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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고전주의와 바로크 I

베르사유 궁의 왕실 예배당

2층으로 이루어진 궁중 예배당의 전통적인 설계도에 따라 1689년 망사르가 건축을 시작하여, 1710년

로베르 드 코트가 완성. 유일한 중앙 회중석은 왕실 특별석을 따라 2층에 있는 방들과 연결되어 있다.

왕과 신하들은 주제단(主祭壇)과 다비드 왕을 나타내는 고부조(高浮彫)로 장식된 대형 오르간을 내려다

보게 된다. 후면의 사분궁륭(四分穹霳)에는 샤를르 드 라 포스가 활기차면서도 웅장한 화법으로 그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보인다.

 

 

 

 

지암바티스타 티에폴로, <콘타리니 별장에 초대받은 앙리 3세>, 1756년경, 자크마르-앙드레 미술관(파리)

1750년부터 유럽의ㅣ 대부분이 고전적인 전통으로 회귀하는 반면에, 바로크는 장식 예술의 거장인 티에폴로의 천재성이

발휘되었던 베네치아 회화에서 그 빛을 발하게 된다. 티에폴로는 발크 예술의 마지막을 장식하 위대한 거장 중 한사람이다.

 

 

 

 

렘브란트, <예술가와 사스키아>, 1636년, 동판 부식, 국립 도서관(파리)

렘브란트는 능숙하게 드라이 포인트와 동판 부식을 차례로 사용하면서 수많은 판화를 제작하였다.

이 판화들은 그 크기의 다양성과 함께 매우 강렬한 어둠과 빛의 효과로 이해 주목한 만하다,

 

 

 

 

에티엔 알레그랭, <1669년경 북쪽 화단에서 바라본 베르사유궁 정원의 전망>. 베르사유 궁과 트리나농 국립 미술관.

르 노트르, 1613~1700년, 정원 설계가, 프랑스 건축가는 공간을 규격화하고 지배하기 위한 원칙에 따라 정원을 만들었다.

오솔길과 분수, 넓은 녹색 공간의 배치는 이제 프랑스에서 고전적인 양식이 되었다.

 

 

 

 

그리엔 교회, 18세기, 바바리아. 치머만의 회장 벽토와 그림.

바바리아의 바로크적 특성을 나타내는 작품. 풍성한 교회 내부 장식과

전통적인 건축양식을 뒤엎은 곡선의 유희가 주목할 만하다.

 

 

 

 

프란시스코 드 고야 이 루치엔테스, <카롤로스 4세의 가족>, 1800년,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왕실 가족 구성원들이 궁전의 방 하나에 모여있다. 이 작품의 단순성은 인물들이 표현하고 있는 준엄하고

환각을 일으키는 장면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중앙에는 여왕 마리아 루이자가 있고, 왕의 뒤쪽에는

아이와 함께 파르므의 왕자와 공주가 서 있다.

 

 

 

 

 

자크 루이다비드, <사비니의 여인들>, 1799년, 루브르 박물관(파리)

화가는 등장 인물들을 조각처럼 그려놓고 있다.

마치 이들에게 영원성의 외관을 부여하기 위해서인 듯하다.

 

 

 

 

 

카를로 마데르노, 산 피에트로 대성당 정면, 1606~1619년(로마)

강한 수직 기둥과 특히 수평적인 주선(主線)들로 장식되어 있는 구조로 마데르노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안드레아 포초, <성 이그나스의 천국 입문>, 1685~1694년, 산 이그나치오 성당 천장화

정밀화 규칙에 대한 완벽한 지식을 이용하여 포초와 후세의 여러 바로크 장식가들은 신자들의 영혼에

호소하고 신앙심을 고양하기 위하여 이 성당을 하나의 축제와 구경거리를 제공하는 장소로 변화시킨다.

 

 

 

 

조반니 바티스타 가울리, 일명 바치차, <예수의 승리>, 1669~1683년, 로마 예수회 성당 천장화

바치차는 자신의 예술에 바로크적인 영감을 불어놓고 있다. 명암 효과로

훨씬 강한 인상을 주는 간접 조명에 의해 움직임이 더욱 생동감 있게 보인다.

 

 

 

 

르 베르냉(베르니니), <다비드 상>,(부분), 대리석, 1623년, 보르게세 미술관(로마)

단호한 표정의 이 두상은 르 베르냉의 조각이 지닌 힘과

속물적인 거인 골리앗을 물리친 다비드의 완강함을 동시에 나타낸다.

