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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역사속의 장군들 III

 

나폴레옹

유럽 대륙을 제패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이 말을 타고 알프르 산맥을 넘는 모습을 묘사한 자크 루이 다비드의 유명한 그림이다.

1800년, 나폴레옹은 1년 전에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게게 빼앗긴 이탈리아를 되찾기 위해 예비군을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 하지만 실제로 알프스 산맥을 넘을 때 그는 당나귀를 탓다고 한다.

 

"권력은 나의 애인이다. 내가 그토록 애써 얻은 애인은 그 누구도 뺏어가지 못한다."

 

나폴레옹은 적들에게도 존경을 받았다. 심지어 웰링턴은 나폴레옹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나폴레옹은 자신의 업적을 전쟁터가 아니라 프랑스 혁명의 정치적 이념을 전파한 데서 찾았다.

"나의 진정한 영광은 40여차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이 아니다. 워털루 전투의 패배로 수많은 승리의 기억은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러나 결코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살아남을 것은 바로 내가 만든 민법전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유럽의 군지휘관들 모습을 표현한 16세기와 19세기 사이의 전형적인 작품.

프랑수아 제라르가 아우스터리츠 전투 장면을 소재로 그린 작품에서 나폴레옹은 백마를 탄 채

적군의 깃발을 뺏어온 부하들로부터 승전 소식을 보고받고 있다.

 

 

 

 

호레이쇼 넬슨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군 제독

 

"천성적으로, 나는 부드럽고 느릿한 수단과 어울리지 않는다."

 

영국의 화가 리뮤얼 애버트가 1800년에 그린 호레이쇼 넬슨 경의 초상화.

넬슨의 모자에 달린 '첼렝크' 라는 장식물은 나일 해전이 끝난 뒤 오스만 제국의 술탄 셀림 3세가

선물로 준 것이다. 열세 가닥의 다이아몬드 장식은 나일 해전에 참전한 프랑스 전투선들을 나타낸다.

 

넬슨은 21년 동안 서유럽 스칸디나비아 반도, 북아프리카, 카나리아 제도 등

지를 누비며 여러 차례의 전역과 전투에 참가했다.

 

 

 

 

 

웰링턴 공작

나폴레옹을 물리친 영국 군인

 

"전쟁, 아니 우리 삶을 둘러싼 모든 일은 행동을 통해 미지의 대상을 파헤치려고 애쓰는 것과

관계 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한 '반대쪽 언덕에 무엇이 있는지 짐작하기' 이다.

 

전 세계에 명성을 떨친 영국의 여러 유명인 가운데 한 사람인 웰링턴은

프란시스코 데 고야 같은 거장을 비롯한 당대 일류 화가들에게 인기있는 작품 소재가 되었다.

이 초상화는 토머스 필립스의 1814년 작품이다.

 

웰링턴의 유럽 전역은 우선 이베리아 반도에 집중되었다.

그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승리를 거둔 뒤 무대를 프랑스 북부로 옮겼다.

 

 

 

 

현대

 

리시스 S. 그랜트와 휘하 장군들을 묘사한 당시의 그림.

그랜트는 기존의 북군 전략에 집요함을 가미했다. 아직 '총력전'이라는 용어가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그랜트와 셔먼을 비롯한 몇몇 인물들의 사례는 주목할 만하다. 특히 그랜트는 1864년부터 1865년까지

총사령관을 맡으면서 북군의 군사정책에 새로운 전략적 추진력을 제공했다. 오버랜드 전역(남북전쟁시

1864년 5월부터 6월까지 버지니아 주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에서 그랜트는 개별적인 전투보다

반복적인 전역을 통해 남군에 압박을 가하는데 주력했다.

 

 

 

 

샤카 줄루

남부 아프리카를 주름잡은 줄루족 지도자

 

"우리 부족 마을의 대문을 살피고, 즈위데의 어린 황소들을 한 마리도 놓치지 말라."

 

전투 복장을 갖춘 줄루왕국의 왕 샤카의 유일한 초상화.

샤카는 아프리카 남부에 군사강국을 건설했다. 이 지역에서는

아직도 그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어 강력한 정치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샤카와 동맹을 맺은 종족집단과 샤카와 전쟁을 치른 종족집단의

영역을 보여주는아프리카 남부의 줄루 나탄 지역의 지도.

