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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행·여행·풍경

임진강변 산책

 

2016. 1. 22

 

 

화석정花石亭

 

경기도 유형문화제 제61호.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초익공(初翼工)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이곳은 원래 고려 말기의 문신 길재(吉再)의 유지(遺址)였던 자리였다. 1443년(세종 25)에 이명신(李明晨)이 건립하였고

1478년(성종 9)에 이숙함(李淑瑊)이 화석정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이명신의 증손인 이이(李珥)가 중수하여 퇴관(退官) 후 여생을 이곳에서 보내면서 시를 지으며 학문을 논하고

이(理)를 구(究)하니, 중국의 칙사(勅使) 황홍헌(黃洪憲)이 정자를 찾아와 음시(吟詩), 청유(淸遊)하였다고 한다.

 

 

 

 

이숙함의 정기(亭記)에 의하면, 당나라 때 재상 이덕유(李德裕)의 별서(別墅)인 평천장(平泉莊)의 기문(記文) 중에 보이는

 ‘화석(花石)’을 따서 정자 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후 80여 년 동안 터만 남아 있었다가

그 뒤 이이의 후손들이 1673년(현종 14) 중건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다시 소실된 것을 1966년파주(坡州)

 유림(儒林)이 성금을 모아 복원하였다. 1973년 정부가 실시한 율곡 선생 및 신사임당(申師任堂) 유적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화석정이 단청되고 주위도 정화되었다고.

 

 

 

 

 

 

 

 

 

 

정자는 장단(長湍) 쪽을 향하였는데 바로 밑을 흐르는 임진강을 굽어볼 수 있고,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면 서울의 삼각산과 개성의 오관산(五冠山)이 아득하게 보인다.

정자 안에는 ‘화석정중건상량문’을 비롯하여 여러 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율곡 선생은 평소 정자에 제자들과 함께 기둥과 서까래 등에 들기름을 반질반질하게 먹여 두었다고 하는데,

훗날 임진왜란(선조 25년, 1592년)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파천할 당시(4월 29일 밤) 억수같은 폭우속에

 강을 건널 때 이항복이 화석정에 불을 질러 무사히 배가 강을 건넜다고 전한다.

 

 

 

 

 

 

 

 

 

 

 

율곡이 8세때 화석정에서 지었다는

 八 歲 賦 詩

 

 林亭秋已晩 騷客意無窮

숲 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으니 시인의 생각이 한이 없어라
遠水連天碧 霜楓向日紅

먼 물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서리 맞은 단풍은 햇빛 받아 붉구나
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

산은 외로운 달을 토해내고 강은 만리 바람을 머금는다
塞鴻何處去 聲斷暮雲中

변방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저녁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소리

 

 

 

 

 

 

 

요 며칠 한파로 꽁꽁 얼어붙은 임진강.

 

 

 

 

 

 

 

 

 

 

 

 

 

 

 

 

 

임진강변 산책에 함께한 이 남 교수님

 

 

 

 

 

 

 

 

 

 

 

 

 

 

 

 

 

 

 

 

'자운서원'에서의 사진은 모두 날아가버려

 아래 5장의 사진은 이 남 교수님의 휴대폰 사진을 빌려왔습니다.

 

 

율곡 이이의 가족 묘역

 

 

 

 

 

율곡 이이의 묘

 

 

 

 

 

 

 

 

 

 

 

 

 

 

 

 

 

사임당 신씨의 묘

 

 

 

 

 

 

 

 

 

 

 

 황희선생영당 黃喜先生影堂        

경기도 기념물 제29호. 이 영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맛배집으로,

조선 세종 때의 문신 황희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그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오른쪽의 반구정(伴鷗亭)과 왼편의 앙지대(仰止臺)

 

 

 

 

 

앙지대(仰止臺)

 

 

 

 

 

 

 

 

 

 

 

원래 '반구정이 위치했던 자리이다.

1915년 반구정을 현 위치에 옮겨 지으면서 그 자리에 황희선생의 유덕을 우러르는 마음을 담아

육각정을 짓고 양지대(仰止臺)라 이름 하였다. 양지대 상량문엔 '오직 선(善)만을 보배로 여기고

다른 마음이 없는 한 신하가 있어 온 백성이 우뚝하게 솟은 산처럼 모두  쳐다 본다. 아름답구나!

이 양지대란 이름은 시경(詩經)의 호인(好仁)이라는 뜻을 취했다. 라고 적고 있다.

 

 

 

 

 

 

 

 

 

 

 

 

 

 

 

 

 

 

 

 

 

 

 

양지대에서 바라본 반구정(伴鷗亭)

 

 

 

 

 

빙하를 연상시키는 임진강의 얼음 잔해

 

 

 

 

 

 

 

 

 

 

 

 

『정자는 파주에서 서쪽으로 十五리 지점에 있는 임진강 하류에 위치하였다.