 

 

 

 

카 레초니코 궁전(현재 18세기 베네치아 미술관), 1657년, 베네치아

발다르 롱게나는 봉-프리울리가(家)를 위해 대운하에 자리잡고 있는 이 궁전의 건축을 칙임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궁전은 완성되지 않은 채로 레초니코가(家)에 팔리게 되어 마사리가 작업을 이어 받게 되었다.

마사리는 이 궁전을 한 층 더 올려 무도회를 위한 방을 만들었고, 궁전 장식을 위해

천장을 장식한 티에폴로 등 많은 예술가들을 고용하였다.

 

 

 

 

르 카라바조, <성 마태의 소명>, 1599~1600년, 세인트 루이스-데-프랑세 성당(로마)

1590년 르 카라바조는 세인트-루이스-데-프랑세 성당의 콘타렐리 예배당을 장식해 달라는 중요한 주문을 받게 된다.

당시 29세였던 그는 1599년부터 1600년까지 양쪽 벽에 성 마태의 <소명과> <성 마태의 순교> 라는 두 작품과

1600년부터 1602년까지 <성 마태와 천사>라는 성단화를 그리게 된다. 역사적인 사실에 입각해 그려진 <성 마태의

소명>에는 세금 징수원 마태가 보인다. 또 성 피에르를 동반하고 나타나 미래에 자신의 제자이자 복음전도사가 될

마태를 검지 손가락으로 강압적으로 지적하면서 과장된 몸짓을 하고 있는 그리스도가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의 모든 장면은 어떤 때는 얼굴을, 어떤 때는 어깨나 다리를 비추는 조명에 따라

강조되는 부분이 달라 보인다. 빛과 그림자의 확실한 분리는 그림에 극적인 요소를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분리가 없었더라면 작품의 깊은 강도가 표현되지 않았을 것이다.

 

 

 

 

 

르 카라바조, <성 바올로의 개종>1600~1601년, 산타 마리아 델포폴로(로마)

<성 피에르의 고난>에 상응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이 작품은, 후에 성자로 추앙받는 바울이 신의 계시를 받고

쓰러져 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건장한 말의 입체감과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기사(騎士)를 묘사한

생략법이 빛에 의해 강조되고 있다. 전체를 세분화하고 있는 이 빛은 말에서 사람이 떨어졌다는 평범한

사건을 신의 계시가 갖는 놀라운 힘을 나타내는 초자연적인 사건으로 표현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

 

 

 

 

안니발 카라치, <바쿠스와 아리아드네의 승리>, 1597~1605년, 파르네즈 궁전(로마)

궁전 갤러리의 둥근 천장에 그려진 이 장식화는 반종교개혁 정신을 전혀 반영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매우 세속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도 오도아르도 파르네즈 주교는 자신의 궁전에 이처럼 이교도적인 그림을 그린 것에 대해 조금도 놀라움을 나타

내지 않았다. 전체적인 육중함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의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은 고전주의 전통의 백미를 보여 주고 있다.

 

 

 

 

쥬제페 데 리베라, <속죄하는 성 제롬>, 1648년, 루부르 박물관(파리)

강렬한 조명 효과로써 암울한 조합을 만들어낸 화가의 취향은 노인의 야윈 몸과 황홀경에

빠진 시선에 놀랄 만큼 깊은 감정을 부여하고 있다. 리베라는 나폴리에 살고 있었지만

작품에서는 스페인에서 신앙심이 지닌 극적인 요소가 자주 나타나고 있다.

이는 그의 작품에서 성인들의 모습이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귀도 레니, <데이아네이라와 켄타우로스 네수스>, 1620~1621년, 루브르 박물관(파리)

이탈리아 만토바의 공작인 페르디낭 드 곤차그를 위해 그린 것으로, 차례로 영국 왕 찰스 1세와

프랑스 왕 루이14세의 소장품이 되었다. 격동적인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는 이 작품은

카라바조의 대조적인 자연주의를 반영하고 있다. 귀도 레니는 여기에 자신만의 독특함,

즉 강한 감각성에 밝게 표현되어 있는 인물에서 표출되는 비물질적인 표현을 첨가하였다.

