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연/산행·여행·풍경

화사별서(花史別墅)

 

 

 

 

 

 

 

 

화사별서(花史別墅)

- 경남 하동군 악양면 -

 

 

 평양 조씨()의 고가로 조선 태조, 정종, 태종 3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조준(1346~1405)의 직계손인 화사() 조재희()의 별서()이다.

  악양을 배경으로 한 박경리()가 쓴 소설 『토지』에 나오는 ‘최참판댁’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회남재'에 올라 조선조 처사를 대표하는 남명 조식 선생의 발자취를 느껴보고 내려 오는 길.

너무 이른 시간이었을까? '화사별서'를 찾아갔으나 대문 빗장이 굳게 걸린 상태.

하는 수 없이 마을 고샅길이나 한 번 걸어보기로 한다.

 

 

 

 

 

 

 

 

 

 

어느 댁 대문 바로 옆 담장 돌에 새겨진 그림이 흥미를 끈다.

마치 고대 선사인들의 그림을 보는 듯.

 

 

 

 

 

 

부연 일기 탓에 시야가 그리 선명치 못하지만

동네 낮은 돌담길을 걷는 맛도 나름 괜찮은 산책이었다는 사실.

 

 

 

 

 

 

 

 

 

 

 

 

 

 

 

 

 

 

 

 

 

 

 

 

 

 

 

 

 

 

 

 

 

동네 회관 앞에 내 걸린 사진 들.

 

 

 

 

 

 

이날 오후 다시 찾은 조씨 고가.

돌담길을 따라 측면으로 돌아 가니 별서 공간의 핵심이랄 수 있는 후원이 나타난다.

 이곳에 이르기 전 고가 방문을 사양한다는 코팅지가 걸려 있는 모습을 보았기에

내심 건물 내부 진입은 꿈도 꾸지 못했었다.

 

 

 

 

 

 

 

 

 

 

 

단정한 서체를 바위면에 옮겨놓은 솜씨도 괜찮아 보인다.

 

 

 

 

 

 

바윗돌 측면, 아마도 후대에 새겼으리라 추정되는 각자 '상신촌'

 

 

 

 

 

 

 

 

'花史別墅'라 적혀 있는 커다란 바윗돌과 건물 전체가 약간 부감 되는 모습.

자그마한 계류 위로 놓인 돌다리가 놓인 이 공간이야말로 화서별서의 핵심 공간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한참을 이 앞에서 서성이고 있던 차, 왼쪽에 보이는 문을 나서시는 이 고가 어르신의 모습.

근 일백 수에 이르신다는 어른의 모습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은 정정하신 모습에 절로 고개가 숙여 진다.

 

아들 내외와 함께 점심 식사 차 밖으로 행차하시는 모습과 마주한 것이다.

 

어디서 왔느냐는 물음에 정중한 예와 함께 얼굴에 철판이라도 깐 양 무례를 범하고 만다.

 

" 어르신께 청을 드리기 위해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잠시라도 내부를 볼 수 있을까 해서요?"

 

내가 생각해도 참 낮짝 두꺼운 청이자 영락없는 무뢰배의 짓이다.

헌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 온다.

 

"멀리서 여기까지 찾아 왔는데 어찌 하겠소. 출입을 막고 있긴 하지만 들어가 돌아 보소."

 

뒤따라 나서는 아드님의 안내로 득달같이 내부로 들어선 후 정신없이 몆 컷 찍어대고 건물을 빠져나와

다시 한 번 베풀어 주신 호의에 거듭 거듭 감사드린다.

 

 

 

 

 

 

 

구전()에 의하면, 조재희가 16년에 걸쳐 건축한 것이라고 하나

사랑채는 없어진 상태인데 앞으로 조금씩 복원해 나갈 계획을 갖고 있다고. 

 

 

 

 

 

 

 

안채의 상량에 “개국 오백이십칠년무오 입주상량()”(1918년)이라고 적혀 있다고.

사라진 사랑채는 원래 정면 6칸, 측면 2칸이었으며,  동학 농민 혁명 때 화재를 당하고, 또한 6·25 전쟁으로

 다시 불타 현재는 안채와 행랑채만 남아 있는 상태.

 

 

 

 

 

 

주거의 구성은 정남향의 넓은 터에 남북으로 긴 대지가 몇 단으로 조성되어 있다.

