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북崔北, <풍설야귀인風雪夜歸人>
최북은 '칠칠' 이라는 호를 사용한 화가로, 기이한 행동을 많이 해서 유명하다.
이규상李圭象은 그의 화법은 힘이 있어서 비록 가는 선으로 이루어진 그림이라도 갈고리처럼
기운찬 모양이 되지 않는 게 없다고 하였다. 이 그림도 바람에 쏠린 나무들을 억센 붓놀림으로 그려내었다.
이경전李慶全,
「큰 눈이 내릴 때 천방사를 방문한 기록大雪訪千方寺記」
양쪽의 협곡이 옥죄듯 하고, 소나무와 노송나무는 하늘에 빼곡하여, 푸른 수염에 비취 덮개, 붉은 갑옷에 하얀
비늘을 하고서, 몇 겹의 층을 이루고 빼곡하게 곧추서서, 옥먼지와 옥가루 같은 눈발 아래서 기둥을 떠받들고
있다. 간혹 긴 바람이 불어와 나무를 치면 흰 옥가루의 꽃 수술이 흩어져 아지랑이 같기도 하고 안개 같기도 하다.
그 질펀하고도 농익은 형상을 눈으로 똑바로 볼 수가 없다. 긴 등넝쿨과 늙은 덩쿨은 골짜기에 걸쳐 있고 개울을
덮고 있다. 어떤 것들은 서로 얽혀 떨기를 이루거나 풀무더기처럼 되어 있고, 어떤 것은 빽빽하게 뒤얽혀서 이무
기도 같고 뱀도 같다. 또한 층층 바위와 기괴한 돌이 있는데, 사람이 서서 마주잡은 두 손을 올려 공손히 인사하는
듯한 모습도 있고, 범이 쭈그리고 앉아 사나운 짓을 하는 모습도 있다. 한 줄기 개울물이 졸졸거리며 흘러, 들쭉
날쭉한 나무 움과 울부짓는 땅 틈으로 쏟아져 나와서는 패옥처럼 쟁글쟁글 소리를 내어 그 소리를 들을 수는 있
지만 볼 수는 없다. 산허리를 반쯤이나 올라오니, 봉우리가 돌연 우뚝 솟아 일행 앞에 다가와 선다. 아스라한 바
위가 너무 험준해서 도무지 기어 올라갈 수 있는 형세가 아니다. 한참을 방황하다가 눈 위에 그대로 주저앉아 있
는데 하늘이 갑자기 잠깐 개었다. 위를 올려다보니, 우람하게 처마와 서까래가 아스라하게 만 길 푸른 절벽 위에
높게 솟아 있었다. 하인이 기뻐 뛰면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였다.
"저기가 천방사 입니다."
그러나 찾아갈 길이 없었다. 이에 큰 목소리로 외쳐 불렀더니 절의 승려 덕륭이 대령하겠다고 한다.
그 소리가 가물가물하여 마치 천상의 말소리 같았다. 이윽고 사미승 10여 명이 두레박줄을 드리운 듯이
줄줄이 아래로 내려왔다. 그들이 인사를 채 마치기도 전에 곧바로 그 어깨와 등을 빌려 업혔다.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가는데, 실처럼 가는 길 하나가 꼬불꼬불 서리고 얼기설기 얽혀 구절양장九折羊腸의 열 배는 되었다.
마음속에 겁이 나서 머리칼이 곧추 서고 현기증이 돌아 눈앞에 현화가 지나갔다. 개울과 계곡을 내려다보니
푸르스름하고 아스라하여 그 깊이가 몇천 길이나 되는지 않 수 없다. 뒤에서 오는 자들을 돌아보니, 비척비척
비틀비틀, 올라오는 듯하다가는 문득 굴러 떨어지며, 넘어진 자는 기운을 내고 잡고 오르는 자는
재간을 부리면서 각기 혼신의 힘을 다 하지만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기 어려워하고 있다.
정말 무엇인가를 하려는 사람은 또한 이같이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윽고 절문에 들어갔다. 절문 안에 뜰이 있는데 길쭉하되 넓지는 않다.
뜰 곁에 담장이 있어서, 곧바로 그 서쪽을 막고 있다. 아마도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고, 또 사람들이 그 아래로
벼랑이 끝없는 것을 넘겨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리라. 절방은 깔끔하고, 그다지 넓지도 좁지도 않다. 불화가 벽에
드리워져 있고 가사가 시렁에 얹혀 있다. 화로의 향은 반쯤 사위었고, 경쇠 소리가 맑게 퍼져나간다. 방 바깥에는
음산한 기운이 엉켜 가득하지만 방 안에는 따스한 기운이 물씬 피어났다. 사람의 힘이 하늘의 능력을 빼앗은 것일까?
