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
황윤석(黃胤錫)은 5세 때 할머니 김씨에게서 글자를 익히고, 이듬해에 시를 배웠다. 14세 때인 1741년(영조 17) 백시명(白時明)과 백시덕(白時德)의 문하에서 수학했는데, 이때부터 수학과 문자학에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745년(영조 19) 수학에 관한 저술인 『이수신편(理藪新編)』을 쓰기 시작하였다. 1745년(영조 21) 여호(黎湖) 박필주(朴弼周)에게 사사하려 했으나 의견이 맞지 않아 그만 두었다. 이 무렵 정읍 이언복(李彦福)의 집에서 자명종(自鳴鐘)을 보았는데 이를 주제로 「윤종기(輪鐘記)」를 쓰게 되었다.
1748년(영조 24) 남원의 처가에 머물면서 정후(丁垕)와 함께 사람의 성(性)이 동물의 성과 같은가, 다른가에 대한 논란인 ‘호락심성동이(湖洛心性同異)’에 관하여 토론했다. 1756년(영조 32) 당시의 거유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의 문하에 왕래하며 학문의 규모와 심성의 변을 질문했고, 1758년(영조 34)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의 문하에 들어가 백가서를 통독했다. 다음 해 사마시에 합격하고, 순창의 백수(白水) 양응수(楊應秀)를 만났으며, 선운사의 도솔암(兜率庵)과 백양사의 백련암(白蓮庵) 등에서 『주역(周易)』 등을 읽고, 성리학 연구에 더욱 정진했다.
1764년(영조 40) 전주에서 목산(木山) 이기경(李基敬)을 만나 ‘호락심성이기변(湖洛心性理氣辨)’을 논하고, 다시 김원행을 찾아가 『대학(大學)』 강의를 받으며 마침 장성에 유배되어 있는 정경순(鄭景淳)을 찾아가 학문을 논했다. 1765년(영조 41) 김수(金璲)와 학문을 논하고, 안형옥(安衡玉)과 ‘심성이기설(心性理氣說)을 논했으며, 양응수에게 정약용(丁若鏞)의 저서인 『경세유표(經世遺表)』에 대한 의문점을 묻고 예절에 관한 글을 지었다. 1766년(영조 42) 실학자인 서명응(徐命膺)과 역상(易象), 범수(範數), 자서(字書) 등을 논했다. 그 해 장릉참봉에 제수되고, 김원행의 부탁으로 김민적(金民積)의 『혼벽당유고(混闢堂遺稿)』를 교정하였다. 1767년 다시 정경순을 찾아가 당시의 민생을 구제하는 데 대한 구시책(求時策)을 의논하고, 천문과 역법에 대해 논했다.
1768년 윤창정(尹昌鼎)과 함께 당시 전래된 서양의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의 ‘지원설(地圓說)’을 논했고, 1769년 김용겸(金用謙)과 함께 『중용(中庸)』의 오묘한 이치와 역범(易範)·율력(律曆)·전병(田兵)·관직·산수·음악 등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1770년 김용겸·홍계희(洪啓禧) 등과 『주자대전(朱子大全)』을 교정했고, 영조의 명을 받아 여암(旅庵) 신경준(申景濬)과 경복궁 근정전에 입시하여 예조판서 한광회(韓光會)와 함께 어첩을 작성하여 봉안했다. 이때 외세의 침략에 대비해야 할 방법을 논한 「방비책」을 지었다. 1774년(영조 50) 기언정(奇彦鼎)과 백성을 구제하는 ‘구시책(救時策)’을 논하고, 심정진(沈定鎭)과 경의(經義)·복서(卜筮)·율력·성위(星緯)·병진(兵陣) 등을 논했으며, 염영서(廉永瑞)를 시켜 자명종의 일종인 윤종(輪鐘)을 제작했다. 1775년(영조 51)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수정하고, 그 예를 인용하여 「의증수동국여지승람예인(擬增修東國輿地勝覽例引)」을 지었다. 또한, 도량형을 고증하여 「곡석설(斛石說)」을 지었다.
1776년(영조 52) 정월에 익위사익찬(翊衛司翊贊)으로 임명되었으나 곧 그만두었다. 1778년(정조 2) ‘인물성동이’의 시비가 되었던 호론과 낙론의 견해를 종합하여 「호락이학시말기(湖洛二學始末記)」를 지었다. 1779년(정조 3) 김용겸과 『주서유집(朱書遺集)』을 교정하고, 그 해 목천현감에 제수되었다. 1781년(정조 5)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의 행장을 지었고, 1785년(정조 9) 불우헌(不憂軒) 정극인(丁克仁)의 행장을 지었다.1786년(정조 10)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가 되고, 곧 전의현감에 임명되었다. 이즈음 역대 왕의 선원전(璿源殿)에 관한 「본조조종진전사실변(本朝祖宗眞殿事實辨)」을 지었으며, 『문헌비고(文獻備考)』와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영정이 안치된 경기전사실변을 지었다. 1788년(정조 12) 복식 제도인 「부인회두제도설(婦人繪頭制度說)」을 지었고, 1790년(정조 14) 「소자황극경세서사상체용성음괘수도해(邵子皇極經世書四相體用聲音卦數圖解)」를 지었다. 1791년(정조 15) 돈의 무게에 관한 「전화경중설(錢貨輕重說)」을 짓고, 4월 15일 ‘수필 일기’를 마지막으로 쓰고 세상을 떠났다. 이 밖에도 집필 연대를 알 수 없는 중국어 연구 글인 「화음방언자의해자모변(華音方言字義解字母辯)」 등을 남겼다.
