다.

경과의 이 두 글자가 있는 것은 마치 하늘에 해와 달이 있는것과 같다.

 이 두 글자의 의미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것이다.

성현이 남긴 말들의 귀결점은 모두 이 두 글자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배우는 이들이 두 글자의 공부에 매진한다면 마음에 거리낌이 없을 것이다.

 나는 그런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죽는구나. 

내가 한평생 간직한 장기가 있다면 그것은 책을 읽는 것이다.

 그러한 내가 성리를 논한다면 어찌 내가 남에게 뒤지겠는가.

큰 거리를 노닐면서 금은보화를 보고 값을 논하다가 하나도 자기 것으로

하지 못한다면 이는 한 마리의 생선을 사들고 돌아옴만 못하다.

학자들이 성리를 크게 떠들지만 자기 것으로 하지 못한다면 이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책을 많이 읽고 이론을 많이 떠들어도 자득한 것이 없으면 헛것이다.

또한 학문을 넓게 배우되 이를 자기 것으로 소화해서 그것에 힘입어 자신의 경지를

높이고 그 높은 경지에서 모든 사물을 훤히 내려다 보는 고견이 있어야 행함이

도에 어긋나지 않고, 세상에 쓰임이 이롭지 않은 것이 없다.

(산천재는 주역에서 따온 말로 강건하고 독실하게 그 빚남이 날로 새롭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일두 정여창

일두는 성리학의 태두인 송나라 정이천의 말에서 인용한

 하늘과 땅 사이의 한 마리 좀벌레라는 자기인식으로 산수에서 즐기는 삶을 살았다.

그것은 바로 산수에서 자강불식하는 성을 체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과의 교감을 통해 우주적 실재를 체화하는 수행의 연속이었다.

정이천은 다른 사람의 음택을 입고 살면서도 그럭저럭 세월을 보낼 뿐,

다른 사람들에게 음택을 주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한 마리의  좀벌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점필재 김종직

점필재는  책에 담긴 뜻은 알지도 못한채 입으로만 글자를 읽는다는 의미이다.



함양 개평마을 정여창 고택



 담장 아래 피어난 날개 하늘나리



일두 고택의 정려문



충신, 효자 등  정려를 계시한 패가 자그만치 다섯개나 걸려있다.




일두 고택 사랑채

정려문을 통해 마당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안채로 가는 일각문이,

오른편으로 넓은 사랑 마당에 잘 다듬은 디딤돌과 소맷돌을 갖춘 사랑이 보인다




정여창 고택의 위세와 품격을 보여주는 사랑채 앞 노송이 선 석가산.

  자연석을 이용해 삼봉형 주산을 높게 만들고, 좌우에 주산보다 낮은 각각의 높이로 봉우리를 만든 후

산봉 아래 깊은 석곡을 만들어 화초 등을 심은 모습이다.

아담하지만 산과 바위, 물과 나무가 모두 들어 있다. 동양 전통의 신선 사상을

조형물로 나타낸 것으로  석가산은 중국 송나라 때 생겼으며 한국에서는 백제, 신라 때 활발했고

일본은 백제에게 전수받아 정원의 골격을 이루는 요소로 자리 잡았다. 





동행자들의 자기 소개의 시간



석가산 담장 아래 피어난 어성초



과거 이곳 사랑채에 몇 번인가 유숙했던 기억인데,

 그 중 바로 앞 난이 놓여있는 탁청재에의 다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정여창

(鄭汝昌,1450년 음력 5월 5일 ~ 1504년)  

 율정(栗亭) 이관의(李寬義)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1456년(세조 11년) 이시애의 난으로 아버지 정육을이 전사하자

 세조의 특명으로 의주판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이후 점필직의 문하에서 수학 관직에 나아갔으

무오사화에 연루 배소에서 사망한다. 그 뒤 갑자사화로 부관참시된다.

사후 복권되었고, 중종조에 이르러 동국도학(東國道學)의 종(宗)으로 숭상되어 문묘에 종사되었다.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 수옹(睡翁), 시호는 문헌(文獻),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학역재 정인지, 하성위 정현조, 정숭조, 선조의  생모 하동부대부인이 그의 일족들이었다.

