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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행·여행·풍경

시나브로 가을이...





가을이 오는 길목


- 고 중 영 -


방등 산그늘이 저벅거리며 내려선-
예전에는

도적 떼들이 근거지로 삼았다는
그 외토라진 마을에도
봄이면 홍도화는 물에 어리고
소나기 떼 여름을 건너간 흔적이
징검다리 자박돌 위에 박혀 있더니
붉은 旗 펄럭이는 당골집 울안에서는
이제 막 몸 것 내 풍기기 시작한
새끼무당 무너리 가슴이
시로사로 찰감처럼 익고 있겠다.

하늘은 연분홍 단풍잎 입김에

풍선처럼 부풀어
무욕의 꼭대기에 올라앉아 한가로운데
삐꺽 문 중간 어름에 가까스로 매달린
부고장 누래 빠진 봉투가
제 속에서 문드러진
상여소리 한 대목을 꺼내보려고
바람결에 몸을 부시럭거리며
간간이 애를 쓰고 있다.

* 시로사로- 시나부로의 방언











강당골의 가을


- 고 중 영 -


청솔모들이 호도알을 멋대로 쏠아대도 무방한
야틈한 산비알 두그루 마주 선 감나무
연연한 시선 주고받으며 붉힌 볼
어쩔것이냐?

암팡진 아랫도리 오금지어 박고 버팅긴 채
진초록 삼지엽으로 허심을 찔러
저 하늘까지 퍼렇게 멍들여 놓은 조선솔
억겁에 억겁을 이어 살것같은 저 양양함
어쩔것이냐?

도무지 끊길것 같잖은 햇살을 끌어당겨
틀어올린 모감지에 친친감은 으름넌출 아래로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가며
쉼표도 없는 음절을 붙이며
잉큼거리려는 곡조 애써 평조로 짓누르느라
하얀 속치마 허벅지까지 나부끼는 산바람
어쩔것이냐?

오늘 막 혼례를 치룬 가시버시 한쌍 있어
멋적게 옹송거리던 인연을 벗고
더는 옥죌수 없을만큼 끌어안은 두 몸사이에
뜨겁게 달아오르는 응큼한 시선을 찌르면
어쩔것이냐?

터질듯 늠실거리던 녹음도
느껴서 알만한 환장할 세상일로만 농익으니

아 어쩔것이냐?
이 가을 강당골에 와서 어쩔것이냐?.









        다비 式


              - 고 중 영 -


        동백나무 꽃 피는 문수사 말사 내원암        

        해 그늘은 저녁마다 그 앞을 지나더란다.         

        일주문 앞에 걸린 자재 보살행심         

       오래 전 내 사내를 품었던 그날처럼        

       꽃의 옆구리를 할퀴고 가는 바람도 있었더란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도        

        정돈된 갈비뼈 하나를 발라내던 그 사내 -        

        그녀를 슬프게 하는 건

        사내의 주검이 아니라        

        가끔은 아쉬워질 살 냄새라는 걸 문득-        

 

       달빛이 실오라기로 나풀거리는

       음력 초사흘 밤

       가까스로 죽은 사내의 몸뚱이

       뚱이에-

       나풀, 날아들어

       여성상위처럼 엎드린

       붉은 꽃이파리 하나가

       몸부림으로 훨훨 타오르다가

       주검보다 먼저 재(災)가 되고 있더란다. 











가을비 묘적 (描跡)


- 고 중 영 -



내 육십 노년의 긴 잠으로 덮어둔
흑진주 찬란한 웜 홀 속에서
고물고물 기어나온 천체 물리학 한 페이지가
바늘귀에 매달려
새앙쥐 젖니를 빌려다가
우주 한 귀퉁이를 쏠아 대고 있다

바스락
바스락
바스락
바스락
바스락

쏟아져 내리는 부스러기들이
가랑잎 겨드랑이를 파고드는 소리
간지러워 못 견디겠는 겨드랑이들이
비비꼬며 키득 거리는 소리 .









그리움에 대한 보고서


- 고 중 영 -


그리움은 갑작스러울수록 좋은 것이다.

음악을 듣다가 혹은 삼류 영화를 보다가
문득 아득해지는-
그리움은 그렇게 무작정일수록 좋은 것이다.

지난 해 가을,

견디다 못해 제 가슴 빠개버린 석류를 따서
어느 주머니에 담았었는지가 궁금해지면 좋고
그 향기 다시 한 번 맡고 싶어 하며
“지키지 못한 약속처럼 늘 가슴에 맺혀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한 사람아!”라는
한 줄 남짓의 독백이라면 더 좋은 것이다.

그리움은 갑작스러울수록 좋은 것이다.