《디지털고창문화대전》에서 발췌한 내용.
황윤석의 학문과 사상
황윤석의 사상적 특징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모든 학문은 경전(經典)을 기반으로 해야 하다는 고증학적 태도를 나타낸 것이다. 둘째, 학자가 학문을 할 때에는 어느 것이나 널리 알아야 한다는 점을 주장하여 소위 박학적 학문 방법을 취하고 있다. 셋째, 배워서 알고 있는 것은 실제 생활에 응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특징은 조선 근대의 실학적 학문 태도와 명백히 일치하고 있다. 황윤석의 이러한 사상적 특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과거의 유학자들의 학문 방법은 한결같이 정주학(程朱學)의 ‘심성이기설’에만 집착하고 있는 데 반하여 그의 학문 방법은 경전의 올바른 이해를 기초로 하고 있다.
즉, 그는 ‘학(學)’이란 유교 경전인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읽는 데 그치지 않고, 그 학문의 사상과 내용 속에 담겨 있는 성현의 가르침을 깨닫고, 그 가르침이 올바로 이해되며 전래되었는가를 명확히 깨달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경전의 탐독에 그치지 않고 이를 고증하여 믿을 수 있는 학문인가를 탐구하였다. 그의 문집 가운데 고증이나 의문에 대한 저술이 많은 것은 이와 같은 그의 학문적 태도에 연유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그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그러했듯이 박학하는 데 충실하고 있다. 그는 경전 이외에 역사, 천문, 지리, 인물, 풍토, 언어, 습관, 의례, 상수, 복서, 율역, 법형제도, 사, 어, 서, 수 등에 관해서도 모두 탐구하였고, 그 결과를 저술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학문 방법이 박학에 충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제 생활에 유익하게 이용하는 데 힘썼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셋째, 황윤석은 이론적 지식을 실천에 옮기고자 자신이 배우고 연구한 것을 모두 기억하고 또 저술했다. 그리고 황윤석은 서구에서 전래된 새로운 문명과 과학 기술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그는 염영서에게 자명종을 제작시켰고, 산학과 성음, 음악에 이르기까지 탁월한 연구와 기록을 남겼다. 이러한 사실은 배우고 익힌 지식을 실생활에 적용하려는 그의 학문적 태도에서 연유된 것임을 말해 준다. 이와 같이 그는 전형적인 실학자로서 실학적 학문과 학설에 민감했지만, 다른 실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학문은 저술에 그치고 세상에 실제로 응용되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이것은 당시 사회의 정책적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어쩔 수 없는 한계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황윤석은 실로 다방면에 걸쳐 많은 저서를 남기고 있다. 그는 유교 경전의 본격적인 연구와 도덕적 인격의 수양을 비롯하여 정치, 교육, 음양, 이기, 성명, 상수, 복서, 시문, 계잠, 역사, 천문 지리, 인물, 풍토, 언어, 관습, 의례, 법전, 제도, 수학, 의약, 풍수, 농공, 병법, 술수, 선, 불, 제자백가 등에 이르기까지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고 저술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의 이와 같은 저술들은 호남 지역은 물론 전국의 실학자들에게 선구적인 위치를 확보한 것이다. 황윤석의 학문과 사상이 당시의 학계 또는 실학사상에 끼친 영향은 그의 연보에서 대강 짐작하게 되지만, 그는 호남을 비롯한 각 지역의 인물들과 널리 교유하며 강학하고 토론한 자취로 보아 서로가 지대한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알 수 있다.
황윤석은 남원의 정후와 전주의 이기경(李基慶)과는 성리학을 논의하였고, 김용겸과 홍계희, 그리고 심정진 등과는 경전을 토론하였으며, 서명응·위백규(魏伯珪)·이언복·윤창정 등과는 실학으로 교유하였다. 황윤석이 같은 스승인 윤병구 문하에서 공부했던 동문 중 실학사상에서 유다른 영향을 주고받은 사람은 위백규라 하겠다. 황윤석과 위백규는 호남의 대표적인 실학자로 나이는 황윤석이 두 살 위였으나 서로가 흉금을 털어놓고 학문을 토론하면서 성장했던 사이이다. 이 밖에도 장성부사로 와 있던 정경순은 역률·경제 등에 관한 지식을 교환하여 황윤석을 계방(桂坊)[익위사]에 추천하기도 했고, 동복에 거주하던 나경적·나경훈·안처인과 나주에 거주하는 염영서와도 많은 교류를 하였다.
《디지털고창문화대전》에서 발췌한 내용.
