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3. 16
외대문(外大門)
정문은 3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을 한 삼문 형태.
원래는 기단과 전면 중앙에 계단이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정문 앞 지면이 높아져 땅에 묻히게 되었다고.
외대문을 들어서면 삼도(三道)가 북으로 길게 나 있다.
널찍하고 거친 돌로 깐 삼도는 가운데가 양 옆보다 약간 높은 凸자형으로 높낮이가 다르게 되어 있다.
가운데의 약간 높은 길은 신향로(神香路)이고, 동측의 낮은 길은 어로(御路) 서측은 세자로(世子路)인데,
어로는 제사 때 임금이 다니는 길이고, 세자로는 세자가 다니는 길이며,
신향로는 제향 때 향로를 받들고 다니는 길. 이 길은 어숙실, 정전, 영녕전으로 이어진다.
향대청 일원
종묘의 기원은 중국 우(虞)나라 때 시작,
은(殷)·주(周)대까지는 각각 7묘제(7대조까지 묘에 봉안)로 하였다가 명나라 때는 9묘제로 바뀌었다.
신라 시대는 5묘제, 고려 시대는 7묘제로 하였고, 조선 시대 초기에도 7묘제로 하였다.
즉, 7대왕 이상의 신주는 영녕전으로 조천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치적이 큰 왕은 만세 불후(萬世不朽)·조공 숭덕(祖功崇德)의 근본 이념에 따라
7대가 지나도 부조위(不祧位)인 정전에 모셨고, 조천된 신주는 영녕전에 봉안하였다.
십이장복(十二章服)
면류관과 곤복을 통칭하는 황제의 예복.
대한제국 선포 후 고종황제와 순종효황제가 국가의식에 착용.
정전(正殿) 일원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으며, 종묘제례(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와 제사를 지낼 때
춤과 함께 연주되는 종묘제례악(중요 무형문화재 제1호, 세종대왕 작곡)은
2001년 유네스코 무형유산걸작으로 등록되었다.
전사청(典祀廳)과 찬막단(饌幕壇)
전사청에서 만든 제물을 상에 차리기 전에 올려놓고 검사하던 곳.
열주의 행렬이 장중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정전 회랑.
종묘 정전(국보 제227호)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임금과 비의 신위를 봉안한 사당이며,
정전은 종묘의 중심 건물로 영녕전(보물 821)과 구분하여 태묘라 부르기도 한다.
종묘내에 만든 어도들은 중앙이 높고 좌우가 낮게 박석을 깔아 만들었으며,
정전과 영녕전의 담장 밑에는 빗물을 담장 안에서 흘려 내보내기 위한 석루조(石漏槽)들을 두었다.
서쪽 제1실에서부터
태조·태종·세종·세조·성종·중종·선조·인조·효종·현종·숙종·영조·정조·순조·문조·헌종·철종·고종·순종 등
19왕과 왕비의 신주를 19개 방에 모시고 있다.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자, 1604년(선조 37)부터 중건이 논의되어,
선조 41년 터를 닦고 기둥을 세우는 등 공사를 개시한 후 광해군이 즉위하던 해인 1608년 5월 중건되었다.
그 뒤 몇 차례의 개수와 중건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정전은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의 4대조(목조, 익조, 탁조, 환조) 신위를 모셨으나,
그 후 당시 재위하는 왕의 4대조(고조, 증조, 조부, 부)와 조선시대 역대 왕 가운데 공덕이 있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정전의 양끝은 협실로 이어지고 동·서월랑이 직각으로 꺾여서 정전을 좌우에서 보위하는 형태를 취하는데
그 사이에 큼직큼직한 박석들로 덮인 넓은 월대가 광대하게 펼쳐지면서 정전의 공간은 장대하면서도 엄숙하다.
종묘의 건축은 중국의 제도를 본떠 궁궐의 좌변(左邊)에 두었다.
조선을 창건한 태조는 1394년(태조 3) 8월 종묘 터를 보았고,
9월 감산(坎山)을 주산(主山)으로 하는 임좌병향(壬坐丙向)한 그 곳에 종묘 터를 결정하였다.
12월부터 영건(營建)을 시작해 다음해 9월에 일차 영건이 끝났으며, 그 뒤 1546년(명종 1)까지 계속되었다.
악곡청
문설주 아래의 태극문양
정전은 19칸이 옆으로 길게 이어져 우리나라 단일건물로는 가장 긴 건물이다.
