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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르네상스 미술 II

 

 

 

 

 

 

 

안드레아 만테냐의 <지옥으로의 하행> 1465 - 1470년.

스콰르치오네는 문하생들이 그리스 로마 시대의 작품 스타일을 보고 베낄 수 있도록, 버려진 고대 유물들을

사 모았다. 특히 그리스 로마 시대의 관에는, 피렌체의 대조각가 도나텔로가 흉내내던 부조가 새겨 있어

스콰르치오네의 관심을 끌었다. 스콰르치오네의 수제자 중 한 명인 만테냐는 십대 때부터 데생 실력이 스승을

능가했다. 만테냐 이전에 데생은 단순히 색칠이 용이하도록 하는 밑그림에 지나지 않았으나, 만태냐 이후부터

그림을 그리기 전에 그림 전체의 구도와 화가의 아이디어를 정리하는 방식으로 발전한다. 이 때부터 데생은

채로 표현되는 작품을 준비하는 단계가 아니라, 미술가의 깊은 사고를 보여주는 독립적인 작품으로 인정받는다.

이 때문에 만테냐의 데생은 세계 각지의 유명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만테냐의 데생은 평행 직선으로만 되어 있다.

 

※ 데생 dessin

프랑스어로 '그림'이라는 뜻의 dessin은 프랑스어로 '디자인' 이라는 뜻인 dessein과 스펠링 한 글자 차이지만

발음은 둘 다 '데생' 으로 같다. 그러나 두 단어 모두 신이나 인간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그림으로 정리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영어로 '운명' 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 'destiny' 도 여기서 비롯된 말이다. 이탈리아의 화가들은

1300년대 말경부터 사용하던 이 두 단어의 발음이 유사한 까닭은 '우주가 신의 그림' 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해 왔다. 이런 주장에 따라 르네상스 이탈리아인들은 신이 미리 우리의 인생을 그려 두고 그림대로 천지를

창조햐셨듯 사람이 그림을 그리는 것은 조그마한 천지를 창조하는 것과 같다고 믿었다. 또한 이 시대 예술가들은

신이 이미 그려 둔 그림을 재현해 완벽하게 그려내는 것을 목표로 작품을 창작했다. 인간이 아무리 버둥거려도

신이 이미 정해 둔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없고, 예술가들은 그 그림을 재현해야 한다고 믿었다.

 

 

 

 

 

 

 

 

 

얀 반 에이크의 <교회에 있는 성모마리아> 1425년.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화가들이 원근법을 연구하는 동안 네덜란드 화단에서는 '신 예술(Ars Nova)' 이라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기 시작한다. 이탈리아 화가들이 '공간' 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연구하는 동안 네덜란드

화가들은 눈에 보이는 빛을 자세히 관찰하고 연구해 빛이 퍼지거나 반사되는 방법으로 그림에서 실제 물건의

촉감을 살리는 방법을 찾아낸다. 1430년부터 이탈리아에 많은 양의 네덜란드 소품이 쏟아져 들어온다.

특히 덜란드 화가 얀 반 에이크의 작품은 이탈리아 화가들에게 섬세한 옷감의 질감을 표현하면서도

성모의 우아한 포즈와 눈부신 광채를 조합한 완벽한 그림으로 추종받았다.

네덜란드 그림을 본 이탈리아 사람들은 깊은 감동을 받아 울음을 터뜨리거나,

죄가 많은 사람든 그림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다는 말이 돌았을 정도.

 

 

 

 

자코포 벨리니의 <성모마리아를 섬기는 에스테 후작> 1450년

피렌체의 르네상스 미술이 공간 표현에 집중했다면, 국제 고딕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던 베네치아 예술은

색의 대조로써 시각적 효과를 내는 일에 집중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의 작품들이다.

젠틸레의 제자인 자코포 벨리니 역시 색채와 시각 효과를 중시했다. 벨리니의 대작들은 거의 대부분

파괴되었으나, 소품 몇 개가 장식과 효과를 중요시하는 베네치아 그림 스타일을 보여 준다.

성모마리아 뒤에 펼쳐지는 환상적인 풍경화에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와 넓은 평야가

조그마한 언덕과 대조를 이루도록, 색채의 대조와 패턴을 통해서 보여 준다.