황윤석의 선친 황전이 건립하였으며 지금은 안채, 사랑채, 문간채가 남아 있다. 안채는 높은 축대 위에 세웠는데, 정면 6칸이고, 앞뒤에 퇴간을 둔 5량가의 일자형 초가로 전형적인 남부 지방의 가옥 형태를 취하고 있다. 벽체는 안방에서 중방 사이를 모두 판벽(板璧)으로 하였고,
중방에서 하방 사이는 솟을동자를 세운 머름청판으로 꾸미는 등 격식을 갖추었다.
저서로 『이재유고(頤齋遺稿)』·『이재속고(頤齋續稿)』·『이수신편(理藪新編)』·『자지록(恣知錄)』 등이 있다. 이 중 『이재유고』에 「자모변(字母辨)」·「화음방언자의해(華音方言字義解)」 등이 있어 국어학사의 연구 대상이 되며, 운학에 대한 연구는 『이수신편』에 실려 있다.
황윤석의 이재난고
서학을 좇는 한 지식인의 기록
전 생애를 촘촘히 기록한 일기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은 18세기 후반 조선에서 신경준(申景濬, 1712∼1781)과 함께 호남을 대표하는 학자로 거론되던 인물이다. 그런데 신경준이 과거를 통해 중앙 정계에 진출한 반면 황윤석은 문과 급제에 실패했다. 일찍이 영조가 “신경준은 다행히 나를 만나서 그 재주를 펼 수 있었는데, 황윤석만은 나를 만나지 못했으니 다른 날에 그 누군가 쓰는 자 있으리라”라고 하며 황윤석이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것을 애석해했다는 일화도 이런 사정을 반영한 것이었다.
황윤석은 1766년(영조 42) 38세의 나이에 천거를 통해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종부시직장(宗簿寺直長), 목천현감(木川縣監),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 등을 역임하다가 전의현감(全義縣監)을 끝으로 1787년(정조 11) 정계에서 물러났다. 그는 당대의 노론(老論)-낙론계(洛論系)의 대표적 학자인 김원행(金元行, 1702∼1772)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서울생활을 통해 여러 저명한 학자와도 교유했다. 따라서 황윤석은 18세기 후반 조선의 사상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이재난고(頤齋亂藁)』는 황윤석이 평생에 걸쳐 작성한 일기다. 여기에는 그의 나이 열 살 때인 1738년(영조 14)의 단편적인 기록을 시작으로 그가 세상을 떠나기 이틀 전인 1791년(정조 15) 4월 15일까지, 황윤석의 삶의 궤적이 촘촘하게 묘사되어 있다. 따라서 황윤석의 생애와 사상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재난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중요성에 착안하여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는 1994년부터 초서(草書)로 된 『이재난고』의 탈초·영인 사업에 착수했고 마침내 2004년에 이르러 완간하였다. 이로써 황윤석에 대한 연구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 글에서는 『이재난고』에 실려 있는 ‘서학(西學)’ 관련 기사를 중심으로 황윤석이 서양의 과학기술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과 의미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서학서를 빌려 보고 서학 지식을 좇다
조선 후기에는 중국으로부터 많은 서학서(西學書)가 전해졌다. 특히 청(淸)왕조가 안정기에 접어든 17세기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수용된 서학서는 조선왕조의 지식인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이 1785년(정조 9) 서양의 학문을 비판하기 위해 쓴 「천학고(天學考)」라는 글에서 “서양의 책(西洋書)이 선조 말년부터 이미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명경석유(名卿碩儒)들이 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 것은 이러한 사정을 잘 드러낸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서학서가 연행 사절을 통해 국내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지만, 서학서가 어떤 경로를 통해 지식인 사회에 유통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다. 이런 상황에 비추어볼 때 황윤석의 『이재난고』는 18세기 후반 조선사회에서 서학서의 유통 현황을 적실히 보여줄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 가운데 하나다.
황윤석은 십대 후반부터 서학 관련 서적을 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로 그는 천문역산학을 비롯해 과학기술과 관련된 서학서에 관심을 두었고, 관련 서적들을 구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서학서를 접한 것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경로를 통해서였다. 첫째는 양반 사대부들과의 교유를 통해 서학서를 빌려 보는 경우다. 황윤석은 적극적인 방문이나 서신 교환을 통해 지인들에게 서학서를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천거(薦擧)를 통해 1766년(영조 42) 중앙 정계에 진출한 황윤석은 이후 여러 해 동안 서울생활을 하면서 많은 사람과 접촉했다. 그는 성균관에서 공부하면서 여러 유생과 사귀었고, 중앙 정부의 여러 관청을 경유하면서 다양한 인물과 교유관계를 맺었다. 그중에는 조선 후기 과학기술사와 사상사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황윤석의 교유관계에서 먼저 주목할 만한 인물은 김용겸(金用謙, 1702∼1789)이다. 김용겸은 안동 김문(金門) 김수항의 손자이며 김창즙의 아들로 ‘북학파(北學派)’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그는 예악(禮樂)에 밝고 예술적 자질이 풍부했으며 홍대용, 박지원을 비롯한 북학파의 구성원들과 나이를 뛰어넘어 사귀었다. 황윤석 역시 김원행의 문하라는 학문적 기반 위에서 김용겸을 매개로 다양한 인물과 교유관계를 확장할 수 있었다.
