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산군지도德山郡地圖>
1872년, 74×52cm, 조선후기지방지도 충청도편,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영인.
이 지도에서는 덕산 관아 서쪽에 상왕산象王山과 가야산伽倻山을 별도로 표시하여 두었으나 오늘날에는 그 두 산을
하나로 보아 가야산으 이칭이 상왕산이라고 한다. 가야산은 소의 머리와 모습이 비슷하다고 하여 우두산牛斗山
이라고 불렀으며 상왕산象王山 · 중향산衆香山 · 지달산 · 설산이라고도 한다.
이철환李嚞煥 「상산삼매象山三昧」
회잠會岑과 여옥呂玉이라는 두 사미승이 있는데, 나이는 각각 17세이다.
용모가 단아하게 잘 생겼으므로 두 눈은 빛이 났다.
불경을 외는 소리가 각각 그 맑고 고움을 다하여, 그 사람됨과 같았다.
회잠이란 자는 또한 입술을 모아 바람을 불어 나각螺角과 비슷한 소리를 잘 내었는데,
천연스레 교묘하여 당에 가득한 사람들이 그것을 구경하느라 시끌시끌하였다.
예전에 석가모니가 능가선음陵迦仙音으로 무루법회無漏法會를 창설唱設하니
사방의 대중들이미증유의 것을 얻은지라 크게 환희하였다.
회잠은 석가씨의 유풍遺風을 듣고 흥기한 자가 아니겠는가!
일찍이 아무개 선비가 입으로 거문고 소리를 잘 내서 궁상宮商이 조화를 이루고
그 튕김이 쟁글쟁글 옥소리 같아 내가 마음속으로 사모하고 즐거워하였으나
만나 볼 길이 없어 오래토록 시원하지 않았었다.
또 들으니 정수암 승려 여견呂堅이란 자는 이 빠진 나무빗에 옥수수의 마른 잎을 끼고 음악을 연주하는데,
유유하고 부드러워 호드기 소리도 아니고 퉁소 소리도 아닌 것이 듣는 이를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한다고 한다.
내가 또한 빨리 알아서 한 번 시켜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일찍이 , <내암외서耐庵外書> ('내암'은 '시내암' 을
뜻하고 '외서'는 '소설류'를 말함. 이는 곧 김성탄본) 「수호전」>를 읽었는데, 착산斵山(김성탄의 친구)이
서울의구기인口技人을 칭송한 부분을 보고는 탁자를 치면서 탄식했었다.
하지만 이는 구요口妖라 할 만하니, 친히 보지 못한 것을 어찌 마음 아파하랴!
맹상군孟賞君은 마침내 닭 울음소리 내는 인사에 힘입어 강포한 진라라에게 죽임당하는 것을 면하였지만,
군자는 천하고 하찮다 말하며 탐탁히 여기지 않는다. 하물며 사고師辜(죄인) 비부鄙夫(비천한 자)가 개 짖는
소리로 아첨하며 양상군자梁上君子은 마침내 닭 울음소리 내는 인사에 힘입어 강포한 진나라에게 죽임당하는
것을 면하였지만, 군자는 천하고 하찮다 말하며 탐탁히 여기지 않는다. 양상군자가 쥐 소리를 내가며
상자를 뜯어 도둑질하는 일은 입에 부끄러움을 끼침이 이보다 큰 것이 없다.
회잠은 비록 이런 자들과 나란히 논할 수는 없겠으나, 그의 재주는 예藝에 있어 또한 말末인 것이다.
같은 입 재주인데, 어떤 이는 소학笑謔의 바탕이 되고, 어떤 이는 욕辱을 부른다. 또 같은 혀인데
어떤 이는 재주로 드러나고, 어떤 이는 도道를 깨우쳐 준다. 사람의 멀리 떨어짐이 어찌
구우일모九牛一毛에 그칠 뿐이리오. 회잠 또한 그 재주를 제대로 쓰지 못한 것이리라.
또 내가 이런 말을 들었다.
서양의 기인畸人이 통을 만들고는 그 안에 기축機軸을 설치하여 편면에 끈(호스)을 걸쳐서
스스로 기운은 불어 넣기를, 마치 대장장이가 풀무로 바람을 불어넣는 것과 같이 하고는 잠시 후
현絃을 조율하고 관管을 나란히 하여 동시에 합주하면, 맑고 탁하고 느리고 빠른 것이 각각 그 마땅함을 얻고
신장新章과 구곡舊曲이 연이어 나오다가, 부채를 접듯이 접으면 음악이 멈춘다고 한다.
이제 중국에 사행가는 자들이 대부분 이것을 본다. 하지만 그런 것은 기이하게 여길 것도 못 된다.
