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490년 피렌체의 모습, 이탈리아 피렌체
'꽃의 도시'라는 뜻의 피렌체,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드 같은 르네상스 최고의 예술가들이 활동한 무대.
이곳은 서양 미술의 탄생지라고 불리며 르네상스의 중심지였다.
오늘날까지 수백만 명의 관광객들이 미술품을 보러 몰려든다.
상), 조토 디 본도네 / 1315? - 1375년
피렌체 출신의 중세기 화가이다. 모든 그림을 평면, 색채와 선으로 생각하던 중세 비잔틴 양식을 거부하고
입체성과 볼륨을 강조하 최초의 '이탈리아식' 화가로 불리운다. 화가로서 뿐 아니라, 대성당의 종탑과 피렌체의
유명한 다리인 '옛 다리'의 건설자로도 유명하다. 대표작으로는 이탈리아 중부 작은 도시 아시시에 자리잡은
성 프란체스코 교회의 벽화와, 베네치아 근교 파도바라는 도시의 스크로베니 카펠라 벽화 등이 있다.
하), 도나텔로가 조각한 칸토리아(성가대 베란다) / 1433 - 1438년.
서로 엉겨서 춤추고 노는 통통한 아기들의 모습이 조각돼 있다. 이처럼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품에는 '푸토(Putto)' 라
불리는 포동포동한 아기들이 많다. 이것은 새 세상을 기원하는 소망이 미술품을 통해 표출되는 것이다. 유럽의 희망,
이것이 도나텔로의 조각네 적용된 것이다. '르네상스'는 바로 "다시 태어나다" 라는 뜻이다.
피렌체 최고의 부와 권력을 소유한 가문은 르네상스 예술의 후원자였던 메디치 가문이다.
메디치 가문의 가장 코시모는 피렌체에서 가장 뛰어난 조각가 도나텔로를 궁으로 부른다.
조각가는 육체 노동을 하는 천한 계층으로, 당시 고귀한 사람과는 밥상도 같이 하지 않던 시대이다.
그렇다면 코시모는 도나텔로를 왜 궁으로 초대했을까?
젊음의 분수가 있는 사라아의 정원 / 15세기, 이탈리아 모데나.
에스테 공작 도서관에서 발견된 「보카치오 소설 삽화」중 하나이다.
인생의 고통 없이 기쁨만 있는 환상적 '희락의 정원'은 당시 아랍과 유럽 문학의 주요 테마였다.
그림 아래쪽에 '루트' 라는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가 입고 있는 양쪽 다리 색이 다른 스타킹은 당시의 멋쟁이들이
선호하는 최신 패션이었다. 음식 테이블 아래로는 납작하고 목이 짧은 물병이 보인다. 이것은 '순례자의 물통'
이라고 불리는 당시 유행 악세서리로, 멋쟁이들이 항상 들고 다니던 것이다.
프랑스 예술가 자크 칼로의 판화 / 1616년
크르네발레 때 사람들이 흔히 분장하던 케릭터들의 모습이다.
특히 야한 농담으로 인기를 끌던 광대들의 의상을 많이 사용했다.
뒤로는 가면으로 분장한 시민들이 춤을 추며 노는 장면이 보인다.
'꽃의 성모 마리아' 라는 이름의 피렌체 대성당.
르네상스 미술사에 관심있다면 제일 먼저 알아야 할 건축물이다.
세계 미술 애호가의 순례지, 수많은 소설과 영화 속에 낭만의 무대로 등장하는 곳.
부루넬레스키의 돔 / 1420 - 1436년, 이탈리아 피렌체.
브루넬레스키가 지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의 바실리카 전경.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는 피렌체의 지붕이다.
오리지널 설계 디자인은 세계에서 가장 큰 대성당이었지만 건설되면서 규모가 많이 줄어들었다. 1296년 착공
되었고 1418년까지도 돔 건설은 건축 사상 가장 유명한 난제로 남아 있었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는 혁명적인
팔각 돔 형태를 구상해 결국 1436년 완공시킨다.
