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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역사속의 장군들 II

스웨덴왕국군과 신성로마제국군이 맞붙은 뤼첸 전투(1632년,부분)는 지휘관이 당할 수 있는 위험이

여실히 드러난 사례였다. 오스트리아 기병대장 파펜하임 장군은 포탄을 맞고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뒤 아군 대열 오른쪽에서 벌어진 기병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스웨덴 국왕 구스타부스 아돌푸스가 이끈

보병대는 가운데에서 오스트리아 주력군과 맞붙지만, 고전을 면치 못했다. 아돌푸스는 팔에 총을 맞은

체 병사들을 독려했으나 혼전중에 세 차례 총상을 입고 전사했다. 전투는 오스트리아군이

퇴각하면서 막을 내렸다.

 

 

 

제국과 혁명의 시대

 

나폴레옹이 휘하 장군들을 이끌고 행군하는 모습(19세기 프랑스 화가 에르네스트 메소니에 작품).

나폴레옹은 자발적인 군대에 의한 신속하고 단호한 작전행동을 고안함으로써 군사작전 발전에 기여했다.

(그것은 특히 일련의 교전이 이루어지는 와중에 적을 고립시킨 뒤 허를 찔러 무찌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역량은 전투를 향한 뜨거운 열정에 미치지 못했다.

 

 

 

 

에르난도 코르테스

아스텍제국을 멸망시킨 스페인의 신대륙 정복자

 

"아스텍족이 제국을 지키려고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그들의 씨를 완전히 말려버려도 된다고, 아니 그렇게 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에르난도 코르테스의 실물을 묘사한 화상을 보고

이탈리아 화가 크리스토파노 디 파피 델알티시모가 그린 초상화.

(코르테스는 그림 수집가인 파올로 조비오 주교에게 직접 자신의 화상을 보냈다고 한다).

 

코르테스가 베라크루스에 도착해 모텍소마 사절로부터 영접받는 과정이 묘사된 작자 미상의 17세기 멕시코 그림.

이 그림은 여덟 개의 연작 가운데 하나이며, 현재 미국 워싱턴 소재 의회도서관 에이 키슬락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다.

 

1519년, 코르테스와 원주민 동맹군은 멕시코 만 해안에서

아스텍제국의 수도 테노치타틀란까지 행군했다.

 

아스텍제국의 수도 테노치타틀란의 함락 장면을 그린 상상도.

17세기 후반 어느 멕시코 화가가 그린 여덟 개 연작 가운데 하나이다.

 

 

 

 

프란시스코 피사로

잉카제국의 파괴자

 

"피사로가 천을 들어 올렸다. 그것은 잉카인들에 대한 공격신호였다. 잉카인들은

칸디아가 총을 쏘자 처음 듣는 총소리에 놀랐지만, 정작 말을 보고 더 놀랐다."

페드로 시에사 데 레온(스페인의 신대륙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초상화 (작자 미상)

 

카하마르카에서 잉카제국 황제 아타우알파가 사로잡히고 수만 명의 군중이

학살당하는 모습을 상상한 테오도르 드 브리의 16세기 그림

 

세 차례에 걸친 피사로의 원정은 1524년에 오늘날의 콜롬비아 지역을 소규모로 약탈한

것에서 출발했다. 2년 뒤, 피사로 일행은 그보다 더 남쪽까지 향해했다. 두 번째 원정은

엄청난 양의 황금을 지닌 미지의 문명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낳았고, 결국 그곳을

정복하가 위한 더욱 조직적인 세 번째 원정으로 이어졌다.

 

 

 

 

셀림 1세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정복한 오스만제국의 위대한 지도자

 

"술탄에게 이 세상은 너무도 좁다!"

 

1512년에 있었던 셀림 1세의 즉위식.

콧수염을 기른 술탄의 모습이 깃털이 꽃힌 큰 터번 때문에 더욱 커 보인다.

턱수염을 기른 신하들의 공손한 인사를 받는 모습으로 보아 셀림 1세가 상황을 완전히 장악한 듯 보인다.

 

셀림 1세 치세의 오스만제국. 오스만제국의 영토확장 방식에서는 술탄의 전략적 목적을

엿볼 수 있다. 셀림의 치세 말기에 이르러 오스만제국의 영토는 마치 거대한 야수가

유럽 대륙을 집어삼킬 듯 입을 벌린 모양과 닮아 있었다.

 

 

 

 

 

슐레이만 대제

헝가리를 정복한 오스만제국의 위대한 술탄

 

"낮이든 밤이든 언제나 내 말에는 안장이 얹혀 있고 내 칼은 출전을 기다린다."