연산군의 세자 시절 스승이기도 하다.






대원군이 썼다는 '충효절의'



이것은 전남 장흥 월산재(月山齊)에 걸린 '충효절의' 편액으로

위 정여창 고택 사랑채의 것과 서체나 크기가 똑 같다는 사실.

어떤 것이 원조(?)인지 아직 확인을 못했다.






안채


정여창 고택 평면도




일두 정여창의 성리학적 사상


 정여창은 정몽주(鄭夢周) ·김숙자(金叔滋)·김종직으로 이어지는 도통(道統)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그의 저서는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소각되어 한강 정구(鄭逑)가 엮은 『문헌공실기(文獻公實記)』

 속에 그 유집(遺集)이 전할 뿐이다. 따라서 그의 사상은 「리기설(理氣說)」·「입지론(立志論)

「선악천리론(善惡天理論)」등 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는 기(氣) 없는 리(理)가 없고 리 없는 기가 없기 때문에 리기가 구별이 없는 것 같지만,

 리는 총괄적으로 말하여 지선(至善)하고 영위(營爲)가 없다고 할 수 있으며, 기는

 청탁(淸濁)의 구별이 있으므로 리기가 구별된다는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一而二 二而一]라는 입장을 버리지는 않았다.

 리기의 선악(善惡)에서 정자(程子)와 주돈이(周敦)의 입장에 반대하고, 성(性) 또한 선으로 악이 생기는 것은

 기의 청탁(淸濁)이 있기 때문이라며 천리(天理)가 인욕(人欲)으로 덮여 악이 된다고 하였다.

학문의 목적은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라 하여, 학(學)이란 성인을 배우는 것이며, 지(志)란 그 학문을 완성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자면 뜻을 굳게 세우고 그것을 관철하려는 강인한 의지가 필요하므로 물욕(物欲)에 이끌리고

공리(功利)를 추구해서는 목적을 이룰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먼저 굳건히 뜻을 세우는 일[立志]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학문하는 목적을 성인되는 데 있다고 하여 성학(聖學)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는 송유(宋儒)들의 주장과 맥을 같이하여 붕우간의 책선(責善)을 강조했으며, 학문은 성(誠)으로 하고,

율신(律身)은 경(敬)으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즉 성으로써 궁리(窮理)하고 거경(居敬)으로써 수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키백과에서 발췌)






일두 고택 담장 후문



종암바위와 우물


개평마을이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양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인 일두 정여창과 문효공 옥계 노진이 배출된 이후부터다.

 두 사람 모두 남명 조식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일두는 조선 시대 대표적인 도학자인 동시에 성리학자로

이기론, 심성론, 선악천리론 등의 사상을 기초로 소학과 가례의 실천적 효행에 모범을 보였으며, 특히 부모에 대한

효행을 삶의 근본으로 삼았다. 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고 1504년 갑자사화 때는 부관참시당하는 고난을 받았지만

 성리학사에서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5현으로 칭송되는 인물이다.


옥계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명종 1년(1546)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박사, 전적, 예조낭관을 거쳐 지례 현감으로

있었으며 청백리로 뽑힐 정도로 명망이 높았다. 수찬, 교리, 지평, 부응교, 직제학, 형조 참의를 거쳐 도승지, 진주 목사,

 충청도 관찰사, 부제학 등을 역임했다. 선조 8년(1575) 예조판서에 올랐으나 사퇴했고 그 후에도 대사헌,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에 임명되었으나 병 때문에 취임하지 못했다. 저서로 『옥계문집』이 있으며

남원의 창주서원, 함양의 당주서원에 제향되었다.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중에서)



 하동정씨 고가




1880년에 지은 집으로 원래는 여러채의 건물이 있었으나 대부분 훼철되었다.

하동 정씨의 경우 서인에서 노론으로 일괄적인 흐름을 보이는 반면 풍천 노씨는 주로 남인이었지만

서인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즉 하동 정씨는 성리학적 이상을 추구하고 정치·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위치를 공고히 했지만 풍천 노씨는 학문적 실천과 실리적인 면을 강조했다. 이는 풍천 노씨가 하동 정씨보다

 상대적으로 열세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차이는 양 문중의 중앙 정계 진출은 물론 개평 마을에서의 활동

영역에서도 은연중 엿보인다. 우선 하동 정씨가 풍천 노씨보다 건축 활동에서 우위를 띤다.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중에서) 



하동 정씨의 대지 규모는 풍천 노씨보다 월등히 크다.

