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평梅
장흥군 장평면 장평중학교에 선 백매이다.
내리는 봄비를 아랑곳 하지않고 찾아왔건만, 예상대로 거의 다 지고 겨우 몇 송이만 남은 상태.
발길을 윗녘으로 향한다.
학포당(學圃堂)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 소재.
전라남도 기념물 제92호. 조선 중종 때의 학자이며 서화가인 양팽손(梁彭孫)이 1521년(중종 16)에 세운 것으로,
1920년 후손 재경(在慶)이 비를 세우고 후손들이 현 위치에 중건하였다. 학포당은 마을 동쪽에 서향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남쪽으로 육봉, 동쪽으로 매일봉을 바라보고 있다. 배치는 2단의 축대를 쌓아 영역을 구분하고 상단에 본당,
하단에 솟을대문을 세웠으며, 본당은 평삼문과 솟을삼문을 거쳐 이른다.
경내에는 학포당 창건 당시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고,
평면은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의 정방형으로 정중앙에 방을 둔 중재실(中齋室) 1칸과 후퇴 반칸씩 방을 놓고
전좌우퇴에 마루를 설치한 단층 유실형(有室形)을 구성한다.
중재실 상부에는 다락을 설치하여 서고로 이용하였다.
학포당유지추모비(學圃堂遺址追慕碑)가 세워져 있다.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
1510년(중종 5)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생원시에 합격하고, 1516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했으며,
또 현량과(賢良科)에 발탁되었다. 이후 정언(正言)·전랑·수찬(修撰)·교리(校理) 등의 관직을 역임했으며,
호당(湖堂: 독서당을 고쳐 부른 이름)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하기도 하였다.
정언으로 재직할 때 이성언(李誠彦)을 탄핵한 일로 인해 대신들의 의계(議啓)로써 직책이 갈렸지만,
조광조·김정(金淨) 등 신진 사류들로부터는 언론을 보호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1519년 10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김정 등을 위해 소두(疏頭)로서 항소하였다
. 이 일로 인해 삭직되어 고향인 능주로 돌아와, 중조산(中條山) 아래 쌍봉리(雙鳳里)에
작은 집을 지어 ‘학포당(學圃堂)’이라 이름하고 독서로 소일하였다.
이 무렵 친교를 맺은 인물들은 기준(奇遵)·박세희(朴世熹)·최산두(崔山斗) 등의 기묘명현들이었다.
1539년에 다시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544년 김안로(金安老)의 사사 후,
용담현령(龍潭縣令)에 잠시 부임했다가 곧 사임하고 다음해에 58세로 죽었다.
13세 때 송흠(宋欽)에게 나가 공부했으며 송순(宋純)·나세찬(羅世贊) 등과 동문으로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항상 『소학』·『근사록』 등으로 처신의 지침을 삼았고, 당시 신진 사류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회화에도 일가견을 보여 안견(安堅)의 산수화풍을 계승하였다.
1630년(인조 8) 김장생(金長生) 등의 청으로 능주 죽수서원(竹樹書院)에 배향되었으며,
1818년(순조 18) 순천의 용강서원(龍岡書院)에 추향되었다.
작품으로는 「산수도」 1점이 전하며, 저서로는 『학포유집』 2책이 전한다.
시호는 혜강(惠康)이다.
쌍봉사雙峯寺 대웅전
철갑선사탑澈鑒禪師塔 / 국보 제57호.
쌍봉사를 창건한 도윤(道允, 798∼868)의 승탑이다.
승탑은 신라 승탑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원당형(圓堂形)으로 조성되었지만, 여느 신라 승탑보다 세부 조각이 우수하고 아름다울 뿐 아니라, 가구(架構) 수법도 목조 건물의 그것을 그대로 따라서 구현하여 한층 주목된다. 화강암으로 조성된 승탑은 받침돌 위에 몸돌과 지붕돌을 놓은 모습이다.
