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 15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雙磎寺)의 말사이다.
670년(문무왕 10)에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
1208년(희종 4)에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수선사(修禪社)의 법석(法席)을 물려주려 하자 그 뜻을 뿌리치고 이곳으로 들어와서 자취를
감추었던 혜심(慧諶)이 중창하였다.임진왜란 때 전소된 뒤 1639년(인조 17)에 학명(學明)과
의오(義悟)가 중창하였으며, 1883년(고종 20)에 용성(龍城)이 중건하였다. 1919년에는 영호(暎湖)가
이 절의 강사로 있으면서 세진교(洗塵橋)를 놓은 것을 비롯하여 두 차례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앞에 자방루(滋芳樓), 좌측에 심검당(尋劍堂),
우측에 적묵당(寂默堂)이 있으며, 그밖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6호로 지정된 명부전과
금당(金堂)·팔상전(八相殿)·나한전·산신각·독성각(獨聖閣) ·칠성각·객실 등이 있다.
건물 하나하나가 큰 규모를 보이고 있고, 가람의 지붕이 마치 연꽃무늬처럼 배열되어 있어
규모면에서 본사인 쌍계사를 능가하고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495호로 지정된
임자명반자(壬子銘飯子)를 비롯하여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3호인 자방루,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0호인 반종(飯鐘),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2호인 대웅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99호인 고성 옥천사 소장품 등이 있다.
임자명반자는 고려시대에 동으로 만든 것이고,
자방루는 지은 지 300년이 넘는 우아한 건물로서 이 절의 품위를 한층 더 높이고 있다.
이 밖에도 큰 법고(法鼓)와 자방루 앞뜰에 하얀 화강암으로 다듬어 세운 청담(靑潭)의 사리탑이 있다.
이 절은 청담이 처음 출가한 사찰이기도 하며, 고려 말의 요승 신돈(辛旽)이 노비로 살았던
절이기도 하다. 절의 일원이 경상남도 기념물 제140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속 암자로는 백련암(白蓮庵)·청련암(靑蓮庵)·연대암(蓮臺庵) 등이있다.
경남 고성 연화산 옥천사 (蓮花山 玉泉寺)
'호조참판' 벼슬을 한 이가 이 절에 시주를 많이 했대서
비와 비각을 세워 특별 대접을 하는 모양.
하마비
옥천사엔 임금의 수복을 비는 '축성전'이 있기에
여기서 그만 말잔등을 내려야 한다는 것.
하동 쌍계사에 가면 고운 최치원이 찬 한 '진감선사대공탑비'가 있다.
그 내용 중 "쌍계사는 본디 옥천사라 하였으나 근처에 옥천사라는 절이 있어 헌강왕이
쌍계사라 고쳐 제액을 내렸다." 라는 기록으로 보아 신라 문무왕 16년
의상대사가 옥천사를 창건했다는 내용이 뒷받침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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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옥천(蓮華玉泉)은 연화산 옥천사를 줄인 말이다. 이 편액은 조선말기에 병조판서를 지낸 위당 신관호(威堂 申觀晧, 본명은 申櫶, 1810-1884)공의 글씨다. 위당 공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수제자로 무과에 급제한 무인이면서 서예와 바둑에 조예가 깊었다. 이 글씨를 보면 蓮자는 복잡한 윗 혹들을 가늘게 쓰다가 내려올수룩 굵어지고 있고 玉자 같은 간단한 글짜는 힘을 넣어 쓴 후 점을 허리께에 매달아 요지부동으로 마감하고 있다. 추사 선생이 "한대(漢代)의 명필에 비해도 손색이 없다. 나보다 났다." 고 극찬했던 명필이다.해인사에도 <팔만대장경>이라 쓴 위당 공의 필적이 남아 있다.위당 공이 철종13년(1862)부터 15년(1864)까지 3년 동안 통영 삼도수군통제사(종2품, 경상감사와 동급)로 내려와 있을 때 옥천사를 방문하여 이 글씨를 썼다한다. 추사 김정희선생의 수제자가 신관호공, 다음 제자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인데 1864년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자 신관호 공을 중앙으로 불러올려 형조판서, 병조판서, 공조판서, 어영대장을 역임토록했다. 신공은 강화도 조약 당시 조선측 대표를 맡기도 하였다. |
- 옥천사 홈피에서 발췌한 내용 -
계단을 올라서 바라본 옥천사 경내
(오른편은 연분홍 겹 홍매이다.)