 

이탈리아 화가 티치아노의 작품을 모사한 이 초상화에서는 슐레이만이

젊음이로 표현되어 있다. 비록 실물을 보고 그린 듯 보이지만, 티치아노는

슐레이만을 직접 만난 적이 없었다. 슐레이만은 말년에 이르러 귄위의

표시로 턱수염을 길렀다.

 

1529년 슐레이만의 오스만제국군에게 포위당한 비엔나의 1530년 모습.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를 뺏는 데 실패하면서 오스만제국은

유럽 중부로의 진출을 멈추어야 했다.

 

1566년 슐레이만 대제가 세상을 떠났을 때의 오스만 제국.

 

 

 

 

 

카를 5세

이탈리아 전쟁을 치른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자

 

"나는 하느님에게는 스페인어를, 여자에게는 이탈리아어를,

남자에게는 프랑스어를, 내 말에게는 독일어를 쓴다.

 

카를의 정신적 시야는 여러 측면에서 중세말기에 머물렀지만,

후기 르네상스 양식을 따르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마치 로마황제처럼 묘사할 때가 많았다.

스페인의 여러 작가들과 선전자들, 그리고 카를의 일부 측근들은 그의 치세를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고 유럽의 통일과 평화를 성취할 수 있는 역사적인 기회로 여겼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의 치세에는 국민국가가 출현하고 종교전쟁이 발발했다.

 

카를의 군사적 경력은 신성로마제국의 독특한 지리적 특성에 큰 영향을 받았다. 신성로마제국은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분열도어 있었고, 특히 프랑스는 신성로마제국에게 포위된 듯 느끼며

적의를 품고 있었드며, 남쪽과 동쪽에서는 오스만제국이 점점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그가 수십

년 동안 전쟁을 치른 뒤 동생 페르디난트와 아들 펠리페에게 제국의 지배권을 나누어주기로

결정한 것은 제국의 난감한 지정학적 상황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제국에는 아메리카 대륙의 새로운 영토도 포함되어 있었다.

 

기사를 소재로 삼은 역사상 가장 큰 초상화 가운데 하나.

티치아노는 카를 5세를 스페인 지휘관의 붉은 현장(縣章)을 맨 채 뮐베르크의 이교도들과

싸우기 위해 말을 타고 가는 가톨릭 전사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해질녘의 하늘은 황제가 지난날의 힘들었던 세월 끝자락에 있음을 암시한다.

(실제 전투는 아침과 낮에 벌어졌다)

카를은 뮐베르크에서 용감하게 싸웠지만 이미 통풍(痛風)에 시달리는 중년이었다.

 

 

 

 

 

바부르

북부 인도를 지배한 무굴제국의 시조

 

"지배욕이나 정복욕이 있는 사람은 일이 한두 번 잘못되는 것을

느긋하게 지켜보지 못한다."

 

인도 무굴제국의 시조 바루르.

그는 티무르와 칭기즈칸 같은 조상들의 업적에 버금가는 제국을 세우기 위해

20여 년 동안 피땀을 흘렸다. 그가 남긴 회고록에는 그의 악착같은 의지와

비상한 지적 소양이 담겨 있다.

 

바부르는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에서 제국의 부흥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카블에 교두보를 확보했다. 1519년부터 그는 인도를 상대로 몇 차례 탐색전을 펼쳤고,

인도 내부의 아프간계 술탄 이브라힘 로디에 대한 반감을 이용해 전면공격을 감행했다.

그는 1526년 4월의 파니파트 전투와 1527년 3월 카누아 전투를 거쳐 힌두스탄을 점령했다.

 

 

 

 

 

악바르

무굴제국의 실질적 창건자

 

"모름지기 군주는 이웃나라들이 반기를 들지 못하도록 항상 정복에

몰두해야 한다."

 

악바르는 바부르부터 아우랑제브(1658~1707년)까지의 무굴제국 황제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다.

세력을 강화하고 확장한 그는 티무르를 거쳐 칭기즈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제국의 뿌리를 깊이 인식

하고 있었다. 이 그림에서 그는 아들 자한기르가 지켜보는 가운데

황제의 관을 손자인 사자한에게 건네고 있다.

 

악바르 치세에 무굴제국은 서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의 헬마드 강에서 동쪽으로는

생골의 브라마푸트라 강까지, 남쪽으로는 데칸 지방의 고

다바리 강에서 북쪽으로는 히말라야 산맥까지 뻗어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의 통일 위업을 달성한 장군

 

'소자 9월쯤 명나라를 정복할 것 같습니다. 그대 명나라 도읍지에서 열릴

중양절 축제에 입을 옷을 선물해주십시오."

 

마치 생전에 그린 것 같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초상화는 그가 죽은 직후에 그린 것이

많았다. 이 초상화는 1608년에 세상을 떠난 화가 카노 마쓰노부가 그린 것이라고 한다.