아니면 조물주가 공평하지 못한 것일까? 가히 별도로 다른 세계가 있다고 하겠다. 시렁 위에 책자 몇 권이 있기에,
승려 원각을 시켜 가져오게 하여 보았다. 곧 <연화경蓮花經 (법화경)>과 <대혜선어게송大慧禪語偈頌>이었다.
몇 장을 뒤적거려보니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간혹 사람의 마음을 깨우치는 부분도 많았다.
가져가서 다시 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곡기를 끊고 산다는 스님이 절 뒤쪽 봉우리에 와서 머문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 만나보았더니, 구름빛 가사는
백 번이나 기웠는데 흰 눈썹이 서리처럼 희다. 자기 말에, 본디 홍양洪陽 출신으로 나라 안의 명산들을 다 밟아보고
돌아가다가 우연히 이 산에 머물게 되었다고 하였다. 주림을 참는 데는 솔잎만한 것이 없으며, 안색이 온화하며
윤기가 있고 걸음걸이도 민첩하고 씩씩한 것이 모두 그 효험이다. 기미년(1619) 명나라의 요청으로 중국에 군사를
보냈다가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오는 병사들이 다른 풀은 먹지 않고 모두 솔잎만 먹으며 오게 하였더니 수십 일을 아
무 탈 없이 몸을 보중하여 돌아왔다고 한다. 이야기를 한참 나누고 있는데 덕융 스님이 차를 내어오겠다고 하였다.
댓무를 깎아내고 홍시도 담아내었다. 차는 애청崖淸 꿀을 정화수井華水에 풀어서 시원하고 달콤하여 감로차甘露茶나
제호탕醍醐蕩 보다 훨씬 나았다. 이윽고 다시 자리를 옮겨 덕융스님이 거처하는 곳으로 방문하였더니, 방 한 칸이
서쪽에서부터 비스듬히 남쪽을 향하여 트여 있는데, 밝은 창이 매우 한적하다. 정갈한 안석은 씻어놓은 것처럼
깨끗하고 도배를 해놓은 것도 깔끔하며, 구들은 평평하고 따스하다. 또 다른 하나의 정사精舍를 지극하게
꾸며놓은 것이다. 나는 스님게게 말하였다.
"하늘이 나에게 몇 년의 수명만 늘려 주어 여기에 와 살면서 그간 보지 못했던 책을 다 읽는다면 아마
도 유익함이 있겠지요. 하지만 속세의 인연이 몸을 얽고 있는 데다 늘그막에 쇠약해졌으니, 어찌 바라겠소?
정말 한탄스러움 뿐이요." 스님이 굳이 머물러 자고 갈 것을 청하였다.
"오늘 유람은 정말로 얻기 힘든 행운입니다만, 기이하고 놀라운 볼거리가 그저 눈앞의 천변만화天變萬化에만
있었지, 시선 닿는 끝까지 멀리 바라보기에는 마땅하지 않았습니다. 평상시에 하늘이 밝아 탁 트이면, 일망무제라서,
내포內浦 대여섯 읍의 경내에 속하는 크고 작은 봉우리와 뫼, 하천과 들판, 도로와 작은 길, 혹은 사람이 사는 촌락
등이 역력히 남김없이 다 드러나지요. 그런데 오늘은 날이 흐리고 어두어 그 경관들을 뒤덮고 숨겨서
드러나지 않게 하였습니다. 이 또한 속이기 좋아하는 도깨비의 장난질이라 하겠습니다.
또 어찌 알겠습니까? 한밤에 달이 돋고 가는 구름까지 죄다 사라지며 푸른 하늘이 맑아져서,
달나라의 영롱한 성곽과 수정 같은 누대들이 한순간에 모두 드러나, 그 나머지 맛을 모두 누릴 수 있게 될지를."
나는 이 말을 득고 매우 기뻤다. 하지만 만일 황혼이 되기를 앉아서 기다린다면. 데리고 온 아이들이 모두 유약하여
그들만 집으로 돌려보낼 수가 없어, 끙끙거리면서 머뭇거렸다. 다시 돌아갈 길을 생각하니, 경관을 끝까지 다 보지
못해서, 마치 절세가인과 헤어지는 한恨이 절로 그치지 않는 듯하다.