받침돌은 아래받침돌, 가운데받침돌, 윗받침돌로 구성되었으며, 시멘트로 보강된 8각의 바닥돌 위에 올려져 있다. 아래받침돌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는데, 윗단과 아랫단으로 구분된다. 아랫단은 단면이 원형으로, 아래부분에는 아랫단보다 제법 넓은 8각 2단의 각진 굄과 원형의 낮은 굄이 자리하고 있다. 옆면에는 권운(卷雲) 무늬가 전면에 걸쳐 가득 조각되어 있는데, 특히 윗부분은 거의 둥글게 장식되었다. 구름 무늬 사이에는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두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는데, 구름 사이에서 꿈틀거리며 발로 여의보주(如意寶珠)를 위쪽에서 받치는 모습이어서 이채롭다.윗면에는 8각의 낮고 각진 굄이 새겨져 있다. 윗단은 아랫단과 달리 단면이 8각이다. 8각의 모서리에는 연꽃 잎을 날개처럼 세운 기둥을 새겼는데, 기둥과 기둥 사이의 각 면에는 안상(眼象) 모양 안에 사자가 1구씩 돋을새김되어 있다. 사자는 앞다리를 들고 있거나 구부리고 앉아 있는 등 각각 여러 모습을 하고 있으며, 머리도 위를 바라보거나 아래를 향해 숙이고 있는 등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다만 얼굴만은 모두 앞을 향하고 있어 흥미롭다. 윗면에는 제법 높직한 8각의 굄이 있다. 안쪽으로 둥글게 굽은 1단의 굄을 두르고 그 위에 높고 둥근 받침을 마련한 모습이며, 맨 윗부분은 가운데받침돌의 밑면이 끼도록 오목새김한 상태이다.
단면 8각의 가운데받침돌은 윗받침돌과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으며, 여느 부분과 달리 제법 낮은 편이다. 밑면은 아래받침돌 윗단의 윗면에 새겨 놓은 홈에 끼도록 안쪽으로 둥글게 굽었으며, 아래부분에는 높은 1단의 굄 위에 다시 낮은 굄이 새겨져 있다. 옆면에는 각 모서리마다 위아래로 날개 모양으로 펼쳐진 연꽃 잎을 기둥으로 세우고서, 그 사이의 각 면에는 안상 모양을 두었다. 안상 안에는 상상의 새인 가릉빈가(迦陵頻伽)가 얼굴이 매우 큰 모습으로 장식되어 있다. 윗부분에는 8각의 낮고 각진 3단 받침을 마련하여 윗받침돌을 받치게 하였다.
윗받침돌은 연화대와 몸돌 굄돌로 이루어졌다. 곧 단면이 둥그런 연화대는 옆면에 꽃잎이 위로 솟은 앙련(仰蓮)의 연꽃 무늬 16개가 둘러져 돋을새김되었는데, 연꽃의 가운데는 화려한 꽃 무늬로 장식되었다. 연화대의 윗면에는 연꽃 잎의 끝부분을 따라 낮고 각진 1단의 굄이 새겨져 있고, 다시 그 안쪽에는 몸돌 굄돌을 받치기 위해 마련한 각진 8각의 1단 굄이 있다.
몸돌 굄돌은 단면 8각으로 제법 높직한 편이다. 각 모서리에는 세로로 세운 짧은 기둥인 동자주(童子柱)가 상다리처럼 둥글게 조각되었는데, 겉면에는 가로로 1줄의 선이 오목새김되었다. 동자주와 동자주 사이의 각 면에는 안상이 1구씩 깊게 오목새김되었으며, 안상 안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가릉빈가가 1구씩 돋을새김되었는데, 그 모습이 각각 다르다. 덮개돌처럼 처리된 윗부분의 옆면에도 동자주의 겉면처럼 가로와 세로로 1줄의 선이 오목새김되어 있다.