 

 

 

 

피에르 르 뮈에, 발드 그라스 성당, 1645~1665,(파리)

이 성당은 처음에는 망사르, 다음에는 르메르시에가 건축을 담당했다가

고전 건축 이론가인 그 뮈에가 마무리하는 책임을 맡았다.

 

 

 

 

조르쥬 드 라 투르, <부인에게 조롱받는 욥>, 1652년, 보쥬 지방 미술관, 에피날

이 작품의 주제는 자주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몇몇 작가들은 이 작품을 성 알렉시스의 일화로 보거나 수감자

성 피에르를 해방하는 천사라는 제목이 어울린다고 주장하였다. <부인에게 조롱받는 욥>이라는 제목은 심층적인

연구에 의해 가장 그럴듯하게 여겨지게 되었다. 이 작품은 프랑스의 중요한 카라바조 추종자들 중 하나인 조르쥬

드 라 쿠르의 '야경화' 중 하나로 여기에 나타난 조명은 인상적인 동시에 모순적이다. 조명은 욥의 무릎처럼 매우

강한 입체감을 나타내고 있으며 활력 있는 붓질로 강조되어 있는 욥의 부인처럼 순수하게 선(線)적인 필체가 단일

색조를 배경으로 그려져 있다. 신비감을 주는 이 작품은 몇몇 성서 주석가들에게는 인간의 불행에 대한 명상처럼

여겨졌고, 부인이 불행한 욥을 조롱하고 있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기보다는 그를 동정하여 연민을 가지고

그를 굽어보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놀라운 강렬함이 나타내고 있는 모든 것은 두 인물의 시선 교환이

어두운 허공에 의해 구분되며 더욱 비장하게 느껴지는 기묘한 대화로 변한다.

 

 

 

 

조르쥬 드 라 투르, <다이아몬드 에이스로 속임수를 쓰는 사람>, 루브루 박물관(파리)

속임수를 쓰는 사람이라는 테마는 카라바조가 다루었고, 이후에도 자주 등장하는 것이다.

조르주 드 라 투르는 이 주제로 그의 작품 중 가장 아름다운 두 점을 그렸다.

 

 

 

 

시몽 부에, <사랑의 신과 함께 있는 프시케>, 1625년경, 보자르 미술관(리옹)

부에가 살던 로마에서 1613년부터 그려진 이 작품은 확실한 입체감을 나타내고 있는 명암 때문에 신비롭게 보인다.

부에는 로마네스크적인 특성과 무대효과를 추구하려는 노력의 결과로 위대한 장식을 위해 임명되었고, 그는 14년

동안의 로마 체류 기간을 마치고 1627년 파리로 돌아와 장식에만 전념했다. 주문이 쇄도하였지만, 지적인 사색이

깃든 푸생의 작품에 가려 부에와 그의 작품은 곧 잊혀졌다. 카라바조 이후에는 부에의 표현력과 기교,

그리고 절충적인 태도가 기교적인 습작처럼만 여겨졌다.

 

 

 

 

니콜라 투르니에, <십자가에서 내려진 그리스도>, 1632년경, 아우구스티누스 미술관(툴루즈)

프랑슈-콩테 지방 출신의 투르니에는 로마에서 지낸 뒤 툴루즈에 정착한다. 비장미 가득한 강렬한

영적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이 그림에서는 신중하고 간결한 예술로 정화된 카라바조주의를 나타내고 있다.

투루니에는 엄격한 구성 감각으로 드라마틱한 요소와 간결한 자세를 부드럽게 표현하고 있다.

 

 

 

 

르 냉 형제, <짐수레>, 혹은 <풀 말리는 계절의 도래>, 1641년, 루브르 박물관(파리)

르 냉가(家)의 세 형제들, 즉 앙투안, 루이, 그리고 매튜의 작품을 구별해내는 거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들이 전원풍 사실주의로 외벽을 장식한 모든 그림을 보면 매튜의 성(姓)만이 표시되고

작품 연대가 씌여졌음을 학인할 수 있다.

 

 

 

 

 

루이 르 냉, <농부 가족>, 루브르 박물관(파리)

르 냉 형제 중 루이는 농민의 생활을 제재로 해 회색 · 갈색의 색조를 활용한

고전적인 긴밀한 구성의 작품을 선보였다.