하동 정씨가 마을 내에서 주도적인 입지를 갖고 있고 풍천 노씨는 이들과 다소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런 결과는 두 문중의 성격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하동 정씨는 위세적이고 탄탄한 배경을 바탕으로

 종파와 종손 중심적인 특성을 갖고 있는 반면, 풍천 노씨는 상대적으로 지파와 지손 중심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즉, 풍천 노씨는 개평마을과 떨어진 곳에 많은 씨족이 분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중에서)


오담고택 사랑채


오담 정환필 선생이 기거한 집으로 사랑채는 1838년에, 안채는 1840년에 지었다.

 오담은 조선 후기 학자였으며 일두의 12세 후손이다.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공식 명칭을 부여할 때는 당대의 건물주 이름을 적는 것이 원칙이나

 선조 이름인 오담을 고집해 결국 승낙받았다고 한다.  

사랑채 옆으로 난 대문으로 들어가면 사랑채와 안채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사랑채 대청마루에 신주를 설치하는 등

 대종가에서 분가한 양반 계층의 주거 형태라는 점에서 가치를 인정받았다.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중에서)



안채


이 집의 특징은 정지 칸, 마루 칸, 건넌방 칸이 안방 칸에 비해 폭이 넓다는 점이다.

 안채와 사랑채에 전후 툇간을 적용한 점 등이 조선 후기 주거 건축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중에서)



풍찬노씨대종가 사랑채


개평마을의 역사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원래는 경주 김씨 등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는데

 14세기에 정여창의 증조부인 정지의가 처갓집인 이곳으로 들어와 근거지를 잡기 시작했고,

곧바로 풍천 노씨도 입향했다. 풍천 노씨 입향조인 노숙동이 함양에 입향한 내력은 전설적이다.

노숙동이 과거에 급제하고 이곳을 지나다가 마을 앞 종바위 근처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때 마을에 입거한 김점이 집에서 낮잠을 자다가 꿈에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고 깨어났다.

무언가 길조가 있다고 느낀 그는 하인을 시켜 주변을 살피게 했고, 종바위 위에서 자고 있는

노숙동을 발견했다. 김점은 그를 불러오게 해 융숭하게 대접했고 추후에 사위로 삼았다.

김점은 정복주의 사위이고 정복주는 정여창의 할아버지다. 즉, 하동 정씨가 먼저 개평에 입향하고

사위인 김점의 사위로 풍천 노씨가 들어온 것이다.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중에서)



안채


입향조인 송재 노숙동이 경남 창원에서 처가인 이곳에 자리를 잡고 이사 오면서 지은 집이다.

송재는 호조예서참판 등을 역임했고 『고려사』 저술에도 참여했다.

지극히 청렴해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쳤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고 하며,

1701년 숙종 때 도곡서원에 배향된 선비 중의 선비다.

 현재 보이는 건물들은 순조 24년(1824) 건립되었으며 1940년대에 중수한 것이다.

 남부 지방의 특징인 개방형이며 독립된 채들로 구성되었지만 사대부 집답게 ㅁ자형으로 배치되었다.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중에서)



남계서원


정여창(鄭汝昌)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위하여 1552년(명종7)에 지었다.

 1566년(명종 21)에 나라에서 ‘남계(灆溪)’라는 사액을 내렸다.




정유재란(1597)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1603년(선조 36)에 나촌으로 옮겨지었다가

1612년(광해군 4) 옛 터인 지금의 위치에 다시 지었다.

숙종 때 강익(姜翼)과 정온(鄭蘊)을 더해 배향했다.




따로 사당을 짓고 유호인(兪好仁)과 정홍서(鄭弘緖)를 모셨다. 별사는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정여창을 모신 서원은 전국적으로 9곳에 이르며, 그 중 주된 곳이 남계서원이다.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남계서원은 서원철폐 때에도 존속한 47개 서원중의 하나이다.