윗면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해서 둥글고 각진 2단의 굄을 새겼는데, 둥근 굄의 각 변에는
꽃잎이 아래로 향한 복련(覆蓮)의 연꽃 무늬가 7개씩 장식되었다.
단면 8각의 몸돌에는 각 모서리마다 둥근 기둥이 조각되었는데, 가운데부분이 볼록한 배흘림 수법이 뚜렷하다. 기둥 위에는 주두(柱頭)가 표현되었고, 둥근 기둥 사이에는 가로로 올린 횡방(橫枋)이 조각되었으며, 횡방 가운데에는 지붕의 무게를 받치는 접시받침[小累]이 역시 새겨져 있다. 앞면과 뒷면에는 네모난 테두리 안에 자물쇠가 조각된 문비(門扉)가 오목새김되었고, 나머지 6면 가운데 4면과 2면의 각 면에는 각각 서 있는 사천왕상 1구씩과 함께 공양비천상(供養飛天像) 2구씩이 장식되어 있다.
하나의 돌로 조성된 지붕돌 또한 단면 8각으로 윗면인 낙수면은 평박(平薄)한 편이다. 각 모서리마다 내림마루인 우동(隅棟)은 굵직하면서도 화려하게 조각되었고, 기왓골 역시 뚜렷하게 표현되었다. 처마에는 암막새와 수막새의 막새 기와가 새겨져 있는데, 특히 수막새기와에는 실제 건물의 기왓장처럼 8개의 꽃잎을 가진 연꽃 무늬가 사실적으로 장식되어 의장(意匠)이 특별히 주목된다. 밑면에는 4곳에 비천상이 돋을새김되었고, 나머지 4곳에도 각각 향로와 꽃 무늬가 새겨졌으며, 서까래와 부연(副椽)도 표현되어 있다. 꼭대기에는 2단의 각진 굄을 두어 상륜부를 받치게 하였지만, 현재 상륜부의 부재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굄의 가운데부분에만 둥근 찰주 구멍이 있을 뿐이다.
철감선사탑비澈鑒禪師塔碑 / 보물 제170호
전체높이 1.4m. 현재 비신은 없어지고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만 남아 있다. 이수 앞면 가운데에 ‘雙峯山澈鑒禪師塔碑銘’이라는 2행의 전액(篆額)이 새겨져 있을 뿐이다. 이수나 귀부의 전체적인 조형은 격렬한 조각기법으로 당대를 대표하는 우수작이다. 특히, 귀부의 오른쪽 앞발을 살짝 들어올린 점은 형식적인 관념을 벗어난 새로운 조형이다.
이 비의 주인공인 철감선사 도윤(道允)은 한주인(漢州人)으로 825년(헌덕왕 17) 당나라에 들어가 유학하고 847년(문성왕 9) 범일국사(梵日國師)와 함께 돌아와 경문왕을 불법에 귀의하게 한 명승이다. 868년(경문왕 8) 71세로 쌍봉사에서 입적하였다. 시호는 ‘철감’, 탑명은 ‘징소(澄昭)’라 하였다.
건립연대는 대략 그가 입적한 868년에서 얼마 안 되는 9세기말로 추측된다.
쌍봉사 경내에 비록 고매(故梅)가 없다는 사실쯤은 내남 없이 잘 알고 있는 사실.
비록 작은 개체일 망정 그래도 목탁 소리를 들으며 살아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주목의 대상.
오랜만에 찾은 쌍봉사.
절을 지키던 비구니 스님들은 어디론가 물러나고 비구들이 점령하여
그야말로 왕성한 불사가 이루어 지고 있었다.
내쳐 달려간 곳은 화순 사평면에 소재한 임대정 원림.
'임대梅' 의 안위가 궁금해서이다.
용트림하며 땅 위를 기어가다 딱 두 가지을 뻗어 올려
고졸한 백매 몇 송이를 피워낸 모습이 자못 처절하게 느껴진다.