왼편, 종각 앞에 선 백매.
옥천사를 가장 돋보이게 하는 요소가 바로 이 백매에 있다라는 사실.
조선 고매의 전형 홑 백매
이 글씨는 동국진체풍의 후기 글씨로 영조말기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낙관에 정수혁(鄭守赫)이라는 인장이 찍혀 있어 영조말기에 경상감사를 지낸정수혁의 글씨로 보인다. 아래는 정수혁(鄭守赫)이 읇조린 詩다. 홍매(紅梅) 가지마다 눈을 흩고 봄빛을 독차지해 산호로 깎아 낸가 송이 송이 눈부시다. 아리따운 젊은 여인 애교 흠뻑 머금은 듯 향기 바람 절로 일어 정든 임을 애태우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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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씨는 매우 단정하고 숙련된 명필 글씨이다. 낙관을 탁본하여 판독한 결과 조명채(曹命采 1700-1764)로 되어 있어 영조 때 이조참판, 대사헌을 지낸 조명채가 옥천사에 왔을 때 쓴 것으로 추정된다. 조명채는 불교에 심취하여 해남 대둔사 환성당 지안(喚醒志安:1664-1729)대사의 비석을 다시 세울 때 비문을 쓰기도 했다. 본관은 창녕, 자는 주경(疇卿), 호는 낸재(蘭齋). 1762년 사도세자 사건이 일어났을 때 옥사와 관련하여 국문을 당하다가 곧 풀려났으나 2년 후에 죽었다. 영조는 그를 애석하게 여겨 그 아들에게 봉작을 내렸다. |
- 옥천사 홈피에서 발췌한 내용 -
대웅전 구역으로 '탐진당' 을 리모델링 중인지라 전체적으로 어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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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계단 양 옆에 한 쌍 씩,
마당에 두 쌍, 합의 네 쌍의 석주가 서 있는 대웅전 구역.
아내를 떠올리고는 했다. 남편과 막내딸을 불문(佛門)으로 떠나보내고, 온갖 번민과 근심 끓이고 산다는 그녀의 소식을 접할 때면 팔만사천 번뇌를 여의었다는 청담조차 모래 위에 부어진 물처럼 아픔이 가슴 속 깊이 스며들었다. 자물쇠도 열쇠도 없는 마음의 감옥에 갇혀 괴로워 할 그녀가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젊은 날 진주 호국사에서 벌컥벌컥 물을 들이키는 그에게 ‘목마름이야 물로 다스릴 수 있지만 마음이 탈 때에는 무엇으로 끌 수 있느냐’는 한 노스님의 말을 듣고 시작된 출가에의 의지. 대를 이어야할 2대 독자가 삭발 출가하려 하자 아버지는 서둘러 그를 혼인시켰고, 청담과 차점이(1905~1988)와의 인연도 이렇게 시작됐다.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넉넉지 못한 농가로 시집와 소처럼 일하고 양처럼 순종했던 여인. 자신이 백양사로 해인사로 구름처럼 떠돌 때에도 그저 지켜만 보고, 일본에서 출가자의 길을 걷겠다고 선언했을 때도 그저 고개만 끄덕이던 착한 여인. 고성 옥천사로 출가한 청담이 고향을 찾아가 이혼수속 얘기를 꺼냈을 때 그렁그렁 고인 눈물이 아내의 야윈 뺨을 타고 흘러내리던 모습을 그는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기왕지사 출가했으믄 스님다운 스님이 되셔야지예. 지야 뭐, 당신이 하자는대로 해드리겠심니더.”
1930년 봄, 고향 낙성법회에 법문 왔다가 한사코 매달리시는 어머니에 이끌려 다시 찾은 고향집. 마지막 소원이라며 “가문 이을 씨앗 하나만 심어 놓고 가라”는 어머니의 한 맺힌 절규에 청담은 목건련을 떠올리며 ‘불쌍한 어머니, 저분을 위해서라면 지옥엔들 가지 못하랴.’라고 마음을 굳혔다. 동시에 아들을 낳지 못해 주변의 핍박과 자괴감에 두고 두고 시달릴 젊은 아내에게 옛 지아비로서 마지막 의무라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하룻밤 파계. 첫 닭이 울기도 전 버선도 신지 않은 채, 속가 뛰쳐나온 그는 깊은 절망에 빠졌다. ‘아! 수행자인 내가…...수미산 같은 이 죄업을 어찌 다 씻을고.’ 가혹하리만치 매서운 청담의 참회와 인욕수행이 시작된 것도 이 때부터다.