사미승을 불러 지팡이와 빗자루를 모아서 하산할 계획을 세워, 한결같이 올 때처럼 하였다.
내가 스님 등에 업혀 앞서고, 차례차례 이어 내려왔다. 앞서 남긴 발자국이 나중에 내린 눈에 이미 덮여, 망망하여
찾을 수 없었으므로, 걸음걸음 눈길을 새로 밟자 밟으면 밟는 즉시 푹푹 꺼져 내렸다. 어이, 이보게, 떠들며 서로
부르고 답하는 사이에, 어느새 중봉 아래에 이르렀다. 올 때 말을 타고 왔던 길도 울퉁불퉁하고 미끄러워 발을
댈 수가 없다. 그래서 스님 등에 매달려 곧바로 골짜기 입구로 나와서 내렸다.
날이 이미 저물어 추워서 벌벌 떨림이 배나 심해졌다.
마침내 덕융스님과 작별하고 말을 몰아서 갔다.
현등산을 돌아보니 높다랗고 시커멓게 하늘과 같은 빛이 되어, 산허리 아래에는 구름과 아지랑이,
남기와 안개가 눈보라와 어지러이 뒤섞여 만 겹으로 잔뜩 뒤덮고 둘둘 감싸고 있다.
그래서 전에 들어갈 때 어느 쪽으로 들어갔는지, 나올 때 어느 쪽으로 나왔는지 알 수 없다. 도사 나은羅隱이
건너다니던 만 길의 은교銀橋나, 당나라 현종이 즐겨 찾던 예상월굴霓裳月窟 같이 아름답던 곳도 다시는
그 자취를 찾을 수 없고, 그저 신선이 된 꿈을 한바탕 꾸고 깨어난 것만 같다.
천방산 千房山
천방산은 충남 예산군 대술면 해발고도 475미터의 산이다.
조선 중기의 이경전李慶全(1567~1644)은 1631년(인조 9, 신미), 눈 오는 날에 천방사를 방문하고
「대설방천방사기大雪訪千方寺記」를 남겼다. 천방사千方寺는 각종 기록에 천방사千房寺로 나온다.
소정방蘇定方이 남겨 놓은 사찰이라고 하는데, 1664년에 승려들의 반란으로 불타버리고, 다시 중건되지 못하였다.
현재는 은적사라는 조그만 암자가 있다.
이경전은 본관이 한산韓山, 호는 석루石樓이다. 1585년(선조 18) 진사가 되고, 1590년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96년 예조좌랑 · 병조좌랑을 지내고, 1608년 정인홍鄭仁弘(1535~1623) 등과
함께 영창대군의 옹립을 꾀하는 소북小北으 유영경柳永慶(1550~1608)을 탄핵하다가 강계江界에 안치되었다.
그해 광해군이 즉위하자 풀려나 충청도와 전라도 관찰사를 지내고, 1618년(광해군 10) 좌참찬에 올랐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서인들의 편을 들어 생명을 보전하고 주청사로 명나라에 가서 인조의 책봉을 요청하
였으며 이로써 한평부원군韓平府源君에 진봉進封 되었다. 1637년(인조 15) 삼전도 비문 작성의 명을 받았으나
병을 빙자해 거절하였고, 1640년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문필에도 명성이 높았다.
이경전은 바로 이산해李山海의 세 아들 가운데 한산 이씨 아계鵝溪 가문을 이은 주요한 인물이다.
곧 이산해는 부인 양주 조씨와의 사이에서 경백慶伯 · 경전慶全 · 경신慶伸 세 아들을 두었으나 장자 경백은
1580년 문과 급제한 해에 사망하고, 3자 경신도 진사 급제 후 단명하였다. 이경전은 인조반정 때에도
서인 정권에 동조함으로써 요로에 머물 수 있었다.
이경전은 예산의 전장을 잘 경영하였다. 그리고 부인 안동 김씨 사이에서 아들 5형제와 조수익趙壽翼(1596~1674)
에게 시집간 딸을 두었고, 서자도 많이 두었다. 그중 차남 이구李久의 부인인 전주 이씨는 왕족의 후손으로 1637년에
예산으로 낙향하여 친정 재산, 시집 재산, 아들 상빈이 처가로부터 받은 재산까지 합하여 경영을 잘해서 가세를 크게
확장시키게 된다. 본래 이경전의 부친 이산해는 유배 생활에서 풀려난 후 온양 · 아산 · 신창 등지에 전장을 확대하여
나갔다. 대지동면 한가리를 거점으로 하는 예산 전장도 그 무렵에 확보하였다. 그리고 이산해는 자신의 묘택을 그곳에
두게 된다. 이경전 때에 이르러서는 천방산에 위치한 천방사를 원찰로 삼아서 지주로서의 기반을 강화하였다. 천방산에
는 이산해를 안장하였을 뿐 아니라 가문의 초당이나 우거지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천방사는 이산해의 문집 <아계유고鵝
溪遺稿>와 이경전의 문집 <석루유고石樓遺稿>를 간행하게 된다. 훗날 천방사가 소실되자 아계 가문은 이화암梨花庵을
건립해서 묘택과 책판을 관리하게 하였다.
