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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축제·전시·공연

원주 일원 폐사지 순례

2016. 6. 27


진공대사탑비 귀부 및 이수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흥법사지에 있는 고려시대의 탑비.

 940년. 귀부 높이 75㎝, 이수 높이 99㎝. 보물 제463호.

 

진공대사의 속성은 김씨이며, 경주 귀족 출신으로 법호는 충담(忠湛)이다.

21세에 구족계를 받고 율장(律裝)을 공부했다. 당나라에 유학, 운개사의 정원대사에게 법을 묻고

선종과 교종을 두루 섭렵하고 918년, 50세에 돌아왔다. 고려 태조는 그를 왕사로 임명, 흥법사를 중건케 한다.

  흥법선원을 이끌다 72세로 입적하니 태조가 진공(眞空)이란 시호를 내리고 비석과 승탑을 이곳에 세운 것이다.

 

 

 

 

귀부 높이 75㎝, 이수 높이 99㎝. 940년(태조 23)에 건립되었다.

현재 귀부와 이수는 절터에 남아 있으며, 비신은 일찍이 무너져서 단석(斷石) 4개가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있다.

아울러 진공대사탑도 흥법사 터에서 단석과 함께 경복궁으로 옮겨져 왔다.

귀부와 이수는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조각이 활달하고 화려하다.운룡을 새긴 이수 앞면의 가운데에는

 ‘眞空大師(진공대사)’라는 전액(篆額)이 있다.

 

 

 

 

비문은 태조가 짓고 문신 최광윤(崔光胤)이 당나라 태종의 글씨를 집자한 것으로 유명하다.

글씨는 2∼4㎝의 행서로 통일신라 말엽 당태종의 글씨가 전래되었다는 기록을 입증해주는 좋은 자료이다.

 

 

 

 

 

비의 뒷면에는 진공대사가 태조에게 올린 표(表)가 해서로 새겨져 있다.

거의 모든 글씨를 당태종의 글씨에서 집자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고유한 구성미는 찾아볼 수가 없으나,

당시 집자를 수행한 사람의 글씨에 대한 미적 사고를 엿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흐르는 서풍은 역시 당태종이 좋아한 왕희지의 서풍임을 여실히 드러낸다.

 

돌거북 오른편으로 흥법사지 3층 석탑이 보인다.

 

 

 

 

당 태종의 글씨를 집자한 진공대사탑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비문은 태조 왕건이 직접 지었고 글씨는 당 태종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어서 일찌기 주목을 받아왔다.

당 태종은 중국 서예사에서 명필로 꼽을 뿐 아니라 중국 서예사의 기틀을 다진 장본인이었다.

 당 태종은 임종시 자신의 무덤에 오직 왕희지의「난정서」만 넣어달라고 유언할 정도였다.

 

 익제(益齊) 이제현은 이 비석을 평 하길,

"말뜻이 웅장하고 깊고 위대하고 고와서 마치 검은 홀(笏)을 쥐고 붉은 신을 신고 낭묘(廊廟)에서

읍양(揖讓)하는 듯하다. 글씨를 보면 큰 글자와 작은 글자, 해서와 행서가 서로 섞여 있어 마치

난봉(鸞鳳)이 일렁이듯 기운이 우주를 삼켰으니 진실로 천하의 보물이다." 라고 했다.

 

이 비가 동강 난 사연을 영조 때 금석학자 이계 홍양호(洪良浩)는 자신의 문집에 이렇게 적었다.

"원주 영봉산 반절비는 고려 태조가 짓고 최광윤이 왕명을 받들어 당 태종의 글씨로 집자한 비다.

임란 때 왜놈들이 수레에 싣고 가다가 죽령에 이르러 비가 두 동강이 났다. 이에 왜놈들은 반을

버리고 갔다. 난리가 평정된 뒤 관동의 수령이 원주로 다시 가져오니 '원주 반절비'라 부르게 되었다."

