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왕 윌리엄이 말을 타고 병사들과 함께 서 있는 모습을 묘사한 14세기 수사본의 삽화>
1066년에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은 유능한 작전 지휘관이었다. 그의 주 무기는 타고난
적극성과 저항을 신속하고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한편, 적극적으로 성을 쌓고 군복무에 대한 대가로 토지를
지급했다. 또한 그는 스코틀랜드도 효과적으로 견제했다.
<18세기 토머스 로렌스 경이 그린 웰링턴 공작의 초상화>
사격후 이동 전술의 명수로서 질서정연한 대열을 형성하는 동시에 경장보병을 폭넓게 활용했다.
그것은 기동성 중심의 일렬 사격대형을 강조한 보수주의적 경향때문이었다. 아울러 그는 지형을
재빨리 파악했고, 시시각각 변하는 전투상황을 능숙하게 장악했다.
<아이젠하워와 그의 부하들>
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가 노르망디 상륙적전 개시일인 1944년 6월 6일에 독일군을 공격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미 82공수사단 병사들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아이젠하워는 유능한 정치군인이었다. 노르망디
전투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그의 이른바 '넓은 정면 접근법은 지금까지 논쟁의 대상이다. 독일군의 저항과
연합군의 보급 문제를 감안하며, 아이젠하워의 접근법과 몽고메리의 조직적인 전쟁방식은 둘 다 현명한 선택이
었다. 훗날 아이제하워는 북대서양조약기구 사령관을 맡았고, 미국 대통령직을 두 번 역임했다.
- 고대 세계 -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페르시아인이 함께 사자 사냥을 하는 장면을 담은 알렉산드로스 석관.
시돈에서 발견, 4세기 후반 BC, 대리석, 높이 69cm,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투스>
직업군인으로 구성된 상비군의 최고사령관을 맡았다. 그는 비록 야전사령관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충성스런 군대와의 밀접한 관계(그 군대의 최고사령관으로 활약한) 덕분에 지휘관으로서
장수할 수 있었고, 부하 사량관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제국의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다.
<2세기의 로마 석관(石棺)에 고부조(高浮彫)로 새긴 로라군과 갈리아군의 전투 모습>
로마군의 전투적 효율성은 특히 그들의 작전 범위에서 명백히 드러났다.
전술적 기술과 무기는 논외로 치더라도 그들은 월등한 인력, 자원, 의지력, 조직력 등을 갖고 있었고,
다양한 범위의 물리적, 군사적 환경에 익숙했다.
- 키루스 대왕 -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제국의 창건자
"용기백배한 자들이 무리를 지으면 당해내기 어려우나.
일단 그들에게 두려움이 밀려들면 그 수가 많을수록 두려움도 커진다."
카루스 대왕이 세상을 떠날 무렵, 페르시아제국은 사실상 최대 영토를 확보했다.
그의 사후에 아들 캄비세스는 이집트를 정복했다.
- 알렉산드로스 대왕 -
서아시아를 제패한 마케도니아의 정복자
"정복의 목적과 목표는 정복된 자들과 똑같은 행동을 피하는 것이다."
알렉산드로스가 가장 총애한 조각가 리시포스의 작품을 모방한
알렉산드로스의 대리석 두상. 알렉산드로스가 위쪽을 바라보는
모습은 신과의 연결을 암시한다고.
- 찬드라굽타 -
인도 마우리아제국의 창건자
"정복자는 나라를 바퀴처럼 여겨야 한다. 나 자신은 바퀴의 중심이다.
그리고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바퀴살로 이어진 동맹군은 바퀴의 가장자리다."
- 시황제 -
중국 최초의 황제
"우리는 날로 강성해진 힘으로 천지를 뒤흘들었고, 여섯 명의 제후가 무릎을 꿇었다.
그 다음 우리는 천하를 통일했고, 악의 뿌리 뽑았으며, 전쟁을 끝냈다."
- 한니발 -
로마의 패권에 도전한 카르타고의 용맹한 장군
"내가 바로 칸나이 전투 이후 이탈리아를 거의 차지한 한니발이라는 사람이다."