소론(少論) 계열의 정경순(鄭景淳, 1721∼1795)도 황윤석이 교유한 중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황윤석은 정경순의 아들인 정동기(鄭東驥, 1750∼1787)와 그의 사촌인 정동유(鄭東愈, 1744∼1808)를 통해 천문역산학과 관련된 많은 자료를 접할 수 있었다. 『주영편(晝永編)』이라는 독특한 저술의 저자인 정동유는 경학(經學)과 예학뿐만 아니라 천문학, 지리학, 수학, 의학과 같은 자연학 분야와 제자백가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두루 섭렵한 인물이었다.
정철조(鄭喆祚, 1730∼1781)·정후조(鄭厚祚) 형제와 그 매제인 이가환(李家煥, 1742∼1801) 등도 주목된다. 정철조는 홍대용, 박지원 등과 밀접한 교유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혼인관계를 통해 박지원의 반남(潘南) 박씨(朴氏) 가문, 이가환의 여주(驪州) 이씨(李氏) 가문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정철조는 당시에 “재예(才藝)가 절륜(絶倫)하다”고 소문이 자자했으며, 그의 아우인 정후조는 지리학으로 이름이 높았고, 이가환은 박식하다고 평가되었던 인물이다.
그 밖에 황윤석의 교유권에서 주목되는 인물로는 달성 서씨(達城徐氏) 가문의 서명응(徐命膺, 1716∼1787)·서호수(徐浩修, 1736∼1799) 부자, 풍양 조씨(豊壤趙氏) 가문의 조진관(趙鎭寬, 1739∼1808)·조진택(趙鎭宅, 1746∼?) 형제, 그리고 당대에 박학자로 명성을 얻었고 정조대에 『문헌비고(文獻備考)』 증보 작업에 참여했던 이만운(李萬運) 등을 들 수 있다. 황윤석은 이처럼 개성 있는 학자들과 활발히 교유하면서 그들이 소장하고 있던 서학서를 빌려 보기도 하고, 그 내용에 대해 심도 있는 토론을 펼쳐나가기도 했다.
둘째는 서울에서 관료생활을 하면서 직무 수행과 관련하여 서학서를 접하게 된 경우다. 황윤석은 자신이 근무하고 있는 관청의 서리(書吏)들을 통해 평소 관심 있는 서학서를 구입하기도 했고, 각종 사행에 참여하는 역관들과 친분이 있는 이서배(吏胥輩)들에게 부탁해서 중국에서 서학서를 구입해오도록 요청하기도 했다.
1766년(영조 42) 황윤석은 원흥윤(元興胤)으로부터 귀가 솔깃한 이야기를 들었다. 황윤석이 평소에 갖고 싶어했던 『수리정온(數理精蘊)』이나 『역상고성(曆象考成)』을 구입하고자 한다면 자신의 매형인 이심해(李心海)가 사행갈 때 역관에게 부탁하면 될 것이라는 얘기였다. 이에 황윤석은 이심해에게 편지를 보내 두 책을 구해줄 것을 요청했다.
1768년(영조 44) 8월에는 의영고(義盈庫)의 서원(書員)인 김흥대(金興大)를 통해 10월에 동지사 부사로 연경에 가는 구윤옥(具允鈺, 1720~1792)을 수행하게 된 김흥대의 동생에게 『기하원본』과 『수리정온』을 구입해오도록 부탁했다. 1769년(영조 45) 8월에는 관상감(觀象監) 서원(書員)을 역임한 바 있는 서리를 시켜 『역상고성』 한 질을 구입하고자 했으며, 동부도사(東部都事)로 재직 중이던 1778년(정조 2) 8월에는 부리(部吏) 윤성창(尹聖昌)을 시켜 그와 친분이 있는 관상감 책색서리(冊色書吏) 황덕문(黃德文)으로부터 『역상고성』과 『수리정온』 두 질을 구입하게 하였다.
셋째는 서적 판매상인 책주릅[책아인(冊牙人)]을 통해 서학서를 구입하는 경우다. 황윤석은 일찍이 『율력연원(律曆淵源)』을 열람하고 이 책이 진한(秦漢) 이래로 율(律)·역(曆)·수(數) 삼가(三家)에 일찍이 없었던 바라고 하면서 찬탄을 금치 못했다. 『율력연원』은 『역상고성』 『율려정의(律呂正義)』 『수리정온(數理精蘊)』의 3부작으로 구성된 거질의 총서로(100권), 그 내용은 천문역산학(天文曆算學), 율려학(律呂學), 수학을 포괄하고 있었다.
황윤석은 여러 경로를 통해 『율력연원』을 구입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1770년(영조 46) 4월 15일 황윤석은 박사억(朴師億), 박사항(朴師恒), 이원복(李遠福) 등 책주릅 세 사람의 방문을 받았다. 이들은 황윤석에게 김선행(金善行)의 집에 있는 『율력연원』 70책을 130냥에 구입해주겠다고 제안하였다. 황윤석은 주변에서 돈을 빌려서라도 이 책을 구입하고자 노력했다. 이 책을 구입해서 고향으로 내려가 사방의 벽에 비치해두고 때때로 살펴보기를 염원했기 때문이다.
