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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행·여행·풍경

보길도 기행

2014. 1.27 

 

土末,  땅끝탑으로 가는길.

흑일도 하늘이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합니다.

 

 

 

애공 ~~~~!

  뱃시간 땜에  달려가기 바빠 그땐 채 다 읽어보지 못했거든요.

 

 

 

땅끝탑 당도

 

 

 

 

 

 

 

 

 

 

 

 

 

한반도 최남단 땅끝에서 태평양을 향하여 출항.

 

 

 

 

 

 

 

 

 

 

 

 

 

금방이라도 일출이 시작될 듯.

이곳에서 느긋하게 일출을 감상했으면 좋으련만 시간이...

 

 

 

부지런히 갈두항을 향해 가는데 일출이 시작됩니다.

 

 

 

 

흑일도 너머로 돋는 음 12. 27 아침 해

 

 

 

 

갈두항 당도.

 

 

 

 

갈두항에서 바라본 땅끝전망대

 

 

 

 

노화도를 향하는 선상에서 바라본 멀어지는 갈두 항.

 

 

 

 

노화, 보길 연도교.

먼저 왼편에 보이는 장사도로 연결된 다리를 건넌 다음,

 또 하나의 다리를 지나야 보길도에 닿게된다.

 

 

 

보길도에 당도하여 건너다 본 노화읍.

 

 

 

 

부용동 원림

 

 고산 윤선도(선조 20년 1587~현종12년 1671)가 1637년부터 1671년 그가 죽을 때까지

13년간을 보길도에 살면서 어부사시사 및 많은 한시를 남긴 곳이다 부용동 계곡의 지형을

이용하여 아름다운 정원공간을 조성 하였는데 부용동 입구의 세연지를 비롯하여 계담 위

산자락에 있는 옥소대, 기암괴석의 경승지에 있는 동천석실, 격자봉 밑의 낙서제 곡수당 등

기발한 조원 안목과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통한 원림 조성의 높은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판석보(板石洑)

 

나라안 조원 유적 중 유일한 석조보로 세연지의 저수위 조절 시설이다.

평소에는 돌다리가 되고 우기에는 폭포가 되어 수면이 일정량을 유지하도록 했다.

판석보를 통해 형성된 계담은 세연정 앞에 만들어진 지당에 물을 대는 공급원이 되었다.

 또 계담 너머 옥소대 쪽으로 연결하는 동선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孤山 윤선도

 

본관 해남(海南). 자 약이(約而). 호 고산(孤山) ·해옹(海翁). 시호 충헌(忠憲). 1612년(광해군 4) 진사가 되고, 1616년 성균관 유생으로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 등의 횡포를 상소했다가 함경도 경원(慶源)과 경상도 기장(機張)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나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 여러 관직에 임명된 것을 모두 사퇴했다. 1628년 42세 때 별시문과(別試文科) 초시(初試)에 장원,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어 봉림대군(鳳林大君:孝宗)을 보도(輔導)했다. 1629년 형조정랑(刑曹正郞) 등을 거쳐 1632년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을 지내고 163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문학(文學)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고 파직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의병을 이끌고 강화도로 갔으나 청나라와 화의를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주도로 항해하다 풍랑을 만나 보길도에서 은거하였다. 하지만 병자호란 당시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 하여 1638년 영덕(盈德)에 유배되었다가 1년 뒤에 풀려나 해남으로 돌아갔다. 
- 지식백과 -

 

 

1652년(효종 3) 왕명으로 복직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 때 남인(南人) 정개청(鄭介淸)의 서원(書院) 철폐를 놓고 서인 송시열(宋時烈) 등과 논쟁, 탄핵을 받고 삭직당했다. 1657년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에 복직되었다.