고택의 대문은 조촐한 한 칸 구성으로 전면 동측 면에 위치한다.

 

 

 

 

 

 

행랑 마당 서쪽 끝 담장 아랫쪽을 깊게 파서 방지()를 만들고 석축을 높이 쌓아 올렸다.

 

 

 

 

 

 

 

 

사랑채 구역은 빈터로 남아 있으며, 사랑의 서쪽에 안채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었음을 돌계단과 석축을 통해 알 수 있다.

사랑채 영역은 이 통로에 의해 좌우로 나뉘며, 방지를 앞에 두고 넓은 터가 있어 별당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방지 석축 부분에 네모난 형태의 '석빙고'가 보이는데

이 집 어르신의 증언으로는 어릴 적 여름이면 너무 시원한 공간이어서

서로 들어가겠노라는 쟁탈전이 심했다고...

 

 

 

 

 

 

 

 

 

 

 

천원지방天圓地方이 구현된 네모난 방지에 베롱나무가 선 아담하고 둥근 형태의 섬.

전체 공간을 베롱나무 수세가 압권하는 모습이다.

 

 

 

 

 

 

 

 

 

 

 

안채 영역은 높은 기단을 쌓아 사랑채 영역과 구분하였다.

안채의 중문()이 있었을 자리에는 잘 다듬은 돌계단만 남아 있다. 이곳에는 1칸의 헛간만 남아 있다.

그 반대편인 서쪽에는 측면으로 돌아앉은 행랑채가 안채를 바라보며 있는데,

 정면 6칸, 측면 1.5칸으로 2칸의 고방과 행랑채가 구성되어 있고, 측면으로 나가는 대문간을 두었다.

안채로의 출입을 사랑을 통하지 않고 따로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조선 최대의 길지 중 하나로 꼽는다는 약양 일대.

그 중에서도 이곳 '화사별서'의 위치는 그야말로 수승한 지세 중의 대표 격.

칠성봉과 구제봉이 시야를 가득 메우는 자리에 형제봉을 병풍삼고

드넓은 악양벌을 면전에 두었다면야 무슨 더 할 말이...

 

 

 

 

 

 

후원으로 이어지는 계단 위로 차밭이 조성되어 있는데

 본디 이곳은 사당이 있었던 자리라고.

 

 

 

 

 

 

헛간까지도 기와를 올렸는데,

 유지 보수의 차원이었을지 몰라도 오른편 행랑채의 지붕은 슬레이트를 얹은 모습.

고택의 정경에 너무 안 어울리는 생뚱한 모습인지라 그저 안타깝기만...

 

 

 

 

 

 

안채나마 이렇게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내심 고마울 뿐.

고택을 유지한다는 게 얼마나 애로가 많은지는 살아 본 사람만 안다는 사실.

 

 

 

 

 

 

 

잔디가 심어진 이곳은 아마도 초당이 있었지 않았을까 보이던데...

 

 

 

 

 

 

계류와 돌담, 돌다리와 두꺼비(?) 형태의 당호석이 어우러진 후원 일대.

자연 지세를 거스르지 않는 한국식 정원의 전형이라 볼 수 있겠다.

 

 

 

 

 

 

필자가 집안을 둘러 보고 나올 때까지 기다려 주신 화사별서의 조한승 어르신.

 고맙습니다. 늘 여여한 가운데 부디 건안하시길.

 

 

 

 

아래는 어르신의 자제분께서 건네 주신 명함인데

어르신은 물론 자제분께서도 겸양지덕謙讓之德이 체화體化 된 이른 바 선비의 몸가짐을 보여 주고 계셨다.

 

 박경리의 토지에 나오는 '길상'이란 인물은 가상의 인물이 아닌 실제 이 집안 종손의 실명이었다는 사실도 말씀해 주셨다.

 

 조한승 어르신의 사촌 누님과 박경리가 진주여고 동창생으로 학창시절 이 고가를 몇 번인가 방문한 바 있었기에,

 이 화사별서와 주인공 길상을 모티프로 대하소설 '토지'를 집필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Gratitude - Jon Harald

 

 

'자연 > 산행·여행·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축령산 편백림 산책  (0) 2020.05.03
황룡동산 데크길   (0) 2020.04.29
석송대(石柗臺) 소고  (0) 2020.04.24
야은재 영산홍  (0) 2020.04.18
관어대(觀魚臺)  (0) 2020.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