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량金斗樑, <월야산수도月夜山水圖>
1744년, 82×49.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두량은 도화서 화원으로 별채를 지냈고, '남리南里' 라는 호를 영조로부터 하사받은 인물이다.
이 그림은 그의 나이 49세 되던 때 안개 낀 가을 달밤의 정취를 그린 것으로 <월야소림도月夜疎林圖>
라고도 부른다. 잎이 다 떨어지 나뭇가지를 거칠게 묘사하고, 빠른 붓놀림으로 계곡의 급류에 속도감을 주었다.
무리 진 달과 계곡 너머 짙은 안개가 이 전경과 대조된다.
산의 본상本相을 숨겨두어 손상시키지 않으려는 뜻을 담았다.
이산해李山海, 「달밤에 운주사를 방문한 기록月夜訪雲住寺記」
어느 날 저녁, 온창 고을 정 사또가 찾아왔다. 내가 말하였다.
"공이 이곳을 다스린 지 서너 해가 되었으니, 이 산의 경승을 이미 잘 파악해서 돌아보셨을 테지요. 나를 위해
안내해 주지 않겠소? 다만 국상國喪에 상복을 입고 있는 몸이라서, 놀러다닌다는 혐의를 받지는 않을까요?"
정 사또가 말하였다.
"아, 이 못난 사람이 불민不敏했군요. 공사다망한 까닭에 한번도 유람할 겨를이 없었소이다.
이제 만일 선생님을 모시고 산중을 한번 오가게 된다면, 그것은 곧 선생의 은혜올시다. 더구나 승방에서 하룻밤을
자는 것은 술을 싣고 산을 찾아가는 일에 비할 바가 못 되리니, 어찌 혐의가 있겠소?"
옆에 서생 이복기李福基라는 자가 있어. 서울에서 마을에 살았고, 나그네로 돌아다니다 우연히 이곳에 들러 있던 참
이었는데, 그도 적극 찬성하였다. 마침내 이 군이 바짓가랑이와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먼저 나서고, 정 사또와 우리 집
아이가 뒤를 따랐다. 나는 승려의 등을 빌려 업혔다. 앞서 가는 사람은 끌고 뒤에 오는 사람은 밀고 왼편에서
부여잡고 오른편에서 끌어당기면서, 마치 생선 꿰미와 같은 형상을 지어 올라갔다.
운주사 절문에 이르니, 범종 소리가 막 잦아드는데 달이 산봉우리에서 떨어져 나와 이미 한 길 남짓 되었다.
나는 일찍이 소동파蘇動坡가 「적벽부赤壁賦」에서 "산이 높아 달이 작다" 고 한 말을 두고 '달이 크고 작은 것이
산의 높낮이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라고 의심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이르러 그 말을 징험하여,
비로소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정 사또가 말하였다.
"좋은 밤은 만나기 어려운 법이요, 장관은 다시 보기 어렵지요. 잠시 맨 바닥에 앉아 있다다 흥이 다하면 절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떠하오?" 모두들 좋다고 하였다. 마침내 절 앞 동대東臺 위에서 잠시 쉬었다. 얼음 같은 샘이 봉우
리 정상에서 쏟아져 나오는데, 대竹통을 설치하여 물을 끌어 작은 못에 떨어지게 해놓았다. 쟁글쟁글 물 떨어지는
소리가 패옥 같았다. 한 움큼 손으로 떠마셔 보니, 중국의 태화산太華山 우물이나 혜산惠山의 샘물이라 하더라도
그 시원함을 견줄 수 없을 것 같다. 이날 저녁, 가는 구름까지 죄다 걷히고 푸른 하늘이 물처럼 맑았다. 수레바퀴
같은 둥근 달이 차츰 중천에 오르고 별과 은하수가 은은한 빛을 흘리니, 천지 육합과 사방 천하가 통랑하게 밝고
깨끗하게 맑아서 만리 먼 곳까지 걸거치는 것이 없다. 아래로 내려다보니 천 개 바위와 만개 골짜기가 그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고, 산 밑의 멀고 가까운 곳에 있는 마을과 집들이 또렷하게
하나하나 아득한 사이에서 분별해낼 수 있다.
이윽고 푸른 구름 한 줄기가 산 너머에서 일어나 하늘 한복판을 가리고, 바람이 일어나 동남쪽에서 불어왔다.