성모마리아의 금가루를 뿌린 듯한  환상적인 옷도, 색채 대조를 이용해

환상적인 시각 효과를 보여 준 벨리니의 예술적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미노 다 피에솔레> 1429 - 1484년

얄팍한 부조와 원근법을 합쳐 그림 반, 조각 작품 반을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하다.

도나텔로가 발명한 이 '스키아치아토' 부조 테크닉은 미켈란젤로가 나타나기 전까지 피렌체 조각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다. 미노 다 피에솔레는 주로 로마 시대 조각 중에서 가볍고 우아한 분위기의

조각을 모방했다. 후대에 나타난 보티첼리의 그림 스타일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도 있다.

 

 

 

 

도메니코 베네치아노의 <루시, 제노비우스, 세례 요한, 성 프라체스코,

왕좌에 앉은 아기 예수와 성모마리아>  1445 - 1447년.

도메니코 베네치아노가 그린 이 제단화는 젠틸레의 작품에서 테마를 따온 것이지만,

부드럽고 광채나는 새로운 테크닉을 사용했다.

베네치아노는 벨리나처럼 젠틸레 다 파브리나오의 제자다.

 

 

 

 

조토의 스크로베니 예배당 벽화 중 <유다의 입맞춤> 1303 - 1305년.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은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선배 예술가 중 1300년대 초에 활동한 조토를

가장 높이 평가했다. 파도바에는 조토의 벽화로 가득한 스크로베니 예배당이 있다. 완성된 원근법은

아니지만 처음으로 물건을 입체로 그려 무게가 느껴지도록 그린 조토의 그림은 모든 표면이 매끈하고,

새벽의 푸른빛으로 뒤덮혀 있는 느낌을 준다. 유다가 예수의 입을 맞추며 로마 군인들에게

그를 체포하도록 하는 장면을 그린 이 작품은 당시 예술에선 찾아볼 수 없는 역동적인 움직임과,

많은 사람이 떼지어 있는 모습을 처음으로 표현한 그림으로 알려진다.

르네상스 시대의 파도바 예술가들에게는 파도바에 조토의 그림이 있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었고,

조토의 그림을 모방하거나 연구하는 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마상

로마 시대에 제작되어 유일하게 남아 있는 황제의 기마상이다. 현재는 캄피돌리오에 소장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로마 교황청 소속 라트라노 교회에 보관되어 있었다. 고대 로마는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이전에 제작된 로마 황제들의 조각을 모두 우상이람 녹여 버렸지만,

이 기마상은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마상으로 착각해 지금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다.

 

 

 

 

 

도나텔로는 로마에 유학을 갔을 때, 웅장한 로마 황제의 기마상에 깊은 감동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파도바 정부의 주문으로 꿀 고양이(가타멜라타) 장군 동상을 제작할 때, 로마 시대의 기마상을

모델로 삼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조그마한 말을 짓누르는 영웅적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마상과 달리 가타멜라타가 손에 지휘봉을 들고, 자기보다 몇 배 큰 말을

지혜로 다스리는 전략가와 지식인으로서 군인을 묘사했다.

 

 

 

 

세비야의 알카라르 궁전

아랍 왕에게서 궁전을 빼앗은 스페인의 카스타야 왕가가 살던 궁. 기독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믿음은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을 이슬람 왕국에세서 되찾으려는 노력에서 생겨난 개념인데,

훗날 남북 아메리카와 아시아 대륙에 식민지를 세우고 원주민을 잔혹하게 죽이는

스페인식 식민 사고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로지에 반 더 바이덴의 대표작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예수> 1435년, 스페인 마드리드.

예수의 제자들이 돌아가신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리는 장면이다.

이 작품은 네덜란드 그림을 사랑한 스페인 귀족들이 반 더 바이덴에게 주문한 작품 중 하나로

지금은 스페인의 프라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옷감과 사람의 얼굴까지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것이

반 더 바이덴의 스타일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세상을 떠난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리는

장면에서 슬픔과 고통을 표현하는 것은 그 이후 화가들 사이에 반드시 그려야 하는 전통이 된다.

 

 

 

 

프라 안젤리코의 <무덤으로 옮겨지는 예수> 1440년, 독일 뮌헨.

 

반 더 바이덴의 <무덤으로 옮겨지는 예수> 1464년. 이탈리아 피렌체.

