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6. 8
子瞻文章世稀有 자처문장세희유
소동파의 문장은 세상에 드무니
謫向江波動星斗 적향강파동성두
귀향길 강물결에 별빛도 따라 움직이네
河人有筆筆無塵 하인유필필무진
어떤 이의 붓인들 그 붓에 티끌이 없으랴만
鵞溪一幅爲寫眞 아계일폭위사진
거위 노는 냇가 그림 한 폭 참으로 잘 그려졌네
※ 위 주련은 음각으로 판각하고 푸른색 도료로 글씨 외곽선을 채워 넣었는데
판각 솜씨가 초보 수준인지라 추사 글씨의 특징을 잘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行行路轉峰廻處 행행로전봉회처
가고 또 가는 길 돌아 산봉우리 도는 곳에
一道淸泉天上來 일도청천천상래
한 줄기 맑은 물 하늘 높은 곳에서 쏟아지네
※ 위 해설 중 '귀향길'은 '귀양길'로 고쳐야 할 터.
(전화상으로 '고창군립미술관' 관계자에게 동의를 구했음.)
芙蓉萬타自珊瑚 부용만타자산호
연꽃 만송이는 스스로 산호같지만
若比人間凡草木 약비인간범초목
만약 인간 세상에 비한다면 평범한 초목이라
※ 두 번재 유형의 위 주련은 추사가 자신의 시 「옥순봉」의 전결 부분을 쓴 것이다
.이 판각은 양각으로 조각하고 글자 위에는 푸른 색을, 배경에는 흰색 도료로 마감한 것으로 비교적 판각의
수준이 높으며, 추사의 특징적인 필체가 그나마 잘 드러나고 있다.
田家敗籬 幽蘭逾芬 전가패리 유란유분
농가의 부서진 울타리에 난초 더욱 향기롭네
※ 세 번째 유형의 위 주련은 '揚伯夔詞品十二(양백기사품십이칙)의 한 구절을 쓴 것으로
두 번째 유형처럼 양각이고 글씨는 청색, 바탕은 흰색인데 판각자가 다르고 보존 상태는 제일 좋은 편.
値會意詩商獨坐 치회의시상독좌
뜻을 깨닫는 때를 만나서는 항상 홀로 앉아있고
到無型處心知 도무형처심지
형체가 없는 곳에 다다르면 다만 마음으로 안다네
※ 위 주련은 추사 주련과 함께 있었던 창암 이삼만 (1770 - 1847)의 글씨로
구봉 송익필(15634 - 1599)의 칠언율시 情中有感 제5구와 제6구인 경련을 쓴 것이다.
이 판각은 추사 주련 두 번째 유형과 조각자 및 조각형태가 같다.
※ 아래 넉 장의 사진은 고창군립미술관에 전시된 창암 이삼만의 초서 병풍이다.
창암은 정읍 출생으로 당대의 명필 원교 이광사를 수학했으며 특히 초서에 능했다.
靑山佛語人無事 청산불어인무사
청산은 말이 없고 사람들은 근심 없으니
一任風花自往還 일임풍화자왕환
바람과 꽃만이 스스로 가고 올뿐이네
忍把浮名買却閑 인파부명매각한
뜬 구름같은 명성을 다리품의 한가로움으로 맞바꾸니
門前流水對靑山 문전유수대청산
문 앞에 흐르는 물 청산을 대하였구나
風前有胎梅千點 풍전유태매천점
봄바람에 매화 천개의 꽃망울 올라오고
溪上無人月一痕 계상무인월일흔
시냇가엔 인적 없고 달빛 자취 뿐이네
晩醉扶笻過前村 만취부공과전촌
늦도록 취해 대지팡이 의지해 마을 앞을 지나니
數家殘雪擁리根 수가잔설옹리근
몇몇 집 울타리에 잔설(残雪)이 남아있네
日暮酒醒人已遠 일모주성인이원
해 저물어 술깨니 인적은 이미 멀리 있고
滿天風雨下西樓 만천풍우하서루
하늘 가득 풍우가 일어 서쪽 누각에 드네
勞歌一曲解行舟 노가일곡해행주
노젓는 소리 한 곡조에 배는 떠나가고
紅葉靑山水自流 홍엽청산수자류
단풍든 청산을 돌아 물은 흐르네
海月滿庭秋一色 해월만정추일색
해월 빛이 뜰 가득 가을 색을 채우고
天香和露滴西豊 천향화로적서풍
하늘 향기 머금은 맑은 이슬 서풍에 떨어진다
掛花陰下坐談空 괘화음하좌담공
꽃이 늘어진 그늘 아래 좌담은 공허하고
怳在淸虛玉付中 황재청허옥부중
어슴푸레 맑고 허허로운 옥부 중에
名筆蒼巖完山李公三晩之墓
(1770 ~ 1847)
비 옆의 안내판엔 이렇게 적혀있다.
