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 백계산 옥룡사지 동백숲
- 문화재청 사진 -
. 옥룡사지 동백숲은 남부지방 사찰 동백숲의 원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수령 100년 이상 7천 주 정도가 군락을 형성하고 있다.
- 문화재청 사진 -
쌍탑(부도)이 전해져 그 이름이 일찍부터 알려져 왔다. 그러나 1878년(고종 15) 화재를 당해 폐찰이
되면서 천년 이상 밝혀 왔던 법등은 꺼지고 사역(寺域)은 점차 폐허화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구례 간전면에 거주하는 청주한씨 문중에서 절터를 중심으로 주변 일대를 매입,그들 선대의 묘지를 조성하고 재실을 지으면서 옥룡사지는 더욱 그 흔적을 잃어갔다.
1994년부터 1999년까지 순천대학교 박물관에서 4차례의 조사를 실시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도선과 경보의 부도와 비가 있던 탑비전지(塔碑殿址, 일명 비석거리)에서 부도를 보호하였던
2동의 건물지가 노출되어 최초로 나말여초 시기의 부도전(浮屠殿)이 조사되었다.도선의
부도전에서는 8각 지대석 아래의 석곽 내에서 도선의 석관(길이 95㎝, 너비 54㎝, 높이 48㎝)이
출토되었으며 석관 안에는 그의 인골(人骨)이 물속에 잠겨 있었다.인골은 두개골에서 척추, 골반까지
원형대로 가지런히 놓이고 척추 좌우로 하지 골(대퇴골, 비골)과 상지 골(상완골 요골)이 놓였다.
이 인골로 보아 도선은 화장(火葬)을 하지 않고 우리의 전통 장법인 2차장[洗骨葬]을 하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도선비[證聖慧燈塔碑]편은 발견되지 않아 옮겨졌거나 파손되지 않고
묻혀 있을 가능성이 있으며, 경보비[寶雲塔碑]편은 잔편으로 100점 이상 발견되어 산산이 깨진
것으로 드러났다.절터의 건물지는 상층만 조사하였기 때문에 대체로 조선시대의 건물지만
조사되었는데 여러 동의 건물지가 노출되었고 옥룡사(玉龍寺), 성화십이년 병신(成化十二年 丙申,
1476), 만력십칠년 기축(萬曆十七年 己丑, 1589), 송치(松峙)’ 등의 명문이 있는 기와, 분청사기,
순백자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건물지 아래층에는 여러 유구층이 확인되어 앞으로
조사가 더 진행되면초창기의 유구도 그 모습을 알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민족문화대백과 인용 -
광양 백운산 논실마을 가는 길
가운데 안부가' 한재'이고 왼편 석양의 잔상이 남은 곳이 똬리봉이다.
백운산 가장 깊숙히 자리한 논실마을
신선대가 석양을 받고 있는 모습.
석양의 잔상을 뒤로하고....
해질녘, 참으로 간만에 찾아든 옥룡사지.
그때가 언제였던가? 그야말로 백운산 일대에서 살다시피 했던 그 때.
옥룡사지 발굴과 도선국사 유골 수습에 이르기까지.
소식은 접하고 있었지만 막상 사지를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 궁금했었다.
동백숲 속 여기저기 산재하던 묘지는 물론 짝퉁 '옥룡사'까지도 사라지고.
제법 넓직한 폐사지가 내 눈앞에 펼쳐진다.
석양빛 콘트라스트의 강렬함이 동백 이파리에 번쩍이는 광경.
그것은 마치 두터운 초록 동백 이파리가 겨울의 잔상을 털어내고 싶은 표정.
한 시절, 이 동백숲에서 참으로 많은 사색에 잠겼던 전력의 나.
이십년 저편의 나와 금일의 내가 옥룡사지 동백숲에서 조우하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 보니
그시절 대부분의 주제는 전일적(全一的) 자아였던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