2009년에는 사적 제499호로 지정되었다








해설 경청



























사당



이게 도대체 무슨 사변인란 말인가?

눈을 씻고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 사당을 지키던 흰색 배롱나무.




 (지난 2013년의 모습)


이젠 과거 사진으로 남은 사당 구역 내에 서있던 흰색 목백일홍의 자태.

사진상의 '白百日紅' 이야말로 남계서원 최고의 포토 포인트이자

일두 선생을 일컫는 동국도학(東國道學)의 상징이요, 선비정신 발현이라  굳게 믿어왔던 터.

어느 누구의 소행인지 몰라도

이 시대 찌질이들의 안목의 낳은  남계서원 최대의 불상사가 아닐까 싶다.




그저 그런 나무 한 그루에 불과하다는 생각에서 였을까?

사당의 품격에 고아한 방점을 찍어주던 白배롱의 우아한 자태에 대한 기억을 가슴에 묻어야 하다니.

서원 문화 관계자들은 이토록 처참한 행태를 왜 저지하지 못했을까?

속 터지는 심정으로 남계서원 일대를 내려다 보며 한동안 긴 한숨만...



 남명  기념관 



남명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04년 지어진 기념관.




 남명의 고고한 선비정신을 대변하는 명종에게 올린 단성소(丹城疏).

 양반 관료의 부정부패와 지방 서리들의 횡포를 지적하고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 것을 주장했던 것.


(전략)전하의 정사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망해버렸습니다.

하늘의 뜻은 이미 가버렸고 인심도 떠났습니다. 마치 큰 나무가 백 년 동안이나 벌레가 속을 파먹고

진액도 다 말라버렸는데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언제 닥쳐올지 까마득히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 지경까지 이른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중략)자전(紫殿)께서 생각이 깊으시다고 해도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일 뿐이고, 전하께서는 나이 어려 선왕의 고아일 뿐입니다.

천가지, 백가지나 되는 천재(天災), 억만 갈래의 인심을 대체 무엇으로 감당하

고 무엇으로 수습하시렵니까?(후략)



조식(曺植)


 자(字)는 건중(楗仲)이며, 경상도 삼가현(합천) 사람이다.

한미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와 숙부가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비로소 관료의 자제가 되어 사림파적 성향의 가학을 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30세까지 서울 집을 비롯한 부친의 임지에서 생활하며 세상을 보는 안목을 넓혔고

 조선 중기의 큰 학자로 성장하여 퇴계와 더불어 당시의 경상좌·우도  사림을 각각 영도하는 인물이 되었다.

 관직이 내려졌으나 한번도 취임하지 않았으며 현실과 실천을 중시하며 비판정신이 투철한 학풍을 수립하였다.


그의 제자들로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 정인홍, 김우옹, 정구 등을 길러냈으며

 대체로 북인 정파를 형성하였다. 사후  사간원대사간에 추증되었다가

북인 집권 후  의정부 영의정에 증직.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靡室靡兒僧似我

집도 없고 아들도 없는 게 중과 비슷하고

無根無我如雲

뿌리도 꼭지도 없는 이내 몸 구름 같도다.

送了一生無可奈

한 평생 보내자니 어쩔 수 없는 일

 餘年回首雪紛紛

여생을 돌아보니 머리가 흰 눈처럼 어지럽도다.



남명 선생이 쓴 오언절구 漢詩



성성자(惺惺子)

남명 선생이 자신을 성찰하는 도구로 삼았던 방울




경의검(敬義劍)


남명 선생은 평생 재야의 길을 걸었다.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 外斷者義). 남명은 다른 선비들과 달리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의’라는  글귀를 새긴

패검을 차고 다녔다고 한다. 그것은 절제로 일관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이었다.



해설을 경청 중인 일행.



 남명에게 내린 선조의 제문.


  사제문(賜祭文) 


하늘이 이토록 문명된 학문과 제도를 버리니, 선비가 나아갈 바를 잃었다.

사람들은 진성眞性을 아로새기고, 순정 淳情을 무너뜨려 세속에 아부했지만

公은 뜻을 더욱 굳게 가져 끝내 변절하지 않았다.