홑옷에 맨발 차림. 청담의 눈물겹도록 처절한 만행은 덕숭산, 오대산, 설악산, 묘향산을 거쳐 북간도까지 이어졌다. 여윈 볼을 할퀴고 지나가는 칼바람에도, 허벅지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을 때도 늘 맨발이었다. 살은 얼어 찢겨 나가고 발은 쩍쩍 갈라져 피가 솟았다. ‘눈 위에 피 묻은 발자국이 있으면 청담 스님이 다녀간 자리’라는 말이 수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늙은 홀어머니와 아내를 두고 출가의 길을 선택한 청담은 가족들 고통을 떠올리며 스스로 다그치며 피나는 정진을 멈추지 않았다. 청담이 서른 넷 이른 나이에 묘향산 설령대에서 오도송을 부를 수 있었던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모든 부처와 조사는 어리석기 그지없어 어찌 현학의 이치를 깨우쳤으랴. 만약 누가 나에게 한 소식 한 바를 묻는다면 길가에 서 있는 고탑이 서쪽으로 기울었다 하리라.
오랫동안 괴롭혀오던 마음의 갈증이 해갈된 청담. 하지만 이 무렵 그에게 들려온 속가의 얘기는 그를 안타깝게 했다.
옛 아내가 또 딸아이를 낳았으며, 이로 인해 시어머니로부터 혹독한 시집살이를 당하고 있다는 것. 청담은 어머니가 더 이상 죄업을 지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이르렀고, 늙은 홀어머니를 직지사 서전암으로 모셔와서 출가토록 했다.
‘아들 스님’의 당부대로 비구니 성인(性仁)은 묵은 한을 내려놓고 열심히 염불정진 했다. 훗날 어머니가 임종을 얼마 앞두고 며느리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했으며, 며느리도 사찰에 머물며 임종 때까지 시어머니를 돌봤다는 얘기를 들은 청담은 슬픔에 앞서 두 여인의 화해에 안도의 한숨부터 먼저 내쉬었다.
청담과 차점이가 다시 만난 건 몇 해 뒤인 1943년 여름. 복천암에서 생식하며 안거수행을 하던 청담은 사월초파일날 상주경찰서로 연행됐다. 잦아들지 않는 독립운동에 골머리 앓던 일제는, 기미년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청담이 북간도 간 이유를 집요하게 추궁했고, 법(法) 찾아 수월을 만나러 갔다는 그의 항변에도 연일 모진 고문을 가했다.
인욕제일 청담이건만 두 달여 계속된 잔학한 고문에 결국 실신했고, 피투성이 된 채 사경을 헤매야 했다. 이 때 멀리 진주에서 이 소식을 듣고 맨 먼저 달려온 이가 차점이였다.
“시님, 시님…. 이게 뭔 일이란 말입니꺼.”
낡고 찢긴 옷에 피골이 상접한 청담의 모습에 차점이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녀는 마지막 남아있던 땅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청담을 경찰서에서 빼내 상주포교당으로 옮겼다. 차점이는 청담의 곁에 머물며 24시간 지극정성으로 병구완을 했다.
회복될 것 같지 않던 청담의 병세는 하루가 다르게 나아졌고 조금씩 거동도 가능해졌다. 청담은 희끗희끗 흰머리가 돋기 시작한옛 아내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성껏 들려주었다. 차점이는 무뚝뚝하기만 하던 그에게서 처음으로 따뜻함이 느껴져 왔다. 지아비가 아니라도 좋았다. 그냥 이렇게 세월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남편이 아니라 바람과 구름이 되어 떠도는 수행자였다. 몸을 추스릴 수 있게 되자 청담은 또다시 운수행각에 나섰고, 차점이는 그런 청담에게 한 땀 한 땀 정성껏 만든 바랑을 조심스레 건넸다.
“남을 즐겁게 하는 것이 보살이요,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보살이요, 남을 살리는 것이 보살입니다. 좋은 일 많이 하시고 염불도 지극정성으로 하도록 해요.”