 

태조 왕건이 비문에 적기를,

과인은 어려서 위무(威武)는 숭상했으나 학문에는 힘을 쓰지 아니한 탓으로 선왕의 법도를 알지 못합니다"

라는 겸손함과 동시에 대사의 열반을 애도하고 있다.

"지금 비록 스님의 육체는 사라졌지만 그 진실인 법체는 길이 남아 있도다. 전에는 물이 고이니

고기가 찾아옴을 기꺼워했건만 이제는 숲이 없어지니 날아가는 새를 슬퍼하도다.

 

보배를 감추고 법인(法印)을 알았도다.

자비의 그 배는 풍랑에 빠졌고

지혜의 등불은 그 빛을 잃지만

은빛 석등의 불꽃은 영원히 비추리.

 

 

(진공대사탑비 해설은 유홍준 저 '나의문화유산답사기 남한강편' 참조)

 

 


원주 흥법사지 삼층석탑

. 높이 3.69m. 보물 제464호

 

 

 

 

석탑은 2층 받침돌 위에 3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린 전형적인 일반형 석탑이다.

 바닥돌 위에는 하대석(下臺石)과 아래층 받침돌의 면석을 하나의 돌로 만든 4장의 널돌이 올려져 있다.

 면석의 각 면에는 모서리 기둥과 가운데 기둥을 새기지 않고 대신 안상(眼象) 3구씩을 새겨 놓았는데,

안상 안에는 꽃 무늬가 오목새김되어 있어,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절터는 현재 밭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석탑은 밭 가운데에 서 있다.

2장의 널돌로 구성된아래층 받침돌의 덮개돌은 너비가 좁은 편인데, 윗면의 경사가 심하여

특이하며, 윗면 가운데 부분에 새겨진 얇은 1단의 굄은 간략화 과정을 보여준다.

윗층 받침돌의 면석은 여러 장의 널돌로 불규칙하게 구성되었고

  너비가 좁은 모서리 기둥과 가운데 기둥이 새겨져 있다.

밑면에는 쇠시리인 부연(副椽)이 없고, 윗면에는 경사가 있으며,

윗면 가운데 부분에는 3단의 각진 받침이 있다.

 

 

 

 

 

탑신부(塔身部)는 받침돌에 비해 크기가 급격히 작아져 좋은 비례라고는 할 수 없다.

곧 1층 몸돌의 너비는 반으로 줄었고, 높이도 약 2/3로 줄었으며, 2층 이상의 몸돌 높이는

 1층 몸돌에 비해 2/3로 줄었기 때문이다. 각 층의 몸돌에는 가느다란 모서리 기둥만 조각되었을 뿐

 다른 조각은 없다. 지붕돌은 추녀 부분이 많이 손상된 상태인데, 밑면 받침은 각 층마다 4단이고,

 얕은 밑면 받침에 비해 윗면인 낙수면은 두꺼워 경사가 심하다. 추녀 밑은 전각(轉角)에 이르러

약간의 반전(反轉)을 보인다. 각 지붕돌의 꼭대기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한 1단의 각진 굄이 있다.

 

 

 

 

 

이 석탑은 규모도 작을 뿐 아니라 기단부(基壇部)와 탑신부의 비례가 맞지 않고,

석재 구성이나 표면 조각도 기백을 잃고 약체화되어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건립시기는 고려 초기 이후일 것으로 추정된다.

 

. 머리장식인 상륜부(相輪部)에는 심하게 손상된 노반만 있을 뿐이었는데

근래들어 누군가가 새로운 석재로 복발을 만들어 올려놓은 모습이었다.

 

 

 

 

사지 한 편에 수습된 와편.

 

흥법사터에는 이전부터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 및 석관(보물 제365호)과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보물 제463호)의 귀부를 비롯하여, 높이 약 3m,

길이 약 60m 규모의 석축, 문터, 여러 주춧돌이 남아 있었다.

흥법사는 원래 1만 평에 이르는 대찰이었다는데 절터는 모조리 농가와

농지로 변한 모습이어서 세월의 무상함이 온 몸으로 젼해져 온다.