샤카는 결국 이 지역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시몬 볼리바르

라틴아메리카 독립전쟁의 영웅

 

"혁명에 투신한 사람들은 바다에서 밭을 일구는 사람들이다."

 

1825년 페루의 군인이자 화가였던 호세 힐 데 카스틀가 그린 볼리바르 초상화.

 

볼리바르는 광범위한 저항운동을 통해, 남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를 해방시켰다.

 

 

 

 

 

주세페 가리발디

이탈리아 통일전쟁을 이끈 장군

 

"아무리 위험해도 우리 조국의 원수들과 싸우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겠다."

 

 

 

시칠리아의 부르봉 왕가를 타도한 뒤 이룩한 1860년의 이탈리아 통일은

가리발디에게 더없이 영광스런 순간이었다. 그는 일찍이 남아메리카에서

게릴라부대와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동안 전쟁에 관한 많은 것을 터득했다.

 

 

 

 

 

대(大) 몰트케

독일 통일전쟁에서 맹활약한 프로이센 장군

 

"결국 행운은 효율성이 높은 쪽이 차지하기 마련이다."

 

헬무트 몰트케 육군 원수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의모습.

프란츠 제라프 폰 렌바흐의 1890년 작품이다. 몰트케는 프로이센군이

오스트리아군(1866년)과 프랑스군(1870~71년)을 상대로 거둔 승리의 주역이었다.

 

비스마르크의 통일과업 기반을 닦은 몰트케의 세 전역을 보여주는 지도.

 

 

 

 

율리시스 S. 그랜트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북군 장군

 

"병법은 간단하기 이를 데 없다. 적이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라. 되도록 신속하게

적을 찾아내라. 최대한 강력하게 공격하고, 항상 움직여라.

 

'모든 미국적 요소가 집약된 사람'은 1864년 7월 어느 날 버지니아 주 콜드 하버 근처에서 이 사진이

촬영될 때 어느 북군 장교가 그랜트를 두고 한 말이다. 당시 그랜트는 제임스 강을 건너 피터스버그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가 위대한 지휘관이 돌 수 있었던 것은 보기 드문 노련함과

결단력을 겸비한 덕분이었다.

 

그랜트는 빅스버그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거둔 승리를 통해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고, 링컨 대통령의 확실한 신임을 얻었다.

 

 

 

 

로버트 E. 리

남북전쟁 당시 북버지니아군 사령관

 

"의무란 인간의 언어 중에서 가장 숭고한 낱말이다. 무엇보다도 의무를 다하라.

그 이상은 넘볼 수 없다. 그 이하는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1865년 4월 애퍼매턱스에서 항복한 직후 리티먼드에 머물고 있던

로버트 E. 리 장군의 모습. 리는 물론 탁월한 사령관이었지만, 스스로 말했듯이

북군의 '압도적인 병력과 물자에 굴복' 할 수 밖에 없었다.

 

남북전쟁 당시 리의 용감한 전역은 결국 항복으로 막을 내렸다.

 

 

 

 

 

메넬리크 2세

이탈리아 침략을 물리친 에티오피아 통치자

 

"열강들이 아프리카를 나눠 가지려는 흑심을 품고 있는 한,

나는 결코 무관심한 방관자가 될 수 없다."

 

대관식에 참석한 메넬리크 2세의 근엄한 모습.

이탈리아 침략을 격퇴하고, 제국의 통일과 영토 확장,

그리고 군대의 근대화를 이룬 메넬리크는 아프리카인들과

세계 곳곳의 아프리카 출신 사람들에게 자긍심의 원천이 되었다.

 

19세기 후반 에티오피아 제국의 영역.

메넬리크는 1896년에 이탈리아군을 격파한 뒤 아프리카 통치자로서는 유일하게

'아프리카 쟁탈전'에 가담하게 되었고, 일련의 군사적 전역을 통해

주변 여러 지역을 정복함으로써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가넷 울슬리

19세기 영국 제국주의를 대표하는 장군

 

"조국의 위대함을 지켜보는 것이 나의 가장 고결한 염원이고, 그 위대함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싶은 것이 나의 유일한 포부이다."

 

 울슬리는 세계 곳곳의 전쟁터를 누볐는데, 특히 아프리카에서 맹활약 했다.

덕분에 당시 영국에서는'만사형통'이라는 뜻의 '올 서 가넷(ALL Sir Garnet)'

이라는 표현이 유행하기도 했다.