도나텔로의 청동 다비드 / 1435 - 1440년, 이탈리아 피렌체.
도나펠로의 다비드상은 두 가지 큰 의미가 있다. 첫째 이때부터 청동이 조각의 주요 재료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대다수의 조각이 청동 재질이었다. 그러나 중세기에는 금 공예과 돌 조각에 밀려
청동상이 제작되지 않았다. 청동은 다루기 힘들고 식는 동안 갑자기 수축돼 깨지거나, 증기가 폭발하기 쉽다.
그러나 이 시기, 잦은 전쟁으로 대포 만드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청동 다루는 기술도 향상됐고 도나텔로의 청동을
시작으로 청동이 조각의 주요 재료로 부활한다. 둘째 누드의 출현이다. 엄격한 기독교 교리에 따라 사람의 몸을
부정적으로 보던 관습 속에서 과감히 누드를 그린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사람 몸을 자연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여기던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문학을 많은 사람들이 읽기 시작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어린 아이의 나체이지만 정신에 비해 몸이 얼마나 빈약한지를 강조했다.
그러나 나체가 예술 소재로 등장한 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다.
도나텔로는 전투 모습이 아니라, 승리 직후의 모습을 표현했다.
어린 다비드가 딛고 선 골리앗의 머리 크기는 다비드가
얼마나 큰 역경을 이겨냈는지를 상징한다.
오늘날 미술 애호가들에게 르네상스의 불을 지핀 선구자가 누구냐고 물으면 건축의 브루넬레스키,
조각의 도나텔로라고 말할 것이다. 르네상스의 불을 제대로 피우려면 화가도 필요한 이 시점,
한 미스터리한 시골 청년이 보따리 하나만 짊어지고 피렌체에 나타나는데 그가 곧 마사초라는 인물이다.
사세티 카펠라, 이탈리아 피렌체.
브루넬레스키와 도나텔로의 십자가 / 1420년경, 이탈리아 피렌체
도나텔로가 조각한 목각 예수상(上)은 지금까지 성 십자가 성당에,
브루넬레스키의 목각 예수상(下)은 새 성모 성당에 보존되어 있다.
설명 없이도 두 작품을 나란히 놓으면 어색하고 거친 도나텔로의 표현과.
감정을 잘 표현한 프루넬레스키의 실력 차이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듯.
마사초, 브랑카치 벽화 중 「테오필로스 아들의 부활」/ 1426 - 1427년, 이탈리아 피렌체.
마사초는 이 벽화에서 처음으로 평면 뒤로 실제 공간처럼 이어지는 소실점 기법을 사용한다.
바닥과 벽을 선으로 이용해 마치 무대 위의 공간처럼 꼭 막힌 공간을 만든 것이 당시로서는
지금 벽화 오른쪽 군중 속에 섞인 브랑카치의 얼굴은, 정치적 안정이 이루어진 후,
교회 관계자들이 복원 공사를 한 것이다.
브루넬레스키의 피렌체 세례당 문 대회 출품 / 1402년, 이탈리아 피렌체.
1402년 브루넬레스키가 출품한 이 작품은
처음으로 소실점과 원근법을 제대로 응용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신께 바치기 위해 칼을 내리치려는데 천사가 날아와 칼을 멈추는 장면이다.
그의 라이벌 로렌초 기베르티의 작품보다 움직임이 훨씬 활발하다.
칼을 쥔 아브라함의 팔과 불쌍하게 몸을 구부리고 있는 이삭,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아브라함의 손을 멈추는 천사의 움직임이 매우 동적이다.
그림 좌측 하단을 보면, 양치기가 발에서 가시를 뽑고 있는 장면이 보인다.
이것은 로마 시대의 유명한 작품 「가시 뽑는 자」라는 조각품을 응용한 것이다.