 

 

 

 

(전)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 확대 이미지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原州 興法寺址 廉居和尙塔) 국보 제104호

 

 

이 탑은 본래 원주 안창리 흥법사터에 있었는데 여러 차례 옮겨졌다가, 1914년 탑골공원으로

옮긴 것은 확실하며, 경복궁 뜰로 옮겼다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뜰에 자리잡고 있다.

탑의 양식은 이른바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이라 하는 것으로 현재 전하는 사리탑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이후 대부분의 팔각원당형 사리탑이 이 양식을 따르고 있어 그 최초의 작품이라는 의의를 지니는 작품이다.

 

이 부도탑은 비록 다른 팔각원당형 부도에 비하여 규모는 크지 않으나 전체적으로 우아한 기품과 소박한 조각

솜씨를 보이고 있으며 세부의 조각도 아릅답다.

이 부도탑의 구조는 모든 부재의 평면이 팔각을 이루고 있다. 전체적인 구성은 기단부 위에 탑신을 놓고

그 위에 옥개석을 얹었으며, 정상에 상륜부가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기단 아래에 사각형 지대석(地臺石)이 있으나 나중에 만들어 넣은 것이라서 본래의 형태가 어떠했는지 알 수 없다.

기단은 상·중·하대석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대석에는 각 면에 사자(獅子)를 양각으로 새겼는데

모두 자세가 다르다. 하대석 윗면에는 중대석을 받치는 3단의 괴임이 있는 것이 특이하다.

 다소 낮은 듯하게 보이는 중대석에는 안상(眼象)을 새기고 연(輦)·향로·화문(花紋) 등을 새겼는데,

특히 연은 연좌(蓮座)·보개(寶蓋)·보주(寶珠)·화문 등이 장식되어 화려하다.

상대석은 아래 위의 두 면으로 구성되었는데, 아랫면에 팔각으로 된 각형(角形) 받침을 내어 윗면에 마련한

중대석의 괴임대와 대칭을 이루게 하였다. 아랫면의 옆은 앙련(仰蓮)을 이중으로 마련하여 매우 화려하다.

윗면에는 가장자리에 둥근 괴임을 돌리고, 그 중앙에 다시 2단의 괴임을 두었다.

 

상대석과 탑신부 사이에는 별도로 만든 낮은 형태의 팔각 괴임돌을 넣었는데, 각 면에 안상을 새기고

 그 안에 연화좌 위에 앉아 있는 천부상(天部像)을 새겨넣었다.사리를 모셔둔 탑신(塔身)은 목조 건축을

그대로 형상화하였기 때문에 지붕 등에서 깊게 패인 기왓골, 기와의 끝마다 새겨진 막새기와의 모양,

밑면의 서까래 등 목조 건축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다. 탑신 각 면 좌우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우주(隅柱)를 새겼으며, 앞과 뒷면에 문비(門扉)를 새기고 그 안에 자물쇠와 문고리 두 개씩을 양각하였다.

또한 문비 양쪽에는 각각 사천왕을 새겨 옹호하는 모습을 나타냈다. 머리 뒤로 두광을 갖추고 갑옷을 입었으며

무기를 손에 쥔 사천왕상은 매우 사실적이다.

 

탑신 위에 놓인 옥개석(屋蓋石)은 밑면에 1단의 각형 받침을 새기고, 그 위 처마 아래에는 비천상(飛天像)을

한 면씩 건너서 네 면에 새겼다. 옥개 윗면은 우동형(隅棟形)을 표시하고, 우동 끝에 잡상(雜像)을 배치하였던

흔적이 남아 있다. 처마 아래 낙수면에는 기왓골을 나타내었다.

옥개석 윗면에는 팔각으로 높다랗게 각형 괴임을 마련하여 상륜부(相輪部)를 받도록 하였다.

