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9. 14
夢心齋
중요민속자료 제149호.
- 전라북도 남원시 수지면 호곡리 -
1753년(영조 29)부터 1830년(순조 30) 사이에 생존하였던 박동식(朴東式, 호는 蓮堂)이 지었다고 한다.
대문간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나오고 높은 축대 위에 건립된 사랑채가 있다.
문간채 옆에 자리한 연지.
몽심재에 내리는 빗물은 모조리 이곳 연지로 모여드는 모양새.
셋째 칸 주도리에는 ‘夢心齋(몽심재)’라고 쓴 편액이 달려 있다.
안채
안채를 기웃거려도 몽심재 주인장은 보이지 않고
돌아나오는데 낮익은 얼굴께서 몽심재에 들어서는 모습이 보인다.
작년, 하동 지리산 자락에서 "칠성도담"의 장을 펼치신 바 있는
정귀원 교무(우측)님과 일포 선생님.
사랑채의 팔각형 툇기둥도 이채로운데 맨 윗부분엔 태극문양까지 그려져 있다.
백이숙제의 고사와 도연명의 시 등에서 유래한 몽심재 편액과 주련.
서쪽 끝 칸의 툇마루는 한단 높아졌고 난간이 설비되어 있다.
지리산 만복대를 타고 내려온 견두산 끝자락 호두혈(虎頭穴)의 혈구(穴口)가 뭉친 지점으로
훌륭한 인물이 다수 배출되는 형국이라는 풍수가들의 전언.
마당 끝 바위에 여러 각자가 새겨져 있다.
몽심재 담장 밖으로 내다보이는 죽산박씨 종가.
충신, 효자, 열녀 등의 정려문이 빼곡한 모습.
죽산박씨의 종가 가옥
이 가옥은 죽산박씨의 종가로 건립된 건물로, 안채는 1841년(헌종 7)에 건립되었으며, 사랑채는 이웃한
남원몽심재(南原蒙心齋, 중요민속자료 제149호)의 건축연대와 비슷한 1758년(영조 34)경으로 추정된다.
2000년 6월 23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80호로 지정되었다.
고려말의 충신으로 두문동(杜門洞) 72현의 한 사람인 충현공(忠顯公)박문수(朴門壽)를 배향하는
부조묘(不祧廟)와 이웃하여 있다. 박문수는 1353년(공민왕 2)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가정대부찬성사
우정승에 이르렀으며, 일찍이 포은정몽주(鄭夢周), 목은이색(李穡)과 우정이 두터웠다고 한다.
박문수는 두문동으로 들어가기 전에 부인 김씨에게 고려를 섬겨온 충신가문 자손이 절의(節義)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부인만은 고향인 남원 호곡으로 내려가 조상의 제사를 받들고
자손을 보살피도록부탁하였다 하는데, 이후 죽산박씨가 크게 번창하였다고.
몽심재 평면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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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4대 길지 중의 하나라는 '몽심재'
원불교 교무를 자그만치 40여 명씩이나 배출한 것으로 잘 알려진 동네 호곡리.
쥔장이신 박성기 교무님은 어디 가셨는지 도통 보이질 않는다.
감 잡을만한 뭔가 없을까 눈알을 희번득이며' 몽심재'를 훑고 있던 차,
때마침 낮익은 얼굴의 정귀원 교무께서 대문을 들어 서신다.
쥔장 대신, '몽심재'에 익숙하신 정 교무님의 해설을 앞세워 집안 여기저기를 돌아 보는데.
'몽심재' 동쪽으로 멀리 지리산 '만복대'를 달려온 '견두산' 자락이 눈에들어 온다.
지리산 자락 최대 혈처 가운데 하나가 바로 몽심재 마당에 놓인 바윗덩어리라는데.
이 화강암 덩어리가 다름 아닌 호두혈(虎頭穴)의 혈구(穴口)에 해당한다고.
근방을 지나던 과객에게 요즘말로 '노블리스 오블리주'
(Noblesse oblige)의 감동을 듬뿍 안겨주는 것으로 명망이 높았다는 '몽심재'
자고로 적선을 많이 배푼 집안은 당대는 물론이려니와 후대가 강건하고 번성하는 법.
작년, 지리산 칠성봉 자락 도담의 현장에서 만났던 '몽심재' 쥔장 박성기 교무님.
오늘은 비록 뵙지 못했지만, 수행과 영성에 진력해 온 그의 넉넉한 표정과 언행에서
'몽심재' 선대분들의 덕스러움을 곧장 느낄 수 있었던 기억을 새삼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