이 작품은 오늘날까지 로마에 남아 있는데, 1402년에 브루넬레스키가
이 작품을 응용했다는 것은,그가 유학을 떠나기 전에 이미
로마 조각품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도나텔로의 시에나 세례반 장식용 동판 / 1415년, 이탈리아 시에나
기베르티와 도나텔로가 함께 작업한 피렌체 세례당의 청동 문은 수십 개의 평면 작품이 짜맞춰져 있는
전통적인 디자인의 작품이다. 이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헤롯의 향연」이다. 로마 시대의 건축물들이
소실점을 이용한 원근법으로 표현되어 있다. 음악가들과 하인들의 두상이 로마 동전처럼 측면으로 표현
되어 있다. 요한의 머리를 가지고 오는 하인을 중심으로 놀란 헤롯과 손님들이 고개를 젖히고 있는 모습에
서 끔직한 상황이 느껴진다. 그러나 테이블 오른쪽에 몸을 기대고 있는 젊은 여성 살로메가 보인다. 투명한
옷을 입고, 히프에 힘을 준 채, 발 끝을 살짝 든 살로메의 유혹적인 모습이 인상적이다. 끌 자국 몇 개로
여인의 매혹을 묘사할 수 있는 것이 도나텔로의 특별한 재능이다.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의 「아기 예수를 섬기는 동방박사」/ 1423년, 이탈리아 피렌체.
젠틸레는 고딕 양식의 최고봉을 자랑하는 화가였다. 당시 프랑스 미술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그 첫째는 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을 화면에 가득 그리는 것이었다. 젠틸레의 그림 한 구석에는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배에서 내린 군중들이.
그림 아래쪽에 있는 아기 예수가 보이는 곳까지 꼬불꼬불 산길을 타고 행렬을 짓는다. 한명 한 명, 어찌나 섬세하게 묘사
했는지 그 많은 군중을 각기 다른 얼굴과 표정으로 표현했다. 당시 프랑스 화가들의 또 다른 특징은 의관을 금빛 나는
물감으로 그리는 것이었다. 배경 전체를 금색으로 칠해 촛불이 비치면 그림이 떨리는 효과를 내는 것이 그들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원색을 피한 부드럽고 고급스런 파스텔 톤의 색채가 이 그림에 잘 드러나 있다.
도나첼로와 브루넬레스키의 지혜와 재능은 어디에서 왔을까?
1402년 미래의 거장이 될 두 젊은이가 유학을 떠났다. 그들은, 모든 예술가들이 유학을 가는 파리를 향해
북쪽 길로 간 것이 아니라 정 반대 방향인 남쪽, 즉 로마로 발길을 옮겼다.
필리포 부루넬레스키의 죄 없는 자의 쉼터(고아원) / 1419, 이탈리아 피렌체
이건물의 앞 부분은 질서 정연한 로마식 아치 형태이다. 그리고 그리스 로마식으로 머리를 장식한 기둥을 사용했다.
이런 단순하고 질서정연한 디자인은 부루넬레스키 디자인의 특징이다. 수직적 라인과 복잡한 원형으로 얽힌 당시
유행하던 프랑스 고딕 디자인과 단조롭고 검소한 로마 스타일의 대조가 재미있다. 브루넬레스키는 로마를 숭배하지만
이를 잘 알지 못하던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그러한 건축 양식을 부활시켜 큰 감동을 주었다. 그때부터 이탈리아에는 로마
붐이 일어, 고대 로마에 관한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이 책들은 고대 문화의 부활을 이룬 르네상스의 주춧돌이 된다.
마사초의 브랑카치 예배당 벽화 중, 「세금을 내는 베드로」/ 1426 - 1427년, 이탈리아 피렌체.
벽 뒤로 깊숙히 파고 드는 것같은 공간감은 미술을 모르는 사람이 봐도 쉽게 느낄 수 있다. 그림 속의 흐릿한 노란색,
파란색, 청색 등의 차갑고 은은한 색채는 당시 이탈리아 미술의 특징이다. 사람처럼 복잡한 물체는 원근법을 적용하기
어려워 인물들이 기하학적 물체처럼 딱딱하지만, 그 무게감과 움직임의 밸런스를 맞춘 것은 마사초의 특징이다. 예수의
제자 베드로의 삶 중에서 제일 유명한 「테오필로스 아들의 부활」로 베드로가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기적을 행하는
모습이다. 바닥을 바둑판 모양으로 처리해 원근법을 개선한 흔적이 남아있다. 사람을 공간 속에 물체로 표현하는 거도
마사초가 시작한 르네상스 미술의 특징이다.