1659년 남인의 거두로서 효종의 장지문제와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를 가지고 송시열이 영수로 있는 서인의 세력을 꺾으려다가 실패하여 1660년 삼수(三水)에 유배당하였다.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벽지의 유배지에서 보냈으나 경사(經史)에 해박하고 의약 ·복서(卜筮) ·음양 ·지리에도 통하였으며, 특히 시조(時調)에 더욱 뛰어났다. 그의 작품은 한국어에 새로운 뜻을 창조하였으며 시조는 정철(鄭澈)의 가사(歌辭)와 더불어 조선시가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 사후인 1675년(숙종 1) 남인의 집권으로 신원(伸寃)되어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저서에 《고산유고(孤山遺稿)》가 있다.
-지식백과 -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던 남인의 가문에 태어나 집권 세력인 서인에 강력하게 맞서 왕권 강화를 주장하다가, 20여 년의 유배 생활과 19년의 은거생활을 했다. 그러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 화려한 은거 생활을 누릴 수 있었고, 그의 탁월한 문학적 역량은 이러한 생활 속에서 표출됐다. 자연을 문학의 제재로 채택한 시조 작가 가운데 가장 탁월한 역량을 나타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 지식백과 -

 

 

문학적 특징은 자연을 제재로 하되 그것을 사회의 공통적 언어 관습과 결부시켜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개성적 판단에 의한 어떤 관념을 표현하기 위해 그것을 임의로 선택하기도 한 데에 있다.

또, 대부분의 경우 자연은 엄격히 유교의 세계관과 긴밀한 관련을 맺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자연과 직접적인 대결을 보인다든가 생활 현장으로서의 생동하는 자연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자연이 주는 시련이나 고통을 전혀 체험하지 못하고 조상이 물려준 유산을 토대로 풍족한 삶만을 누렸기 때문이다

- 지식백과 -

 

 

정철(鄭澈)

·

박인로(朴仁老)와 함께 조선시대 3대 가인(歌人)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들과는 달리 가사(歌辭)는 없고 단가와 시조만 75수나 창작한 점이 특이하다.

- 지식백과 -

 

 

 

세연정 입수구

 

 

  

세연(洗然)이란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을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 지는 곳'이란 뜻으로

고산연보(孤山年譜)에서는 1637년 고산이 보길도에 들어와 부용동을 발견했을 때 지은 정자라 하고 있다.

정자의 중앙에 세연정(洗然亭), 동쪽에 호광루(呼光樓), 서쪽에 동하각(同荷閣), 남쪽에 낙기란(樂飢欄)이란

편액을 걸었으며, 또 서쪽에는 칠암헌(七岩軒)이라는 편액을 따로 걸었다.

 

 

 

 

 

 

 

 

 

 

 

 

 

 

 

 

 

 

 

 

 

 

 

 

 

 

 

 

 

 

 

 

 

 

 

 

 

 

 

 

 

비홍교(飛虹橋)

 

 

 

 

앞에 보이는 세연정은 계담과 방지방도 사이에 위치한 정방형의 정자이다.

고산연보에는 고산이 1637년 보길도에 처음 들어와 부용동을 발견했을 때 건축된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후 이 정자는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소실되었다가 근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우리나라 조경유적중 특이한 곳으로, 고산의 기발한 착상이 잘 나타나있다.

개울에 보를(판석보, 일명 굴뚝다리)를 막아 논에 물을 대는 원리로 조성된 세연지는

산중에 은둔하는 선비의 원림으로서 화려하고 규모가 크다.

'어부사시사'는 주로 이곳에서 창작되었다. 

-지식백과 인용 -

 

 

부용정 뒷편

 

 

 

 

세연정은 사방으로 경관을 감상하는데 용이한 구조를 가졌다.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으로는 세연정 사방에 편액을 달았다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보길도지에 따르면 세연정 중앙에는 세연정이 남쪽에는 낙기란, 서쪽에 동하각, 동쪽에 호광루

그리고 칠암이 널려있는 동쪽에 또 다른 편액인 칠암헌을 달았다고 한다.

세연정은 중앙 방단상에 다시 3단을 축조해서 기단을 조성한 다음 그 위에 건축되었으며

기단의 높이는 약 1.8m~2m 가량 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주변경관의 조망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 지식백과 -

 

 

건너편에 보이는 파란 지붕은 아마도 초등학교 건물인 듯

우리나라 원림은 이른바 차경(借景)문화를 지향하는데 이럴 수가.!

나무를 심어 건물을 가리는게 좋을 듯 싶은데...

 

 

 

 

 

 

 

 

 

 

 

 

 

 

 

 

 

 

 

 

 

 

 

 

 

 

 

 

 

 

 

 

세연정(洗然亭에 올라 바라본 동대(東臺)

가로 6.7 세로 7.5 장방형으로 높이는 1.5m.