이 지도에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의 결정적인 전역과 전투가 나타나 있다. 한니발은 히스파니아에서 출발해
알프스 산맥을 넘었고, 티키누스 강, 트레비아 강, 트라시메노 호수, 칸나이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그는 로마를 정복하지 못했고, 그의 동생 하스드루발이 지휘한 히스파니아의 카르타고 영토를 공격했다. 이
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가 아르리카로 건너가 카르타고의 심장부를 공격했고, 한니발은 결국 자마에서
패배를 맛본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
갈리아를 정복한 로마의 독재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프랑스 남부의 오랑주(로마 시대의 아라우시오)에 소재한 로마식 극장에 전시된 이 전신상은
군복 차림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묘사하고 있다. 아라우시오는 카이사르가 죽은지 몇 년 뒤에
로마 식민지로 건설된 것이어지만, 고대 갈리아 남부 지역은 카이사르가 북쪽으로 원정을 떠날 때
이미 로마의 통치를 받았고, 카이사르 군대에게 보급품과 병력을 제공하는 병참기지 역할을 수행했다.
- 아우구스투스 -
로마 최초의 황제
"나는 온 세상의 육지와 바다에서 나라 안팎의 적들과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다.
승자로서 나는 자비를 구한 모든 시민들을 용서했다."
로마 바로 북쪽에 있는 프리마 포르타의 어느 별장에서 발견된 아우구스투스의 유명한 조각상으로
현재 바티칸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군복을 입은 아우그스투스를 로마군 최고사령관으로 표현하고
있다. 착용한 흉갑에는 파르티아에게 뺏긴 로마 군단기를 돌려받는 모습(이 그림에는 보이지 않는다)
을 비롯한 여러 가지 선전용 장식이 새겨져 있다.
아우구스투스의 전역은 시기와 지리적 측면에서 뚜렷하게 구분되었다. 이 지도에는 그가 황제가 된 이후
히스파니아, 게르마니아, 발칸 등지에서 펼친 주요 군사행동뿐 아니라 카이사르의 암살자들(필리피전투),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안토니우스(악티움 해전) 등과 전투도 표시되어 있다.
- 트라야누스 -
로마제국 역사상 최대 영토를 차지한 황제
"트라우스는 스스로 알렉산드로스 대왕보다 더 멀리 나아갔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정복한 영토조차 계속 다스리지 못했다."
- 카시우스 디오 -
트라야누스의 다키아 전쟁은 주로 오늘날 루마니아의 산악지대에서 벌어졌다.
고대 사료에는 전역 경로가 그다지 상세하게 나와 있지 않다. 이 지도는 트라야누스
기념주에 묘사된 내용을 토대로 살을 붙여 재구성한 것이다.
로마의 숙적 파르티아를 상대로 한 트라야누스의 동방원정 경로.
아르메니아 왕국(역사적으로 로마와 파르티아가 각축전을 벌인 나라)과 메소포타미아 북부에서
승리를 거둔 트라야누스는 기수를 남쪽으로 돌려 파르티아의 수도 크테시폰을 약탈한 뒤 페르시아에 당도한다.
하지만 이후 반란이 잇따른 데서 알 수 있듯 로마는 그가 정복한 영토를 다시 빼앗기고 만다.
트라야누스 기념주의 근접사진으로, 트라야누스의 다키아 원정 장면을 묘사한 세 줄의 나선형 소벽.
여기에는 병사들에게 연설을 하는 트라야누스(맨 아랫줄 오른쪽), 로마의 강배, 말 운반선(가운뎃줄 왼쪽).
치료를 받는 로마 군단병과 보조군 병사(맨 윗줄) 등의 모습이 아주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 벨리사리우스 -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를 정복한 비잔틴제국의 장군
"싸움을 각오하지 않은 채 로마에 발을 들여놓으려는 사람은 꿈속을 헤매는 자이다.
나 벨리사리우스가 살아 있는 한 이 도시를 포기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6세기 중엽 라벤나의 산비탈레 성당의 모자이크. 은행업자 율리우스 아르겐타리우스 의뢰로 제작된
이 모자이크에는 가운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막시미아누스 대주교 양쪽으로 고위 성직자들과
세속의 유력인사들이 서 있고, 그 뒤에는 호위병들이 보인다. 벨리사리우스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바로 오른쪽의 턱수염을 기른 남자로 추정된다.