문장文章은 여사餘事로 삼고 오직 대도를 향해 매진하니 그 도달한 경지가 홀로 높았다......

자기의 생각을 발표할 때도 의기가 순정純正하고 말고 글에 위엄이 있었다.

 누가 말했던가, 이는 봉황의 소리라고?

모든 사람의 입에서 재갈을 벗기니, 간신들의 뼈를 서늘하게 하였고, 뭇 벼슬아치들의 얼굴에

 땀이 흐르게 하였다. 위엄은 종묘와 사직에 떨쳤고, 충청스런 분노는 조정을 격동시켰다.

사람들은 조공 曺公에게 위태롭다 걱정했지만공은 조금도 겁내지 않았다......

간당姦黨이 물러가고 현덕을 찾음에 공을 으뜸으로 부르니 백의로 마주하여 절실하고

 긴요한 좋은 방책을 바치어 묻고 대답함이 산울림 같고

고기와 물이 서로 의지하고 기뻐하듯 하였다.....

 내 대통을 이은 뒤 일찍이 성망을 흠모하여 선왕의 뜻을 따라 초빙하였건만,

공은 더욱 멀기만 하니 내 정성이 부족했는지 부끄러워했다. 충성어린 소장疏章은 남이 못할

말을 하였고 그로써 과인은 공의 학문이 깊고 넓음을 알았다. 이를 병풍 대신 둘러치고

조석으로 읽어 보며, 공이 오기만 하면 팔과 다리로 삼으로 했는데, 어찌 생각이나 했으리.

한번 병들자 처사의 별이 빛을 잃을 줄이야......

누구를 의지해서 냇물을 건너며 어디에서 높은 덕을 보고 배울까.

소자小子(국왕이 자신을 제자로 겸양한 호칭)는 어디에 의탁하며, 민생들은 누구에 기대할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슬픈 마음 가눌 길이 없다.

옛날 은둔한 선비들을 되돌아보니 그 시대마다 찬연히 빛났다.

허유許由와 務光무광이 교훈을 세워서 唐虞당우 시대가 순박했고, 노중련魯仲連은

진나라의 폭정에 항거하였고, 엄자릉嚴子陵은 한나라의기강을 세웠다.

 한 사람의 절개와 지조로도 이같이 일세의 퇴폐를 막았거늘 하물며 금옥같이 곧은 미덕으로서야.

비록 몸은 두어 이랑 논밭에서 서식했지만 세상의 경중을 한 몸으로 좌우하여 그 빛은 일대를 밝히고,

그 공은 백세에 남을 것이니 비록 사후에 영예직을 수여하지만 어찌 예를 다했다 하겠는가?

지난 날 선왕께서 세상을 같이 하지 못하심을 한탄하시더니,

내 이제 그 말씀 되새겨 봄에 마음이 부끄럽다.

 음성과 요모를 영원히 못 보게 되었으니 이 한스러움 어찌 헤아리리오.

남쪽 하늘 바라보니 산 높고 물만 길고나. 하늘이 은둔한 선비를 아끼지 않아 나라의 대로大老가

잇달아(여기서 '잇달아'는 퇴계가 간 지 일년 만에 또 남명이 갔음을 지칭) 세상을 뜨니

온 나라가 텅 비어 본받을데 없음을 어찌하랴.


 

초야에 묻힌 처사를 '나라에서 존경받는 어진 노인'(國之大老)으로 추앙한 것은

남명의 예가 처음. 이 때부터 조정이 나라의 선비들에게 우대의 예를 갖추었으며,

과거 출신과 구별치 않는데서 나아가 속세의 선비를 더 우대하여 보임하는 전례가 마련되었으니,

 남명이야말로 사림을 흥하게 한 지대한 공로자인 셈. 이후로 재야학자들 중에

정인홍, 송시열, 허목 같은 명관이 많이 나와  사존관비士尊官卑라는 자존과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케 된 것.



산천재(山天齋)

남명 선생이 만년에 학문을 제자들에게 전수한 곳으로

사림의 중심이자 임란 때에는 의병의 산실이기도 했다.