<효종실록>에 보면, 효종 3년 12월 7일 조에 서천군수 이무가 상소한 내용에 "고을 경내에 천방사가 있는데, 이제 또한
궁가의 원당願堂이 되었으므로 중들이 기세를 부려 사람들이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니, 청명한 세상에서 어찌 이래야
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이에 임금이 하교하기를 "천방사라는 것은 어느 궁가에 속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그 고을의
사세가 매우 절박한 듯하니 그 고을에 도로 붙이게 하라 하였다" 라고 기록하였다. 천방사가 중앙 권력과 연계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중앙 권력이란 아계 가문과 어떤 관련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 후 현종 5년(1664) 12월 13일에 천방사 승려가 관아의 영을 따르지 않자 감사 이익한李翊漢이 겸임 한산군수
신숭구로 하여금 그 우두머리 승려를 잡아들이게 하였다. 그러자 절의 승려 수백 명이 조총을 갖거나 활을 지니고서
험지에 웅거하여 저항하였다. 그 후 화약으로 그 절을 불사르고, 침노한 벼슬아치의 집을 불 질러 그 분을 풀었다
라고 하여 천방사 승려의 사변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후 송준길의 알선으로 천방사 승려의 변고는 일단락을 짓고
천방사는 다시 중건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경전은 1631년 동지 전 날, 성묘를 이유로 휴가를 얻어 다지동多枝洞에 있었다.
22일 대설이 내리기 시작하여 23일에도 눈이 오고, 24일에도 그치지 않았다. 엉성한 처마는 다 눌려 꺼지고 부서진
울타리도 모두 내려앉아버렸다. 뜰의 대나무는 머리를 땅에 처박고 누워 있고, 고갯마루의 노송은 머리를 드리운 채
하얗게 덮여 있었다. 하늘이나 땅이나 사방이 모두 아스라이 구분할 수 없어 천하가 혼돈의 상태에서 형상을 갖추기
전의 모습과 같았다.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송나라 임포林逋처럼 눈속의 매화를 찾아 서호西湖로 찾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고, 당나라 정계鄭棨처럼 눈 오는 날 파교灞橋에서 노새를 타고 시를 읊조리고 싶은 흥이 일어났다.
마침내 아이를 불러 각반을 빨리 가져오게 하고, 백등의白藤衣를 입고 청승포靑繩布를 머리에 쓰고
갈 곳도 정하지 않은 채 출발하였다.
녹연재綠煙堤를 따라 동괴정東槐亭을 지나 물단勿丹 손가孫家의 집 앞에 이르렀다.
그때 집 아이 오봉午鳳과 천석天石이 남의 등에 업혀서 따라와 굳이 함께 가겠다고 하였다. 한 바위산 기슭을 지나
천방동 이라는 곳으로 들어갔다. 대설이 다시 내렸다. 골짜기가 어두어졌다.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았다.
말을 돌려 시내를 따라 내려가 일정암一正庵을 끼고서 앞 들판을 경유하여 큰아들 부후의 초당에 도착하였다.
신래봉新來峰은 뾰족한 머리는 다 숨기고 허리와 배 부분을 반쯤 드러내고 있고, 저현동猪峴東은 아스라하고
거뭇거뭇하게 구름을 토하고 서리를 뿜어낸다. 절 뒤의 봉우리나 으슥한 생양동生陽洞, 우뚝한 우하령牛下嶺 등은
모두 보이지 않고, 현등산玄鐙山만이 둥그스름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동남쪽 허공 위에 끊어진 듯 서 있다.
문을 나서 가는데, 동금의 동생으로 다섯 살인 이룡二龍도 하인 등에 업혀서 뒤를 따랐다.
손으로 더듬으면서 다시 천반동 골짜기 입구를 찾아 들어갔다.
이경전은 천방사를 찾았다가 다시 돌아 나오기까지의 기록을 세밀하게 남겼다.