 

 

 

 

 

도고 제독

러시아 함대를 격파한 일본군 사령관

 

"황국의 흥망이 이번 전투에 달려 있다. 모두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도고 제독은 쓰시마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세계적인 명장으로 떠올랐고, 지금도

일본의 민족 영웅으로 남아 있다. 러일전쟁 이후 그는 일본 군부엣 막강한 위치에

올랐고, 1934년 사망하기 직전 후작 작위를 받았다.

 

비트게프트 제독의 태평양 제1소함대는 뤼순항의 봉쇄를 돌파한 뒤 황해 전투에서

도고 제독의 함대와 교전했다. 도고는 이른바 'T'라 전법을 구사하며 러시아 함대를

무력화 시키려고 했으나 최대사거리에서는 승리를 확보하기 불가능했다. 도고는 기함

미카사호가 심각한 타격을 받은데다 아군의 전력 손실을 우려한 나머지 주력함들을

철수시키고 러시아 함대의 회항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포슈 원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사령관을 지낸 프랑스 장군

 

"나는 전쟁을 위한 전쟁을 수행하고 있지 않다. 정전을 통해서라도 원하는 조건을

독일에게 부과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페르디낭 포슈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파리평화회의에서 군사고문으로

활약할 때의 모습이다. 외교관들과 정치인들은 대체로 그의 조언을 무시했다.

포슈는 평화조약이 프랑스의 안보를 보장하지 못하는 결함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불만이 많았다. 실제로 그는 베르사유에서 열린 조인식에 참가하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서부전선 상황을 보여주는 지도.

포슈는 평생 공격적인 지휘 성향을 고수했다. 하지만 그는 전쟁 초기 공격전술에 따른

인명피해를 계기로 현대전의 실상에 눈뜨게 되었다. '미하엘' 작건, '게오르게테' 작전,

'블뤼허' 작전은 모두 1918년 독일군의 공격작전이었다.

 

 

 

 

 

에리히 루덴도르프

제1차 세계대저 당시 독일군을 이끈 장교

 

"총력전은 전 국미의 적극적인 참여를 수반한다."

 

독일군은 베르됭 전투와 솜 강 전투를 거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에리히 루덴도르프의 탁월한 조직 관리능력에 힘입어

그 뒤 2년 내내 연합군을 상대로 치열한 복수전을 펼칠 수 있었다.

 

타넨베르크 전투와 마주르스키에 호수지방 전투의 패배로 독일군은 동부지역을 침공한

러시아군을 물리쳤다. 두 전투에서는 독일군과 더 남쪽에서 움직인 오스트리아군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기도 했다. 비록 두 전투에서 독일군은 상당한 전과를 올리고 러시아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러시아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일시적인 좌절일 뿐이었다.

이후 러시아는 뼈아픈 패배를 딛고 또다시 3년 동안 전쟁에 임했다.

 

 

1918년 공세는 미군이 유럽에 도착하기 전에 독일군이 제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마무리 하기 위해

운명을 걸었던 최후의 도박이었다. 비록 타넨베르크 전투의 경우처럼 빛나는 전술적 성과를 거두거나

연합군에게 큰 타격을 주기도 했지만, 독일군은 전쟁을 끝낼 만한 결정타를 날리지 못했다.

118년 공세가 막을 내릴 무렵, 독일군은 적군의 반격을 제대로 막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승리를 목적으로 시도한 것이 패배를 안겨다 준 꼴이 되었다.

 

 

 

 

무스타파 케말

터키의 민족주의 지도자

 

"자유와 독립을 빼놓고는 나를 말할 수 없다."

 

1916년경의 무스타파 케말.

그는 리만 폰잔더스와 엔베르 파사와 심각한 의견충돌을 빚은 뒤

1915년 12월에 갈리폴리를 떠났다. 그러나 타고난 군사적 자질을

입증하듯 이후에 군단을 맡았고, 1916년에는 군을 지휘했다.

 

카프카스 전역 당시 케말은 제16군단을 지휘했다. 이후 그는 시리아 · 팔레스타인에서

제7군과 기동타격부대를 지휘했고, 아나톨리아에서 벌어진 독립전쟁에서는 천재적인 전략을 총괄했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

히틀러 휘하의 독일군 최고 명장

 

"주관이 뚜렷한 병사들이 자신감을 갖는 법이다."

 

 

만슈타인이 1942년 혹은 1943년 어느 날에 지도를 펼치고

참모들과 작전계획 및 병력배치를 숙의하는 모습.