'어부사시사'가 불리워지면 무희들이 저곳에 올라 춤을 추었다고.


 
  

 

서대(西臺)

 

  삼단이 남아있으며, 축단 한 변이 7.5m,  높이는 2.2m에 이른다.

동대와 대칭을 이루는데 춤을 추며 나선형으로 된 계단을 올랐다고.

 

 

낙서재(樂書齋) 

윤고산의 주된 주거공간으로 주산인 격자봉의 혈맥을 잡아 터를 잡고

동천석실과 마주보는 공간에 3칸의  모옥(茅屋)지었는데 후손들에 의해 와가(瓦家)로

 바뀌었다고 한다.

'보길도지'에 의하 처음 이곳에 집을 지을 때는

수목이울창해서

산맥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사람을 시켜 장대에 깃발을 달고 격자봉을 오르내리게 하면서

그 높낮이와 향배를 헤아려 집터를 잡았다고 한다. 이렇게 잡은 낙서재 입지는 보길도 안에서

가장 좋은 양택지로 평가받는다는데 최근 마당 북쪽에 고산이 달을 감상하던 귀암(龜巖)이

발견되어 남쪽의 소은병과 낙서재, 귀암의 축선이 확인되었다고.

 

 

 

솔숲 사이 내 집 가서 새벽달을 보자 하니
배 붙여라 배 붙여라
공산 낙엽(空山落葉)에 길을 어찌 찾아갈꼬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흰 구름 따라오니 입은 옷도 무겁구나
윤선도 <어부사시사> 춘사(10)

 

낙서재 지표조사를 하던 중.

기록으로 전하던 거북바위가 발견되었다던데 바로 이 귀암(龜巖)인 모양.

 

 

 

소은병

 

 

주자가 기거했던 무이산 봉우리 이름인 대은병의 이름을 차용해 소은병이라 지을 정도로 주자의 사상을 흠모했지만

 거기에만 얽매이지 않고 다방면의 학문을 접하려 했던 융통성과 호기심이 남달랐던 학자, 윤선도.


 

산수간 바위아래 띠집을 짓노라 하니
그 뜻을 모르는 남들은 웃는다 하지만
어리석은 시골떼기의 생각에는 내 분수에 맞는가 하노라
윤선도 <산중신곡> 만흥(漫興)중
 

 

이 바위 위에는 삼각형홈이 크게 파여있어서

빗물이 고이면 바위벽을 타고 흘러내리게 되어 있다.

이 바위와 바로 아래의 낙서재, 그 앞의 거북바위(龜巖)가 축을 이룬다.

 

 

소은병 바위 위헤서 바라본 모습.

오른쪽 멀리 곡수정이 보인다,

 

 

빽빽한 숲이 있던 이곳 바위에 올라 사색에 잠기곤 했다는 고산..

 

 

내일이 또 없으랴 봄밤이 그리 길까
배 붙여라 배 붙여라
낚싯대로 막대 삼고 사립문을 찾아보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어부의 평생이란 이러구러 지낼러라
윤선도 <어부사시사> 춘사(10)

 

 

 

오른편 기와 건물은

제물, 제기 등 제사에 필요한 도구를 보관하는 전사청이다.

 

 

동풍이 잠깐 부니 물결이 곱게 인다
돛 달아라 돛 달아라
東湖(동호)를 돌아보며 西湖(서호)로 가자꾸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앞산이 지나가고 뒷산이 나온다

윤선도 /어부사시사 춘사(3)

 

 

 

서재는 곡수 남쪽 두 골짜기 중앙에 입지한 강학을 위한 건물로

문 안쪽에서 밖을 바라본 모습이다.

건립 당시 학관(學官 고산 5남)등이 선생께 가르침을 받던 곳이다.

멀리 산 중앙 하얀 부분이 동천석실이 자리한 곳이다.

 

 

 

곡수당((曲水堂) 

낙서재 건너 아랫쪽 작은 개울을 중심으로

초당·석정(石亭)·석가산(石假山)·연못·화계(花階)·다리 등 

다채로운 조원(造苑)이 베풀어진 곳으로 윤선도의 아들 학관이 머물던 공간이다.