 

 

 

 

필립 드 상페뉴, <남자의 초상>, 예전 제목은 <로베르 아르노 당디이>, 1650년 루브르 박물관(파리)

상페뉴는 이 그림에서 네덜란드의 전통적인 그림 제재인 창문가에 자리잡고 앉은 상반신 초상화 형식을

유연하게 발전시키고 있다. 그림의 모델은 거의 사실적으로 그려진 한 손을 창가에 무기력하게 올려놓고

있다. 의도적으로 축도된 배색 효과, 7부 외투를 입은 인물의 고상한 태도는 이 인물이 아마도 여왕 안느

도트리슈의 청원 심사관이었던 오르빌리에 남작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샤를르 르 브륑, <고블랭가 제조소를 방문하고 있는 루이 14세>

1673년에서 1679년 사이에 만들어진 <왕의 역사>라는 고블랭가(家)의 장식

융단 연작 중 일부분. 베르사유 궁전 국립 미술관.

 

 

 

 

上), 야를르 르 브륑, <십자가를 짊어진 그리스도>, 1688년, 루브르 박물관(파리)

이 그림으 르 브륑이 중상 모략가들에게 자신의 재능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린 일련의 그림 들 중 하나다.

下), 니콜라 푸생, <에코와 나르시스>, 1630년경, 루브르 박물관(파리)

이 그림에는 로마에서 살고 있던 티치아노의 <바쿠스제(祭)와 유사한 푸생의 스타일이 나타나 있다.

푸생이 채색에 능한 화가라기보다는 데생 화가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수타일은 차가움과 따뜻함의

대비나 순수한 색조의 선명함 역시 잘 드러나 있다.

 

 

 

 

 

레오나르도 데 피게로아, <산 첼모골라주>, 1682년 (세빌랴)

피게로아는 쿠엔카 근처의 위티엘 출린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재능을 특히 세빌랴에서 발휘해,

이곳에 중요한 건물들을 여럿 만들었다. 특히 산텔모의 콜레지오-세미나리오의 대 수도원, 예배당,

보기 드물게 기념비적인 신상을 주는 현관 정문 등은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그는 이 건물에서

세빌랴 바로크 예술의 걸작품들을 만들었던 거이다.

 

 

 

 

호세 베니토 데 추리게라, 산 에스테반 성당의 주제단, 1963년 (살라만카)

추리게라 형제의 풍성한 장식 기법은 스페인 바로크 양식을 매우 잘 보여주고 있다.

 

 

 

 

엘 그레코(일명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폴로스), <생-자크의 기사 줄리안 로메로와 그의 수호성인 줄리앙>

10~1590년, 프라도 미술관(마드리드)

라스 아라나스의 줄리안 로메로는 용감한 군인이었으며, 그의 망토가 나타내듯이 산티아고 수도회의 집사였다.

그가 사망했던 1578년 이후에 그려져 1890년까지 그의 가문이 소유하고 있던 이 초상화는 엘 그레코의 수호

성인이 성 줄리앙과 함께 있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망토와 백합꽃으로 장식된 왕관 때문에

그림 속의 성 줄리앙을 푸랑스의 왕인 생 루이로 간주했다. 성 줄리앙의 한 손은 그의 피 보호자의 어깨 위에 올

려져 있고, 손바닥이 펼쳐진 다른 손은 내세를 향하고 있는 성인의 시선과 함께 소개의 몸짓을 나타내고 있는 듯

보인다. 조명, 표정, 몸짓, 넓게 주름이 잡힌 멋있는 망토, 줄리안 로메로의 모아진 손과 얼굴 등 이 모든 것이 엘

그레코의 작품엣만 찾아볼 수 있는 종교적인 열정과 위대함을 강조하고 있다. 미화된 이 군인은 단지 기도하는

사람일 뿐이며, 미리 창조자의 의지에 복종하는 봉헌물일 뿐이다.

 

 

 

 

엘 그레코,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1586년, 산 토메 성당(톨레도)

엘 그레코이 이 걸작품은 자신의 비용으로 성당을 다시 건축하게 한 오르가스의 영주 곤잘로 루이스 데 톨레도

의 장례 장면을 지상과 천상이라는 두 부분으로 나타내고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성 에티엔느와 성 고귀스틴이

손수 이 백작을 매장하는 신비스러우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천사로 가득찬 구름들은 신의 축복을 받은 자가

머무르는 것을 보호하고 있는 듯하다. 여기에서 성모와 성 장 바티스트는 천사가 옮겨주고 있는 신생아 모습을

한 망자의 영혼을 맞이하고 있고, 그리스도는 천국에서 이 영혼을 기다리고 있다. 완벽한 채색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이 작품은 점점 비물질적인 단계에 따라, 갑옷을 입은 오르가스 백작의 몸으로부터 하늘에서 군림하고

있는 구세주 그리스도의 모습까지 구성되어 있다.