마사초의 삼위일체 / 1425년, 이탈리아 피렌체
공간을 마음대로 나눌 수 있게 된 마사초는 이 그림에서 공간을 깊이에 따라 4등분 했다.
바깥 공간에는 기도하는 후원자의 모습을 그리고 가장 깊은 공간에는 기도하는 성모 마리와와 세례 요한을,
그리고 더 깊은 공간에는 더 깊은 공간에는 예수 위에 손을 벌리고 있는 성부를 그렸다. 그는 군중의 공간
뒤로 그림의 공간이 연장된다는 놀라운 생각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당시로서는 공간을 몇개의 깊이로
명확하게 나눈다는 것 자체가 혁명적이었다. 이 공간은 브루넬스키식 로마 건축물 모티브가 된다.
로마에 있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선문 디자인을 본따, 가운데는 큰 실린더 형 아치를, 옆에는
그리스, 로마식 기둥을 그린 것이 흥미롭다. 그림 아래로는 해골관이그려져 있다.
관 위에 해골을 조각하는 것은 프랑스의 '트란지' 전통에서 온 것이다.
시체 위에는 이탈리아 고어로 이렇게 적혀있다.
"나도 한 때 너희와 같은 것이었고, 너희도 나중에 나와 같아질 것이다."
마사초의 피사 성당 제단화 / 1426년, 이탈리아 나폴리
제단 위에 올려놓고 기도하기 위해 만든 이 그림은, 고딕식 금 배경으로 처리했다. 피사의 한 성당을 위해
그림은, 원근법이 적용되지 않았다. 마사초의 업적을 말할 때 원근법에 치중하지만, 이 그림에서는 전혀
다른 것을 느낄 수 있다. 이전까지 종교적인 그림에서는 신학적 체계로 정리하는 게 상례였으나
이 그림에서는 예수의 고통스런 모습이 표현되었음을 볼 수 있다.
로마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 서기 300년대.
이렇게 호화로운 교회에서 목욕도 하지 않은 순례자들이 바닥에서 잠을 잤다는 것이 현대 방문자에겐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이 건물은 서기 300년대에 세워진 몇 남지 않은 로마시대 건물이다.
마솔리노의 큰 성모 성당 제단화 / 1428년, 이탈리아 로마.
마솔리노의 제단 장식용 그림에는 '큰 성모 성당'이 세워지게 된 일화가 묘사되어 있다.
이 교회는 서기 360년 경,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로 승인되었을 때, 로마의 여신 시빌레
(예수 탄생 이전에 메시아의 출현을 예고했던 고대의 무녀)에게 바쳤던 신전을 성당으로 개조한 건물이다.
전설에 의하면, 서기 358년 성모 마리아가 교황 눈 앞에 나타나 이곳에 교회를 지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밤새 눈이 내려 성모가 원하는 교회의 모습대로 땅에 쌓였다고도 한다. 이 그림에서는 밤에 내린 교회 모양의
눈을 따라 땅을 고르는 교황의 모습이다. 위로는 예수와 성모 마리아가 구름을 타고 나타나 눈이 내리게 하는 장면이다.
마사초가 로마에서 독살당해 죽은 것은 미술사의 큰 미스터리 중 하나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설이 있다. 바사리는 그의 재능을 질투한 라이벌 화가가 죽였을 것이라고도 한다.
브랑카치 가문의 정치에 너무 깊이 관련되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부루넬레스키의 산 로렌초 성당 성구실 / 1421년, 이탈리아 피렌체
산 로렌초 성당의 성구실은 꼭 알아야 할 작품이다. 이 건축물은 미켈란젤로가 수 십 년 후에 지을
'새 성구실'과 비교해 '옛 성구실' 로 불린다. 1421년에 짓기 시작한 이 건물에는 당시 귀족들의 취향처럼
벽화나 장식이 없으며, 도나텔로에게 부탁해, 입구의 문만 초기 로마시대의 지붕과 같은 삼각형으로 조각했다.