황윤석을 잘 아는 주변 사람들은 책값이 지나치게 비싸게 책정되었다며 이는 책주릅들이 부당하게 이익을 꾀하는 것이라고 한탄하기도 했고, 황윤석이 빚을 내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발 벗고 나서 주선하기도 했지만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당시 책주릅들은 구매 의욕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책값을 흥정했는데, 황윤석에게 130냥의 높은 가격을 부른 것은 황윤석의 책 욕심과 구매 의욕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황윤석은 빚을 내는 일이 쉽지 않자 『율력연원』을 구입하려던 계획이 어그러질까봐 입맛을 잃을 지경이었다. 결국 『율력연원』을 구입하려 했던 황윤석의 노력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황윤석은 6월 13일에 전승지 김치공(金致恭)의 둘째 아들이 75냥의 가격에 『율력연원』을 구입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그는 책이 주인을 잘못 만나 불행하다고 한탄했다.
이처럼 여러 경로를 통해 황윤석이 접한 서학 관련 문헌과 물품을 분류해보면 [표 1]과 같다.
종류 | 서명·품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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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역법서 (天文曆法書) |
혼개통헌도설(渾蓋通憲圖說), 표도설(表度說), 역상고성(曆象考成), 칠요표(七曜表), 신법역인(新法曆引), 역상고성후편(曆象考成後編), 서양역통(西洋曆通) |
산서 (算書) |
동문산지(同文算指), 기하원본(幾何原本), 구고의(句股義), 원용교의(圜容較義), 수리정온(數理精蘊) |
천문도 (天文圖) |
태서건상도족자(泰西乾象圖簇子), 황적이극총성도(黃赤二極總星圖) |
세계지도 (世界地圖) |
이마두오대주지도(利瑪竇五大洲地圖), 이마두만국전도(利瑪竇萬國全圖), 만국전도(萬國全圖), 서양오대주지도(西洋五大洲地圖) 양폭(兩幅), 서양만국곤상전도(西洋萬國坤象全圖) 남북면(南北面) 2폭(幅) |
천주교 교리서 |
천주실의(天主實義) |
수리학 (水利學) |
태서수법(泰西水法) |
기계 | 자명종(自鳴鍾) |
그림 | 대서양화족자(大西洋畫簇子), 서양화본[西洋畫本, 서양화족자(西洋畫簇子)] |
자명종에 대한 집념
황윤석은 일찍부터 자명종[自鳴鍾, 윤종(輪鐘)]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황윤석이 초산(楚山, 정읍의 옛 이름)의 이언복(李彦復)이 60냥에 구입해서 소유하고 있던 자명종을 구경한 것은 그의 나이 열여덟 살 때인 1746년(영조 22) 8월이었다. 그때 자명종은 서양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거나 왜국(倭國)을 거쳐 조선에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당시 조선에서 자명종을 제작할 수 있는 인물로는 서울의 최천약(崔天若)과 홍수해(洪壽海), 그리고 전라도의 나경훈[羅景壎, 나경적(羅景績)]이 거론되었다.
황윤석은 1761년(영조 37)에는 김상용의 현손인 김시찬(金時粲, 1700∼1767)의 집에서 나경적이 강철로 제작한 자명종을 직접 보았으며, 1769년(영조 45) 4월에는 이해(李瀣, 1496∼1550)의 후손인 이광하(李光夏)로부터 홍대용이 자명종과 혼천의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기도 했다. 실제로 홍대용은 숙부 홍억(洪檍, 1722∼1809)을 따라 중국에 갔을 때 자명종을 구경하기 위해 흠천감(欽天監) 박사(博士)인 장경(張經)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으며, 천주당을 찾아가서 자명종을 구경하기도 했다. 당시 홍대용이 얻어왔다는 자명종은 크기가 담배 상자(南草銅匣)만 한 것이었다고 한다.
홍대용이 연행했을 때 한글로 기록한 여행 견문록이다. 그는 이때 중국의 지식인들을 만나 교류하였다.
그렇다면 자명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서양의 기계식 시계를 가리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동시보장치를 갖춘 천문시계[혼천시계(渾天時計)]를 뜻하는 것이었다. 황윤석은 후자를 ‘윤종(輪鐘)’이라고 표현했다. 그에 따르면 자명종은 본래 서양의 여러 나라에서 창시된 것인데 마테오 리치에 의해 중국에 전파되었고, 이후 북경의 시장에서 거래되어 사신들을 통해 조선에 전해졌으며, 장저(江浙) 지역의 무역선들을 통해 일본에도 전파되었다고 한다.
황윤석은 1774년(영조 50)에 염영서(廉永瑞)라는 사람으로부터 윤종을 구입했다. 염영서는 일찍이 나경적과 함께 윤종을 제작한 적이 있고 홍대용의 대기형(大璣衡) 제작에도 참여한 바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1772년(영조 48) 박찬선(朴燦璿)·박찬영(朴燦瑛) 형제의 초청에 따라 흥양(興陽)의 호산(虎山)에 수년 동안 머물면서 윤종 2가(架)를 제작했다. 황윤석이 구입한 것은 그 가운데 하나였다. 홍대용이나 박찬선 형제는 모두 김원행 문하에 출입했던 인물들로 황윤석과 학연이 있었다. 염영서는 이들을 통해 황윤석이 천문의기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이에 윤종을 판매하고자 황윤석을 직접 방문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매매 과정은 순조롭지 않았다.