예전 그렇게도 '임대매' 에 대한 관리를 부탁해도 마이동풍이더니만
썩은 부분을 도려내고 충진재를 채워넣은 모습을 보니 이제야 쬐끔 이 개체의 소중함을 인식한 모양.
꽃 송이를 열 손가락으로 거진 헤아릴 수 있을 정도다.
내가 지난 육십 년대 말 부터 봐 오면서 과연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애를 태웠는데도
아직까지 이런 모습으로 목숨을 부지한다는 게 그야말로 희안하기만...
두문동 72현 가운데 한 사람인 서은 전신민의 혼을 담고 있다는 생각에서 이름 붙였던 독수정梅.
독수정 바로 윗쪽에 전신민의 후손이 사는 집에 수령 수 백년에 이르는 홍백 두 그루 매화가 있었지만
이제는 사라졌다. 내가 '독수쌍매' 로 이름 붙였던 천하 명매가 이젠 사라져 버렸다.
그리하여 이제부터는 이 '독수정매'를 '독수매'로 호칭하고자 한다.
수세나 꽃의 기품이나 할 것 없이 그야말로 어디 하나 빠질 것 없는 名梅이기에 말이다.
이태백(李太白)의 시 “이제시하인 독수서산아(夷齊是何人獨守西山餓)”에서 따왔다는 독수정.
바로 옆 배롱나무를 비롯한 여러 나무들 틈새에 끼어,
온몸을 비틀어 아름다운 매화를 피워내는 독수매. 마치 흑룡의 찬란한 비상을 보는 느낌이다.
분명 홍매에다 그것도 겹매이지만 ,
전혀 속기俗氣라곤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단아함의 진수를 보여준다.
'설중탐매雪中探梅' '월야탐매月夜探梅' 는 물론,
오늘 같은 봄비 속의 '우중탐매雨中探梅' 의 경계도 가히 오금을 저리게 한다는 사실.
독수정 원림에 피어난 산수유.
'독수정' 팻말을 붙인 살구나무.
조선천지 이 살구꽃 처럼 격조 높은 개체를 난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거목으로 자라난 두줄기 중 하나는 진즉에 잘려나갔지만 높다랗게 하늘로 뻗어올라간 살구나무.
향기만 없다 뿐이지 거의 매화와 진배 없는 단아하고 작은 꽃을 매단 격조는
그야말로 최고의 감상미를 내재한 조선 최고의 살구꽃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다.
살구꽃의 격조가 이토록 높을 수 있다니.....!
소쇄원 '오곡문' 담장 앞 두 그루 작은개체.
'제월당' 마당으로 가지를 뻗은 노오란 산수유.
'광풍각' 일원
계당 홍백쌍매
계당 쌍매 중 홍매의 목질부의 썩음 상태가 심각해 보이던데....
지실 와룡매.
환벽당梅
'환벽당' 옆 '취가정'에는 감상할만한 매화 개체가 하나도 없다.
과거 저 마당 앞 넓적돌이 있던 곳에 멋진 노송이 한 그루 있었지만 지금는 사라졌다.
김덕령 장군의 의혼이 서린 취가정.
식영정 노송 그늘에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해가는 홍매 한 그루.
비록 작은 개체이지만 이 한 그루 매화 향이 식영정 일대를 온통 뒤덮고 있었다.
'죽림매' 가 만개하여 짙은 매향을...
이 장소가 이른 바 '월야탐매'의 장소로 그만이다 라는 사실을 귀속말로.... ㅎ
'우중탐매'의 끝 자락 명옥헌.
'자연 > 탐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축탐매 (辛丑探梅) X (0) | 2021.03.25 |
---|---|
신축탐매 (辛丑探梅) IX (0) | 2021.03.22 |
신축탐매 (辛丑探梅) VII (0) | 2021.03.18 |
신축탐매 (辛丑探梅) VI (0) | 2021.03.12 |
신축탐매 (辛丑探梅) V (0) | 2021.03.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