현재 상륜부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지만, 1920년대에 촬영한 사진을 보면 옥개석 위에 복발 1석과

보륜 2석으로 된 상륜부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금동탑지(金銅塔誌)

(국립중앙박물관)

탑을 옮겨 세울 때 발견되었는데, 신라 문성왕 6년(844)에 이 탑을 세웠음을 알게 되었다고.

염거화상(廉居和尙)은 하대신라 선종의 개산조인 도의국사(道義國師)의 법맥을 이은 제2조로

제3조인 보조선사 체징(體澄)으로 이어졌다. 체징이 장흥 가지산 보림사(寶林寺)를 개창한 것이

하대신라  구산선문의 첫 가람이 됐으니 염거화상의 불교사적 위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 및 석관 확대 이미지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 및 석관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365호.) 

 

나말선초에 활동하면서 고려 태조의 두터운 존경을 받았던 진공대사 충담(忠湛, 869∼940)의 승탑.

 높이는 2.91m이고, 석관의 높이는 0.48m이다.

 

 네모난 바닥돌 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 왼쪽에는 석관이 따로 놓여 있다.신라 승탑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원당형(圓堂形)을 대체로 따랐는데, 윗면에 단면 8각인 2단의 테두리 장식을 새긴 바닥돌 위에 올려져 있다.

 아래받침돌은 위아래 2단으로 이루어졌다. 아래단의 윗부분에는 덮개돌 모양이 조각되었고, 8각의 각 면에는 뿔이

안쪽으로 날카롭게 뻗어 있는 넓직한 안상(眼象)이 1구씩 오목새김되었는데, 안상 안은 꽃 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윗단은 연화대(蓮花臺)로 꾸며졌다. 곧 2장의 꽃잎이 아래로 향한 복련(覆蓮)의 연꽃 무늬 16개가 둘러 새겨져

있으며, 각 모서리에는 연꽃 잎 안쪽으로 귀꽃이 나지막하게 장식되어 있다.

 

가운데받침돌은 8각 모서리의 모를 죽여 단면이 거의 둥근데, 겉면 전체에 웅장한 구름 무늬와 함께 용의 몸통이

꿈틀거리듯이 뒤엉켜 웅대하면서도 건장하게 돋을새김되었다. 특히 용의 눈이나 코, 입, 비늘 등이 살아 있는

것처럼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서, 마치 하늘로 오르는 용의 장엄한 모습을 직접 바라보고 있는 느낌을 준다.

 윗받침돌 역시 연꽃 무늬로 가득 장식되었다. 곧 밑면에는 1단의 받침이 마련되어 있고, 윗면에는 2단의 8각

받침이 새겨져 있으며, 2장의 꽃잎이 위를 향해 있는 앙련(仰蓮)의 연꽃 무늬 16개가 둘러 돋을새김되었다.

그 모습은 아래 받침돌의 연화대와 비슷하지만, 각 모서리마다 귀꽃은 장식되어 있지 않다.

 

단면 8각의 몸돌은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다. 각 모서리에는 기둥이 조각되었는데,

기둥 안쪽의 가운데부분과 위아래부분에 꽃 무늬가 장식되어 특이하다.

지붕돌 역시 단면 8각인 하나의 돌로 조성되었다. 밑면에는 3단의 받침과 함께 2중의 서까래를 새겨

목조 건물의 겹처마와 같은 의장(意匠)을 나타내고 있다. 경사가 완만한 낙수면에는 각 모서리마다

 내림마루인 우동(隅棟)이 제법 굵게 표현되었고, 전각(轉角)의 반전(反轉)이 심한 각 모서리에는 귀꽃이

높이 솟아 있다. 특히 모서리 사이에는 기와를 입힌 모양의 기와골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는데,

기와골은 각 면의 추녀끝에 이르기까지 암막새 기와와 수막새 기와를 상세하게 조각하여 밑면의 서까래와

함께 당시에 건립되었던 목조 건물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머리장식인 상륜부(相輪部)는 보개(寶蓋)

만이 남아 있을 뿐 모두 없어져 정확한 모습을 알 수 없다.