염영서가 일부 장치가 고장난 윤종을 가지고 황윤석을 찾아온 것은 1774년(영조 50) 1월 20일이었다. 염영서는 5일간 머물다가 선급금으로 5냥을 받고 1월 24일 돌아갔는데, 3월에 와서 고장난 곳을 고쳐달라는 황윤석의 부탁에 난색을 표했다. 이에 황윤석은 2월 2일 이웃 마을 사람과 수리를 시도했다. 염영서가 수리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는 터라 막연히 기다릴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도는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2월 25일 염영서가 다시 와서 황윤석과 함께 수공업자(冶家)를 찾아가 윤종을 수리했으나 3월 3일까지 완성하지 못했다. 이에 염영서는 돌아갔고 황윤석은 2냥을 얹어주면서 다시 와서 고쳐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9월에도 염영서는 고치지 못하고 되돌아갔다.
해를 넘겨 1775년(영조 51) 전주부(全州府)의 장인 김흥득(金興得)이 와서 윤종을 수리해주겠다면서 수리비로 4냥을 제시했다. 2월 21일에 드디어 야장(冶匠) 송귀백(宋貴白)이 와서 함께 윤종을 수리했는데 그는 뛰어난 기술자였다. 3월 27일 마침내 수리가 대략 마무리지어졌고 송귀백이 돌아갈 때 황윤석은 4냥을 지급했다. 2월 21일부터 3월 27일까지 36일 동안 황윤석은 수리 작업에 골몰하다가 손가락에 마비 증세가 오기도 했는데, 그는 이것이 ‘상지(喪志)’의 해로움이라고 탄식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781년(정조 5) 12월 12일 나주에 거주하는 염영서의 아들 염종득(廉宗得)이 친척인 염종신(廉宗愼)을 통해 자신의 아버지가 빌려준 윤종을 돌려달라고 요청하는 편지를 황윤석에게 보냈던 것이다. 이에 황윤석은 염영서가 자신에게 윤종을 팔고 전후로 7냥을 받아간 사실을 적시하고, 만약 당시에 윤종 수리가 완벽하게 되었다면 돈을 더 지불했을 텐데 염영서가 두 차례에 걸쳐 수리했으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결국은 자신이 야장 송귀백과 한 달 넘게 수리하면서 비용이 매우 많이 들었으므로 돌려줄 수 없다는 뜻을 전달했다. 황윤석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이 수리한 부분이 절반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황윤석은 왜 이토록 자명종에 애착을 품었을까? 그는 이것이 자신의 ‘호고(好古, 옛것을 좋아함)’ 취미에서 비롯되어 ‘완물상지(玩物喪志)’로 귀결된 것이라고 자책했다. 그러나 실제로 이는 주희나 이황, 송시열이 선기옥형(璿璣玉衡)을 제작하여 소유한 사례를 본받고자 한 행위였다. 선기옥형은 『서경(書經)』에 등장하는 천체관측 기구로서 요순(堯舜)으로 대표되는 유교의 성왕(聖王)들이 천명을 받드는 정치를 어떻게 행했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도구였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자명종은 단순한 ‘완물(玩物)’이 아니라 ‘이수(理數)’와 관계된 중요한 물품이었던 것이다.
서학과 율력산수학, 그리고 『성리대전주해(性理大全註解)』
이처럼 황윤석은 서학서나 서양식 기계장치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황윤석은 서양의 과학기술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동시대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황윤석은 서양의 과학기술 가운데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을 취사선택했다. 그것은 자신의 학문 체계를 정립하기 위한 시도였다. 그렇다면 황윤석이 주목했던 서양의 과학기술 분야는 어떤 것이었을까?
1764년(영조 40) 2월 7일 황윤석은 전주에 있는 이기경(李基敬, 1713∼1787)의 집을 방문했는데 여기서 『천주실의(天主實義)』를 보게 되었다. 이 책을 접한 황윤석의 첫 소감은 “몹시 천박하고 누추해서 볼만한 것이 없다”는 비평이었다. 여기서 황윤석은 서학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서양의 천주교에 대해서는 매우 ‘천박하고 누추하다(淺陋)’고 평가한 반면 역산(曆算)과 수법(水法)에 대해서는 ‘‘천고(千古)에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나다(卓絕千古)’고 높이 평가했다.