“예, 시님…. 알겠심니더.”
다시 몇 해가 흘러 일제의 탄압이 극도에 이른 1945년 초, 청담은 차점이로부터 편지 한통을 받았다. 젊은 남자는 징용으로, 처녀는 정신대로 끌고 가고 있으니 둘째 딸을 데려다가 스님으로 만들어달라는 부탁이었다. 파계를 해가며 까지 낳은 아이, 청담은 어쩌면 속세부터 이어져온 佛緣이라는 생각에 절친한 도반 성철의 도움을 얻어 머리를 깎도록 했다. 그러나 차점이는 막상 자신의 뜻대로 딸이 출가했건만 어린 딸이 절 생활은 잘 하는지, 건강은 괜찮은지 한시도 걱정 끊이질 않았다. 딸 묘엄이 조선 최고의 강백이라는 운허의 문하에서 공부할 때도, 뒤늦게 동국대학교에 입학했을 때도,청도 운문사로 내려가 강원을 개설해 학인들을 가르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차점이는 수시로 딸이 있는 곳을 찾았고 청담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면서도 늘 안타깝기만 했다. 청담은 절을 찾아 온 차점이에게 대도성(大道性)이라는 법명을 주고 걱정과 욕심을 내려놓을 것을 당부했지만 소용없었다.
조계종 종정직을 사퇴한 이듬해인 1968년, 청담은 옛 아내에게 간절한 편지를 띄웠다. 이제는 이런 저런 근심걱정 다 접어놓고 자신의 업장이나 닦으라고, 그래서 훗날 정토에서 다시 만나자고….
1971년 11월 15일 청담이 홀연히 열반에 들자 대도성은 자신의 삶을 지탱했던 대들보가 무너지는 듯했다. 십수 년 간 조석으로 기도하고 염불도 했건만 가슴 한 켠에 구멍이 숭숭 뚫린 것 같은 허전함은 어찌할 수 없었다. 몇 해 뒤 보다 못한 묘엄은 대도성을 절로 모셔와 손수 머리를 깎아 출가토록 한 뒤 대도(大道)라는 법명과 함께 스님으로서 생활할 수 있도록 했다.
대도는 절에서 생활하며 옛 남편의 뜻을 따라 염불과 경전독송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면서 ‘세상사가 꿈과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와 이슬 같다’던 청담의 말을, 비로소 가슴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1988년 5월 12일 마침내 대도는 고단한 삶의 여정을 접고 무정했던 남편, 인자했던 삶의 스승 청담이 있는 아미타불 회상으로의 마지막 여행을 위해 조용히 눈을 감았다.
※ 청담 스님이 대도성 보살님께 보낸 편지는 현재 서울 도선사 청담기념관에 전시돼 있습니다.
그러나 편지에 날짜가 기록돼 있지 않아 청담 스님이 정확히 언제 보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다만 당시 대도성 보살님과 같이 생활했던 손자인 부산대 철학과 김용환 교수는 1968년에 할머니가
청담 스님으로부터 그 편지를 받았다고 밝혔으며, 편지의 내용으로 미뤄보더라도 그 무렵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출처 : cafe.daum.net/BYG5/EaEs/5668
대웅전 계단 양편으로 나뉘어 선 당간석
맨 뒷편에 늘어선 전각 들
칠성각, 조사전, 독성각, 산령각, 나한전 등
대웅전에 보관중인 괘불함
대웅전 내부
모란과 연꽃 그림
닫집
아미타불을 모셨으니 극락전이라 해야할텐데...
말 하자면 아미타 부처님이 대웅전에 세 들어 계신다고 보면 되겠다.
내출목을 비롯 결구 상태나 벽화의 그림등
전체적으로 조선 후기의 느낌이 강한 전각이다.
대웅전 뒷편에 보관중인 당간지주목과 부자재
백과사전 기록중에 이'옥천' 관한 흥미로운 내용이...
// 위장이 약한자가 이 물을 마시면 곧장 설사를 하게 된다.
반대로 변비가 심한자가 이 물을 마시면 즉각적인 효험을 볼 수 있다..//
관솔불을 밝히던 불우리
반야와 지혜 한 쌍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 중 한 마리만 보인다.
단박에 탄허의 서체임을 알아 보겠다.
청담 선사의 사리보탑과 탑비
청담스님께서 .. 출가 전 부인에게 보낸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