중세 세계
노르망디공 윌리엄(이후의 '정복왕 윌리엄') 이 노르만의 잉글랜드를 정복한
과정이 담겨있는 자수품 '바이외 태피스트리'의 일부이다.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윌리엄이 병사들에게
아무런 부상을 입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위해 투구를 벗어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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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이슬람교도들의 위대한 지도자 살라딘의 군대를 프랑스식으로 묘사한 작품. 살라딘 휘하 기병대의
주축이 기마 궁수인 점을 고려할 때 이렇게 프랑스식의 기병대로 묘사한 것은 잘못이다. 하지만 살라딘
의 기병대가 항상 경장기병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쿠라사니야는 갑옷, 활, 구부러진 칼,
몽둥이, 도끼 등으로 무장한 중작기병대였다. 제1차 십자군 전쟁(1097~9년0 때 십자군들은 기수와 말을
철갑으로 두른 아굴라니(아마 페르시아에서 밀려난 듯하다)와 마주쳤다.
우), 1420~31년 보헤미아세서 후스파와 맞붙은 십자군의 모습을 담은 당대 필사본으로, 후스파는 얀지슈카 같은
유능한 지휘관들의 활약과 마차로 방어선을 구축하는 등의 혁신적인 보병전술 덕분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기스문트의 공격을 격퇴했다. 후스파 병사들은 석궁, 그리고 새로 도입된 권총과 대포로 마차 방어선
(바겐부르겐)을 사수했다.
티무르(1336~1405년)가 수행한 전역에서 엿볼 수 있는 특징은 치밀한 사전준비였다.
그의 군대는 아주 조직적이었고 훈련이 잘 되어 있었다. 덕분에 그는 행군의 방향을
재빨리 바꾸는 등 항상 군대를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티무르의 전역은 단지 약탈
목적의 습격이 아니었다. 그의 군대는 행군을 하면서 군수품을 조달했고, 기존 제도를
통해 공물을 거두었다.
- 샤를마뉴 -
프랑크족 지도자 겸 신성로마제국 초대 황제
"이윽고 쇠투구를 쓰고, 쇠장갑을 끼고, 오른손으로 불패의 칼을 쥔 채
왼손에 움켜쥔 쇠창을 하늘 높이 들어올린 샤를마뉴가 보였다."
- 말더듬이 노트케르(9세기의 수도승)
세계를 정복한 황레 샤를마뉴가 말을 탄 모습.
금박을 입힌 이 작은 청동 입상은 샤를마뉴가 세상을 떠난 지 한참 뒤인
10세기와 11세기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그만큼 샤를마뉴의
영향력이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샤를마뉴는 이따금 대군을 동원했고, 800년까지 거의 매년 원정을 직접 지휘했다.
그 무렵의 통치자에게는 일반적으로 노예, 보물, 토지 같은 전리품을 부하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샤를마뉴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잠재적인 적들을 자신의 왕국 안으로
통합하려고 노력한 정복자였다. 그의 성공 비결은 세심하고 정교한 계획과 조직이었다.
- 오토 대제 -
마자르족을 무찌른 독일 출신 신성로마제국 황제
"적들과는 혀 대신 칼로 이야기하자."
동유럽에 기독교를 전파할 목적으로 레히펠트 전투 이후 설치된 마그데부르크
대주교관구에 있는 오토 대제와 부인 에디타의 석상.
오토의 전역. 오토는 마자르족뿐 아니라 방항적인 봉신들, 동유럽의 슬라브족,
프랑스와 이탈리아 지역의 왕국 등을 상대로 광범위한 군사작전을 펼쳤다.
- 정복왕 윌리엄 -
잉글랜드를 정복하 노르만 침략자
"용감하게 싸우면 승리, 명예, 부를 거머쥘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전장에서 죽거나 포로가 되어 극악무도한 적의 비위를 맞추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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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잉글랜드 왕관을 쓴 윌리엄 1세(베틀 수도원의 영대기 12세기 필사본).
윌리엄 1세는 속죄의 의미로 헤이스팅스 전투 현장에 배틀 수도원을 세웠다.