 

 

 

 

 

 

 

샤 아바스 1세

이란을 강국으로 만든 사파비 왕조의 샤

 

"너희가 쿠라산을 내 신하들에게 넘겨주면 화친을 맺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꺼이 싸울 것이고, 치열한 싸움에 목말라 이라크에서 나타날 것이다. 너희와 내가 서로

마추칠 때마다 신이 우리를 갈라놓을 것이다.

 

무굴파 화가 바쉰 다스가 그린 아바스 1세의 초상화.

무굴파 미술의 주요 미학적 목표는 객관성이었다.

 

바스 1세와 우즈베크족 사이의 대결을 묘사한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 사이의 프레스코화.

(사파비제국의 수도 이스파한의 키힐 소우톤 궁전 소장)

 

 

아바스 1세는 군제를 개혁했을 뿐 아니라 뛰어난 지략으로 군대를 이끌었다.

그의 치세에 사파비제국의 영토는 크게 확대되었다.

 

 

 

 

 

 

구스타부스 아돌푸스

30년 전쟁 때 스웨덴군을 이끈 위대한 지휘관 겸 국왕

 

"원컨대 러시아인들이 저 작은 시냇물을 건너기 어려워하게 하소서."

러시아인들을 발트 해에서 몰아낸 뒤

 

구스타부스 아돌푸스는 17세 나이에 스웨덴 국왕이 되었다.

마테우스 메리안이 그린 이 그림은 아돌푸스의 말년 모습이다.

그는 풍부한 경험과 노련한 정치적, 행정적 감각을 바탕으로

스웨덴의 자원을 전쟁에 동원했다.

 

신성로마제국 영역에서 전역을 수행할 무렵 아돌푸스는 이미 지난 20녀 년 동안 끊임없이

전투 경험을 쌓았고, 약 7만 2,500명의 막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튀렌

루이 14세 시대의 프랑스 육군 원수

 

"공성전은 드물지만, 소규모 접전을 잦다."

 

샤를 르 브륀이 그린 튀렌의 초상화(1665년 작품)

 

 

튀렌은 17세기 유럽 북서부 지역에서 벌어진

여러 전투에서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올리버 크롬웰

청교도 혁명 때 왕당파를 물리친 장군

 

"정직한 소수가 부정직한 다수보다 낫다."

 

1640년경 코머스 위크가 그린 크롬웰의 초상화.

크롬웰이 두각을 나타내기 전이었지만, 이미 사령관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크롬웰은 영국과 아일랜드 곳곳에서 전역을 펼치면서 의회파 정권을 수호하고

영국 제도 전체에 대한 통치권을 확립했다.

 

로버트 워커가 1649년경에 그린 크롬웰의 초상화.

당시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전성기를 구가한 크롬웰이 오른손에 총

사령관의 상징인 지휘봉을 들고 있다.

 

 

 

 

 

 

얀 소비에스키

비엔나에서 오스만제국군을 물리친 폴란드 왕

 

"왔노라, 보았노라, 그리고  하느님이 승리하셨노라."

 

폴란드 중장기병대 사령관 복장을 갖춘 소비에스키의 초상화(작자 미상)

원형 금속판을 서로 연결해 만든 흉갑은 17세기 후반 부유한

폴란드 기사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소비에스키가 다스린 폴란드 · 리투아니아 연방은 오스만제국과 국경을

나란히 했다. 오스만제국과의 싸움은 그가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을

입증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표트르 대제

대북방 전쟁에서 스웨덴군을 무찌른 러시아 황제

 

"자비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는 승리를 안겨주셨음을 선언하노라."

 

영국화가 고드프리 넬러 경이 그린 표트르 대제 초상화.

 

표트르는 러시아를 개혁하는 한편, 1696년에 전략적 요충지 아조프를 점령함으로써 남쪽으로의

진출을 꾀했다. 18세기 초 그는 러시아를 침입한 스웨덴군에 초토화 전술로 대응하면서

레스니야와 폴타바에서 승리를 거두었다(폴타바 전투는 그가 거둔 최대의 승리이기도 하다).

한편 오스만제국과의 전쟁은 1711년에 프루스 강에서 러시아군이 패하면서

치욕스럽게 막을 내렸다.

 

폴타바 전투를 묘사한 다소 정형화된 그림(부분) 이기는 하지만 고도로 훈련된 군인들이 화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택한 대형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포연이 가득한 혼란한 상황 속에서도

각 전투단위가 정해진 대열을 유지하는 것이 승리의 필수요건이었다.