노을에 살이 붓는 하늬바람 켜켜이
근황을 알 수없는 그 사람 체온을 찾다가
와락 한 아름 쓸어안아
잔주름 까실한 볼에 마구 문질러 봐도 좋고
이 계절의 *후절수(後絶手)에 걸려
토막 나버린 추억의 징검다리를 놓느라
떠날 듯 못 떠나고 못 박힌 마음의
오래된 상처같이 연신 피 흘려도 좋은 것이다.

*바둑용어, 잡힌 자리를 되 끊어 잡는 手










몽상 혹은 신비주의


- 고 중 영 -


까트린느 드뇌브의 영화를 보다가

출렁거리는 그녀의 머리카락과

슬맆 속에 열망하는 그녀의 욕망을 눈치채는

새벽 2시 34분

예리한 면도를 손에 쥐고

무엇을 할까, 망연히 생각하다가

결국 誤打를 쳐버린 자판 위에

/혐오/가 나타나다.

 

보세요.

여기를 보아주세요.

목숨을 던져버린 꽃송이

목숨처럼 시들어버린 꽃 한 송이

아니지 그렇게 표현하는 건 오타 때문일 테지

시들어버린 꽃 송이가 아니라 /꼰닢/이라고 해줘.

 

재깍재깍재깍재깍재

점과 점이 이어지고 끊어지고

재깍재깍재깍재깍재

시간과 시간이 정돈되고 분열하고

재깍재깍재깍재깍재

흐터진 기억의 立子를 다른 것으로 代替하고

재깍재깍재깍재깍재

쓰러진 이오니아 海底

 

깃 하나 떨구고 날아가버렸던 새가

새벽을 쪼아

시간의 알갱이를 터뜨리는군

파랗게 혹은 보라빛으로 밝아오는 창을 닫고

자야겠군

나도 이제 시간처럼 쓰러져야겠군.










일몰이 지고 있다


- 고 중 영 -


일몰에 어리는 저 아랫길

잠시 눈자위가 붉더니 어느덧 침침해진다.

하지 말아야할 짓을 하다가 들킨

고추잠자리 한 쌍이 

더 빨개져서 허공을 맴돌고

여름 한철 버티던 길섶의 풀들도

기력이 쇄한 듯 몸들이 구부정하다.

 

벗들은 안녕들 하신가.

 

여기저기 구멍난 창호지 문

일간 읍내 나가 닥나무로 만든

한지 두어장은 사와야 겠지?

그때 밀가루도 조금 사다가

마루밑에 쑤셔 둔 스텐레스 공기를 찾아

저 아래 옹달샘 맑은 물로 풀을 쑤어

땜빵이라도 해야할까. 원

 

눈에 어리듯 미동하던 일몰들이

하나 하나 느티나무 이파리 뒤에 숨고

방안에 멀대같이 앉은 나는

70년 가까이 살았어도

내일이 어떻게 생겼는지

통 몰라하는 내가 섭섭한지

인사도 없이 일몰이 지고 있다.

 

저도 나만큼은 무심하다.









풍장


- 황 동 규 -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트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白金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 다오

바람 이불처럼 덮고
化粧도 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다오.










명상의 시간


- 고 중 영 -


꽃이라는 언어 한 토막을 집어 들고
기척 없는 공(空) 안으로 들어가
스스로도 몰라야하는 다스림의 律을
어김없는 行으로 열어보게.

뿌리에서 오른 지혜가 높낮이를 다스리고
줄기에서 오른 인자로움이 겸손을 만들고
향기로 빚어낸 선함으로 저만치 부드럽고
잎사귀에 둔 티 없음이 어긋남을 밀어내고
색깔로 정한 정결이 경박함을 멀리 하고
뜻으로 닦은 표정이 맑음을 취하며
있음에서 취한 결실에 두려움이 없다할 때

기쁨으로 들끓고 참에서 감사하며
촉으로 그리움을 만질 수 있는 그대는
비로소 꽃으로서의 완성이니
그곳에는 그대와 꽃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있음"이 있을 뿐이네










노을에 지다


- 고 중 영 -



붉은 꽃 명자나무 꼭대기에 있던

새가

붉은 꽃 없는 명자나무 가지에 묶어 둔

내 시선을 쪼아 물고 날아오르다.

 

날아올라 이미 "날다"가 되어버린 새가

날고 날고 또 날아

혼곤한 비상의 궤적을 벗을 즈음 잠시

점으로 흔들렸는가? 했을 때

보인다와 안 보인다의 틈새로

홀연히 몰입해가던 새가

"툭" 털어버린 시선 끝에서 일어난 불씨가

보인다와 안 보인다.를 태우고

있다와 없다 를 태우고

시작과 끝을 태우고

당신을 태우고

나를 태우고

삼라만상을 태우고 그도 모자라

불이 불을 태우는 저 황홀한 장엄 뒤에서

 

세상 실명하다.










A Beautiful Soul - Marc Enfr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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