에스테 후작은 당시 이탈리아를 잠시 방문한 로지에 반 더 바이덴에게 피렌체 화가 알젤리코의

모델을 이용한 그림을 주문했다. 만테냐가 페라라로 가던 해, 로지에 반 더 바이덴이

이 그림을 에스테 코르타에서 선보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피사넬로의 <에스테 가문의 여성> 1435 - 1449

피사넬로의 일반적인 초상화 스타일을 보여 준다.

마치 천을 짜서 만든 네덜란드의 카펫처럼 색상이 화려하고

그림이라기보다는 무늬처럼 처리 했다.

 

 

 

 

벨리니가 그린 <성모를 숭배하는 레오넬로 드 에스테>

레오넬로 드 에스테의 얼굴을 확대한 것이다. 좀 더 입체적인 얼굴과,

그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을 묘사하는 면에서

벨리니의 예술이 한발 앞섰음을 보여 준다.

 

 

 

 

 

 

 

 

안드레아 만테냐, <아기 예수를 섬기는 양치기들> 1450년.

만테냐가 에스테 후작에게 주문 받아 1450년경 완성한 작품이다.

갓 테어난 아기 예수를 섬기는 동방박사들이 보인다.

따뜻한 색채와 사람의 얼굴의 거친 피부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 그림은, 로마의 건축과 의상으로 모든 것을

처리하던 어린 만테냐의 작품과 많이 차이 난다. 색채는 앞에 나온 로지에 반 더 바이덴의 화사한 색채에 가깝고,

뒤에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멀리 지평선까지 보이는 배경, 소박한 농민들의 모습,

예를 들어 다 떨어진 옷이나 뒤에 노인이 달걀 바구니를 들고 오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린 것 역시

네덜란드 미술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또 뒤쪽 우측에 솟아 있는 높은 산에,

천사가 양치기에게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장면을 그렸다. 각기 다른 시간에 일어난 사건을

하나의 그림으로 처리한 것 역시 르네상스 이탈리아보다는 네덜란드에서 흔히 쓰이던 기법이다.

이 작품은 만테냐가 에스테 후작의 성에서 처음으로 감상한 네덜란드 화가

로지에 반 더 바이덴의 작품에 얼마나 큰 영향을 받았는지를 보여 준다.

 

 

 

 

피레로 델라 프란체스의 <채찍질 당하는 예수 그리스도> 1430년경.

모든 공간이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직선을 이루는 이상한 공간 속에서 예수가 채찍질 당하고 있다.

이 그림은 아직도 학자들을 의아해하게 하는 부분이 많다. 실제로 예수가 채찍질을 당하고 있을  때,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은 사령관인 폰투스 필라투스였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는 당시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요한 7세다. 혹자는 이것이 터키인들에게 수난을 당하는

콘스탄티노플을 바라보며 슬퍼하는 동로마 황제의 모습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앞에 있는 세 사람은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모아, 터키인들을 밀어내고 동로마의

기독교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에 민병대를 모으려던 정치가들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 세 사람의 정체도, 예수를 바라보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라는 사람도 누구인지는

정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이 그림의 특징이라면  왼쪽 동로마 황제가 앉아 있는 의자 아래

돌판에 OPVS PETRIDE BVRGO SCI SEPUVCI(보로고 산 세폴코로가 고향인 피에로의 작품)이라는

글이 새겨 있는 것이다. 예술가가 자기의 이름을 작품의 일부인 것처럼 나타내는

것은 얀 반 에이크가 만든 네덜란드의 전통이지만, 대리석과 라틴어를 이용한 것은 그

것을 따라 한 것이 아니라피에로가 자신도 라틴어에 능통한 지식인 계층을 끼고 싶어 하는

르네상스 '아티스타' 라는 야망의 표현이 아닐런지...?

 

 

 

 

 

위는 만테냐가 베로나에서 그린 제단 장식의 한 부분이고, 아래는 벨라니가 같은 테마(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로 그린

것이다. 두 예술가의 구도가 비슷한 것으로 만테냐가 더 경험 많은 벨리니에게서 많은 것을 전수받았음을 보여 준다.

하지만 만테냐의그림이 벨리니의 그림에 비해 몇 가지 앞선 부분도 있다.