이곳에 모시지 않은 왕의 신위는 이 건물 서쪽에 있는 영녕전에 봉안되어 있다.
홑처마에 맞배지붕 건물로, 기둥은 배흘림 형태이다.
정전의 월대 아래 동쪽에는 공신당이 있고, 서쪽에는 칠사당이 있다.
공신당은 정전에 모신 역대 왕의 공신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며, 칠사당은 궁궐의 모든 일과 백성의 생활이
무탈하게 풀리도록 사계의 운행과 관계되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종묘 최대의 예술작품은 박석이 깔린 마당 공간이 아닐런지...
영녕전(永寧殿) 일원
영녕전은 세종(1421년) 종묘에 모시던 태조의 4대 추존왕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그 왕비들의
신주를 옮겨 모시기 위해 세워진 별묘로 왕실의 조상과 자손이 길이 평안하라는 의미를 담고있다.
영녕전(보물 제821호)
종묘정전과 많은 유사점을 지니고 있으나, 벽체와 기둥의 관계를 표현하는 데서
결정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정전에서 전퇴의 열주(列柱)를 제외한 모든 기둥을 벽 속에 숨긴 데 반하여,
영녕전에서는 원기둥을 노출시켜서 벽을 나누고 있다.
건물의 지지체인 주춧돌과 원기둥을 두툼하고 굵게 만들고
이 위에 가장 간결한 공포인 초익공(初翼工)을 짜올려 거대한 지붕을 받치고 있으며,
중앙계단의 섬돌과 문설주 양옆에는 태극무늬를 새겨 놓았다. 색채는 붉은색과 청록색 2색만을 사용하여,
흔히 밝고 화려한 다채색을 칠한 궁궐과는 상당한 대비를 보이고 있다.
현재 영녕전에는 중앙의 4실을 양 협실(夾室)보다 높게 꾸미고
각 실에 태조의 4대조인 목조(穆祖)·익조(翼祖)·도조(度祖)·환조(桓祖)와 왕비들의 신주를 모셨으며,
서쪽 제5실에서부터는 정종(定宗)과 왕비, 문종(文宗)과 왕비, 단종(端宗)과 왕비, 덕종(德宗)과 왕비,
예종(睿宗)과 왕비, 인종(仁宗)과 왕비, 명종(明宗)과 왕비, 원종(元宗)과 왕비, 경종(景宗)과 왕비,
진종(眞宗)과 왕비, 장조(莊祖)와 왕비,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 영친왕)과 태자비 등
총 32위의 신주가 제16실에 이르기까지 모셔져 있다.
남문 안쪽에는 장대석(長臺石)을 2벌로 쌓아 나지막한 월대(月臺)를 조성하고,
그 한복판에 상징적인 중심이자 건축의 기하학적인 중앙 축으로서 신도(神道)를 두었다.
신도의 끝에는 다시 월대를 쌓아 제관(祭官)들이 건물 앞에서 의례의 절차를 거행할 자리를 마련해 놓았다.
이 상월대(上月臺) 위에 장대석 1벌로 기단을 쌓고 여기에 가운데 태실 4칸, 좌우 각각 익실 6칸씩을 두어
16칸을 조성한 건물을 세우고, 익실 양끝 툇간에 덧붙여서 동월랑(東月廊)과 서월랑(西月廊) 5칸씩을 연결하였다.
※ 종묘에 관한 모든 해설은 백과사전 참조
중연지 한가운데 자리한 향나무의 예술적 자태.
통상적으로, 평일 종묘 관람은 정해진 시간에 따른 입장과 해설사의 안내에 따라야 하지만
매주 토요일 만큼은 자유관람을 할 수가 있다.
종묘대제와 종묘제례악 관람은 매년 두 차례 5월 첫째 일요일과 11월 첫째 토요일에 실시된다고.
2007년 종묘제례를 참관한 유네스코 관계자의 발언이다.
"서양에 그레고리언 찬트가 있다면 동양엔 종묘제례가 있다."
인류가 남긴 세계 최고의 건축물 중 하나라는 침묵의 정전 종묘.
그곳에는 유교라는 이데올로기를 표방한 조선의 모든 것이 총 집약되어 있다고 보면 틀림 없다.
단언컨데,
조선왕조 최대의 문화유산은 '종묘'라는 굳건한 믿음도 재확인 할 수 있었고....
Max Highstein .. Touch the 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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