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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탐미의 시대 유행의 발견 I

작자미상 <루브르에서의 무도회>, 1581년, 캔버스에 유채, 122×185cm, 베르샤유

 

1581년. 가을이 깊어가는 루브르 성은 아침부터 분주하다. 앙리 3세 Henry III(재위 1574~1589)의 부인인

루이 드 로렌Laudement의 여동생 마르게리트Maguerite de Vaudement와 앙리 3세의 오른팔인 주와이쥬즈

공작Duc de Joyeuse의 결혼식이 있는 날이다. 이 결혼식은 왕족과 귀족을 비롯한 각국의 대사, 고위 관리에다

악사, 춤꾼, 하인, 마부까지 합쳐 2,000명 가까운 사람들이 이틀 동안 루브르 성에서 먹고 자면서 치르는

성대한 행사이다. 관례대로 저녁 7시에 식사가 시작되었고 식사를 마친 앙리 3세가 무도회장으로 나간다.

오늘의 주인공인 신랑과 신부가 먼저 나와 그해 최고로 유행했던 춤인 '브랑슬bransle' 을 추기 시작한다.

그림은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좌) 루브르의 회랑 기둥 조각상,  우) 퐁텐블로 성의 프랑수아 1세 갤러리

 

 

 

 

좌) 코흐나탕 성의 랑브리,   우) 포도주를 만드는 모습을 담은 타피스리

 

손을 잡은 신랑, 신부 왼편에는 결혼식 무도회에 참여한 왕족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인다.

요즘 태어났다면 동성애자라고 불렸을 정도로 여성스러운 취향인데다, 지금 막 춤을 추려는 새신랑과 내연의

관계라는 소문도 있었던 앙리 3세는, 여느 그림에서처럼 금 귀걸이를 하고 방의 제일 가장자리에 앉아 있다.

옆에서 이탈리아 메디치家 출신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손가락을 들면서 이들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는 참이다.

그림에서 권력자들은 결혼식이 아니라 장례식 하객처럼 검정 일색으로 차림새가 칙칙하다.

 

벽난로는 한쪽 벽면을 모두 차지할 만큼 더이가 컸지만, 실제로 실내 공기를 그리 따뜻하게 해주지 못했다.

이때 벽면에 나무 패널을 붙인 '랑브리lambris 는 돌 벽이 품어내는 냉기와 습기를 막는 용도로 쓰이면서

널리 유행했다. 긴 복도 벽을 장식한 화려한 그림과 섬세한 조각 뒤편에는 추위에 떨던 16세기 궁정인들의

생활이 있었던 것이다. 랑브리만으로는 한기를 막기가 버거웠던지, 16세기 사람들은 겨울이 되면 랑브리

위에 벽면을 모두 가길 만큼 큰 '타피스리tapisserie' 를 걸어서 보온을 더했다. 사실 당시 공주는 자매인 다

른 공주들뿐 아니라 자기 시종들가지 데리고 한 방에서 잤다. 여기에는 남자 호위병과 기사들까지 포함된다.

한 방에 50명 남짓한 남녀가 혼숙을 한 것이다.

 

 

 

 

코르프에 귀중품을 싣고 피신하는 궁정인

 

16세기 유럽은 정치적인 전란과 음모가 점철된 곳이었다.

당시 왕들은 그야말로 여행과 이동의 연속이었다는 사실. 잦은 민란의 평정, 전염병,

반란군, 귀족들을 달래고 세금 추징 등 여러 사안으로 자주 궁을 떠나야 했다고.

 

 

 

 

무도회 그림을 자세히 보면 앙리 3세와 카트린 루이 왕비는 등받이가 있는 의자에 앉아 있다.

앙리 3세의 머리 위로 드리워진 빨간 차양이 눈길을 끈다. 지체 높음을 강조하는 장식인 것이다.

 

 

 

 

 

16~17세기에도 요즘처럼 거울을 여자들의 전유물로 여겼다.

당시 여성의 가장 큰 덕목이란 '아름다운 한 송이 꽃' 이 되는 것이었다.

모범답안으로 여겨진 르네상스의 미인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져야 했다.