성모 마리아와 예수의 제자 상을 조각해 원형 메달에 집어넣어 돔의 팔각형과 건축물의 사각형을 잇는 이음새를
깔끔하게 마무리를 했다. 그 아래 황금 6각형에 주사위 같이 점이 찍혀 있는 것은 메디치 가문의 문장이다. 이것은
평민들 편으로 알려진 메디치 집안이 대중의 눈이 두려워 카펠라 건축은 꺼렸지만, 이 성당을 사실상의 카펠라로
사용하기 위해 지었음을 보여준다. 이때부터 가운데에서 시작해 십자가 모양으로 뻗어나오는 복도의 길이가
모두 같은 비율로 지어진 '그리스 십자가' 건축물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아래쪽이 더 긴 십자가 모양인
'라틴 십자가' 건축물을 제치고유행하기 시작한다.
브루넬레스키의 파치 카펠라 (외부0 / 1444년, 이탈리아 피렌체
파치 카펠라 역시 꼭 알아야 할 작품이다. 문 앞에는 '죄 없는 자들의 쉼터(에전에 그가 지은 고아원) 건물처럼
기둥과 지붕으로 일종의 베란다를 만들고, 그 가운데에 조그마한 돔을 올려, 건물 한 가운데의 큰 돔과 조화를
이루게 했다. 입구는 반원형으로 파서, 그 곳이 입구임을 강조하고 좌우 대칭을 강렬하게 표시했다.
인테리어는 로렌초 성당과 같은 디자인을 사용했다. 그러나 층과 원과 사각형의 수를 대폭 늘려
그동안 짓던 어떤 건물들보다 훨씬 복잡하지만 깔끔하고 간결하게 처리해 극찬을 받았다. 큰 돔 아래를 도나텔로의
원형 조각으로 장식한 것도, 그 돔이 기둥으로 내려오는 둥근 부분에 파치 가문의 문장(5개의 십자가와 2마리의 물고기
가 그려진 8각형 문양)까지 산 로렌초의 성구실을 그대로 재현한 것 같다. 작은 돔에 별자리를 그려 넣은 것도 흥미로운데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별자리에 의해 사람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큰 공사를
할 때에는 별점을 보고 시작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완공 때, 그 날의 별자리 모습을 그려 넣었다.
산 로렌초 성구실과 파치 카펠라는 르네상스 건축과 미술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모티브이다.
브루넬레스키의 파치 카펠라(내부) / 1444년, 이탈리아 피렌체.
프라 필리포 리피의 「성모 마리아 천사와 성인군자들」/ 1430년, 이탈리아 밀라노.
당시는 집이나 교회이 특정한 장소에 맞춰 그림을 주문하는 시대여서 그림이 들어갈 장소의 모양에 따라 그림의 모양이
바뀌었다. 이 그림은 뾰족한 지붕 아래 끼울 수 있도록 주문된 것이다. 그림 속 인물들의 유난히 큰 머리와, 연기자처럼
과장된 표정과 제스처는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 대량 생산되던 나무 조각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사람들의 얼굴
과 자세가 그다지 성스러워 보이지 않고 장난기로 가득한데, 이것은 아직 필리포 리피가 자신의 스타일을 찾지 못하고 여러
가지 실험을 하던 때여서 그렇다. 작가의 초기 작품을 알아둘 필요가 있겠다.
프라 안젤리코의 산 마르코 수도원 벼고하 중 「성모 마리아 대관식」/ 1441년, 이탈리아 피렌체.
134년, 프라 안젤리코는 산 마르코 수도원에 도착했다. 그는 수도원 이곳 저곳에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은 수도사들의 명상을 돕기 위해 그들의 침실에 그린 그림 중 하나이다. 예수가 승천한 어머니, 성모 마리아
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있다. 작은 눈과 코, 넓은 이마, 부드러운 곡선으로 우아해 보이는 성모마리아가 인상적이다.