일단 탁 트인 만테냐의 공간감은 벨리니의 것보다 월등히 뛰어나고, 사람들의 포즈도 더 우아하며,

몸의 움직임이나 얼굴도 훨씬 균형이 잡혀 이다. 색채도 덜 인위적이다.

만테냐의 가장 큰 장점은 그가 네덜란드 화가들에게서 배운, 하나의 가느다란 길을 거쳐

높은 곳에 있는 도시까지 올라가는 배경에 그린 풍경들, 그리고 스콰르치오네의 스튜디오에서 배운 것처럼

로마의 옷, 갑옷, 방패 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역사관' 등이라고 할 수 있다.

 

 

 

 

피티 궁전

피렌체에 있는 옛 궁을 흉내내어 지어지만, 릴부러 그보다 몇 배 크게 지었다는 이 궁은 도시 한 가운데에 있던

메디치 궁과 다르게, 도시를 향한 쪽은 U자 모양으로 해서 궁 앞에 광장을 만들었고, 뒤쪽은 정원에서

곧장시골로 이어진다. 전원생활과 도시 생활을 겸할 수 있는 장소로 만든것이다.

이것은 점점 복잡한 도시 한가운데 뚝 떨어져 있는 것보다,

자연과 공생하고 싶어 하는 르네상스의 이념을 표현한 것이다.

 

 

 

 

알람브라 궁전

스페인에 있는 아랍형 성 알람브라. 아랍어로 '붉은 성'이라는 뜻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아랍과 크리스찬 스페인 왕들은 이런 성을 중심으로 영역 싸움을 하고 있었다.

아랍 국가들이 사하라 사막을 건너 들여 오는 노예, 금과 상아로 부자가 되어

이런 거대한 성도 지을 수 있었다. 스페인 왕들이 아프리카와 직접 거래하려고 배를 띄운 것이

유럽이 식민지를 세우고 강한 대륙으로 떠오르는 기반이 된다.

 

 

 

 

파사드

길을 향한 건문 정면에 대한 거대한 판을 말한다.

예컨대 벽돌로 건물을 완성했다면 그 앞에 대리석 판 등을 입혀

정문에서 건물을 볼 때 멋지게 보이도록 하는 일종의 거대한 평면 조각으로, 프랑스어로 '얼굴'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의 정신을 바꾸기 위해 교회 전체를 개조할 때 예산이 부족하면 파사드만 바꾸기도 했다.

알베르티가 만든 새 성모 성당은 완공된 후 10년 넘게 흉칙한 붉은 벽돌을 드러내고 있다가

알베르티가 제작한 파사드를 씌우는데, 그리스 로마 신전과 너무 같은 비율로 만들어

제우스 등의 이교도들을 되살리는 것 아니냐는

교회의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했다.

 

 

 

 

안드레아 만테냐의 <성 세바스티아노의 순교> 1456 - 1459년.

만테냐는 베로나에서 주문 받은 작품을 그리면서 개선문에 묶인 채, 화살을 맞고 죽어가는

성 세바스티아노를 그렸다. 이 그림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두 곳이다.

첫째는 배경으로 네덜란드의 풍경을 흉내냈지만, 완전히 이탈리아식으로 소화한 풍경으로 그렸다.

뒤에 있는 삐죽한 산을 보변, 맨 꼭대기에 성벽으로 둘러싸인 르네상스 도시가 보이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고대의 건축이 나타나다가 맨 아래에는 마침내

로마 시대의 광장이 보인다.

두 번째는 성 세바스티아노의 발 옆에 쌓여 있는 고대 로마의 돌조각들이다.

이것은 만테냐의  스승인 스콰르치오네가 고고학에 심취해 이런 것들 모아

학생들을 훈련시키던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고고학은 땅속에서 역사의 증거물들을 파내는 일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사는 도시가 하늘 높이 치솟는 것은

과거가 땅속 깊숙히 들어가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파고 들어가다 보면 점점 옛것이 나오고, 결국 가장 깊은 곳에 로마의 역사가 있다는 것이다.

만테냐 땅속에 있는 역사를 파내어 그 안에 숨어 있는 성 세바스티아노의 이야기를

발굴해 보여 주자는 의미를 이렇게 표현했다.