그리고 그 유람기 뒤에 다음과 같은 감상을 덧붙였다.
아아, 내가 이 고을에 들어오고 나서 여기에 살며 여기에 왕래한 것이 이제 거의 30년이 되었다.
사계절이 바뀌어 가고 아침저녁 해가 뜨고 지며,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달이 뜨는 광경을 어디 두루
열람하여 익숙하게 보지 않은 것이 있더냐, 왕왕 혹 마음이 흡족할 때도 있었지마, 산속에서 늘 있는 일들이라
자랑할 만한 것은 못 된다. 다만 이번 겨울 내린 눈이 이처럼 아주 기이하데, 때마침 휴가를 얻어 돌아와
성묘를 하게 되었으니 어찌 천행이 아니겠는가?
사람 일이 잘되었다 못 되었다 하는 것과 만났다 헤어졌다 하는 것이 모두 하늘에 달려 있는 법이어서 운수가
거기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설령 세상이 나를 버리지 않아서 내가 묘시卯時(아침 6시경)부터
신시申時(오후 4시경)까지 조정에서 일하는 대열에 낀다면, 금마문金馬門에서 새벽 물시계 똑똑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출근을 기다리느라, 눈서리 내린 듯 허연 머리로 쇳덩이처럼 찬 담요를 덮어쓰고 졸다 깨다
하면서 반드시 고민하게 되었으리라. 그렇다면 비록 현등산 천방사에 오늘 같이 눈이 내렸다 하더라도
어느 겨를에 생각이나마 미칠 수 있겠는가?
노둔한 말이나 쓸모없는 가죽나무 같은 이 몸이 요행히 죽임을 당하지 않고서, 조정에서 죄상을 꼼곰히
기억하지 않고 성상께서 너그럽고 인자한 은혜를 드리우심을 입어, 몇 달간이나 고향에서 유유자적할 수 있게
되었기에, 이처럼 평생 꿈에서도 볼 수 없는 기이한 일을 보게 되었으니, 하늘이 못나고 꾀죄죄한 나에게
배풀어준 것이 어찌 이리 편애를 한단 말인가? 비록 다시 몇 년 후에 설혹 이곳에 올 기약이 있어,
현등산이 예전과 같고, 천방사도 똑같으며, 덕융대사가 한결같이 건강하여 반가운 눈빛으로 대해주는
일이야 있을 수 있겠지만, 오늘처럼 눈 내린 광경이 기이함과 장대함을 지극히 다하여
천태만상을 형용할 수 없게 하는 일은 분명 다시 만나기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천지 만물의 오묘함은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은 반드시 조물주에게 맡겨서 그 지극한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임에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조물造物이라는 것은 본디 물物의 형태로 존재함이 없는 것이니
무無란 바로 유有가 나올 수 있는 바요,
유有이기 때문에 도리어 또다시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비록 조물주라도 사사로이 할 수가 없는 것이니. 한 번은 가능하지만 두 번은 불가할 것이다.
저 등주登州에서 양나라 간문제簡文帝가 신기루를 보고 빌었던 일과
형악衡嶽에서 한유가 기도하여 구름이 갰던 일은 모두 일시의 우연일 뿐이거늘,
이를 가지고 억지로 구해서 이루었다고 말한다면 잘못이다.
이경전은 설경 속에 천방사를 찾았다가 돌아나오면서 두 번 다시 경험하기 어려운 신선한 경험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이 거듭 일어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느꼈고, 그 느낌은 생명의 가치를 어렴풋하게 자각하는
일과 연결되어 있었다. 생명은 초월적 절대자가 계획에 의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본디 물物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 조물造物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 조물이란 우주의 이법에 불과할 따름이다
흔히 동양의 사상 가운데서도 주자학은 '영원한 것' 을 중시하기에 찰나적이고 일회적인 경험을 그리
돌아보지 않는다고 논한다. 이산해의 이 유산록을 보면 그것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도 같다.
이理는 하나이되 만물상으로 분수分殊한다는 주자학의 사유에서 볼 때, 물론 중요한 것은 이理이지만
그 이理가 구현되는 분수分殊로서의 만물 만상도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렇기에 주자학에서도 일상의 일회적 경험을 대단히 중시한다.
나는 우리 사유에서 일회적 경험의 중시가 반드시 주자학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새삼스레 나온 것이 아니라
주자학의 심화 및 재해석에서 이루어진 측면도 있다고 생각해 왔다.
이 글을 읽으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용: 심경호 著 <산문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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