 

세 가지 하얀 것. 피부, 치아, 손

세 가지 검은 것. 눈, 속눈썹, 눈썹

세 가지 빨간 것. 입술, 뺨, 손톱

세 가지 긴 것. 몸통, 머리카락, 손가락

세 가지 짧은 것, 치아, 귀, 발

세 가지 가는 것. 입, 허리, 발볼

세 가지 굵은 것. 팔뚝, 허벅지, 다리

세 가지 작은 것. 젖꼭지, 코, 머리

- 알랑 드코 "미의 기준" 중에서    

 

 

아르라함 보스 <시각>, 1630년, 채색 동판화, 보자르 박물관(투르)

 

아브라함 보스라는 낯선 이름의 화가가 판화를 통해 보여주는 이 시대의 남녀는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 처럼 멀게 느껴진다. 거울 앞에 앉은 여자는 레이스 장식을 옷에 달면서 요모조모

자신의 모습을 뜯어보고 있다. "이것보다 저게 더 낫지 않을까?" 라고 조심스럽게 말하자 뒤에 선

여자가 말없이 웃으며 다른 레이스를 집어준다. 그런데 방 한구석에는 남자가 창가에 바싹 다가서서

망원경으로 무언가를 주의 깊게 보고 있다. 여자는 거울을 보고, 남자는 세상을 보는 것이다.

 

 

 

 

 

프랑수아 클루에 <욕조의 여인>

 

이 그림은 당대 사람들이 여성의 아름다움에 얼마나 큰 의미를 두었는지 여러가지 상징물에 빗대어

보여주고 있다. '욕조의 여인' 이란 제목처럼 막 욕조에 몸을 담근 디안의 곁에는 화사한 체지와 달콤한

서양배 등 과일이 함께 그려져 있다. 뒤편에는 디안에 비해 미모가 뚜렷이 대비되는 유모가 풍만한

가슴을 드러내고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그림 맨 뒤편으로 물동이를 들고 있는 하녀가 보인다.

물동이는여성의 아름다움이 물만큼이나 중요함을 은근하게 드러낸 것이다. 여성의 '아름다움' 을

배고픔조차 잊게해줄 만큼 달콤하고, 인간 종種을 유지시킬 만큼 중요하며, 없으면 살 수 없는

물과 같은 존재로 여겼음이다.

 

 

 

 

 

 

 

 

좌) 17세기 멋진 남자의 전형,   우) 17세기 아름다운 여자의 전형

 

 

 

 

 

 

당시 여인들의 삶은 종종 애잔한 느낌을 준다. 여덟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약혼을 하고, 열두세 살에 결혼을 하고,

쉴 새 없이 아이를 낳았던 여인들은 스물다섯 살만 되어도 젊음의 생기를 잃고 시들어갔다. 궁정의 서열을 나눈

기록을 보면, 궁정의 하녀들은 그녀의 개나 앵무새보다도 지위가 낮았다. 반면 남성들의 교양 수준은 괄목할 만한

발전을 거듭하며 대조를 보였다. 인쇄술의 발전으로 새로운 지식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유럽을 벗어나 머나먼

세계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림 속 망원경으로 창밖을 바라보는 남자는 바로 이러한 새로운 바람을 온 몸으로

받아들인 17세기 사람들인 것이다. 아직 개인적인 공간에 대한 개념이 없을 때인지라 그림처럼 모든 것이 한 방에

서 이루어 졌다. 한 공간에 있지만 여자들은 거울을 들여다보며 서로의 아름다움을 겨루고, 남자들은 망원경에

투과된 먼 세상을 바라본다.

 

 

 

 

 

 

 

 

 

 

 

 

 

아브라함 보스 <미각>, 제작연도미상, 채색동판화, 보자르 박물관(투르)

 

아브라함 보스의 '오감' 연작 판화 중 가장 흥미로운 그림이다. 의상과 분위기가 다른 뿐, 요즘의 식사 모습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앞서 본 <시각> 보다 풍경이 훨씬 친근하게 느껴진다. 오랜 종교전쟁을 지나 프랑스

사회가 안정기에 접어들던 루이 13세 시대, 그림 속 인물들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 음식을 먹는, 단순히

식욕 충족 차원을 벗어나 음식을 즐기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탈리아의 문화적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프랑스에 새로운 미각이 본격적으로 상륙한 데는 메디치 가문에서 태어난 카트린 드 메디시스에 의해서다.