그리고 땅에서 파낸 역사의 증거물들에는

우리가 읽는 역사를 눈으로 볼 수 있는 증거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성 세바스티아의 발이, 옆에 있는 조각 모양과 똑같다는 것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이것은 그들이 수집한 로마의 조각 속 인물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며,

이야말로 역사의 진실을 담고 있는 열쇠라는 의미다.

스승을 미워하고도 스승의 뒤를 따라 고고학에 심취했던 만테냐는

역사적으로 위대한 모든 것은 '돌처럼' 영원히 남는다고 믿었다.

성 세바스티아노가 인간의 피부보다 돌처럼 딱딱하게 표현된 것은그 때문이다.

그 옆에 성자를 죽인 궁수들은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투시화법에 대하여>

출판업이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화가들은 유명세를 타기 위한 새로운 기회로 책 출판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그림에 수학을 적용하는 방법을 책으로 출간해

수학자로 널리 알려지며,

그의 그림은 지적인 작품으로 더욱 각광받는다.

그림을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책을 쓰는것은 화가의 명성을 높이는 좋은 방법이었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진짜 십자가의 전설> 벽화 중에서 1453 - 1464년경, 이탈리아 아레초.

프란체스카는 아레초에 있는 성당에 십자가에 관한 스토리를 그려, 일베르티가 말한 '해설자'로서 예술가, 그리고

수학자로서 예술가의 전형으로 이름을 날린다. 이 그림은 성경, 로마의 역사, 전설 등이 나오는 여러 스토리를 그린

것이다. 그림에 솔로몬 왕을 방문하러 온 시바의 여왕이 나중에 십자가가 될 나무를 보고 이것을 섬기는 장면이다.

이미 수학자로 잘 알려져 있던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십자가에 대한 여러 스토리를 하나로 모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역사'로 묘사해 만능 지식인으로 인정을 받았다.

 

 

 

 

말라테스타 신전

말레테스타는 교황에게 파문 당하자 리미니에 있는 가톨릭 성당 하나를 자기 아내에게 바치는 신전으로 전환

한다. 건축가 알베르티, 화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등이 작업해서 만든 이 신전의 설계도대로라면 지붕에

돔이 올라가 로마의 판테온 같은 모습을 했어야 했지만, 공사 도중 말라테스타가 교황청 군대에 의해 라미니

에서 밀려나면서 오늘날가지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그가 기독교에서 파문을 당했기 때문에 처음으로 고대에

대한 환상을 숨기지 않고, 로마의 황녀들에게 바치던 그 모습 그대로 신전을 재현할 수 있었다.브루넬레스키가

로마 시대의 기술과 미학을 기독교식으로 적용한 데 비해, 알베르티는 그리스 로마 스타일을 그대로 따라 한 것

으로 보인다. 이런 일에 교황청 직원인 알베르티가 참여했다는 것은, 당시 르네상스 지식인들이

기독교와 고대에 대한 이중성을 띤 것을 잘 나타낸다.

 

 

 

 

탑에서 내려다본 만토바의 전경

 

 

 

 

루첼라이 신전의 서체

아직도 타임즈 등 주요 인쇄물에 쓰이는 '로마 인쇄체'는 만토바 곤가가의 출판사에서 처음 사용했다.

하지만 인쇄기가 발명되기 전에 로마 글씨의 비율을 비교해 '완벽한' 글씨체를 만든 사람은 곤자가가

아닌 알베르티였다. 로마 시대 이후 로마 인쇄체가 처음 사용된 것은 알베르티가 피렌체의 명문가

루첼라이를 위해 지은 '루첼라이 신전'에서다.

 

 

 

 

피에트로 롬바르도가 지은 건물의 장식 디테일

밀라노 출의 조각가 피에트로 룸바르도는 베네치아 지방에 많은 건물을 지어 이름을 날렸다.

피에트로 룸바르도는 수학을 이용해 새로운 건축 방식을 만든 것이 아니라, 로마 시대의

대리석 색상 배열이나 장식 모티브를 그대로 사용했다. 새로운 개념을 창조한 건축가라고

인정하기는 어렵지만, 로마 시대의 웅장한 장식 조각의 재현으로는

겨룰 자가 없는 실력 있는 건축가였다.

 

 

 

 

성 안드레아 성당

만토바에는 알베르티의 설계대로 성 안드레아 성당이 새 단장을 한다.