배틀 수도원의 중앙제단은 해럴드 2세가 전사한 곳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우), 윌리엄 인장의 안쪽. 윌리엄이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이다.
인장 바깥쪽에는 그가 왕관을 쓰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윌리엄은 헤이스팅스 전투로 유명하지만, 이 지도에서 알 수 있듯
잉글랜드에서도 전역을 벌였다.
- 살라딘 -
십자군을 격파한 이슬람 세계의 영웅
"유럽 상인들은 최고의 무기를 대준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기들 발등을 찍는다."
이집트와 다마스쿠스의 술탄 살라딘이 언월도를 쥐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15세기 유럽의 채색화.
1174년부터 1186년까지 살라딘은 다른 이슬람 통치자들에게 자신의 권위를 확립하는 데
무려 33개월을 바쳤지만, 기독교인을 상대로 전역을 펼치는 데는 불과 13개월만 투자했을
뿐이다. 그는 모술과 이집트 사이의 지역을 장악한 뒤에야 비로소 예루살렘의 십자군
왕국을 공격했고, 그의 전역이 절정에 달한 것은 하틴 전투였다.
- 붉은 수염왕 프리드리히 -
십자군 원정에서 목숨을 잃은 독일 출신 신성로마제국 황제
"(밀라노 사람들이) 우리를 해치고 로마제국의 영광에 먹칠을 하기 위해 저지른 짓에는
반드시 저 비열하고 불손한 자들이 한 치의 희망도 품을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한 대가가 따를 것이다."
붉은 수염왕 프리드리히를 묘사한 14세기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비엔나 슈테판 성당 소장)
이 작품은 비교적 정형성을 탈피했으나 오로지 상상력에 의존한 것이다. 그의 모습에 관한
설명은 전해지지만 그의 실제 모습은 전혀 알 수 없다. 사실적인 초상화 기법은
13세기 후반에야 발달하게 된다.
- 칭기즈칸 -
역사상 최대 제국을 건설한 몽골 지도자
"나는 신이 내리는 천벌이다. 너희들이 엄청남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신은 나를 통해 천벌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비단에 그려진 칭기즈칸의 초상화(작자 미상)
이 초상화는 칭기즈칸이 세상을 떠난 지 한참 뒤인 원나라 때의 그림이다.
따라서 몽골족 통치자를 중국식 화풍으로 묘사한 것에 불과하다.
몽골군은 처음에는 대규모 침입 수준에 그쳤으나 점차 영구적인 지배를 모색하게 되었다.
1227년 세상을 떠날 무렵 칭기즈칸은 역사상 그 주구보다도 넓은 지역을 정복했고,
그의 후계자들은 제국의 영토를 더욱 넓혔다.
- 티무르 -
중앙아시아제국의 창건자
"감사하게도 신은 나 같은 절름발이에게 세상을 지배할 힘을 주었다."
소련의 학자 M. M. 게라시모프가 복원한 티무르의 두상.
이것은 1941년에 티무르의 무덤에서 발견된 그의 실제 두개골을 바탕으로 제작된 것이다.
게라시모프는 오늘날 일반적인 법의학 기법으로 자리잡은 두개골을 이용한 안면복원술의 선구자이다.
전설에 따르면, 티무르의 무덤을 훼손하는 자의 나라에는 과거에 그가 저지른 짓보다 더 끔찍한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한다. 게라시모프가 무덤을 발굴한 뒤 히틀러의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했다.
티무르는 14세기부터 15세기 초까지 유라시아 대륙의 모든 강대국들에 맞서 싸웠다.
그는 카스피해와 흑해 북부의 금장한국, 인도의 델리 술탄국, 시리아의 맘루크왕국. 터키의 오스만제국 등을
제압했다. 그의 먹잇감이 되지않은 유일한 나라는 중국의 명나라였다. 1405년 티무르는
명나라 원정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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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아미르 티무르 대제의 묘지인 구르 아미르(사마르칸트 소재).
1404년에 세워진 이 8각형 무덤은 티무르제국의 대표적인 건축물 가운데 하나이다.
티무르는 손자 무함마드 술탄 옆에 나란히 묻혔다. 근처에는 티무르의 스승인 수피교 성자의 무덤이 있다.