 

석관은 충담과 관련된 유물을 경문(經文)과 함께 봉안한 돌로 만든 상자이다.

 윗부분을 수평으로 자른 우진각지붕 모양의 덮개돌과 길고 네모난 상자 모양의 몸통으로 이루어졌는데,

 비록 입구의 가장자리 중에 뒤쪽 일부가 깨져 있지만, 현재 전하는 석관 가운데 원래의 모습을 거의

완전하게 갖추고 있는 희귀한 유물이다. 몸통에는 넓은 가로띠를 둘러서 위아래를 구분하였다. 윗단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지만, 아랫단에는 앞면과 뒷면에 각각 1구씩, 좌우면에 각각 2구씩 모두 6구의 안상을

 새겼다. 안상의 조각 수법은 승탑의 아래받침돌 아랫단에 새겨져 있는 안상과 비슷한데, 승탑과 달리

안상 안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법천사지(法泉寺址)       (강원도 기념물 제48호)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명봉산 소재.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지만, 『고려사(高麗史)』,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동문선(東文選)』 등의 문헌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법천사(法泉寺)는 신라 말인 8세기에 산지가람(山地伽藍)으로

 세워져 고려시대에 대대적으로 중창(重創)된 사찰이다. 화엄종(華嚴宗)과 더불어 고려시대 양대 종단이었던

법상종(法相宗)의 고승 정현(鼎賢)이 주지를 맡아 법상종 사찰로 번성하였다.

 

특히 지광국사(智光國師)가 초년(初年)에 수학하고 은퇴하여 머물다 입적(入寂)한 곳이므로,

 이 시기가 전성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초기에 유방선(柳方善)이 이곳에서 강학(講學)하였으며,

권람, 한명회, 강효문, 서거정 등의 학자들이 여기 모여 시를 읊고 시문을 남겼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전소된 뒤 중창되지 못하였다.

 

 

 

 

 

금당(金堂) 터와 탑비전지(塔碑殿址)

 

 

 

 

 

 

용두(龍頭)와 석탑재(石塔材)

 

 

 

 

 금당터의 석조물

 

 

 

 

지광국사현묘탑비(法泉寺址 智光國師塔碑)

-국보 제59호-

고려 문종24년(1070년) 지광국사가 법천사에서 입적하자 그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사리탑인  현묘탑과

 함께 이 비를 세워놓았다. 현묘탑은 현재  경복궁으로 옮겨졌고 탑비만이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비문은 정유산(鄭惟産)이 짓고, 글씨는 안민후安民厚)가 구양순체를 기본으로  부드럽고 단아한 필체로 썼으며

비문에는 지광국사가 불교에 입문해서 목숨을 다할 때까지의 행장과 공적을 추모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돌을 세우고 왕관 모양의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거북은 목을 곧게 세우고 입을 벌린 채 앞을 바라보고 있어 용맹무쌍한데, 얼굴은 거북이라기보다

 용의 얼굴에 가까운 형상으로, 턱 밑에는 길다란 수염이 달려 있고 부릅뜬 눈은 험상궂다.

 

 

 

 

지광국사 해린(海麟)은 당시 원주지방의 토족이었던 원씨(元氏)출신의 명승으로

역대왕의 예우를 받고 삼중대사(三重大師)·승통을 거쳐 1056년(문종 12) 왕사에, 1058년 국사에 올랐다.

원주 출신으로 법고사(법천사) 관웅(寬雄)스님의 가르침을 받다가 개경 해안사(海安寺)에서 삭발했다.

해린은 불과 21세에 대선(大選)에 급제하였는데 "이때 법상(法床)에 앉아 불자(佛子)를 잡고 좌우로 한 번

휘드르니 가히 청중이 모여 앉은 걸상이 부러진 것 같았다"고 한다. 이에 임금은 해린을 찬양하고

대덕(大德)이란 법계를 내렸다.