외부에서 본 성 안드레아 성당은 영락없는 로마의 개선문에 그리스 신전에서 흔히 보는

기둥과 삼각형 지붕을 따서 붙였다. 터널 형식의 내부, 지붕의 정사각형 문양 장식,

기둥에 새긴 식물과 항아리 모두 로마 시대의 건축물에서 그 모티브를 가져왔다.

 

 

 

 

 

 

 

 

만테냐의 신혼의 방 벽화

큰 대리석에 조각한 문의 위쪽이 무대처럼 보이도록 하는 착시 현상을 이용했다. 무대처럼 보이는 창문까지

계단으로 올라가는 것처럼 그리고, 마치 이것이 무대의 막을 올리듯 아기천사들이 양쪽에서 커튼을 잡아

당기고, 그 위에 곤자가와 그 부인의 모습이 나타나도록 그렸다. 또한 로마 시대의 건물처럼 천장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처리했다. 원근법을 응용해 구멍 위에 발코니를 그리고, 발코니에서 천사들이 방을 내려다 보는

것처럼 그렸다. 천장 윗부분은 모두 로마 시대의 관을 장식하던, 풍성함을 상징하는 포동포동한 어린아이들이

과일이 나뭇가지에 매달린 것처럼 그렸다. 자기가 모든 것을 그린 것은 아니지만

아이디어는 만테냐의 것이어서 만테냐의 작품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 안드레아 성당에는 카이사르의 개선 행진을 테마로 하고 만테냐의 데생을 기본으로 한 그림들이 걸려 있다.

이 그림은 전쟁에 이긴 카이사르가 수레 가득 전리품을 싣고 로마와 영웅들의 환대를 받는 장면이다.

이 그림은 교회에 있었음에도 기독교와 상관없는 역사적 사실을 그렸다.

이것은 점점 종교 보다 '개인의 미덕과 힘' 을 중요시 하는 사회로 변하면서

종교와는 관계없는 테마로도 도덕적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는 우마니스타 철학의 표본이자,

종교적 메시지를 전하려고 노력 하던 서양미술을 한 단계 발전시킨 일이라 할 수 있다.

 

 

 

 

 

 

 

 

메디치의 아카데미가 있던 카레치 빌라.

아카데미아 Accademia

원레 아리스토텔레스 제자들의 모임을 일컫는 말로, 그리스 로마의 철학을 기반으로 인류의 지식을 발전시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모여 연구와 토론을 하고, 운동과 게임을 하며 시민을 수양하던 곳이다. 당시 대학들은 대부

분 교회에 소속돼 있었다. 그래서 교회에서 인정한 신학자들과 법학자들이 쓴 책으로만 공부를 했다. 코시모 메

디치는 그리스와 로마의 책들을 읽고 플라톤의 철학을 기초로 한 그리스 지식을 익힌 후 세상의 모든 지식을 두루

배우고 옴과 마음을 익혀야 한다는 생각으로 '아카데미아' 라는 새로운 개념의 모임을 만들고, 이런 책들을 여기 모

인 젊은이들이 자유롭게 읽을 수 있도록 번역하게 한다. 아카데미아는 학력을 인정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지신인

들의 친목을 도모하고 같이 생활하면서 지적인 대화를 나누며 지식의 깊이를 발전시킨다는 새로운 생각의 산물이며

공부를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재미로, 자진해서 하는 사람들만 해야 한다는 르네상스 철학이 본격적으로 구현된 것

이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라틴어로 된 성경을 기초로 한 신학을 중요시하는 대학과, 플라톤 철학을 기본으로 철학

원서를 그리스어로 읽으며 언어 속에 감춰진 비밀을 찾아야 한다는 아카데미아가 종종 크게 충돌했다.

 

 

 

 

조르지오 바사리가 그린 <피렌체의 축구 게임>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에 영국에서 발명된 축구가 들어와 부유한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를 끈다.

큰 축제 때에는 다른 도시 대표들이 와서 축구 경기를 벌였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이탈리아 축구 리그의

전통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피렌체 역사를 그림으로 그린 바사리는, 피렌체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 중

축구 경기 모습을 그려 두었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와 미의 세 여신> 1483년.