 

 

 

 

호세 데 리베라, <기도하고 있는 성 제롬>,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의도적으로 간결하게 처리한 배경, 강렬한 인상을 주는 성인의 모습, 그리고 빛의

놀라운 대비 등은 이 작품에 강한 드라마 같은 힘을 부여하고 있다.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동방박사들의 경배>, 1638~1640년경,

회화와 조각 미술관(그르노블)

제레즈 시의 샤르트뢰즈 수도원의 유명한 기념비적인 연작 장식화 중 하나인 이 그림은 오른쪽 아랫부분에

그려져 있다. 왼쪽 부분에는 <목자의 숭배>가 그려져 있고, 윗부분에는 <수태고지와 할례>가 그려져 있다.

베일리 장군은 루이 필립의 스페인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던 이 네 점의 그림을 그르노블 미술관에 기증했다.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성녀 루시>, 1636년경, 보자르 미술관(샤르트르)

성녀가 한 손에 들고 있는 쟁반 위에는 그녀가 순교할 당시에 뽑힌 두 눈이 올려져 있고, 다른 한 손에는

종려나무 잎이 들려져 있다. 이 작품은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성녀 아폴린느>와 함께 1640년 이후 아틀리에가

시리즈로 제작한 화사하게 장식된 처녀 순교자들에 대한 최고 작품 중 하나다. 두 작품은 1636년경에 그려진

세빌랴으 메르세드 데스탈자에 있는 주요 장식화에 속한다.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헤나레스의 산 디에고 데 알칼라와 팜플로나의 주교>,

1645~1646년, 아우구스티누스 미술관(툴루즈)

첫 주문은 수르바란보다 낮은 가격을 부른 무리요에게 돌아갔다. 기것은 세빌라에 있는 성 프란체스코회 수도원의

'작은 수도원' 에 놓일 연작 그림이었다. 1645~1646년에 만들어진 이 작품들은 불행하게도 프랑스가 침략했을 때

흩어지게 되었다. 십자가 앞에서 황홀경에 빠져있는 산 디에고 데 알칼라는 15세기 초에 알칼라 수도원의 겸허한

신부였고, 공중에 떠오르는 현상을 알고 있었다. 생 프랑수아 교단의 장(長)이 팜플로나의 주교인 추기경에게

산 디에고 데 알칼라를 지적하는 몸짓을 하고 있다. 그는 1588년에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벨라스케스, <발타자르 칼를로스 왕자의 기마 초상화>, 1634~1635년, 프라도 미술관(마드리드)

필리페 4세의 기마 초상화나 왕실 가족의 다른 초상화들, 그리고 마드리드의 새로운 왕궁인 부엔 레티로의

주요 살롱을 장식하기 위하여 제작된 이 초상화에서는 붓놀림의 경이로운 우려함을 엿볼 수 있다.

 

 

 

 

벨라스케스, <귀족의 영애들>, 1656년, 프라도 미술관(마드리드)

사적인 이 장면에서는 어느 정도 반사 기법에 의한 능란한 구성을 볼 수 있다.

 

 

 

 

산토 도밍고 성당, 오악사카, 멕시코

로제르 예배당이나 푸에블라에서처럼 이 성당에서는 스페인 바로크 예술이 토속적인 장식 예술과 혼합된

메스티조 예술이 나타나 있다. 이 양식은 성당의 둥근 천장에 조화로운 리듬을 부여하고 있는

탁자 하부의 장 기둥과 합각에서 시작되는 거대한 조개 모양으로 식별할 수 있다.

 

 

 

 

동업협동조합 건물, 17세기, 브리셀 대광장.

소용돌이 꼴 장식의 합각머리와 풍부한 조각 장식이 돋보이느 바로크 양식 건축의 웅장한 정면.

1695년 빌우아 총사령관이 도시를 침공한 이후에 이루어진 복원 작업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제리트 베르크헤이데, 하름렘 대광장, 두이츠 갤러리(런던)

이 작품은 17세기 네덜란드의 평화롭고 근엄한 이미지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합각머리로 이루어진

건물들의 높은 정면은 도시 중심부에 위치한 이 광장에 규칙적인 리듬을 부여하고 있다.