 

 

 

 

독특한 무늬가 돋보이는 등껍질은 여러 개의 사각형으로 면을 나눈 후

그 안에 왕(王)자를 새겨 장식하였다. 비몸돌에서 눈에 띄는 것은 양 옆면에 새겨진 화려한 조각인데,

 구름과 어우러져 여의주를 희롱하는 두 마리의 용이 정교하고도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머릿돌은 네 귀가 바짝 들린 채로 귀꽃을 달고 있는데,

그 중심에 3단으로 이루어진 연꽃무늬 조각을 얹어 놓아 꾸밈을 더하고 있다.

 


 

높이 455㎝로서 비면 주위에는 아름다운 국화문양을 조각하였고

좌우 양쪽에는 각각 두 마리의 나는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모습을 양각으로 조각하였는데,

 이는 11세기를 대표하는 최고의 걸작이다.

 

 

 

 

해린은 성종. 목종. 현종. 덕종. 정종. 문종에 이르는 여섯 왕을 거치며

대사. 중대사(重大師)승통(僧統)의 법계를 받는다.

 

 

 

 

문종은 직접 개성 봉은사(奉恩寺)를 찾아 해린을 왕사(王師)와 국사(國師)로 추대한다.

문장은 물론, 음운학과 서화에도 능했다는 해린.

역대 왕들은 지광국사를 왕실로 초청하여 법화경과 유식학(唯識學) 등의 법문을 들었으며

 어가에 해린을 동승케하여 가히 부처에 버금가는 예우를 했다고 한다.

 

 

 

문종은 자신의 넷째아들을 출가시켜  지광국사가 법을 펴던

개성 현화사(玄化寺)에 머물게 하니 그가 곧 대각국사 의천이다.

 

 

 

비석 뒷면의 음기(陰記) 

 

 

 

 

 

84세(1067년)에 이른 지광국사는 자신의 생이 다했음을 알고 출가동진했던 법천사로 돌아와

그해 10월 23일 열반에 들었다. 이에 문종은 시호를 지광(智光), 탑호를 현묘(玄妙)라 내리고

비문을 지으라 명하니 그것이 곧 지광국사 현묘탑과 탑비인 것이다.

 

 

 

 

높이 4.5미터의 장대한 모습의 이 탑비는 조각에서도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걸작이자

금석문에 있어서도 명작으로 꼽는다. 나라 안에서 가장 크고 가장 아름다눈 비석이라는 평.

화강암을 떡 주무르 듯,  너무도 정교하고 화려한 모습은 보는이를 압도한다.,

돌거북이 구름문양을 타고앉은 모습인데 물고기 비늘이 목에 조각되어 있고, 등에는 칸칸마다

임금 王자가 새겨져 있다. 연화문 비석 받침대와 비신의 측면으론 운용문을 깊게 새겼다.

 

비석 상단부에 긴 사각틀을 돌려 그 안에 '지광국사현묘탑비'라 새기고 양 옆으론 봉황을,

위로는 비천상. 나무. 당초문. 해. 달들 정교하게 새겼다. 용머리 지불돌의 상륜부는 갓 모양으로

연과 구름이 현란하게 조각되어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희대의 명작이 아닐 수 없다.

 

지광국사가 열반에 든 지 18년 만인 고려 선종 2년(1085년)에 비로소 제자들의 수고로 승탑과

비가 조성되었는데 너무도 화려한 게 죄라면 죄. 일인들이 탐을 내 밀반출되는 수난을 겪는다.

(유홍준 저 '나의문화유산답사기 남한강편' 참조)

 

 

 

 

예전엔 저 앞에 보이는 자리에 불상광배(佛像光背), 불두(佛頭), 연화대 등이 있었는데

어디로 옮겨갔는지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국보 제101호)

 

 지광국사 해린의 부도로서 원래는 법천사지에 있던 것을 경복궁 내로 옮겨 놓은 것이다.

 이 부도는 신라시대부터 이어진 8각 원당형의 기본형에서 벗어나 평면 방형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보인다.  

