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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행·여행·풍경

독립운동가 一江 金澈 선생 기념관

 

 

 

 

 

일강一江 김철金澈 선생 상에 새겨진 내용 

호남의 대표적 애국지사인 일강 김철 선생은 기산영수 정기를 받아 1886년 구봉산 기슭에서 태어나셨다.

선생은 망국한을 풀고자 1917년 중국 상해로 건너가 1919년 1월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을 조직한 후

국내로 잠입 손병희 선생과 3.1운동의 거사를 모의하였다. 같은해 3월에 김구, 이시영, 이동영 선생 등과

대한독립임시사무소를 개설한 후,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임시정부의 교통처장, 회계감사원장,

군두장, 재무장, 무임소장을 지냈으며 가산을 모두 처분하고 천도교 기탁금과 경향각지에서 모금활동을

벌여 임정 재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8월 제 6차 의정회의에서 헌법제정 및 대통령제의 상해임시정부

 탄생을 주도하였고, 1932년 윤봉길의사와 상해 홍구공원 의거를 도모한 후 일제의 추적을 피해 임정을

항주로 옮긴 뒤 국무원 비서장 재임 중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 독립을 보지 못하고 1934년 6월 29일

 48세에 절강성에서 타계해 임시정부장으로 항주시 악비묘 후록에 안장되었다. 1962년 3.1절에 건국혼장

국민장이 추서되었고 유해 봉안 운동이 추진되었으나 묘소를 찾지 못해 혼백이 이역만리 중국땅을

떠돌다가 순국 50년에야  한 줌 흙으로 숭모비 아래 안장되는 비운을 겪었다. 

 - 후략 -

 

 

 

- 출생과 성장 -

일강(一江) 김철(金澈) 선생은 1886년 10월 15일 전라남도 함평군 신광면 합정리에서 김동진의 4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터 영특하였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 주위로 부터 항상 사랑을 받았다.

영광군 묘량의 외가에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1908년에는 영광의 광흥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1909년에 경성법률전수학교에 입학하여 법률을 공부하였으며, 일본으로 유학 1915년 메이지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그해 귀국한 김철 선생은 형제들과 상의하여 토지의 일부르 소작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노속(努屬)들을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이후 고향에 은거하던 김철 선생은 일제 통치에 협력하여 달라는

조선총독부의 군유를 단호히 거절하고 조국 광복에 투신하기 위해, 1917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왼편부터 안후덕(安厚德), 김 석(金 晳), 김덕근(金德根), 문기호(文氣鎬), 이도범(李燾範)

 

 

 

- 김구 선생 유묵 -

1929년 4월 1일 김구 선생이 김철 선생의 따님 김미경에게 써 준 유묵으로

'참다운 학문은 오륜에서 나오고, 문장은 육경에서 비롯된다' 는 내용이다.

 

 

- 신한청년당과 김철 -

1917년 상하이로 망명한 김철 선생은 1918년 여운형 . 장덕수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

1919년 초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였다.  또한 독립운동의 활발한 전개를 위하여 

김철 선생과 선우혁 . 서병호 등을 국내로, 여운형은 만주와 연해주로,  장덕수는 일본으로 파견하였다. 

국내에 잠입한 김철 선생은  당시 천도교 교조였던 의암 손병희를 만나 3.1 운동의 전개를 협의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 받았으며  기산도 등의 동지들과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였다. 상하이로 돌아간 김철 선생은

그해 3월 신한청년당원들과 함께 대한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작업에 착수하였다.

김철 선생은 1919년 4월 10일부터 11일까지 개최된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 의원으로 참척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 한인애국단과 김철 -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장이었던 김철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무장활동을 관장하면서,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활동을 지원하였다. 김철 선생은 국무위원으로 국무회의에 참석하여 김구의 한인애국단

조직과 이봉창 . 윤봉길 의거 등을 사전에 승인하여 실행케 하였다. 한인애국단은 1932년 1월 이봉창 의사가

일본 도쿄에서 일왕에게 폭탄을 투척하였으며, 그해 4월에는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 상하이

주둔군 등을 폭살키시는 의거를 감행하였다. 또한 최홍식. 이덕주 . 유상근 등 한인애국단의 일본 관동군 사령관과

조선 총독 암살 미수 사건 등을 거행하는 등 침체에 빠져있던 독립운동에  커다란 활력을 불어넣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김철 -