우), 티무르의 손자 이브라힘술탄 이븐 샤루흐의 갑옷(1415~1435년 사이에 쉬라즈 지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 금을 새겨 넣은 철판이 사슬갑옷을 장식하고 있다. 이 갑옷 안에 외부 공격의 충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누비옷을 착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 에드워드 1세 -
웨일스를 점령하고 스코틀랜드를 정벌한 잉글랜드 왕
"그대가 똥을 치울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 통치권을 워렌백작 존에게 물려주며
왕을 알현하기 이해 찾아온 주교들과 다른 방문자들을 맞이하는 에드워드 1세.
에드워드 1세는 세인트폴 성당의 주임사제와 요크 대주교도 벌벌 떨 정도로
성직자들에게 엄청난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은 1304년에 스털링 성을 점령한 것 이외에는 그다지
뚜렷한 전과가 없었다. 원정은 주로 스코틀랜드 남부와 중부에서 이루어졌다.
에드워드 1세의 웨일스 원정은 르웰린 압 그루피드 왕자의 전략적 요충지인
북부 귀네드 지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에드워드 1세의 군대는 해군 지원을
받으며 체스터에서 진군해왔다.
에드워드 1세의 삶을 토대로 전투 장면을 상상해 표현한 그림.
말을 탄 왕들과 귀족들이 사용한 칼, 창, 비늘갑옷 등은 1265년의
이브섬 전투에서 쓰인 것과 동일하다.
- 로버트 부루스 -
잉글랜드군을 무찌른 스코틀랜드 왕
"물론 농노로 살 수도 있겠지만,
그대들은 누구보다도 자유를 갈망하기에 지금 여기 모인 것이다."
배넉번 전투에 임하기 전 병사들에게
로버트 브루스가 첫 번째 부인 마르의 이사벨라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묘사한
16세기 그림(실물 그대로 표현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사벨라는 결혼한 지 6년만에
세상을 떠났고, 브루스는 얼스터 백작의 딸 엘리자베스와 재혼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무력한 에드워드 2세가 왕위에 있는 틈을 이용해 잉글랜드 북부 지방을
공격했다. 브루스의 뛰어난 부장 제임스 더글러스와 토머스 랜돌프는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진군할 때가 많았다. 이 지도에는 로벝느 브루스가 스코틀랜드에서 참가한
주요 전투 장소도 포함되어 있다.
- 얀 지슈카 -
백전불패의 체코 명장
"그대의 첫 번|째 전투를 기억하라. 적은 병력으로 무장도 제대로 못 갖춘 채
대군을 맞아 용감하게 싸우지 않았는가? 하느님을 믿고, 출전을 준비하라!"
휘하의 병사들이 사용한 무기 중 하나인 철퇴를 들고 있는 자슈카의 모습
(독일식 초상화는 그가 세상을 떠난지 오래 뒤의 작품이다). 한편 그의 병사들은
자슈카처럼 갑옷을 입지는 못했을 것이다.
자슈카는 탁월한 전술가였다. 특히 방어전술이 뛰어났다. 따라서 그의 군대는
주로 보병으로 구성되었으나 좀처럼 패하는 일이 없었다.
- 야노슈 후냐디 -
오스만제국군을 무찌른 헝가리의 민족영웅
"두려운가?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투르크인들뿐인가?
신이 우리와 함께 한다면, 적들은 쉽게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15세기 후반의 이 소화상(小畵像)은 헝가리 기사들이 투르크 기병대에게 승리를 거두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저 멀리 투르크 함대가 보인다. 그림에는 중장기병이 등장하지만,
후냐디가 활약한 시기의 헝가리군 주력군은 기마궁수 중심의 경장기병대였다.
루마니아 귀족인 후냐디의 아버지 보이트는 기사로서 룩셈부르크 왕가 출신의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를 섬겼고, 1409년에 후냐디 성을 하사받았다(그의 가문명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후냐디는 1440년대 초에 오스만제국군의 공격을 몇 차례 격퇴했을 뿐 아니라
1444년에는 흑해까지 원정을 떠나기도 했다.
목판화 속의 야노슈 후냐디
(출처 : 1488년의 <헝가리인 연대기>
인용: 제레미 블랙 <역사를 바꾼 위대한 장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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