그의 탑은 기존의 선사 중심으로 조성되던 승탑의 조형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탑의 평면을 방형으로 변화시키거나

 탑에 장식되지 않던 국화문, 변용된 귀꽃형 연화문, 대나무로 대체한 기둥을 사용하는 등 새로운 전통을 창조하였다

. 그리고 상층기단 면석의 사리봉송도, 산수문, 신선문 그리고 탑신석의 첨형 아치형 문비와 창문 조각은

당시의 동서문화교류, 회화, 사상적 배경을 알려 준다.  한국전쟁으로 산산히 부서진 것을 간신히 복원했다.

 

 


파란색 비닐로 뒤덮힌 모습에서 폐사지의 정취를 오롯이 느끼기엔 조금 산만하고 아쉽다는 느낌.

 

 

 

풍경은 다소 아쉽지만

그래도 이내 머릿속을 오가는 역사의 수레바퀴는 쉼없이 달리는도다.



최소한 각 계절마다 한 번 씩은 찾아와야 뭔가가 조금은 다가오는 법.


저 비닐 아래 두런대는 역사의 잠언을 내 꼭 듣고 마음에 새기리니...

 

 

 

저 느티나무 아래 꼭 한 번 머물고 싶었는데 오늘도 결국 돌아서고 마는구나.

 

 

 

 

 진한 아쉬움으로 돌아 보는 법천사 금당지

 

 

 

 

거돈사지(原州 居頓寺址)

 사적 제168호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현계산 기슭의 작은 골짜기를 끼고 펼쳐진 곳에 있는 절터이다. 발굴조사 결과 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처음 지어져 고려 초기에 확장·보수되어 조선 전기까지 유지된 것으로 밝혀졌다.

절터에는 중문터, 탑, 금당터, 강당터, 승방터, 회랑 등이 확인되었는데, 금당의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으로 2층 건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거돈사는 고려 초기 불교계의 중심이었던 법안종의 주요 사찰이었지만,

고려 중기 천태종이 유행하면서 천태종 사찰로 흡수되었다.

거돈사는 신라말 고려초의 절터로서 보기 드문 일탑식 가람으로 주목할 만한 곳이다.

 

탑비와 함께 원공국사승묘탑(보물 제190호)이라 불리는 부도가 있었는데

현재는 경복궁 뜰 안에 옮겨 놓았다.

 

 

 

 

도로 옆, 거돈사지 석축 모서리에 선 700년 수령 의 느티나무.

 

 

 

 

 

거돈사지 삼층석탑(原州 居頓寺址 三層石塔)

보물 제750호

중문지 북쪽의 탑으로 2중 기단 위에 3층탑을 세웠으며, 전형적인 신라 3층석탑의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사각의 돌로 된 축대 안에 흙을 쌓고 그 위에 탑을 세운 점이 특이하다.

 

 

 

 

 

탑이 땅과 닿는 부분인 지대석은 4개의 크고 긴 돌로 만들었고,

그 위의 기단부는 위 아래층 모두 모서리기둥 2개와 버팀기둥 1개를 새겨 놓았다.

탑의 몸돌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이 모서리기둥만 새겨 놓았다.

 

 

각 층 처마의 받침은 5단으로 꺾여 있으며, 탑의 추녀 끝은 약각 치켜들려 있어 날렵함을 보여 준다

 

 

 

 

추녀에는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보인다. 탑 위의 장식품으로는 노반과 복발이 남아 있으며,

 전체적으로 2, 3층 몸돌의 높이가 1층에 비하여 1/3으로 줄어 있는 등,

폭과 높이가 줄어가는 비율이 적어 매우 안정된 모습을 하고 있다.

통일신라 후기의 탑으로 볼 수 있다. 높이는 5.44m 이다.

 

 

 

 

사지 한쪽에 모아놓은 각종 석재

 

 

 

 

삼층석탑 뒷편에 자리한 금당터.