산천재 주련


春山底處无芳草

봄 산 어디엔들 향기로운 풀 없으리오만
只愛天王近帝居

하늘 가까운 천왕봉만이 좋아 여기 있네
白手歸來何物食

빈손으로 왔으니 무얼 먹을까
銀河十里喫猶餘

십리 은하같은 물 마시고도 남으리








산천재 마루 위 ‘허유와 소부의 고사’를 그린 벽화다.

중국 요 임금때 은둔생활을 하다 천하를 맡아 달라는 임금의 요청에 귀 버렸다고

냇물에 귀를 씻은 허유와 귀 씻은 더러운 물을 소에게 먹일 수 없다며 소를 몰고

냇물을 거슬러 올라갔다는 소부의 일화를 그린 것. 
 



아래 두 장의 사진은 산천재 보수 이전에 찍어둔 것으로

 현재는 떼어내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산천재 마당에 심어진 비의 상징

남명매(南冥梅)











남명 선생 묘소


1572년 1월 경상도 감영(監營)에서 남명에게 병이 있다고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은 특별히 전의(典醫)를 파견하였지만, 전의가 도착하기 전에 남명은 세상을 떠났다.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경의(敬義)의 중요함을 제자들에게 이야기했고,

경의에 관계된 옛 사람들의 중요한 말을 외웠다. 2월 8일 자세를 단정히 한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부음 소식이 전해지자 선조는 예관을 보내 치제하였다. 그의 나이 만 70세였다.



묘소 앞 3기의 비석


남명과 두번째 부인 송씨의 묘비로 작은 비석은 숙부인 은진송씨의 묘비이고

바깥쪽은 대곡 성운 선생이 지은 묘갈명을 탁계 전치원의 글씨를 새긴 처음의 비석이며

큰 비석은 현재의 묘비가 세워지기 전에 있었던 것으로 한국전쟁의 상흔이 뚜렸하다.




이황이 주로 순수한 학문적 관심에서 성리학의 이론 공부에 심취했던 반면 남명은 이론 논쟁을 비판하면서

실천 문제에 관심을 집중했으며, 노장 사상 등 이단에 대해서도 포용적이었다. 유학자이자 성리학자였던 그는

조선 시대 내내 다른 유학자들이 도교와 노장 사상을 이단시한 것과 달리 노자와 장자에게도 취할 점이

있다고 본 몇 안 되는 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황은 그에 대해 "오만하여 중용의 도를 기대하기 어렵고,

노장에 물든 병통이 있다"고 비판 했는데, 조식은 이에 선비들이 공부한다는 핑계로 자신의 부모의 고혈을

짜고, 여러 사람들에게 폐를 끼친다고 응수했다. 남명은 "요즘 학자들은 물 뿌리고 청소하는 절차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 하늘의 진리)를 담론하며 허명을 훔친다"고 맞대응 하는

등의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황의 조식 비판은

후일 정인홍이 조식을 옹호하는 글을 올림으로서 다시한번 재현된다.


신이 젊어서 조식을 섬겨 열어주고 이끌어주는 은혜를 중하게 입었으니 그를 섬김에 군사부일체의

 의리가 있고, 늦게 성운의 인정을 받아 마음을 열고 허여하여 후배로 보지 않았는데, 의리는 비록

경중이 있으나, 두 분 모두 스승이라 하겠습니다. 신이 일찍이 故 찬성 이황이 조식을 비방한 것을

보았는데, 하나는 상대에게 오만하고 세상을 경멸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높고 뻗뻗한 선비는

중도를 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노장(老莊)을 숭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운에 대해서는 청은(淸隱)이라 지목하여 한 조각의 절개를 지키는 사람으로 인식하였습니다.

신이 일찍이 원통하고 분하여 한 번 변론하여 밝히려고 마음먹은 지가 여러 해입니다.(중략)


조식과 성운은 같은 시대에 태어나서 뜻이 같고 도가 같았읍니다. 태산교옥(泰山喬嶽) 같은

기와 정금미옥(精金美玉)과 같은 자질에 학문의 공부를 독실히 하였으니 (중략)

 

이황은 두 사람과 한 나라에 태어났고 또 같은 도에 살았습니다만 평생에 한 번도 얼굴을 대면한 적이

없었고 또한 자리를 함께 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한결같이 이토록 심하게 비방하였는데,

신이 시험삼아 그를 위해 변론하겠습니다.


