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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탐미의 시대 유행의 발견 III

 

둥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남녀 두 쌍이 마주 앉아 있다.

등을 돌린 여자는 옆 자리 남성에게 막 와인을 따라주려는 참이다. 맞은편에 앉은 여자는 곁에 앉은 남자가 준

연서를 읽는 듯하다. 교태 어린 표정에 넘어간듯한 남자는 은근슬쩍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으려고 손을 뻗는다.

벽에 달린 촛불과 식탁 위의 등불에서 일렁이는 불빛으로 방 안은 아늑하면서도 은밀한 분위기가 담돈다.

바닥에는 이들의 애정 행각을 상징하는 꽃들이 흩어져 있고, 식탁 위에는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세 여신이

파인애플을 머리에 이고 있는 은조각이 은은한 빛을 낸다. 향기로운 와인과 미감을 자극하는

음식을 나누면서 서로의 사랑도 무르익어 간다.

 

 

 

 

 

요리가 그림이나 조각과 어깨를 겨누며 예술의 반열에 오른 마당에 식사를 게걸스럽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17세기 사람들이 그릇의 재료 중에서 가장 최고로 여긴 것은 금과 은이었다. 그러나 17세기 말엽에 스페인과

지리멸렬한 전쟁을 치르느라 돈이 바닥난 루이 14세는 베르사유의 모든 금식기와 은식기를 녹여 금화와 은화를

만들었다. 귀족들도 울며 겨자먹기로 동참해야 했다. 이때 금은 세공 장인들의 주옥같은 작품들이 대부분 사라

지는 바람에 아직도 전문가들은 이 사건을 프랑스사에서 가장 큰 비극을 이야기 하곤 한다.

 

금이나 은식기를 대체할 만한 것은 도자기뿐이었다.

17세기 말엽부터 중국에서 물밀듯이 들어온 도자기들의 아름다움은 금 · 은 식기를 최고로 여긴 유럽인들의

고정 관념을 바꿔놓았다. 17세기의 유럽 도기를 '파이앙스' 라 하는데, 쉽게 이가 나갈 정도로 약한 데다 빛을

투과하는 성질이 있어서 우윳빛이 감도는 짙은 하얀색의 중국 자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품질이 떨어졌다.

유럽의 많은 장인들은 오랫동안 중국 자기의 비밀을 연구하여 마침내 유럽인들의 오랜 소망을 풀었다.

 

 

 

 

 

천장이 낮고 바깥을 향해 창이 나 있지만

아무나 접근할 수 없는 비밀스런 밀실을 '부두아boudoir' 라고 부른다.

 

 

 

 

 

 

 

 

 

엘리자베스 루이 비제 르 므륑, <마리 앙투아네트와 그녀의 아이들>,

제작연도미상, 캔버스에 유채, 275×215cm, 베르사유

 

지척에 있는 센 강의 물결 소리만 울려 퍼지는 콩시에르주리 감옥에서

그녀는 마지막 힘을 다해 펜을 놀렸다.

 

아끼고 사랑하는 동생이여, 영원히 안녕.

이 편지가 그대 손에 들어갈 수 있기를!

언제나 나를 생각해주세요, 내 온 가슴을 다해서 그대를 포옹합니다.

나의 불쌍한 아이들까지도...

 

앙투아네트를 다룬 소설 작품들은 넘쳐나지만 그녀가 본래 어떤 여자였는지, 그녀의 삶이 진정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아주 적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그녀를 아름다운 외모와 사치스런 드레스, 빵이 없어

시위를 벌이는 백성들에게 "그럼 고기를 먹지 그러냐" 는 어리석은 말을 한 여자로만 떠올린다.

 

 

 

 

소녀 앙투아네트

 

 

 

 

 

좌)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의 결혼식. 우) 지적인 루이 16세

 

1770년 5월 16일. 루이 14세가 지은 베르사유 궁 예배당에는 역사적인 결혼식에 참석하려는 왕족들로 가득했다.

이날은 오랫동안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家와 화평을 추진해온 루이 15세와 총리대신 슈아쥘이 마침내 회심의

미소를 짓는 날이기도 했다. 5월의 햇살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오색 찬란한 빛으로 흘러내리는 예배당 안은

행스 주교의 집전으로 장엄한 결혼 미사가 시작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왕녀 마리 아투아네트가 열다섯 살, 4년 뒤 루이 16세로 왕좌에 오르게 될 왕세자의 나이 열여섯 살.

결혼식을 마치자 곳곳에서 축복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정략적으로 맺어진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시작부터

순탄하지 못했다. 둘의 성격이나 취향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혁명정부가 유포한 온갖 악의적인 이미지 탓에 사람들은 루이 16세를 뚱뚱하고 무능력한 왕이며, 매사에

무관심하고 냉정한 남자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 루이 16세는 부르봉 왕가에서는 보기 드물게 지적인 인물이다.