이런 부드럽고 아름다운 여성상은 조금 다른 모습으로 또 다른 수도승 예술가인 필리포 리피의 그림에도 나타난다.
이것은 여자를 항상 가늘고 귀족적인 곡선으로 그리던 고딕 예술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아래로는 같은 계급인 수도사
들이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가운데 갈색 옷을 입고 끈으로 허리를 동여맨 사람은 성 프란체스코이다. 그는 명상을
너무 깊게 한 나머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고통을 몸으로 느꼈고, 이 체험에서 깨어나 보니, 손에 목 박힌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림 속에서 그의 손에 난 상처를 볼 수 있다.
프라 안젤리코의 「최후의 심판」/ 1434년, 이탈리아 피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 벽화 중 하나. 그림 한가운데는 예수의 모습이 커다랗게 그려져 있고 예수는 그를 모시고 있는 성인들
에게 둘러 싸여 하늘나라에 군림한다. 그 아래로 선택 받은 자를이 예수 오른쪽(보는 사람의 왼쪽)에 있고, 이들은 지상
낙원에 도착해 손에 손을 잡고 춤을 춘다. 저주 받은 자들은 예수 왼쪽(보는 사람의 오른쪽)으로 보내져 귀신들에게
고문당한다. 그 당시에 는 죄악을 7개로 나누어 벌을 받는다고 믿었는데 그의 그림에도 7개의 구멍이 있고, 각 구멍
마다 다른 죄를 지은 사람들이 각기 다른 형벌을 받고 있다. 이것은 서기 1100년 대 부터 모든 프랑스 교회 문 앞에 조각
되어 있던 '최후의 심판' 내용과 유사하다. 안젤리코의 초기 작품답게 원근법을 응용하기 보다, 공중에 떠 있는 모습으로
사람들의 볼륨과 투명함을 강조했다. 여러 장면들을 통해 선과 악을 양극화 시키던 당시의 종교관을 볼 수 있다.
프라 안젤리코의 <루브르 성모 대관식> 1434 - 1437년, 프랑스 파리
쟈코부스 드 보라쟁의 책 <황금 전설>에 나오는 오색의 대리석을 그림의 중심 테마로 삼았다.
군중에게 책을 보여주는 사람은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이고 예수의 발 아래 황금 향수통을 든 사람은 성 막달레나로
향수통은 예수를 따르기 이전의 방탕한 생활을 상징한다. 바퀴를 들고 있는 사람은 성 카테리나로 기독교를 옹호하다
로마 황제에 의해 바퀴에 몸이 묶여 사지가 부서져 죽은 순교자이다. 성 아그네스는 자기 이름과 발음이 비슷한 예수의
상징인 어린 양(이탈리아어: 아넬로)을 들고 있다. 모든 사람의 묘사를 위해 소실점을 높게 잡았으며,
소실점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림 가운데 부분을 높이 잡아 끌었다.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의 얼굴이 실린 메달
루카 델라 룹비아의 곷의 성모 마리아 성당 칸토리아 / 1434 - 1438년, 이탈리아 피렌체
가지런한 구도와 예쁘장한 아이들의 얼굴이 특징이다. 자세히 보변 섬세함과 부드러움으로 가득한 손색없는 작품이나,
조각을 보는 사람의 머리 수십 미터 위에 놓인다는 점은 잊은 듯하다. 현제 '피렌체 대성당 작품 박물관' 에 원래의 높이
로 설치되어 있는데, 관람자가 사람의 얼굴을 구분하기 힘들며, 조잡해 보인다. 루카는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7년의
긴 생활을 바쳤다. 총 8개의 평면 돋음 새김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요한 부분은 발코니 정면에 있는
4개의 큰 평면 조각이다.
루카 델라 롭미아의 개인용 성모상 / 1460년경
당시는 성모 마리아나 예수상이 보이는 곳에서 기도를 해야 그 기도가 신에게 전해진다고 믿던 시대였다.