 

만슈타인은 1939년 9월에 바르샤바 남진계획을 수립했을 뿐 아니라 1940년 6월에 아르덴 돌파계획도

입안했다. 1941년, 그는 독일군을 이끌고 발트 3국,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등으로 진군했다. 1942년,

세바스토폴을 점령했으나 그해 겨울에 스탈린그라드에서 포위당한 제6군을 구출하지는 못했다. 1943년

3월, 그는 하르코프를 탈환했다. 그리고 그 해 7월, 쿠르스크에서 요새 작전에 가담했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1944년 2월, 체르카시 고립지대에서 포위당한 독일군 일부를 구출했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총사령관

 

"겸손은 언제나 전우들의 희생과 부하들의 피로

갈채를 받는 사람의 몫이어야 한다."

 

지프 운전대를 잡고 있는 아이젠하워(1944년 12월).

그에게는 영국 기계화 수송군단 소속의 여성 운전기사 케이 서머스비가 있었다.

그녀는 전쟁 내내 아이젠하워 곁을 지켰다.

 

1942년 여름에 지중해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발탁된 아이젠하워는 북아프리카 전역을 통해 상대적인

경험 미숙을 드러냈다. 그러나 북아프리카 전역은 그가 값진 교훈을 배울 수 있었던 기회이기도 했다.

 

 

 

 

 

 

게오르기 주코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 최고 명장

 

"어떻게 그리고 무엇으로 소련 인민들의 원수를 갚아야 할지 자문해보았다.

무력, 오로지 무력만이 유일한 해답이었다.

 

예복 차림의 주코프 원수.

그의왼쪽 가슴 맨 위쪽에 소련 영웅 황금별 훈장이 달려 있다.

 

이 지도에는 1942년 11월에서 1945년 5월까지 소련에서 독일군을 몰아내고 베를린을

점령할 때까지 주코프가 이룩한 중요한 업적이 나타나 있다. 스탈린그라드에서의 반격은

지도 오른쪽에, 쿠르스크 전투는 왼쪽 가운데에, 그리고 끝으로 베를린 전투는

왼쪽에 표시되어 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군이 독일군 제6군을 상대로 펼친 반격이 생생히 드러나 있다.

스탈린그라드 남쪽과 북쪽에 있던 소련군이 독일군과 다른 추툭군 진지를 돌파하고

후방까지 깊숙히 진격한 뒤 아군과 합류해 스탈린그라드를 봉쇄한다. 이후 소련군은

독일군 포위망 돌파시도를 성공적으로 격퇴하고, 독일군을

스탈린그라드에 고립지대로 몰아넣었다.

 

 

 

 

 

 

니미츠 제독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을 무찌른 미국 해군 사령관

 

"하느님은 내가 스스로 옳다고 여긴 것을 포기하지 않도록 용기를 주신다."

 

1945년 6월 21일, 니미츠 제독이 자신의 이름이 붙은

공중요새 B29 폭격기의 조종석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

그가 일본군을 제압할 수 있었던 중요한 비결이었다.

 

니미츠는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인들이 뜻을 하나로 모으는 데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 해군이 승리핤  있었던 것은 그의 지휘 아래 이루어진 철저한

준비와 효과적인 정보 활용 덕분이었다.

 

 

 

 

보 구엔 지아프

프랑스군과 미군을 격파한 북베트남 장군

 

"우리 인민들은 외세 침략에 맞선 조국의 투쟁전통을 물려받아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고 적군을 무찔렀다.

 

보 구엔 지아프 장군.

베트남 인민군 총사령관이자 베트남 민주공화국 국방장관.

 

1954년 디엔 비엔 푸 전투 중 프랑스군 주둔지와 20세기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였고

지아프가 대담하게 펼친 베트남 독립동맹의 패배로 정치인들이 인도차이나에서의

군사적 패배를 비난하게 되고 인도차이나에서 국민들을 철수하도록 만들었다.

 

1968년 1월의 구정공세 때 베트남 공산군이 공격한 지역을 보여주는 지도.

베트남 공산군은 성청 소재지 44개 중 36개, 자치시 6개 중 5개, 군청 소재지 242개 중 64개,

끝으로 약 50여 개의 촌락을 공격했다. 지아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북베트남 지도부가 명령한

구정공세는 공언한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으나 베트남 전쟁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인용: 제레미 블랙 <역사를 바꾼 위대한 장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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