이에 소나무끼리 노송나무끼리 서로 부딪쳐 소리를 내고, 계수나무 혼백인 달은 구름에 가려져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였다. 골짜기는 은은하고 숲은 음산하며 이름 모를 새는 울며 날아오르고 산메아리는 서로 화답하며, 오싹하게
놀라도록 하였다. 가물가물 귓가에, 신선이 학을 타고 먼 하늘에서 내려와서 부는 피리소리가 들릴 듯하되
귀를 기울이며 조용히 기다려 보아도 끝내 신선을 만날 수는 없었다.
이때 밤은 이미 깊어 있었고, 서리와 이슬이 아주 축축하였다.
정 사또가 시중드는 아이를 시켜 차가운 막걸리를 따르게 하였다. 좌중이 각기 한 사발씩 마시니,
곧바로 귓볼이 훈훈해져서 서로 웃고 떠들고 장난을 쳤다. 나는 홀로 묵묵히 아무 말이 없은 채로
마치 무슨 생각을 하는 것처럼 하고 있었다. 한참 후 옆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었다.
내가 말하였다.
"오늘의 이 모임이 어떻게 비롯되었는지는 여러 공들이 어찌 모르겠소?
아아, 왜란의 난리가 있은 이래로 사람들이 떠나가고 돌아오고 보내고 남고 하느라 서울이나 지방이
온통 소란하여 백성들이 제 모숨을 보전할 수가 없어, 도로에서 적의 칼끝에 죽은 이가 얼마나 많았소?
우리들은 창칼을 들고 나서서 전장의 모래 벌에서 적과 대적해서 기세를 꺾을 수 없었던 데다가. 또 호미와 삽을
쥐고서 논과 밭에서 열심히 일하여 위로 세금을 바칠 수도 없었소. 그러면서도 배불리 먹고 편안히 살아 말을 타고
무리들을 이끌고 풍경을 즐기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것은, 그것이 모두 임금의 큰 은혜가 아님이 없소.
더구나 나로 말하면, 못나고 형편없어 걸핏하면 죄망에 걸려들었는데도 오히려 성스러운 임금님께서 너그럽게
포용하여 죽이지 않으시고 조정 분들이 너그럽게 용서해서 심하게 내치지 않았소. 그래서 호서 땅 고향에서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 보면서 눈으로 보고 코로 숨을 쉴 수 있게 된 것은 실로 천지같고 부모 같은 임금님의
은혜라 할 것이오. 이 때문에 내가 감동하여 추대하고 가슴에 새겨서 입으로 마음으로 다짐하는 것이니,
산에 올라서는 산처럼 우리 임금님 만수무강하시기를 축원하고 강물에 임해서는 물처럼 우리나라
복록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발원하며 바람을 쐬면 임금님의 목소리를 받드는 듯이 하고,
달을 보면 임금님의 밝은 얼굴빛에 절을 하는 듯이 합니다.
이는 감정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와 스스로 억제할 수 없는 것이 있어서라오."
그 말을 한 끝에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러자 좌우의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고 숙연해졌다.
마침내 서로 이끌고 승당으로 들어갔다. 승당은 모두 여덟 칸인데 터서 하나의 온동방으로 만들어 100여 사람을
수용할 수 있다. 불상 앞에는 등불이 사르어 있어, 휘황찬란해서 대낮 같으므로, 마음이 밝아지고 몸이 시원해졌다.
자다 깨다 하가가 일어나 살펴보니, 승려 중에는 혹 벽을 향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이도 있고,
혹 불경을 외우면서 예불을 드리고 있는 이도 있다. 또 어떤 이는 누워 있고, 어떤 이는 기대앉아 있었다.
그리고 손님 중에는 또 승려와 함께 장기를 두는 이도 있고 승려와 함께 산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도 있으며,
불러도 대꾸 없이 코를 우레처럼 골면서 잠에 빠진 이도 있다. 이 또한 하나의 기이한 경관이다.
동이 트자 산문을 나서서, 다시 동대로 발걸음을 옮겨보니, 지난밤의 구름이 막 흩어지고 싸락눈이 갓 그쳤다.
서해의 아득히 드넓은 모습, 개펄의 휘돌아 뻗은 모습, 섬들의 아득히 가물거리는 모습, 그 모든 것들이 푸른빛
을 모으고 흰빛을 그어서 발아래에 기이한 장관을 다투어 바치므로, 어제 본 것에 비하여 십중팔구는 얻을 수
있다. 다만, 하늘이 더욱 높고 땅이 더욱 넓으며 내 눈이 더욱 밝아지고 내 가슴이 더욱 트여서,
조물주에게 태초의 아득한 혼돈의 경지에서 공경의 마음으로 절을 하였다.