이 개인용 조각상은 당시 피렌체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조르조 바사리의 옛 궁전 <피렌체의 역사 벽화 사이틀> 중
브루넬르스키가 죽은 백년 후, 바사리는 '옛 궁'에 피펜체의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들을 그렸다.
이런 그림을 통해 대성당의 완공식 때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성 비츠 성당, 프라하 대성당 / 1344 - 1420년, 체코 프라하
독일 황제 카를 4세가 프라하에 정착한 후부터, 프라하는 유럽 문화의 중심지가 된다.
특히 프랑스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은 후부터 프랑스의 고딕 스타일 예술이 화려하게 꽃핀다.
프라하의 성 비츠 대성당은 찬란했던 프라하 고딕 문화의 증거물이다. 1410년대 신학자 얀 후스는
황제와 교황이 신의 뜻을 어긴다며 종교개혁을 시도했고 이어진 격동의 시기에 성당은 미완성으로 남게 된다.
필리포 리피의 바르바도리 제단 장식 <성모 마리아와 천사와 성인군자들> / 1437 - 1439년, 프랑스 파리.
이 당시 프라 필리포 리피는 메디치에 반기를 든 가문 중 하나인 바르바도리 가문을 위해 성모 마리아상을 그렸다.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를 두 성인이 경배하는 모습을 그린 이 그림은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필리포 리피는 이때부터 마사초의 원근법과, 부드러운 옷감과 미소를 그리는 자신의 스타일을 찾은 것 같다. 그림 속에서
흥미로운 점은 후광을 마치 머리에 달린 동판처럼 처리한 것이다. 이것은 필리포 리피 후예들이 모두 따라 사용해 하나의
기법이 된다. 원근법을 이용해 만든 공간을 탁 트이게 그리던 마사초에 비해, 좁은 공간을 빽빽이 채우는 것은 필리포
리피의 특징이다. 얼굴만 너무 크게 그리던 그의 예전 그림에 비해, 이 그림부터는 인체의 비율이 잘 맞기 시작한다.
파올로 우첼로의 각진 성찬배 / 1430년경, 이탈리아 피렌체.
예술가들은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한 스케치를 많이 했다. 특히 수학적인 원근법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이 성찬배와 같은 연습 스케치가 필수적이었다. 원근법에 미친 파올로 우첼로는 복잡한 모양을
원근법으로 처리하기 위한 연구 흔적을 많이 남겼다.
파올로 우첼로의 <산 로마노 전투> 1430 - 1450년경, 이탈리아 피렌체.
3개로 이루어진 그림 세트 중 하나. 파올로 우첼로는 여기에 이어지는 다음 두 그림을 완성하는 데 20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냈다. 이 그림들은 마치 검은 공간 속에서 흰색과 빨간색 비가 뒤섞여 떨어지는 듯 무기들이 수학적
규칙에 따라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다. 그리고 부러진 창들이 바둑판처럼 가지런하게 놓여, 원근법의 소실점을
앞뒤, 위아래 등 모든 각도에서 그렸다. 그림 위 오른쪽에는 고전하고 있는 피렌체 선발 부대를 지원하려는 기마대
가 도착하고 있고, 위 왼쪽에는 창을 든 보병대가 도착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하지만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원근법의 공간이 아닌 그림의 공간 뒤에 쳐 놓은 막 위에 실로 매달아 놓은 것처럼 어색한 느낌을 준다. 아예 배경이
사라져 버린 시커먼 공간 속에는 사람도, 말도, 기하학적인 형상으로 변해 둥둥 떠 있는 것 같다. 알베르티의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다." 라는 원칙을 받아들인 후세는 이런 자연스럽지 못한 파올로 우첼로의 그림을 심하게 비평했다.
그러나 도나텔로와 브루넬레스키 조차 이해할 수 없었던 그의 그림 스타일은 수학의 신비에 완전히 미쳐버린
다음 세대에게는 큰 영향을 미쳤다.
인용: 조승연 · 앤드스튜디오 著 <르네상스 미술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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