그녀가 앙리 2세에게 시집 오면서 이탈리아 상류층이 즐기던 동방의 향신료부터 일급 요리사들까지 데려

왔더 것. 당시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쌌던 샤프란, 귀족의 식탁에 필수품이었던 후추, 약재로도 쓰였던 계피,

설탕 같은 향신료들이 이국적인 '오리엔탈(동방) 맛 문화의 천국을 열어 주었던 것이다.

 

 

 

 

 

 

축제에서 한 상에 차려 먹는 식사 장면

 

 

 

 

 

좌) 17세기 음식재료,   우) 17세기 야채로 얼굴을 구성한 그림

 

 

 

 

좌) 포도주 만드는 모습

 

17세기 음식 재료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육류였다면, 일상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음료는 포도주였다.

정화 시설이 없고 수인성 질병에 걸리기 쉬웠기 때문에 물 대신 와인이나 맥주를 마셨다.

<미각> 그림 속 남자가 손에 들고 있는 유리로 된 와인 잔은 당시에는 최고의 사치품이자 큰 재산이었다.

16세기부터 이탈리아 무라노를 중심으로 생산된 베네치아 유리잔들이 프랑스를 비롯 전 유럽으로 수출되었다.

 

 

 

 

 

 

 

 

 

 

 

 

프랑수아 마로, <첫 번째 생루이 기사단의 임명식>,1661~1775년, 캔버스에 유채, 51×76cm, 베르사유

 

아침 행사를 마친 루이 14세가 침실을 떠나기 전 나라에 중요한 공을 세운 군인들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장면이다.

여기 등장하는 '생루이의 기사'는1693년 4월, 군사 제도를 개편하면서 가톨릭 신자이면서 10년 동안 군대에서 봉사

해온 군인들 중 우수한 인재에게 주는 작위명이다. 훈장은 충성을 요구하는 구실인 것이다.

 

 

 

 

 

 

 

 

 

 

 

 

 

만찬 중인 루이 14세

 

 

 

 

 

 

 

 

 

작자미상, <마담 방타두르와 루이 14세의 초상화>, 1715~1720년, 캔버스에 유채, 127.6×161cm, 왈라스켤랙션(런던)

 

오, 신이시여. 저를 도우소서.

저를 이 고통에서 구하소서

- 1715년 8월 30일, 임종을 앞둔 루이 14세의 기도

 

 

70년 넘게 왕좌를 지켰던 그의 나이 일흔일곱. 그는 곧 죽음을 맞이할 것을,

그리하여 지독한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리한 것을 알고 있다.

 

 

 

 

좌) 갓난 루이 14세,  우) 10대 초반의 루이 14세

좌) 30대 후반의 루이 14세,   우) 40대 초반의 루이 14세

 

 

루이 13세는 1643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고, 다섯 살에 불과하던 어린 루이 14세는 얼떨결에 왕뤼를 이어받았다.

그의 어머니 안은 사방에서 덤벼드는 정적들을 막아내며 아들 대신 섭정을 하느라 루이 14세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더구나 1648년부터 1653년까지 벌어진 프롱드의 난 때문에 루이 14세는 어머니와 동생 필립, 즉 오를레앙 공과 함께

프랑스 각지로 쫓겨 다녀야 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불행이 루이 14세에게는 오히려 약이 된 듯하다. '실전'에서 배운

사촌들의 권력욕, 대영주들의 불길 같은 반란, 온갖 정치적인 협잡과 술수, 음모까지도 평생 기억한다. 그리하여 흔히

루이 14세를 특징지우는 품성의 뿌리가 어린 시절을 통해 길러진 것이다. 아첨하는 귀족들에 대한 비웃음, 음식에 대한

탐욕은 실제로 그의 배고픔에 대한 지긋지긋한 기억 때문인지 집착을 버리지 못해 자연히 과식으로 인한 병을 달고 살 수

밖에 없었다. 동시에 정력이 넘쳤던 그는 왕비 마리 테레즈 외에 앙리에트나 루이 드 라발리에르, 마담 몽테스팡, 마담

멩트농 등 공식적인 첩 말고도 헤아릴 수 없는 여자들을 침대로 끌어들였다. 여성 편력은 급기야 루이 14세에게 임질을

가져다 준다. 그러면서도 베갯머리 송사에 휘둘렸던 역대 왕들과는 달리, 용의주도하게 애첩들의 정치 간섭을 차단하곤

했다. 왕비를 제외한 다른 여자들은 오로지 자신의 향락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인형에 불과했던 것.