 

 

 

사당(祠堂)

낙서재에서 죽은 윤고산 사후 이곳에서 얼마간 초장을 지냈었다고.

 

 

 

 

 

 

 

사당에서 바라본 풍경

 

 

 

이 개울이야말로 곡수당 조원(造苑)의 핵심

 

 

 

 

 

개울물을  홈통으로 연결, 앞에 보이는 돌확으로 떨어지게했고

다시 그 물이 넘치면 아래의 상연지로 떨어지게 되어있다

 

 

 

 

 

 

 

 

 

 

 

 

 

 

 

 

 

곡수당 안에서 바라본 상연지

 

 

 

 

 

 

 

곡수당에서 바라본 개울과 건너편의 사당.

 

 

 

 

 

 

 

오른쪽 멀리 낙재가 보인다.

 

 

 

하연지

형태는 정방형에 가깝고 한 변의 길이가 13m정도이다.

호안 축대의 높이는 약 1m가량이며, 발굴 당시 연못 입수구와 출수구가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었다.

연못 옆에 석정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동천석실(同天石室)

 

부용동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곳으로

윤선도가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곳이자 부용동 제일의 명승이라 했던 곳.

 

 

  

연지, 석담, 석천 

동천석실 정자 오른쪽 암벽 사이에서 솟아나는 석간수를 받아 모으는

연지가 있고, 벼랑쪽을 석담이라 하고 바깥쪽 연지를 석천이라 한다.

 

 

 

예송리

 

 

예송 갯돌 해변과 상록수

 

 

 

갯돌과 어우러진 해송군락.

 

 

 

 

 

 

 

 

저 유명한 천연기념물 '예송리 상록수림'

근데 뭔가 휑하고 이상한 느낌. 자세히 살펴 보니 아뿔사!!!!

 

 

화재로 인해 상당수 나무들이 고사해 버렸고 해변가 집 마저도....

 

 

 

이 무슨 곡절이란말인가?

팽나무, 해송 등 상당수가 불에 타버렸다.

이 모습을 보고 과연 누가 보길도 예송해변을 찾아올 것인가 말이다.

더 이상의 여행을 접고 맥빠진 심정으로 보길도를 떠난다.

 

 

 

 

 

 

 

완도 화흥포로 나가는 통로  노화도 동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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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남 송지면, 땅끝이라 불리우는 토말(土末)을 찾아들었다.

여기서 하룻밤을 묵고 내일 아침 보길도를 가기 위해.

 

이내 소싯적엔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지명 '땅끝'

적당량의 아르꼬르를 털어 넣었다 싶었는데 눈을 떠 보니 새벽 3시

 

엎치락 뒷치락 끝에 간신히 맞이한 아침.

 이른바 땅끝 해맞이 정도는 해 주는게 내 자신과 여행에 대한 도리. 

 

정말 까마득한 기억을 안고 보길도를 찾았다.

노화도와 보길도 사이에 연도교가 놓였다는 사실도 모를 정도였으니까.

 

군 단위가 아닌 일반 섬 중에 아마도 유일한 읍이 노화읍 아닐까 싶다.

가는날이 장날이라고  展이 펼쳐진 모양새가 아마도 노화도 5일장인 모양

 

다리 건너 보길도로 건너가 아침을 해결한 후 '부용동 원림' 순례에 나선다.

  '어부사시사'를 접하자 마자 찾아갔던 보길도의 첫 추억과 갑오년의 대비.

 

 44년 저편 그시절, '난대림의 보고'라는 것을 학습하고 찾아가긴 했지만

 눈 앞에 펼쳐진 검푸른 상록수림대를 보며 황홀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

 

세연정이야 그렇다 치고, 윤고산이 주로 머물렀다는 낙서재와

바로 옆 곡수당의 복원이 눈길을 끌고 있었다.

 

기록에 근거한 사실들이 하나 둘 제자리를 찾아가는 모양.

 

역사와 문학과 예술 그리고 싱그런 자연이 어우러지는 답사길.

보길도는 그러한 답사객을 별 무리없이 맞아주는 국내 몇 안되는 곳 중의 하나.

 

동짓달 끝자락, 

지금 남녘 다도해 섬들은 온통 검붉은 꽃동백의 불길에 휩싸인 형국.

 

P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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