 

 

 

 

앙투안 반 다이크, <이집트 탈출 중의 휴식>, 1627~1630년, 알테회화관(뮌헨)

반 다이크는 1627년 영국에서 앙베르로 돌아온 후 성당이나 수도원, 그리고 부유한 주르주아들을

위해 많은 그림을 그렸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는 인물의 조합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감동적인 감수성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이탈리아 화가들, 특히 티치아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있다.

섬세함, 세련됨, 우아함 등은 이 작품의 화법과 정신을 특징지어 주고 있다. 중앙에 위치한 성모와

아기 예수는 정삼각형 구도 안에 들어가 있다. 다시 출발할 것을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나타내고 있는

조제프라는 인물은 비록 어둠 속에 그려져 있지만, 그림을 가로지르는 대각선에 의해 전체적인

구성에 합류되고 있다. 커다란 평온이 이 작품을 둘러싸고 있다.

 

 

 

 

 

야콥 요르단스, <네 명의 복음서 저자들>, 1622~1623년경, 루브르 박물관(파리)

이 작품은 대조되는 조명 기법과 신랄하고 힘찬 사실주의로 특징이을 수 있는 요르단스의 카라바조풍

시기 이후에 그려진 것이다. 여전히 <성 마태의 소명>을 그린 카라바조라는 대가에게서 볼 수 있던

서민적인 유형을 고수하고 있다. 화가는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생각과 업적을 유포시킨 평범한

사람들의 깊게 주름이 파인 붉은 피부를 빗질하듯 그리면서 이러한 모습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복음전파라는 임무는 마가를 공포에 떨게 하는 듯이 보인다. 이는 그가 마치 이런 엄청난 운명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것처럼 추운 듯이 망토로 몸을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알 수 있다.

 

 

 

 

 

좌), 루벤스, <루시퍼 딸들의 납치>, 1610년경, 알테 회화관, 뮌헨

버크하트가 "어떤 시대나 어느 학파에서 그 누구도 이러한 작품을 창조할 수 없었을 것" 이라고 말했듯이,

이 그림에서는 피베와 텔라이르 자매, 디오스쿠로이르(제우스의 아들들)라 불리는 카스토르와 폴리데우케스,

두 명의 아기 천사, 말 두마리 등 여러 가지 모습들을 볼 수 있다. 두 자매의 성숙하고 아름다운 나체는 그림

중앙을 차지하고 있다. 희생자가 된 그들의 움직임은 육체적인 풍만함을 나타내거나 혹은 강조하고 있다.

뒷발로 일어선 말들과 디오스쿠로이의 어두운 색조는 두 자매의 금빛 살색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사각구도

안에 들어가 있는 인물들은 그들의 모습과 움직임을 배치하고 있는 대각선에 의해 나뉜다.

 

 

 

 

루벤스 <사랑의 정원>, 1633년경, 프라도 미술관(마드리드)

자제하지 않고 관능적으로 포옹하고 있는 커플들의 행복에 대한 이 찬가는 16세의 아름다운 알레나 푸르망과의 결혼이

53세의 화가에게 가져다준 행복에 대한 찬가이기도 하다. 이 그림은 날아다니는 푸토(이탈리아 회화에서 사랑을 상징

하는 벌거숭이 소년)들의 무리에 둘러싸인 비너스 상이 새겨져 있는 거대한 주랑으로 닫힌 정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루벤스와 알레나 커플은 춤을 추고 있고 다른 커플들은 무리지어 있다. 이 그림에는 와토와 랑크레게게 영감을 주게 될

상냥한 목가(牧歌)의 향내에 흠뻑 빠진 커플들의 행복한 분위기가 잘 나타나 있다.