구라파주 에스파니아의 왕은 큰 당을 만들어 높고 크고 기이하기가 짝할 것이 없는데, 수도사들이
빙 둘러 거처한다. 안에는 36개의 제대祭臺가 있는데, 중대中臺 좌우에는 편소編簫 두 대가 있다.
그 가운데는 각각 32층으로 되어 있고, 매 층은 100개의 관管으로 되어 있으며 관管은 각각 하나의
소리를 내니, 도합 3,000여의 관管에서 풍우風雨 · 파도波濤 · 구음嘔吟 · 전투戰鬪 및
온갖 새들의 소리가 나오는데 비슷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한다.
아. 지극하도다, 다하였도다. 성음聲音의 능사能事를 다하였으니, 회잠이 입술을 씰룩이고 혀를 굴리는 것의
기묘함은 무어 말할 것이 있는가! 이를테면 손등孫登의 嘯(휘파람)와 약산藥山, (승려 유암)의 소笑는 예藝에
그칠 뿐이 아니었다. 원현原憲(자사子思)의 소리가 천지에 가득하여 금석金石 소리를 내는 듯하였으니
그 까닭은 무엇인가? 중정中正 화수和粹의 기운이 몸과 마음에 쌓여 넘쳐 내외內外 소영嘯咏의 일이
거의 소소箾韶(순임금의 음악)와 자리를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아, 영靈을 품은 인간의 무리란 똑같이 입을 가졌거늘, 누가 능히 그 입의 본질을 다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떤 이는 한갓 음식 씹는 용도로만 쓰기에, 회잠이 사람을 욕보이는구나!
또 이탈리아 로마성에는 이름난 정원이 있는데, 유상곡수流觴曲水 하는 모양을 만들어 놓아 기교機巧가 빼어났다.
동銅으로 여러 종류의 새들을 주조해 놓았는데, 기계를 한 번 작동하면 저절로 날갯짓을 하며 울어서 각각 그 본류
本類의 소리를 내었다. 또 하나의 편소編簫를 물속에 두고 기계를 작동하면 우는데 그 소리가 아주 묘하다.
대개 서방은 이러한 기기器機들이 많으므로, 함께 인증하여 언급해 둔다.
가야산
상왕산 象王山, 가야산 伽倻山
충청남도 상왕산 덕산면과 서산시 해미면에 위치한 해발고도 678미터의 산.
3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야산 정상에는 중계탑이 들어섰으나 석문봉(653미터) 과 옥양봉(621미터)
이 보위하여 풍광이 아름답다. 석문봉에서 뻗어 내린 능선 위에 남연군 묘가 있고, 정상에서 석문봉으로 이어졌다가
옥양봉으로 연결되는 능선은 길고 굴곡이 많다. 능선에서는 서해 쪽으로 서산과 태안, 약간 남쪽으로
천수만과 서해가 보이며 내륙 쪽은 예당평야가 시야에 들어온다.
석문봉
남연군의 묘
이철환李嚞煥(1722~1779)은 1753년 12월 4일 밤, 가야산 가야사에서 승려들의 연희演戱를 구경하고
위의 글을 남겼다. 이 글에서 말하는 가야산은 곧 대원군이 남연군을 이해 묘자리를 쓰면서 철거해버린 사실을 말한다.
이철환은 안산에 거주하던 여주 이씨 가문의 이익의 손자뻘 되는 문인이다.
이광휴李廣携(1693~1761)의 장남인 그는 아우 이삼환李森煥과 더불어 종조부 성호 이익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덕산德山에 살았으며, 박학하고 문장을 잘 지었음 술수에까지 능통하였고, 이기양 · 이기경 · 이헌길 등의
스승이기도 하였다. 그는 32세 되던 1753년부터 이듬해 1754년 초봄까지 가야산을 36차에 걸쳐 유람한 후 1754년에
「상산삼매象山三昧」라는 기행문집을 정리하였다. 이철환은 32세 봄에 용문산을 유람하였고, 1753년 10월부터
1754년 1월 29일까지 바다와 가야산을 구경하였다. 곧, 1753년에는 인천의 소호蘇湖, 즉 소래 포구에서 배를 띄워
1753년 10월 23일 정수암淨修庵에서 가야산 여행의 첫 밤을 묵고, 영사암永思庵 · 정수암 · 슬치瑟峙를 구경한 후
11월 5일 장천長川(지금의 예산군 고덕면)에 돌아왔다. 이것이 첫 번째 가야산 유람이다.
두 번째 유람은 11월 7일에 여행을 떠나 12월 29일 장천으로 귀가하였다. 세 번째 유람은 1754년 1월 11일에 출발해
병을 조섭調攝하러 22일에 장천으로 귀가하였다가 1월 25일부터 1월 29일까지 다시 가야산을 유람하였다.
