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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축제·전시·공연

동리 신재효

2016. 6. 8

 

   고창읍 성두마을 정자 옆에 기록된 내용.

 

 

방장산 자락의 동리 선생 묘소 가는 길,

 

 

그물이 둘러쳐진 배밭 아래 차를 세우고 걷기 시작.

 

 

잡풀 우거진 묵정 논 옆으로 진행.

 

 

조금 더 진행하다 보면...

 

 

위 마지막 안내 입간판을 만난다.

 

 

산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양 갈래 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왼편 길로 진행해야 한다.

 

 

울창한 시누대 숲을 통과하면...

 

 

위에 보이는 쌍분을 만난다.

 

 

쌍분 앞에 서서 오른편을 보면 숲 사이로 동리 선생 묘역의 망부석과 묘소가 보인다.

마지막 안내 입간판에서 산길로 접어들어 선생의 묘역에 이르는 사이

단 하나의 안내 표시도 없음을 유념해야 한다.

 

- 동리 신재효 선생 묘소 -

 

그는 고창현의 향리와 서민들과 깊이 사귀었을 뿐만 아니라, 죽은 뒤에 여러 향반(鄕班)들이

만장을 써 보낸 것으로 보아, 신분을 넘어 폭넓은 교유를 맺었으리라 추정된다.

그는 아버지가 마련한 기반을 바탕으로35세 이후에 이방이 되었다가 나중에 호장(戶長)에 올랐다.

 1876년(고종 13)에 기전삼남(畿甸三南)의 한재민(旱災民)을 구제한 공으로 정3품 통정대부가 되고,

이어 절충장군을 거쳐 가선대부에 승품(陞品)되고, 호조참판으로 동지중추부사를 겸하였다.

 

 

무덤 앞 상석에 새겨진 "通政大夫. 平山申公. 在孝之墓" 등을 확인하고서야 

겨우 동리 선생의 묘소임을 알아보게 되는데...

 

 

위대한 문화유산 판소리를 집대성한 동리 선생의 묘소에 비석은 커녕, 

그 흔한 안내판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탄식과 통탄을 넘어 경악하고 만다.

 

 

- 고창읍성 -

 

 

 

 

 

- 동리 신재효 고택 -

그가 여생을 마치던 1884년(고종 21)까지 기거하였던 동리정사(桐里精舍)는 1850년대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의 아들이 1899년에 중수하였다고 전한다. 당시 안채를 포함한 크고 작은 여러 채의 건물들이

한 곽(廓)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조촐한 초가지붕인 사랑채만 남아 있다.

 

-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 -

1812(순조 12)-1884(고종 21) 조선 후기의 판소리 이론가, 개작자, 후원자.
동편제와 서편제의 장점을 조화시키면서, 판소리의 듣는 측면에 덧붙여 보는 측면을 강조하였다.

또한 여자도 판소리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전라북도 고창 출생으로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백원(百源), 호는 동리(桐里).

 

 

 

 

 

 

 

 

 

 

 

 

 

 

 

 

 

 

 

 

 

 

 

 

만정은 서예에도 일가견을 이루었다.

 

 

 

 

 

 

 

 

 

 

 

 

 

 

 

 

 

 

 

 

 

 

 

 

 

 

 

 

 

 

 

 

 

 

 

 

 

 

 

 

 

 

 

 

 

 

 

 

 

 

진채선

 

 

 

 

 

 

 

 

 

 

 

 

 

 

 

 

 

 

 

 

 

 

 

 

 

 

 

 

 

 

 

 

 

 

 

 

 

 

 

 

 

 

 

 

 

 

 

 

 

 

 

 

 

 

 

 

 

 

 

 

 

 

 

 

 

 

 

 

 

 

 

 

 

 

 

 

 

 

 

 

 

 

 

 

동리 신재효에 관하여 -

 

 

 

 

 

신분 상승을 꾀하면서도 한시가 아닌 판소리에서 정신세계를 찾은 그는 판소리를 즐기는 동시에 자신의 넉넉한 재력을 이용하여 판소리 광대를 모아 생활을 돌보아 주면서 판소리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직선적이고 기교는 없으나 예스럽고 소박한 성음을 갖추면서 박자가 빨라 너름새를 할 여유가 없는 동편제(東便制)와, 유연하고 화려한 성음을 갖추면서 박자가 느려 너름새가 쉽게 이루어지는 서편제(西便制)의 장점을 조화시키면서, 판소리의 ‘듣는 측면’에 덧붙여, ‘보는 측면’을 강조하였다. 또한 진채선(陳彩仙) 등의 여자 광대를 길러 내어 여자도 판소리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었으며, 「춘향가」를 남창과 동창으로 구분하여 어린 광대가 수련할 수 있는 대본을 마련하기도 하여, 판소리의 다양화를 시도하였다.

「광대가」를 지어서 판소리의 이론을 수립하였는데, 인물·사설·득음(得音)·너름새라는 4대 법례를 마련하였다.인물은 타고나는 것이니 어쩔 수 없으며, 사설의 우아한 표현, 음악적 기교 및 관중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연기가 중요하다고하면서, 판소리는 상스럽지 않고 한문학과 견줄 만한 예술임을 은연중에 드러내었다. 만년에는 「춘향가」·「심청가」·「박타령」·「토별가」·「적벽가」·「변강쇠가」의 판소리 여섯마당을 골라서 그 사설을 개작하여, 작품 전반에 걸쳐합리적이고 체계적인 구성을 갖추게 하고, 상층 취향의 전아(典雅)하고 수식적인 문투를 많이 활용하였다.

그래서 하층의 발랄한 현실 인식이 약화되기도 하였으나, 아전으로서 지닌 비판적 의식이 부각되고, 사실적인 묘사와 남녀 관계의 비속한 모습을 생동하게 그리기도 하였다. 그래서 판소리가 상하의 관심을 아우르면서 신분을 넘어선 민족 문학으로 성장하는 데 진전을 가져올 수 있었다. 고창읍 성두리에 묘가 있으며, 1890년에 한산시회(寒山詩會)에서 송덕비를 건립하였다. 판소리 사설 외에도 30여 편의 단가 혹은 ‘허두가(虛頭歌)’라고 하는 노래를 지었다.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재산을 모으는 방법을 다룬 「치산가(治産歌)」, 서양의 침입이라는 시대적 시련을 걱정하는 「십보가(十步歌)」·「괘씸한 서양(西洋)되놈」, 경복궁 낙성 공연을 위해 마련한 「방아타령」, 그 밖에 「오섬가(烏蟾歌)」·「도리화가(桃梨花歌)」·「허두가」 등이 대표적이다

(백과사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