 

 

 

 

 

 

 

 

베르사유 예배당의 천장 벽화

 

 

 

 

우) 베르사유 궁 내 살롱 드 메르퀴르 천장 벽화

 

루이 14세는 신화를 모티브로 한 푸생의 벽화로 루브르와 베르사유 궁전의 벽을 도배하다시피 했고 궁 안에는 금 은으로

태양왕의 장식을 단 가구들을 두었다. 대표적인 것이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루이 14세 시대의 대표 장인 앙드레 샤를를 불의

가구들이다. 청동, 귀갑, 뿔 등을 이용해 정교하게 만든 문양이 돋보이는 불의 가구에는 신화를 빗댄 태양왕의 상징이 가득

새겨져 있다. 왕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해 재료부터 귀한 것을 많이 사용했고 문양 역시 권위적인 것이 많다.

 

 

 

 

 

 

 

 

 

 

 

 

 

 

베르사유 첨단 유행의 시작

 

 

제라드 장 바티스트 스코탱 <정오> 1690년, 채색 판화, 아르 데코 도서관

 

세계 유행을 선도하는 프랑스 문화는 베르사유 궁에서 시작됐다.

궁정인들의 다정한 식사 장면을 그린 판화 한 장.

흔한 장면에 어떤 첨단 유행이 담겨 있기에 유럽 사람들이 열광했던 것일까?

 

 

 

 

 

루이 13세 시대의 베르사유

 

1677년에 이르러 루이 14세의 주도로 베르사유는 귀족과 부르주아지, 대영주들의 터전으로 다시 한번 탈바꿈하게 된다.

루브르 궁에 머물던 루이 14세가 장인들과 직공들의 마을이었던 베르사유로 왕궁을 옮기기로 한 것이다.

당시에도 베르사유는 여전히 공사 중이었다. 1682년에 루이 14세가 베르사유에 완전히 정착할 때에도 공사는 계속되었다.

예배당을 마지막으로 대장정에 마침표를 찍은 것은 그로부터 30년 가까이 지난 1710년의 일이다.

말하자면 베르사유는 무려 49년 동안이나 공사 중이었던 것이다.

 

 

 

 

공사 중인 베르사유

 

 

 

 

 

 

 

 

 

 

 

 

 

 

 

 

 

 

좌로부터

1, 옷을 차려 입는 궁정인.  2, 당구를 즐기는 궁정인.  3, 게임을 하는 궁정인.  4, 정원에서 밀회를 즐기는 귀족 커플

 

 

 

 

베르사유 궁

 

 

 

 

좌) 루이 14세 시대 가구의 청동 장식.  우) 왕가 가구의 청동 장식

 

 

 

 

 

작자미상, <자도의 아틀리에>, 제작연도미상, 채색 판화, 카르나발레 박물관(파리)

 

1715년 9월 1일, 영원한 태양이기를 원했던 루이 14세가 온몸이 썩어 문드러지는 냄새를 풍기면서 세상을 떠났을 때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무려 72년 하고도 100일 동안 온 프랑스를 꼼짝 못하게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모든 사람

들을 일렬로 줄을 세워 신분에 맞는 자리를 정해주던 왕의 죽음은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겨우 다섯 살인 왕세자를

두고, 필립 오를레앙 공에게 섭정을 맡기고 떠나야 하는 루이 14세는 편히 눈을 감기 어려웠겠지만 말이다.