마르실리오 피치노가 아카데미아 학생들에게 추게 한 춤에는 항상 의미가 숨어 있었고, 춤추는 사람들은

하나의 '이상' 또는 이데아로 만들었다. 이 그림은 아카데미아 학생 중 한 명의 결혼식 후 드들  부부의 방에

보티첼리가 그린 그림이다. 여자가 잦춰야 할 세 가지의 '우아함'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우아함은

순결, 아름다움, 쾌락이다. 그림을 보면 비너스에게 신부를 소개해주면 결혼식에 참석한 비너스가 결혼하는

사람의  묶을 천을 내준다. 숲 속에서 강의를 하며 학생들에게 춤을 추게한 마르실리오 피치노는 그러한

철학적 개념을 스스로 몸으로 재현하는 춤을 추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림 속 인물들이 신발을 벗고

발끝으로 서 있는 것을 볼 때, 이러한 춤의 한 동작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세면대 / 1465년.

크는 도나텔로와 브루넬레스키 사망 후 두 사람의 스튜디오를 물려받아 하나로 통합해 운영했다.

코시모 메디치와 도나텔로 사망 후에도 메디치 가문은 예전 친분을 생각해, 브루넬레스키와

의 뒤를 이은 베로키오 스튜디오에 허드렛일이라도 맡겨 도나텔로의 제자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보살펴 주었다.  산 로렌초 성당의 성물안치소 세면대가 바로 베로키오의 작품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풍경> 1473년.

처음으로 미술교육에 사용된 스콰르치오네의 데생 테크닉은, 만테냐가 유명해지면서 모든 이탈리아

예술가들에게 교육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절벽, 계곡, 산으로 구성된 거친 풍경들을 스케치하며

데생을 공부한다. 그는 이런 식으로 그려 둔 풍경들을 그림의 배경으로 사용했다. 이는 네덜란드에서

그때 막 각광받기 시닥하던 '풍경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멀리 희미하게 사라지는 풍경에

'거리감'을 주기 위해 유화의 투명한 명암을 최대한 사용한 것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창의력이다.

 

 

 

 

베로키오의 <다비드 상> 1465년.

연약한 어린아이가 거인을 이겨냈다.

약한 사람도 재치를 발휘하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는 테마는 메디치 가문의 상징이었다.

메디치 가문은 다비드 상을 세 번이나 주문했다. 코시모가 주문한 도나텔로의 다비드, 로렌초가

주문한 베로키오의 다비드, 그리고 후에 미켈란젤로가 제작해 오늘날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다비

드 상 등이다. 도나텔로가 만든 다비드 상은 하늘에서 사뿐히 날아온 천사처럼 가볍고 날렵하다.

마치 말이 땅을 디디지 않고도 공중으로 뜰 것 같다. 다비드의 표정도, 이 세상 사람 같지 않게 맑고

경쾌하다. 반면, 베로키오가 만든 다비드 상은 묵직하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간의 모습 그대

로다. 부드러운 곡선만으로 우아하게 처리된 도나텔로의 다비드 상과 달리 베로키오의 다비드 상은

근육 하나하나, 갈비뼈 하나하나가 땅을 밟고 서 있는 이 세상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죽은 골리앗의 얼굴도 일그러진 괴물의 얼굴이 아니라, 단지 기골이 장대한 보통 사람의 얼굴이다.

특히 다비드 허벅지 위의 가죽 옷이 살짝 접힌 부분에서 베로키오의 뛰어난 기술이 엿보인다.

 

 

 

 

만테나의 <예수의 세례>

 

 

 

 

베로키오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예수의 세례> 1472 - 1475년.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는 예수의 모습은 르네상스 미술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재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만테냐 등이 모두 비슷한 구도로 그렸다.

그러나 베로키오의 그림에서는 네덜란드식 울퉁불퉁한 땅과 그가 만든 다비드 상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의 거친 골격이 특징적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그의 그림 옆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천사들의 살과 옷에서 퍼지는 연기 같은 빛과 질감 등이 베로키오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모양.

베로키오는 이 그림을 마지막으로 붓을 꺾고 다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림의 배경에서 연기같이 뿌연 풍경이 보인다.이것은 레오나르도 특유의 스타일인데,

이 그림과 앞서의 레오나르도의 풍경 스케치를 비교해 보면

또 다른 재미를 느낄수 있겠다.

 

 

 

 

 

 

 

 

인용: 조승연 · 앤드스튜디오 著 <르네상스 미술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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