이후 어느 날엔가 적조암寂照庵에 가서 「상산삼매」를 엮은 듯하다.
가야는 산스크리트어로 코끼리라는 뜻이므로 가야산은 달리 상산象算이라고도 하였다.
이철환은 "연대와 명호名號를 고증할 수는 없지만 산세山勢를 이용해 험벽함을 설치하여 스스로를 굳게 지켰으니
지금에도 무너진 성채와 성가퀴들이 산등성이에 산재해 있다. 대개 온조왕의 가법家法에 매우 흡사하다" 라고 하였다.
이철환은 가야산에 대해 "이 산의 빼어남은 하표霞標 · 금장錦障 · 부용芙容 · 옥순玉筍의 기이함이 있지 않고, 다만
등정한 자에게 시야를 틔워 막힘이 없게 해주는 데 있다" 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수정봉에 올랐을 때 안개 때문에 조망을
제대로 하지는 못하였다. 오리려 그의 가야산 유람이 지니는 특징은 일락사日落寺 승려들의 연희를 구경한 사실에 있을
듯하다. 곧 위에 인용하였듯이 그는 1753년 12월 4일 밤, 일락사 승려의 구기口技인 '도리연희'를 구경하였다.
이철환은 이듬해 1754년의 1월 12일 밤에는 역시 가야산에서 꼭두각시놀음을 보았다.
세상에 전하기를 이 기예는 (한나라의) 진평陳平이 흉노匈奴 알씨閼氏를 속이기 위해 고안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주周 목왕穆王 때 언사偃師가 바친 비단으로 만든 인형이 더욱 정밀하고 빼어났으니 그 유래가 오래 되었다.
진평이 평성平城 전투에서 안개를 타고 이를 거느리고 희롱하여 적을 속였었는데 근세의 일체의 희장戱場 또한
밤에 횃불을 켠 채 공연을 한다. 대개 횃불 그림자 속에서는 그 빛으로 사람의 눈을 속이기 쉬워 기교를 더욱 세상에
팔 수 있기 때문이다. 군자들은 반드시 저 거짓이 참을 어지럽히고, 밝음을 등지고 어둠으로 나가는 것을
혐오할 것이니, 이것이 단지 이익되는 것 없이 정신만 소모되는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호유후戶牖候(진평)는 스스로 음모陰謨가 많았기 때문에 후사後嗣가 부진不振할 것임을 알았으나 그의 기계奇計로
여섯 번 꼭두각시를 쓴 일은 가장 궤사詭詐하여 부끄러워 숨겼다. 내가 지금의 선비를 보건대, 능히 큰 환난에 대처
하고 큰 재난을 막을 자가 있어 이런 계획을 내어 위난危難을 막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스스로 자랑하고 교만하여
자신의 공훈을 찬미할 것이다. 사람들 또한 염모艶慕하고 찬탄하여 주둥이를 쉬지 않으리니 어찌 스스로를 돌이켜
찜찜해 하고, 사람에게 말하기를 부끄러워할 자가 있겠는가! 이에서 또한세도世道의 변화를 볼 수 있다.
이철환은 가야산 여행은 친구를 전혀 대동하지 않은 단독 여행으로 그만큼 경관과 풍속을 집중적으로
관찰하고 사색에 잠겼다. 「상산삼매」의 끝에는 후지後識에 해당할 다음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대웅씨大雄氏(석가모니)가 말하기를 "일체一切 건아建兒여, 여러 연緣을 짓지 말라" 라 하였으니
참으로 이 말대로라면 천하의 인성人性들을 들어 귀머거리 장님으로 만들고서야 가능하지 않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내가 말법비구末法比丘의 종종악견種種惡緣들을 보건대, 고 선생古先生(석가모니)의
그 연緣을 짓지 말라는 경계에 다름이 없다. 절에서의 아집雅集은 우리들의 맑은 연緣이자 빼어난 과果이니
그 아雅되는 까닭을 미루어 파고 들면 그것은 사람에 있는 것이지 모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진실로 능히
그 아雅됨을 확충하여 맑은 인因을 앞으로 도래할 곳에 심어둔즉 각황覺皇(석가)의 법은 근심할 것 없이
스스로 그칠 것이요, 일신日新의 공功은 거의 이를 이어 더욱 나아갈 것이다. 그 모였는데 아雅하지 않은
경우는 내 감히 알 바 아니다. 또 내가 듣건대 부처는 연緣이 없는 사람은 제도濟度 해주지 않는다 하니
그도 종근種根의 같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삼교주인三敎主人은 적조암에서 장난 삼아 제題 한다.
그는 불교에 대해 상당히 포용적인 생각을 담아내었다.
스스로를 삼교주인이라고 한 데서도 그 점이 잘 나타나고 있다.
인용: 심경호 著 <산문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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