 

필립 오를레앙 공의 섭정 기간은 1715년부터 1723년까지 8년 뿐이었지만 이 시기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변화는 몇 십 년에

걸쳐 일어난 것과 맞먹는 엄청난 것이었다. 섭정에 오르자마자 오를레앙 공은 엄숙한 베르사유 궁을 떠나 파리로 이주할 것을

결정했다. 금융과 정치에 대해 남다른 지식을 갖췄을 뿐 아니라, 음악, 미술에서 화학에 이르기까지 당대 교양에 통달했으며,

위선적인 격식을 참지 못했던 오를레앙 공 다운 생각이었다. 더구나 그는 오페라와 가면무도회들 좋아했고, 딸들까지 데리고

질펀한 파티를 열 만큼 격의 없는 인물이었으니, 근엄한 루이 14세와는 정반대 캐릭터라고 할 수 있겠다.

 

'로코코Rococo' 는 바로 이러한 활기와 희망을 반영한 문화를 말한다.

 

 

 

 

 

 

 

 

 

 

 

 

 

 

 

 

 

 

앙투안 와토, <제르생의 간판>, 1720년, 샤를로트베르제 슈로스 박물관(베를린)

 

이 그림은 미술품을 파는 어느 가게 안을 보여준다.

1720년 9월 어느 날, 파리 시내를 산책하던 18세기 사람이 우연히 들여다본 가게 안 풍경은 사진처럼 선명하다.

1720년은 '대재난' 이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를 만큼 암울한 시기였다. 먼저 1685년 이후로 유럽에서 소멸되었다고

믿었던 흑사병(페스트)이 마르세유를 덮치는 비극이 벌어졌다. 동방교역이 늘어나고 식민지를 개척하던 시절,

프랑스 제일의 항구 도시 마르세유는 상업의 중심지였다. 하루에도 수천 명이 드나들던 이곳은 벼락 호황을 누리는

도시답게 급조된 건물들에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거리는 하수도 시설이 미미한 탓에 온갖 악취와 쥐가 들끓었다.

전염병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도시 전체를 점령할 정도로 전염 속도가

빨라 하루 사망자가 8월 10일 100명이던 것이 불과 열흘 만에 열 배로 늘어났다. 1720년 9월 23일, 헨느에서 발생한

화재는 장장 일주일이나 계속되었다. 다행히 29일 비가 내리면서 화재는 멈췄지만 8,000명의 사람들이

집을 잃고 거리에 나앉았다.

 

 

 

 

 

로의 은행 앞에서 주식 파동에 항의하는 시민들

 

그러나 대혼란의 와중에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는 마르세유에서 북상하던 페스트에 대한 공포도,

온 도시를 삼켜버린 화마에 대한 두려움도 아닌, 바로 존 로의 서인도회사의 주식이었다.

로는 루이 14세가 말년에 벌인 전쟁으로 왕실의 재정이 거덜나버린 걱정으로 밤잠을 설치돈 섭정 오를레앙 공을 만나

끈질긴 설득으로 1716년 사설 은행을 세우게 된다. 로의 사설 은행은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국공채를 발행한 셈이다.

국공채의 가격이 날로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주식을 산 식당 점원은 순식간에 3만 리브르를 가진

벼락 부자가 되었고, 그 옆 가게 주인은 5만 리즈르, 부르봉 공작은 무려 20만 리브르를 벌었다.

하지만 1720년 처음 발행된 주식의 배당금은 단 2펴센트에 불과했다. 대박의 꿈이 불안해진 사람들은 곧 지폐를

다시 금화로 바꾸려고 은행으로 몰려들었다. 고객들의 환금 요구에 아무런 대책이 없던 로는

급기야 1720년 12월, 몰래 브뤼셀로 도주해버리고 말았다. 희대의 사기극에 휘말려 전 재산을 날린 사람들이

도처에 속출해서 전 재산을 잃고 쫓겨나 거지나 깡패가 되었다고 한다.

 

 

 

 

동서 퓨전 : 칠기 가구

 

중국과 일본 문화가 프랑스에 들어온 것은 생각보다는 무척 오래된 일이다.

칠기는 17세기에 처음 프랑스에 상륙했다. 금속으로 보일 만큼 반짝이는 붉고 검은 바탕에 상감된

이국적인 산수와 동양인의 얼굴의 아름다움은 금세 유럽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특히 일본의 칠기는 검정 칠기 위에 금과 은으로 모티브를 넣은 화려함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인용: 이지은 著 <귀족들의 은밀한 사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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