“성현들의 성리학문(性理學問)의 학설은 염락관민(濂洛關閩, 주돈이·정호·정이·장재·주희의 성리학)보다 숭상할 바가 없고, 역산의 방법은 서양보다 뛰어난 것이 없다는 것이 아마도 바꿀 수 없는 논의인 것 같다”는 그의 평가가 이러한 입장을 잘 보여준다. 황윤석은 「제서양화족(題西洋畫簇)」이라는 글에서 “그 도(道)가 『천주실의』에 실려 있으나 나는 보지 않는다. 그 수(數)는 『기하원본』에 갖추어져 있는데 나는 취한다”라고 읊었다. 이는 서학의 도(道, 종교)와 수(數, 과학기술)를 구분하여 수만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황윤석의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황윤석은 청에서 편찬한 『율력연원』을 진한(秦漢) 이래로 율(律)·역(曆)·수(數) 삼가(三家)에 일찍이 없었던 책이라고 찬탄하였다. 황윤석은 우리나라의 선배들 가운데 경학(經學)과 예학(禮學)에 대해서는 언급한 이가 있었지만 이수(理數)의 미묘함에 대해서는 심도 있게 다루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황윤석 자신이 보기에 율력은 국가를 경영하고 천하를 다스리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고, 이는 유자(儒者)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황윤석은 ‘율력’의 문제를 ‘이수’의 차원에서 주목했으며, 수를 밝히면 율력의 문제도 자연스럽게 포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율·역·수 삼가에 대한 황윤석의 관심은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1788년(정조 12)의 기록에 따르면 황윤석은 서양의 학문 가운데 역상·수리·율려(律呂)·공장(工匠) 네 가지가 ‘천고에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나다’고 평가하면서 천주교 신앙 문제 때문에 이것들까지 폐지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서거 직전인 1791년(정조 15) 4월 11일의 기록에서도 분명히 확인된다.
그는 『천주실의』로 대표되는 서교(西敎)에 대해서는 ‘이단사설(異端邪說)’이라고 단언했지만 서양의 ‘율려·역상·산수’의 삼가, 기계제작술과 화법[공야단청지법(工冶丹靑之法)]은 후세에 전해야 하는 것으로 높이 평가했다. 이는 서양의 수학과 천문역산학, 그리고 과학기술과 화법에 대한 황윤석의 긍정적인 자세를 보여주는 예다. 동시에 그가 ‘율·역·수’의 문제, 다시 말해 율력학과 수학의 문제에 얼마나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는가를 절실히 보여준다. 이와 같은 황윤석의 학문적 관심이 최종적으로 율·역·수 분야에서 당대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는 서적인 『율력연원』에 집중되었던 것이다.
황윤석은 십대 후반부터 성리학의 기본 텍스트인 『성리대전(性理大全)』을 탐구하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이러한 황윤석의 노력은 평생토록 지속되었는데, 그것은 『성리대전』의 의심나는 부분을 차록(箚錄)하고 틀린 부분을 바로잡는 작업이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역범(易範)·성명(性命)·이기(理氣)의 근원으로부터 율력산가(律曆算家)에 이르는 전통 학문의 모든 분야를 포괄하는 박학(博學)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것이 『성리대전』의 완벽한 주석 작업을 위한 필수적인 학습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요컨대 황윤석은 서학에 기초한 최신의 율력산수학(律曆算數學)을 활용하여 『성리대전』을 수정·보완함으로써 새로운 대전(大全, 『성리대전주해(性理大全註解)』)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백과사전에서 발췌〉
석전 황욱 (黃旭1898.1.12∼1993.3.22) 선생 묘소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
비문은 김남곤 시인이 지었으며,
글씨는 서에가이자 석전의 손자인 황방연이 썼다고.
석전 선생의 악필은 단순한 변용이나 응용이 아닌 석전 예술혼의 결정체다. 악필법은 일체의 기교가 배제된 마음과 손이
서로 호응하지 않으면 쓸수 없는 ‘심법(心法)’의 글씨다. 가야금 줄의 팽팽한 긴장과 기백 넘치는 석전체가 그냥 우연히
생겨난 것은 아니다. 석전이 가야금과 소리와 활쏘기에 전념하면서 홀로 정진했던 청장년기 각고의 세월이 밑거름이
된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석전의 악필은 이전의 맑고 담담한 분위기와는 달리 삽필(澁筆)의 구사가 두드러지고
약간의 과도기를 거친 뒤 83- 84살에 오른손 악필의 절정을 이루었다. 85살부터는 오른손 악필도 어렵게 되자
87살에 왼손 악필을 시도했다. 왼손악필을 구사했던 10년 동안 그의 서풍은 93살을 기점으로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곧 90살 까지는 자형(字形)이 오른쪽 어깨가 올라가는 일반적인 행서의 흐름을 유지하다가 93살부터는 반대로 오른쪽
어깨가 내려가면서 자간(字間)의 흐름이 달라진다. 그러면서도 묘한 것은전체적으로 통일감과 안정감이 더욱 깊어졌다는
사실이다. 다른 서예가들과 달리 석전은 90살 이후에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다시 말해 노년의 신체적 한계를 극복한
기운생동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그의 예술이 득도(得道)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뜻한다.