 

 

 

 

프란츠 할스, <생 조르쥬 궁수부대 장교들의 향연>,1616년, 프란츠 힐스 미술관(하를렘)

궁수들이 집단 초상화를 주문했을 때, 그들은 화가가 이 분야에서 이미 오래된 전통에 따라 그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화가는 경쾌할 뿐만 아니라 편안한 모습으로 자세를 취하거나 혹은 이야기를 하며 이들이 살아가는 삶을 순간

포착하듯이 지휘관들의 모습을 뒤섞어 그렸다. 전쟁을 나타내거나 부자연스러운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세 명의 대위들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띠를 두른 채 중위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렘브란트, <가족 초상화>, 1669년경, 헤르조그 안톤 율리히 미술관(브룬스윅)

오랫동안 알려져 있던 것과는 반대로 이 작품은 화가의 앋르인 티투스와 며느리 마그달레나 판 루와 손자들의 초상화가

아닌, 마그달레나 판 루와 그녀의 아이들, 그리고 그녀의 친척 프랑수아 판 빌레르트의 초상화다. 티투스는 1668년 이미

죽었고, 작품 속 남자의 모습과는 닮은 점이 하나도 없었다. 이 가족 초상화는 미완성인 듯 보인다, 특히 생생한 색깔은

종종 팔레트용 칼로 두껍게 덧칠해져 있다. 빛의 효과를 찾으려는 노력과 더불어 이 같은 터치에서도 감정의 강렬함을

엿볼 수 있는데, 렘브란트 말년에는 재료의 처리와 대조적인 조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작품이 주문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개인적으로 그린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화가는 당시 사람들이 정한 초상화에 대한 규범에서

한 번 더 멀어지고 있다. 단지 그의 상상력과 자유만 작용할 뿐이다.

 

 

 

 

렘브란트, <야간 순찰>, 혹은 <프란스 배닝 코크 대위의 민간 경비대>, 1642년, 국립 미술관, (암스테르담)

렘브란트의 모든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이 <야간 순찰>이다. 1642년 아르크뷔지에 길드의 요청으로 여러

화가들이 그린 여러 단체 초상화들과 같은 시기에 그려진 이 작품은 사회면에 기사화된 배닝 코크 대위와 그 부하

들의 무기 탈취를 다룬 것이다. 여러 번에 걸친 니스칠 때문에 전체적으로 어두운 느낌을 주어 '야간순찰'이라는

제목이 붙게 된 이 작품은 무기 탈취라는 사실이 이렇게 무거운 느낌으로 표현되는 구실로 작용하였다. 여기에 먼지와

때, 특히 이 작품이 오랫동안 걸려 있던 벽난로의 연기 등이 덧붙여졌다. 게다가 이 작품은 1715년, 암스텔담 시청의

벽보판에 맞추기 위해 높이 28센티미터가 잘려져 복구할 수 없는 훼손을 입게 되었다. 1946년에 세심하게 복구하여

다시 천을 입힌 <야간 순찰>은 본래의 자연적인 빛을 되찾게 되었지만 이제는 제목과는 어울리지 않게 되었다. 블라딩

겐 영주인 중위가 동행하고 있는 프란스 배닝 코크 대위의 민간 경비대는 환영받지 못했다. 다른 참가자들은 별로 묘사

하지 않거나 거의 보이지 않게 그렸다. 귿르은 전통적인 동업조합의 초상화와는 다른 이 광경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무기들의 요란한 소리와 깃발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해질 무렵의 금빛 속에서 진행 중인 이 순간성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가장 놀라운 것은 금빛 후광으로 둘어싸인 어린 여자아이이다. 아니는 반짝이는 공주의 옷차림을 하고 허리에는 닭을 매단

채 이 행렬에 끼어 화승총수들 사이에서 길을 잃은 듯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다. 그림 속에 나타난 여자아이의 모습은

3세기 동안 예술사가들이 의아하게 여기는 부분이기도 하다.

 

 

 

 

렘브란트, <챙 없는 모자를 쓰고 금줄을 걸고 있는 사람> 1933년 파리 루브르 박물관

이 작품은 화가의 화려한 젊은 시절을 그린 자화상 중 하나다. 27세였던 화가는 사스키아와 약혼한 상태였다.

렘브란트는 평생 동안 자신의 얼굴을 관찰하게 되는데, 그의 얼굴은 자기만족과 영광, 행운에서 근심어린 질문으로

옮겨가는 형상이자, 맹렬한 경쟁심에서 비참한 고독으로 넘어가는 시간의 기록이었다. 이 작품은 그가 최초로

이름만으로 서명한 것이다. 이것은 이탈리아 대가들에게는 익숙한 일이었지만, 렘브란트 이전에는

네덜란드의 어떠한 화가도 감히 시도하지 못한 일이었다.

 

 

 

 

인용: 피에르 카반느 著 라루스 서양미술사 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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