 이황은 과거로 출신하여 완전히 나아가지 않고 완전히 물러나지도 않은 채 서성대며 세상을

기롱하면서 스스로 중도라 여겼습니다. 조식과 성운은 일찍부터 과거를 단념하고 산림(山林)에서

빛을 감추었고 도를 지켜 흔들리지 않아 부름을 받아도 나서지 않았읍니다. 그런데 이황이 대번에

괴이한행실과 노장의 도라고 인식하였으니 너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중략)


 더구나 조식과 성운은 비록 세상을 피해 은거하였다고 하지만 선대 조정의 부름을 받아 조정으로

달려가서 한 번 임금을 존중하는 뜻을 폈고, 누차 상소를 올려 정성을 다해 치안과 시무를 발씀드렸는데,

이것이 과연 괴벽의 도리이며 이상한 행실입니까.


그때 나이 이미 70이었습니다. 어찌 벼슬을 그만두어야 할 나이인데 출임하려고 하겠습니까.

수레를 버리고 산으로 돌아가 자신의 행실을 닦고 삶을 마친 것이 과연 중도에 지나치고

괴이한 행실을 한 것이며 세상을 경멸하는 노장의 학문이란 말입니까 신은 의혹스럽습니다.


후일 조식의 제자와 이황의 제자들은 율곡 이이와 성혼의 제자들과 대립하며 동인을 형성한다.

그러나 이황의 제자와 조식의 제자 간 사상의 차이는 다시 동인을 양분화시키는 원인이 된다.

같은 해에 태어난 두 거유의 상이한 출세관과 학문관은 결국 남인과 북인의 분화로 이어졌고,

 당쟁을 격화시키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백과사전 참고, 정리)


남명 묘소에서 내려다 본 모습으로

묘 앞 쪽으로 한 기의 묘소가 더 있는데 이는 은진송씨의 무덤이다.

정경부인 남평조씨의 묘는 김해 산해정 앞에 있다.



여재실(如在室)


남명기념관 옆에 자리하고 있다.

남명 선생과 정경부인, 숙부인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가묘(家廟)이다



덕천서원(德川書院)


1576년(선조 9) 지방유림의 공의로 창건하여 조식(曺植)의 위패를 모셨다.

1609년(광해군 1) ‘德川(덕천)’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그 뒤 최영경(崔永慶)을

 추가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0년(고종 7)에 훼철되었다가 1920년대 지방유림이 복원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숭덕사(崇德祠)·경의당(敬義堂)·동재(東齋)·서재(西齋)·신문(神門)·대문(大門)·

세심정(洗心亭)·산천재(山天齋)·상실(橡室)·장판각(藏板閣)·별묘(別廟)·문루(門樓)·재실(齋室)·

고사(庫舍) 등이 있고, 신도비(神道碑)도 있다.



경의당은 5칸으로 된 강당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장소로 사용된다.



동서 양재는 유생들이 공부하며 거처하는 곳이고,

고사는 향례 때 제수(祭需)를 장만하며 보관하는 곳이다.



請看千石鍾

저 천석들이 종을 보라
 非大구無聲

크게 치지 아니하면 소리나지 않네
爭似頭流山

어찌하면 두류산처럼
天鳴猶不鳴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숭덕사는 3칸으로 된 사우(祠宇)로서, 조식의 위패와 최영경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숭덕사 오른편 비룡문 벽화



숭덕사 왼편의 호랑이 벽화.












                       






서원 앞 덕천강가에 자리한 세심정(洗心停)



송정문집                                                            
송정선생문집을 보면

조식(曺植)을 배향한 덕천서원 앞에 지은 세심정에 대한 「세심정기(洗心亭記)」와

그 주변의 경관을 적은 「남간기(南磵記)」등이 나온다.



세심정記



서원 앞을 흐르는 덕천강.

조금 아랫쪽에서 대원사 계곡 물과 합수되어 진양호로 흘러든다.






Cannon Variations - Ethere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