1919년 8월 김철 선생은 교통 차장에 임명되었으며, 그 해 12월에는 교통청장 직무대리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김철 선생은 국무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각지에 지방교통국을 설치하는 등 국내외 동포사회를 연결하는

연락체계의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임시의정원 의원으로도 활동하였으며, 1924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회계감사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26년 12월 이동녕. 김 구 등과 함께 국무위원으로 선촐되었고, 

1930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장으로서  군사활동을 관장하였다.  이외에도 각종 독립운동단체의

결성에도 참여하였고  1920년 1월에는  김구 등과 함께  군사 양성을 위한  의용단을,  3월에는 안창호

등과 함께  선전위원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이외에도 한중호조사 . 시사책진회 . 한국독립당 등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이동과 김철 -

1932년 윤봉길 의거로 일제 경찰의 추격을 받게된 김철 선생은 김구. 엄항섭. 안공근 등과 함께 

상하이의 미국인 피치 부인 집에 은거하였다가,  5월 10일 항저우로 피신하였다. 김철 선생은 항저우

청태 제 2여사 32호실에 대한민국임시정부 판공처르 개설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업무를 재게하였다.

 이러한 김철 선생의 활동으로 존폐 위기에 처하였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그 법통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33년 7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으며, 1934년 다시 국무위원에 선임되어 재무장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의 여당인 한국독립당의 이사로

선출되어 활동하는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법통을 지키며, 오로지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하였다.

 

 

신한청년당 특사로 국내에 파견된 김철 선생과 독립운동의 전개를 협의하고

자금을 지원하였던 천도교 의암 손병희 성사. 그리고 독립신문에 게제되었던 내용.

 

 

- 김철 선생의 판결문 -

1920년 7월 19일 신한청년당 대표로 국내에 파견되어 군자금 모금활동 등를 전개한

김철 선생에 대한 궐석재판에서 징역 5년을 선고한 일제의 판결문

 

 

- 대한적십자회 청연서 -

1922년 4월 김철 선생이 대한적십자회 감사로 활동하면서 만주의 동포들을 지원할 의연금 모금을 호소한 문서

 

 

- 대한민국 의용단 취지서 -

1920년 1월 김철 선생 등이 군사 양성을 위해 조직한 대한민국 의용단의 설립 취지서

 

 

 

의열문 (義烈門)

 

 

구봉사(九峯祠)

 

 김 철 선생 존영 앞에 촛불과 향을 사르고 배례를...

 

 

 

 

재현 상해임시정부청사 (김철기념관내)

 

 

임시정부회의실

 

임시정부 부엌

 

김구 선생 집무실

 

정부집무실

 

임시정부 침실

 

-독립운동역사관-

태극기 앞에 선서를 하고 기념촬영을 했던 포토존

 

-고문의 상처-

일제의 잔악상을 보여주는 고문도구 전시

 

-통곡의 철창-

잔혹한 고문의 역사를 비롯하여 일제침략기 탄압 및 고문의 내용 등 관련 사진자료 전시

 

 

 

초목에 맺힌

이슬까지도

망한 민족의

눈물인가!

 

김지환 :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48인의 1인

3.1운동으로 재판을 받을 당시의 감회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급 50인 패찰

 

 

 

 

 

 

 

 

 

 

 

 

 단심송과 3인의 합장묘

(일강 김철 선생과 두 분의 부인)

 

 

 

 

 

일강 김철 선생은 위 '단심송'의 주인공 첫번째 아내와의 사이엔 자식을 두지 못했고

 도산 안창호 선생의 소개로 두 번째 부인을 맞아 두 딸을 두었다고 한다.

 기념관을 관리하고 계시는 사진 상 오른쪽 분이 양손(養孫)을 잇고 있다고.

 

일강 선생 기념관과 임정청사에 다시 한 번 예를 갖추고...

 

 

귀로에 들른 함평 '모악산 용천사'

 

 

 

 

 

 

 

 

 

 

 

 

 

 

 

 

 

 

 

 

 

 

 

 

 

 

 

이 한 몸 돌보지 않고

나라에 몸 바쳐

만 번 죽더라도

앞으로 나갈것을

하느님과 조상에 맹세하노라

 

 

 

- 어느 독립운동가가 도산 안창호 선생에게 보낸 혈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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