이에, 사람이 보는 것이라 진실로 끝이 없으므로
급히 스스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서로 밀고 당기며 하산하였다. 어제 험하던 것이 평탄해졌고, 위태하던 것이 평평해졌으며,
몸도 가벼워지고 발걸음도 매끈해졌다. 걸음걸이가 나는 듯하여, 밥 한 끼 먹을 시간에 저도 모르게 이미 골짜기
입구를 나서 있었다. 정말이구나. 위로 도달하는 것은 진실로 어렵지만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것은 아주 쉽다
는 것이. 고개를 돌려 산사의 입구를 바라보니,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고 숲과 골짜기가 어른어른하다.
겨우 하룻밤 전의 일이거늘, 정말로 신선이 산다는 요대瑤臺에서의 하룻밤을 자고 일어난 듯하였다.
한참을 서성이며, 미처 다하지 못하였다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아아! 인생 백 년의 사이에 질병이 몸을 파고들고 근심이 마음을 에워싸고 있기에,
옛사람은 '한바탕 크게 웃는 일도 만나기 어렵다' 라고 하였으니, 한 해 사이에 좋은 밤 밝은 달을 몇 번이나
만날 수 있으랴. 게다가 이름난 땅과 빼어난 경치는 절로 신선의 인연이 없는 자라면 쉽게 이를 수가 없는 법이 아닌가!
우리들이 도고산에서 달빛을 완상한 모임은 실로 하늘이 베풀어 준 것이지, 계획하거나 약속해서 될 것이 아니었다.
도고산道高山
충청남도 아산시 도고면에 위치한 해발고도 482미터의 산.
주봉은 국사봉으로 옛날부터 초계와 방어의 군사적 요새였다. 1390년(고려 공양왕 2) 6월, 서해안으로 왜구가 이곳에
진을 치고 노략질하여 장수 윤사덕과 유룡생이 이끄는 관군이 왜적 100여 명 전원을 섬멸하였으며, 1392년 고려가
망하자 고려조에 벼슬을 했던 김질이란 분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려고 여기서 거적을 깔고 순절하였다고 한다.
이산해李山海(1539~1609)는 1600년(경자) 겨울, 탄핵을 받아 온창溫昌의 시전촌에 우거하고 있던 때에 도고산
운주사에 다녀왔다. 도고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충남 예산현과 신창현의 양쪽에 나와 있다. 이산해는
도고산의 산봉우리와 계곡의 수려한 경관이 호우湖右에서 으뜸이라고 하고, "이 산에는 대체로 36개의
봉우리가 있었는데, 제1봉이 정확하게 내가 거처하는 집의 문발로 솟아 있고, 동쪽과 서쪽의 대여섯 개의
봉우리가 좌우로 둘러싸고 있어 그 모습이 마치 높은 관을 쓴 장인丈人이 홀연히 높이 앉아 있고
문생門生과 제자들이 읍을 하면서 둘러서서 모시고 있는 모습과 같다" 고 묘사하였다.
도고산은 실은 충남 내포 지역의 산이다. 이중환은 <택리지> 「팔도총론」에서 "가야산 둘레 10개 고을을 총칭하여
내포라 한다. 토지는 기름지고 평평하고 넓다. 물고기와 소금이 넉넉하여 부자가 많고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도 많다.
서울의 남쪽에 있어서 서울의 세력있는 집안치고 여기에 농토와 집을 두고 근거지로 삼지 않은 사람이 없다" 고
설명하였다. 도고산은 아산과 예산의 경계에 있다. 온산에 숲이 짙고, 아산만과 내포를 조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동북쪽에서 뻗어와 남쪽을 지나 서북쪽 가야산으로 나아가는 금북정맥의 산들을 조망할 수 있다.
이산해는 <토정비결>로 유명한 토정 이지함이 숙부이고,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한음 이덕형이 바로 사위이다.
본관은 한산韓山, 호는 아계鵝溪이다. 진사를 거쳐 1561년(명종 16) 문과에 급제, 1578년(선조 11) 대사간에 이르러
서인 윤두수 · 윤근수 등의 죄를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1590년 영의정에 올라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光國
공신에 책록되었고, 이듬해 송강 정철이 건저建儲를 일으키자 계략을 꾸미고 아들 이경전李慶全(1567~1644)으로
하여금 그를 탄핵하게 해서 유배시켰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사兩司로부터 국정을 그르치고 왜적을 들어
오게 하였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받아 파직, 백의로 평양에서 다시 탄핵을 받아 강원도로 귀양을 갔다가 돈녕부영사로
복관되고,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1600년 영의정에 재임되고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본래 동인에 속하였으나 다시 북인에 속하였다가 마지막에는 대북의 영수가 되었다.