 

 

 

 

 

말버러 공작

블렌하임 전투에서 승리한 영국 장군

 

"(프랑스) 장군들을 모두 합쳐도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파커 대위

 

아드리아엔 판 데르 베르프가 그린 말버러 공작 존 처칠의 초상화.

윈스턴 처칠은 네 권짜리 전기에서 조상인 존 처칠의 업적을 이렇게 요약했다.

"이기지 못할 싸움은 하지도 않았고, 빼앗지 못할 요새는 포위하지도 않았다.....

그는 이길 수 없는 전쟁은 깨끗이 포기했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당시 반(反) 프랑스 동맹은 지휘권을 둘러싼 상당한 진통을

겼었는데, 특히 서로 작전을 조정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꼈다.

 

유명한 전쟁화가 존 우턴이 그린 블렌하임 전투(부분).

그는 컬로든 전투를 승리로 이끈 컴벌랜드 공작 윌리엄의 후원을 받았다.

 

"부디 여왕 폐하께 내 충성심을 알려드리고 폐하의 군대가 영광스런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을 전해드리기 바란다. 지금 탈라드 경과 다른 두 명의 적장이 내 손에 있다."

말버러 공작, 블렌하임 전투 직후

 

 

 

 

 

프리드리히 대왕

오스트리아군은 격파한 프로이센 왕

 

"모든 것을 막는 자는 아무것도 막지 못한다."

 

 무명화가가 그린 노년의 프리드리히 대왕 초상화.

1777년 12월, 너새니얼 그린 장군은 조지 워싱턴에게 필라델피아의 영국군을

공격하지 말도록 설득하면서 프리드리히 대왕을 '오늘날 가장 훌륭한 장군'으로 평가했다.

그 무렵 프리드리히 대왕은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장군이었고,

군사문제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그가 수행한 여러 전역을 연구했다.

 

프로이센은 지리적으로 동쪽의 러시아, 남쪽의 오스트리아, 남서쪽의

프랑스 등에게 공격받기 쉬운 위치에 있었다.

 

 

 

 

나데르 샤

18세기 이란의 왕이자 위대한 전사

 

"이란과 투란의 모든 반역자들에게 목줄을 채워줄 것이다."

 

 

나데르 샤는 사파비 왕조가 빼앗긴 이란 영토 대부분을 단기간에 수복했다.

 

 

 

 

건륭제

영토 확장에 몰두한 청제국 황제

 

"군대는 백 년 동안 한 번도 동원하지 않을 수 있지만,

군사들은 하루라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건륭제는 친히 싸움터에 나선 적이 없었지만, 전쟁과 군사 현황에 촉각을 곤두세웠고, 제국의

군사력을 과시하는 행사를 자주 열었다. 이 그림은 건륭제가 군대를 사열하는 모습이다.

오늘날 미술작품 편람에서 티셔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복제된 이 그림은

청제국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륭제는 특히, 서쪽에서 영토를 크게 넓혔다.

그는 스스로를 '십전노인'으로 칭했다.

 

 

 

 

조지 워싱턴

독립혁명을 승리로 이끈 미국의 초대 대통령

 

"오로지 조국을 위해 일하느라 머리는 백발이 되었고 눈은 거의 멀었다."

 

찰스 윌슨 필의 1779년 그림 <프린스턴의 조지 워싱턴.

빼앗은 적군 대포에 손을 짚고 있는 대륙군 총사령관 조지 워싱턴의 발 근처에 적군 깃발이 보인다.

1776년과 1777년 사이 겨울에 펼친 전역을 통해 그는 꺼져가는 독립혁명의 불씨를 살리는

동시에 가장 중요한 인물로 부각되었다.

 

워싱턴은 여러 차례 전역에서 특유의 용맹함과 신중한 전술의 조화를 이룸으로써

병사들의 사기저하 문제를 극복했다. 그는 대륙군을 고도의 전문성을

갖춘 직업군대로 탈바꿈시켰다.

 

앙리 판 블라렌베르그가 루이 16세를 위해 목격자의 설명과 스케치를 바탕으로 1781년의 요크타운 전투

광경을 묘사한 작품이다. 워싱턴이 이끈 프랑스군과 대륙군은 프랑스 해군의 지원을 받아 콘월리스가 이끈

영국군을 요크타운에 고립시킨 뒤 포위작전에 돌입했다. 프랑스와 미국 연합군은 요크타운의 동쪽 방어선을

목표로 삼고 두 개의 대열로 평행선을 이루어 접근하면서 포격을 가했다. 1781년 10월 14일, 연합군이 야간

기습을 통해 요크강에서 가장 가까운 요새 두 곳을 점령해 두 번째 평행선을 완성함으로써 사실상

영국군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인용 : 제레미 블랙 著 <역사를 바꾼 위대한 장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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