 금당을 중심으로 회랑을 두른 가람배치로 규모는 앞면 54칸, 옆면 3칸으로 2층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

 

 

 

 

금당 자리에 불상을 모셔놓았던 대좌.

철불이 모셔졌을 것으로 생각되는 돌대좌는 아름다운 수미단으로 장식됐을 터이다.

금당터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아늑한 느낌을 받는다.

 

 

 

 

원공국사 승묘탑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짝퉁 승묘탑.

 

원공국사(圓空國師)는 법명이 지종(智宗, 930∼1018)으로

경기도 양평 사나사(舍那寺)에 머물던 인도 승려 홍범(弘梵)에게서 득도하였고,

 광종 10년(959) 중국 후주(後周)에 유학하여 공부하였다. 970년 귀국한 뒤 975년 중대사(重大師)와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다. 그 뒤 대선사(大禪師)를 거쳐 왕사(王師)에까지 올랐다.

현종 9년(1018) 거돈사에 들어가 그 해에 입적하였다.

 

 

 

 

이미테이션 1

 지대석 2편은 원래의 것이다.

 

 

이미테이션 2


거돈사지원공국사승묘탑(居頓寺址圓空國師僧妙塔)

보물 제190호

 

 원공국사 승묘탑은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인 와다라는자가 훔쳐서

서울로 옮겨간 것을 회수해 1948년 경복궁으로 옮겨졌고 현재는 국립박물관 옥외전시장에 있다.

전형적인 팔각당 승탑으로 앞뒤 양면에는 문과 자물쇠, 좌우 양면에는 창을 냈으며, 나머지 네 면에는

사천왕 입상을 새겨놓았다. 중후한 품격이 느껴지는 전형적인 고려시대 승탑이다.

 

 

 

 

원래의 자리에 이미테이션 승탑이 세워지게 된데는 원주 사람들의 애환이 서려있다.

나라에 부탁해서 원 유물을 돌려주지 않으려면 복제품이라도 제자리에 세워달라 했다고 한다.

 

원공국사는 고려 초기의 천태학을 게승해 훗날 대각국사 의천이 고려 천태종을 일으키는

초석을 다진 공로가 있다. 이로 인해 대각국사가 고려의 천태종을 열었을 때 거돈사는

영암사(靈巖寺). 지곡사(智谷寺) 등과 함께 천태종의 기반사원이 됐다고 한다,

 

 

 

 

원공국사 승탑 언저리에서 거돈사지를 내려다보는 눈맛이야말로 일품이다.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圓空國師塔碑)

보물 제78호

 

 

 

 

거북의 머리는 괴수 모양의 험한 인상을 한 용의 머리모양이다.

등에 새긴 무늬는 정육각형에 가까우며, 육각형안에는 卍모양과 연꽃무늬를 돋을새김하였다.

 

 

 

 

머릿돌에는 구름속을 요동치는 용이 불꽃에 쌓인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데, 매우 사실적이고 화려하다.

 

 

 

 

고려 현종 16년(1025)에 세운 것으로, 당시 ‘해동공자’로 불리던 대학자 최충이 글을 짓고, 김거웅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 새긴 글씨는 해서체인데, 중국 구양순의 서법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는 고려시대의 여러 비에 새긴 글 중에서도 매우 뛰어난 것으로 중국에 비교해서도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한편 이 비에는 머릿돌을 옮기려 할 때 수십 명의 장정들이 매달려도 끄떡않던 돌을 

농가에서 빌려온 소 한 마리가 옮겼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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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돈사 뿐만 아니라 폐사지의 사계 중,

과연 어느 계절의 풍광이 제일일까? 그것은 물어 보나마나 눈덮힌 겨울일 터.

 

남한강 주변에 흩어진 겨울 폐사지 순례에의 염원.

 

언제고 내 꼭 그 바램을 실천으로 옮기고야 말리라는 다짐을 끝으로

금번 원주 일원 폐사지 순례를 여기에서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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