이산해가 다녀온 도고산 운주사는 현재는 남아 있지 않은 듯하다.
그는 "운주사는 제1봉 절정의 아래에 있는데, 구름이 항상 사찰 앞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이름을 삼은 것이라고
《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고 밝혔다. 하지만 현전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도고산 자락에 있던 사찰들로
신창현新昌縣 조에서 한량사閑良寺 · 천일암千日庵 · 도명사道明寺 · 원암元庵 · 불암佛庵 · 안심사安心寺 등을
들었을 뿐 운주사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전라도 능성현에 운주사의 이름이 나올 뿐이다.
기이한 일이다. 절에 다녀온 이튿날 그는 이 글을 짓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무상하고, 사람의 일이란 쉬 바뀌는 법인지라, 빼어난 일을 후세에 전하여
영원토록 하고자 한다면 문자를 빌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자고로 시인묵객이 산수 간에서 시와 술로
유람한 것이 아무리 당대에 떠들썩할지라도, 먹과 붓으로 그려내지 않는다면, 시일이 경과하고 세상일이 바뀌고
나면 마치 지나가는 구름과 날아가는 새처럼 아무런 자취를 남기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이 승방에서 하룻밤
나눈 이야기는 눈 깜짝할 사이에 문득 묻혀지고 말 것이니, 누가 이를 알아주겠는가?
이 때문에 내가 부득불 글을 지어 기록하게 된 것이다.
이산해는 글 끝에 시촌거사柿村居士라는 자호로 서명하였다.
아산시(온양)와 예산을 연결하는 21번 국도의 대문안 네거리에서 645번 지방도 대술(예산군 대술면)
방면으로 들어서면 바로 시전리가 나오고, 길가에 도고중학교가 있다.
이산해는 별도로 「운주사기」를 지었다.
옛날 도정절陶靖節(도연명陶淵明)이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지으면서
구름을 무심無心하다고 하였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고 여긴다.
숲은 새에게 요구하는 일이 없지만 숲이 우거지면 새가 찾아든다.
이는 숲이 무심한 것이지 새가 무심한 것이 아니다.
물은 물고기에게 요구하는 일이 없지만 물이 깊으면 물고기가 즐거워한다.
이는 물이 무심한 것이지 물고기가 무심한 것이 아니다.
산은 구름에게 요구하는 일이 없지만 산이 높으면 구름이 머문다.
이는 산이 무심한 것이지 구름이 무심한 것은 아니다.
무릇 구름이란 것은 기氣이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일었다가 자연적으로 흩어지므로,
고기나 새가 해로움을 피하여 편리한 곳으로 나아가는 것과는 같지 않아서,
서식하는 것도 반드시 산에서 하고 오르내리는 것도 반드시 산에서 하며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고 떠났다가 다시 찾아오는 것이
마치 못 잊어 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는 듯이 한다.
이 점이 바로 내가 도정절과는 견해를 달리 하는 것이다.
아, 사물 중에서 걸거침이 없기로는 구름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데도
역시 구름도 마음이 없을 수 없는데, 하물며 걸거침이 있는 우리네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는가.
게다가 형체는 밖에 있고 마음은 안에 있으니, 형체에는 비록 걸거침이 있더라도
마음만은 걸거침이 없게 할 수가 있다.
마음에 걸거침이 없으면 담담해서 비추지 못할 데가 없고
고요해서 통하지 못할것이 없게 된다.
그리하여 형기形氣의 밖에서 말끔하여 우주 전체를 감싸서
아득하고 오묘한 경지에 이르러서 자연과 일체가 되고
혼돈과 이웃이 되며 조물주와 같은 무리가 된다.
이리하여 만물을 잊을 뿐만 아니라 천지도 잊게 될 것이며,
천지만 잊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 나를 잊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구름은 출입出入이 있어도 이 마음은 출입이 없으며,
구름은 거주去住가 있어도 이 마음은 거주가 없는 것이니,
무엇을 돌아다볼 것이며 무엇을 그리워하겠는가.
나의 마음이 천지자연과 조화하는 것을 구름보다도 더 무심하게 한다고 하였다.
이런 궁극의 경지를 일상에서도 실현할 수 있을까?
다만 산속의 일시적 경험이 있기에, 분잡하기 짝이 없는 일상을 벗어날 꿈을 꾸게 되는 것이리니,
그것도 또한 결단의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인용: 심경호 著 <산문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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