//
전라도가 낳은 명필로 조선 말기 한양의 추사 김정희와 평안도의 눌인 조광진과 함께
조선 3대 명필로 평가되고 있다. 전주 자만동에서 출생(정읍 설도 있음)하여 옥류동
상관의 공기골 등에서 살았으며 별세 후 이곳에 묻혔다. 그는 동국진체를 이어오면서
서법을 서첩에 남겨 한국 서예사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화동서법」을 간행했으며, 중국과 조선 서법의 연원과 성과를 집대성 하였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 귀양길에 창암과 만난 인연으로 후에 묘비를 써주어
이곳에 강암 송성용 선생의 비문과 함께 자리를 지키고 있다.
//
제주 귀양길, 전주에 이른 추사가 관찰사 이목연에게 청을 넣어 객사에서 처음 이삼만을 조우 했다고.
때마침 스승의 공력이 궁금했던 창암의 제자들이 추사에게 한 말씀 부탁했던 모양.
이에 조선 제일의 건방男이었던 완당(阮堂) Kim이 내 뱉은 필론(筆論)인 즉,
"노인장께선 시골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소이다 그려~~"
훗날의 제주 유배에서의 해배길,
상경하던 추사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어버린 창암을 다시 찾아
과거의 비아냥을 정중히 거두고 위 사진의 '묘비명'을 써 주었다고.
창암 선생 묘역
(전북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 소재)
추사가 창암을 그리워하며 따로 밝혀 놨다는 필지(筆誌)를 소개하자면.
公筆法 冠戎東 老益神化 名播中國 弟子數十人
공필법 관융동 노익신화 명파중국 제자수십인
日常 侍習亦 多薦名于 世取季弟子 爲后 語義
일상 시습역 다천명우 세취계제자 위후 어의
《공의 글씨는 해동(조선)의 으뜸이요, 늙어감에 따라 더욱 완숙함이 신묘하여 그 이름은
중국에까지 떨쳤고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었다 제자 중 세상에 그 이름을 나타낸 자가 많았다.
그런데 다만 후사(後嗣)를 이을 아들이 없어 아랫동생의 아들인 조카로서 후사를 이었더라.》
추사가 쓴 필지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창암의 만년이 몹시 적적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한동안 위 묘비 글씨에 대한 전문가들의 설왕설래가 있었지만 종래엔 추사 글씨로 최종 낙착된 모양.
'위리안치(圍籬安置)'에서의 뼈저린 자기 성찰이 이전의 서체를 저토록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인지 자못 궁금할 뿐.
창암의 첫 부인 김씨의 묘와 두 번째 부인 심씨(묘지석)의 묘까지 나란히 자리한 모습.
산광수색 (山光水色)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sonjson/140123642245
창암의 이른바 '독사체'
‘산(山)’자는 뱀이 똬리를 틀고 경계하는 모습이고, ‘광(光)’자는 개구리와 벌레를 낚아채는 형상이요,
‘수(水)’자는 살모사가 목을 추켜들고 상대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에다
‘색(色)’ 자는 승천하는 이무기 형상으로 풀이한는데.
그러고 보니 그도 그럴싸....
추사 보다 10살 연상이었던 창암.
추사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최상의 교육을 받았던 인물이라면.
창암은 몰락한 양반가의 후손으로 어렵던 집안의 재산을 그나마 글씨에 모조리 소진하였다고 한다.
심지어는 와병중에도 하루 일천자 이상을 쓰지 않으면 붓을 놓지 않을 정도였다고.
남녘 일대의 절을 돌아 보면 거의 어김없이 창암이 쓴 편액을 볼 수 있다.
고창군립미술관에 전시된 자기류
백자철화호문호 (15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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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생각 없이 들어선 고창군립미술관.
얼마 전 지상에 보도된 바 있는
고창 반암마을 인촌(仁村)家 제실에서 찾아냈다는 추사의 주련이 전시되어 있었다.
마침 궁금하던 차였기에 마치 횡재라도 한 양,
한참을 이모저모 뜯어 보았다.
주련 내용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 결과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제주 유배시 추사가 지난 호남의 경로를
대체로 추정 할 수 있게 되었다는데.
■ 1840년 9월2일 제주도 대정현 위리안치 명.
▶ 9월3일~4일 유배길 출발 ▶ 일자미상 전주에서 창암 이삼만과의 만남
▶ 9월 20일경 고창 흥덕현 → 하오산마을 → 반암마을(병바위) → 선운사 → 무장현
▶ 9월 23일경 장성 → 비아 → 나주 ▶ 9월25일경 해남 대흥사(초의와의 만남)
▶ 9월 27일 아침 완도에서 배를 탐 ▶ 9월 27일 저녁 제주도 대정현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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