그는 프랑스에 처음으로 전기를 일으키는 기계를 들여와 조작했고, 지리에 밝았으며, 일곱 살 때 부터

완벽하게 라틴어를 읽고 썼다. 또한 당시에는 드물게 영어를 포함한 5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젊은 앙투아네트

 

마리 앙투아네트는 가끔 기계를 다루느라 손이 온통 새까매지던 남편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쇤부른 궁에서 여덟 형제에 둘러싸여 고이고이 자란 그녀는 살롱에서 귀여운

공주 역할을 하는 것 말고는 뭐 하나 제대로 배운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국어인 독일어조차

제대로 읽고 쓰지 못한 그녀는 정략결혼이 결정되자마자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이 초빙한 교사에게

프랑스어 강습을 받아 간신히 의사 소통을 할 수있을 정도였다. 천성이 가볍고 천진난만한 그녀에게

문학이나 철학, 과학은 참을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주제였다.

 

 

 

 

 

 

 

 

 

 

 

 

 

 

 

 

 

 

 

 

단두대로 가는 앙투아네트

 

'위대한 여제女帝' 라는 소리를 들은 오스트리아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로 태어나 프랑스의

왕비를 지낸 여인답게, 죽음을 맞이하는 그녀는 무척 담담했다고 한다. 루이 16세는 단두대가 있는

콩코드 광장까지 지붕이 있는 마차를 타고 갔지만, 그녀가 타고 간 것은 작은 수레뿐이었다.

 

 

 

 

앙투아네트의 처형

 

앙투아네트의 불행은 죽어서도 끝나지 못했다.

그림이 그려진지 200년이나 지난 뒤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림에서 천진난만하게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있는 루이 17세와 딸 마리 테레즈의 운명을 알고 있다.

여덟 살의 나이에 술을 먹고 재판정에 나가 어머니를 고발한 루이 17세는 자기 출신을 잊어버리고

혁명가를 소리 높여 부르는 민중의 아이로 자랐다. 앙투아네트가 처형된 뒤, 코뮌은

이 어린아이에게 '뇌 청소' 를 시행하기로 결정한다.

 

잔혹한 일이지만 당시 기록에는 말뜻 그대로 '뇌를 청소한다cerveau lavage' 라고 분명히 씌여있다.

이러한 명목으로 어떤 학대가 이뤄졌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시몬 부부는 1795년 1월 텅플 성을 떠난다.

그해 6월 8일 루이 17세가 텅플 성에서 갑자기 죽어으며, 다음날 바로 시체를 부검한 뒤 싱마르게리트 묘지에

공동 매장했다는 기록만이 전할 뿐이다. 겨우 열 살이었다. 왕의 아들로 태어난 죄로 그렇게 죽어야만 했다.

 

 

 

 

좌) 루이 17세.   우) 마리 테레즈

 

루이 17세의 미스터리한 죽음은 많은 의문을 불러 일으켰다.

그가 죽은 게 아니라 도망쳤다거나, 어디에 나타난 것을 봤다는 등의 소문이 그치지 않았다.

심지어는 자신이 루이 17세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여럿 나타나기도 했다.

템플 성에 갇혀 촛불도 없이 지내야 했던 마리 테레즈는 마지막 남은 가족인 고모 마담 엘리자베스마저

단두대로 끌려간 1794년 5월 9일부터 홀로 지냈다. 나중에 그녀는 오스트리아에 잡혀 있는 혁명군 포로들과

맞교환되는 조건으로 오스트리아로 보내졌다. 그때까지도 그녀는 아버지와 어머니, 남동생과 고모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훗날 그녀는 삼촌인 아르투아 백작의 아들과 결혼해 1814년 다시 프랑스로 돌아오게 된다.

후세 사람들은 그림 속 한 가족을 자기들 마음대로 생각하고 이해한다. 이들은 죽어서까지도 비운의 왕비와

비운의 왕자라는 이름을 벗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그림 속에 담긴 가장 불행한 사실이 아닐까?

 

 

 

 

 

 

 

 

 

 

작자 미상, <카스트리 저택 약탈>,1790년, 동판화, 개인 소장

 

일찍 해가 뜨는 7월의 파리. 강한 햇살에 아침 이슬이 말라가던 무렵, 파리 동쪽 관문인 생앙투안 문과 시내를

연결하는 포브르 앵앙투안 거리는 수천 명의 사람들로 가득 찼다. 소리 높여 대중을 선동하는 웅변가들의

이야기를 듣는 시민들 얼굴에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생앙투안 문 바로 뒤에는

중세의 음울한 성채를 자랑하는 바스티유 감옥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함성을 지르며 바스티유 감옥의 문으로 뛰어 들어갔다. 흔히 바스티유가 왕실의 감옥이라해서

엄청나게 크리라 짐작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많아야 50명 정도 수감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감옥이었다.

성난 군중들의 함성과 노래 소리와 함께 바스티유 감옥의 정문이 산산조각 났다.

 

 

 

 

 

바스티유 감옥을 초토화한 사람들은 포부르 거리의 유명한 카페인 상테르로 돌아와 왕정을 무너트린

시민의 승리를 자축했다. 그들의 손에는 바스티유의 성벽이 무너지면서 나온 돌이 들려 있었다.

바스티유 감옥이 함락된 이날, 1789년 7월 14일은 바로 프랑스혁명 기념일이 되었다.

 

 

 

 

퉐르리 궁을 노략질하는 군중

 

 

 

 

 

 

 

 

 

 

 

인용: 이지은 著 <귀족의 은밀한 사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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