매일 조수가 나가고 뭍이 드러나면 하얀 갈매기들이 날아드는데 주위가 너무도 편편하여

광야(廣野)도 백사장도 분간할 수 없고 구월쯤 되면 철새들이 첫 선을 보이기 시작하며

서쪽으로는 바다의 입구까지가 이십리 가량 된다.』

 

- 미수 허목의 반구정기(伴鷗亭記) 중에서 -

 

 

 

 

 

 

 

 

 

 

 

 

 

 

 

 

방촌 황희선생상과 왼편은 영모재

 

 

 

 

 

 

 

 

 

황희

                         

황희 영정,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초기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노력한 유능한 정치가일 뿐만 아니라 청백리의 전형으로서,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재상으로 꼽히고 있다. 본관은 장수. 초명은 수로. 자는 구부, 호는 방촌. 아버지는 판강릉대도호부사 군서이다.

1376년 음직으로 복안궁녹사가 되었고, 1383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1389년(창왕 1) 문과에 합격했고, 이듬해 성균관학관이 되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70여 명의 유신들과 함께 두문동에 은거했다. 그러나 태조의 요청과 백성만이라도 구제해야 한다는 두문동 동료들의 천거로 다시 벼슬에 나가 성균관학관과 세자우정자를 겸임했다. 이후 직예문춘추관·사헌감찰·우습유를 지냈다. 그뒤 좌천·면직·소환을 반복했고, 1399년(정종 1) 경기도도사, 1400년 형조·예조·병조·이조의 정랑을 차례로 역임했다. 1401년(태종 1) 지신사 박석명의 추천으로 도평의사사경력이 되었고, 이후 승추부도사·대호군·지신사·대사헌·병조판서·예조판서를 거쳐 1415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1416년 세자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폐위에 반대했으며, 이듬해 평안도도순문사 겸 평양부사가 되었다. 1418년 세자의 폐위가 결정된 후 태종의 미움을 사서 서인으로 교하에 유배되었고, 곧 남원으로 이배되었다. 1422년(세종 4) 과전과 고신을 환급받고, 의정부좌참찬을 거쳐 다시 예조판서에 올랐다. 1423년 강원도 지방에 흉년이 들자 관찰사로 파견되어 선정을 폈다. 1427년 좌의정이 되었으나, 1430년 태석균의 치죄에 관여하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물러나 파주 반구정에 은거했다. 1431년 복직되어 1449년 관직을 물러날 때까지 18년 동안 영의정으로 세종을 도와 국정을 이끌었다.

성품이 강직·청렴했으며, 사리에 밝고 정사에 능해 역대 왕들의 신임을 받았지만 때로는 소신을 굽히지 않아 왕과 다른 대신들의 미움을 사서 좌천과 파직을 거듭했다. 그는 오랜 관직생활 동안 조선 초기의 국가 기틀을 바로 잡는 데 힘을 기울였다. 현실적으로 불합리하거나 중복·누락된 부분이 있던 〈경제육전 經濟六典〉을 온전한 법률집으로 만드는 등 법전의 정비에 힘썼으며, 농업생산력 발전을 위해 농사의 개량과 종자 보급을 실행하고, 양잠을 장려하여 의생활을 일신시켰다.

건국 초기의 어지러운 정세를 틈타 북쪽의 여진족과 남쪽의 왜구가 자주 침범하자 이에 대한 방비책 마련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원나라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던 고려의 예법을 시의에 맞게 고치기도 했다. 세종대에는 그간의 국정경험과 세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4군 6진의 개척,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등을 지휘·감독했으며, 왕과 중신들 간의 마찰을 중화시키는 등 세종을 도와 성세를 이룩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452년(문종 2) 세종묘에 배향되었고, 1455년(세조 1) 순충보조공신남원부원군에 추증되었다. 상주 옥동서원과 장수 창계서원에 제향되었고, 파주의 반구정에 영정이 봉안되었다. 저서로 〈방촌집〉이 있다. 시호는 익성이다.

 

 

 

 

 

 

임진각 망배단

 

 

 

 

 

통일에의 염원을 담은 일포 선생님의 망배단 心告

 

 

 

 

 

자유의 다리

 

 

 

 

 

 

 

 

 

 

 

 

 

 

 

 

 

 

 

 

 

 

 

 

 

 

 

 

 

 

 

 

임진강에서


-정 호 승 -

 

아버지 이젠 그만 돌아가세요

임진강 샛강가로 이제 저를 찾지마세요

찬 강바람이 아버지의 야윈 옷깃을 스치면

오히려 제 가슴이 춥고 서럽습니다

 

가난한 아버지의 작은 볏단 같았던 

저는 결코 눈물 흘리지 않았으므로

아버지 이제 그만 발길을 돌리세요

삶이란 마침내 강물같은 것이라고

강물위에 부서지는 햇살같은 것이라고

아버지도 저만치 강물이 되어

뒤돌아 보지말고 흘러가세요

 

이곳에도 그리움 때문에 꽃은 피고

기다리는 자의 새벽도 밝아옵니다

길 잃은 임진강의 왜가리들은

더 따뜻한 곳을 찾아 길을 떠나고

길을 기다리는 자의 새벽길 되어

어둠의 그림자로 햇살이 되어

저도 이제 어딘가로 길 떠납니다

 

찬 겨울 밤하늘에 초승달 뜨고

초승달 비껴가며 흰 기러기떼 날면

그 어디쯤 제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오늘도 샛강가로 저를 찾으신

강가에 얼어붙은 검불같은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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