인서구로(人書俱老 사람과 글씨는 더불어 늙는다)라는 상식마저 뛰어 넘은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석전은 밖으로 굴곡 많은 한국 근대사의 격랑을 헤치며, 안으로는 자신의 신체적 불운을 딛고 일어선 뜨거운 예술혼의
화신이었다.석전 선생은 63세(1973년)에 오른손 수전증으로 인해 붓을 잡기 어려워지자 손바닥으로 붓을 잡고 엄지로
붓 꼭지로 운필하는 악필법을 개발한다. 전화위복이었다. 묘하게도 새롭게 개발한 악필로 쓴 글씨들은 새 예술세계를
열었다. 마치 역대 서법이나 기교를 초월한 득도의 경지에 이른 듯 했다. 이전의 글씨가 한 마리 고고한 학이 자유로이
노니는 형상이었다면, 악필 글씨는 비상한 기운을 지닌 용(龍)이 힘차게 승천하는 듯한 형상을 띠었다.
이러한 그의 뛰어난 글씨는 친교가 있던 정인보(鄭寅普)·김성수(金性洙) 등으로부터 격찬을 받았다. 이로써 석전 서예의
명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까운 이웃의 비문과 선대의 묘비를 썼을 뿐 한 번도 서예가로서
중앙무대를 기웃거리지 않았다. 이는 해방 이후에도 이어져 국전(國展)에 전혀 참여하지 않고 초연하게 은자(隱者)
로서의 품격을 그대로 지켜 나갔다. 아무리 ‘진흙 속 진주’라고 할지라도 그 빛은 감출 수 없는 법.
마침내 1973년 석전은 전주 유지들의 강권에 못 이겨 회혼기념 서예전을 열게 된다. 그의 나이 일흔 다섯에 가진
첫 전시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동아일보사 주관으로 서울에서 희수 기념 전시회를 개최했다. 당시 전국의
서예가들이 그의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모일 정도로 많은 화제를 낳았다.
이후 석전은 매년 서울, 광주, 부산, 전주 등에서 초대전과 회고전을 가지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뿐만 아니라
1988년에는 구례 화엄사의 일주문 현판과 1991년에는 금산사 대적광전 현판휘호를 남겼다. 또 오목대와 한벽루
현판 요월대(邀月臺) 등 다양한 현판에 글씨를 새기며 큰 족적을 남기기도 했다.
'욕존선겸'
남에게 존경을 받고자 하면 자신부터 먼저 겸손해야 한다
'일물관만물’
한가지 사물을 통하여 만물의 이치를 통찰하라.
‘막현호은’
감추는 것보다 더 잘 드러내는 수 없고, 숨는 것보다 더 잘 드러나는 수 없다. (중용)
‘만법귀일’
만 가지 법이 하나로 귀결된다.
‘봉저난상’
봉새와 난새가 날아 오르듯이 활기차게 살라.
선비의 한 전범을 보여주며 악필이라는 독특한 서체의 경지를 이룩한 석전(石田) 황욱(黃旭)은 1898년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에서 태어났다. 황효익의 5남3녀중 2남이었다. 그의 가문은 15대를 내려온 문한세가(文翰世家)로
영조때 실학의 거장인 황윤석(1729-1791)의 종가(宗家) 7대손이다.
석전은 옛 선비들이 그러하듯 5살 때부터 한학과 서예를 익히며 군자의 덕과 도리를 깨우쳤다.
그러다 1918년 근촌 백관수의 권유로 서울 중앙고보에 입학, 신학문을 익힐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유가적 전통을
고집하던 부친의 명으로 자진 중퇴, 고향으로 내려와야 했다. 일본의 가르침을 거부한 아버지의 엄명때문이었다.
이렇듯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서 우국충절(憂國忠節)의 정신을 이어받은 석전은 1920년 일제의 암울한 시대상을
눈뜨고 볼수 없는데다 끓어오르는 열정을 삭이기 위해 처숙(妻叔) 노병권과 함께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이후 그는 꼬박 10년 세월을 금강산 돈도암에 기거하며 도학과 서도에 전념했다. 이때 탄탄한 기초가 닦이고
훗날 당당한 석전체의 원형이 마련되었다 그의 곧고 굳은 정신을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나중에 석전이
“곱게 보이려는 글씨 보다는 법필(法筆)을 섭렵하고 정심(正心)으로 써야 하고 욕심 없는 정자(正字)를 많이 써야
그 나름대로 자기의 창작서(創作書)가 된다”고 한 말은 자신이 기본에 얼마나 충실했는가를 말해준다.
또한 ‘여추획사 여인인니 (如錐劃沙 如印印泥(송곳을 잡아 모래위에 획을 긋듯 하고 머무를 때는 진흙위에 도장을
찍는 것과 같이 하여야 한다)’라는 주장도 이와 무관치 않다. 석전은 1930년 고향으로 돌아와 해방이 될 때까지
조선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 신위(申緯)를 사숙하며 옛선비들이 갖추어야 할
六藝 (禮·樂·射·御·書·數)를 더 깊숙히 익혔다.
풍진세상의 영욕을 멀리하고 도덕군자의 길을 지키는데 매진했다. 말하자면 석전은 중원의 강호에서 고수들의
도를 터득한 후 한국적인 풍토에 맞는 자신만의 필법을 찾아내 연마를 거듭했다. 이때 석전은 고창과 정읍 등지에서
시주(詩酒)와 활쏘기, 가야금을 즐겼으며 율계회를 결성하여 정악(正樂)을 합동연주하기도 했다.
- 위 석전에 관한 글은〈전북주간현대>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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