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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행·여행·풍경

장흥기행 2편

장흥기행

 

2편

 

2014. 1. 6~7

 

 

억불산 능선상에 자리한 '정남진 천문과학관'

 

 

 

 

 

지구와 행성 크기 비교

 

 

 

 

 

천문과학관에서 바라본 억불산 정상일대

 

 

 

 

 

월산재(月山齊)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제73호)

- 장흥군 용산면 모산리 112번지 -

 

 

 

장흥 향교.연곡서원.강성서원.충렬서원.예양서원.만수사.영석재.월산재.장천재 등은 장흥 선비 정신의 산실이다.
그 중 '월산재는 장흥읍에서 남쪽으로 12㎞, 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4㎞지점에 있으며,
북으로는 억불산지맥을

등에 업고 남으로는 오산들 건너 이름높은 낙수골과 장흥~용산간 국도변 아름다운 자연경관속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 장흥군 용산면 모산리 모산마을은고려중엽에 세암치들에 탐진최씨, 김해김씨 등이 정착, 촌락을 이루어 모읍단이라 하였다.

1824년 영광 김씨들이 중심이 되어 후손교육을 위해 창건 향중자제들을 교훈하고 인재양성에 힘을 써 많은 인재가 배출했던

 배움의 터전이다. 용강사의 강당 면적는은1,362㎡에 이른다.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73호로 지정되었다.

 
-한국매일뉴스 참조 -

 

 

 

 

월산재(月山齋) 앞으로는 작은 물길이 흐르고 육중한 고목이 둘러친 곳을 지나면 좌우로 위엄을 나타내는 담이 인도하며

좌우대칭으로 설치되었다. 월산재라고 한 것도 앞산이 방월형 같다고 해서 월산, 앞에 흐흐는 천이 월내천(月內川)이라 해서

그렇게 불렀다 한다. 또 다른 이명으로 원내서재, 낙영재(樂英齋).월산정사(月山精舍) 라고도 부르고 있다.
이곳은 경관이 수려한 이곳은 원래 순조때 임씨(任氏), 최씨(崔氏)가 터잡고 살던 곳에 퇴락되었던 것을 1882년(고종 19)에

 영광김씨 몽흠,종손 상철 등과 사림들의 발의로 건립하고, 사우 용강사(龍岡祠) 바로 앞에 짓고 영광 김씨 5현을 모시고 있다. 

용강사 창건 이전인 1824년(순조 4)에 망선재(望先齋) 김상철(金尙澈)을 비롯한 영광김씨들이 중심이 되어 후손의

교육을 위해 창건하고 인재를 양성하였던 곳이다.

 

 - 한국매일뉴스 참조 -

 

 

 

나중에 용강사가 지어져 그 강당으로 이용하였으며 1890년(고종 27)에 중건하였고, 1995년 전면 보수하였다.
정면 6칸, 측면 3칸의 비교적 큰 규모이다. 주변의 관리나 건물은 아주 청결하고 작은 연못도 자리하고 있어 자칫

옛 고택같은 느낌이 든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처마는 홑처마로 꾸몄다. 평면구성은 대칭형의 일반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좌측에 정면 2칸의 대청을, 오른쪽에 온돌방과 부엌을 설치되어 있다. 장흥지역 사학으로서 후학을 양성하였을

 뿐 아니라 주위 경관이 수려하여 학남 김우(1833~1910)가 거처할 당시에는 많은 학자들이 찾아왔고,

장흥부사가 부임하면 반드시 이곳을 들렀던 곳으로 유명하다.


-한국매일뉴스 참조 -

 

 

 

 

 

 

 

 

 

충효절의(忠孝節義) 

 

목판에 양각되어 걸려있는 편액 모습이다. 

 

※ 아래의 것은 경남 함양 일두 정여창 고택 사랑채에 붙은 것으로 서체가 낡으면

모사하여 위에 덧 붙여 왔다는데 위 월산제의 것과 서체의 형태와 크기가 같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부사중에 조선 후기의 문신 송석(松石) 송기로(宋綺老 1830 ~ 1898) 부사 돌비를 세워 내방했던 흔적을 남겼다.

김광범·김상범·김성범·김정서·김상범·김우 등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상량문에 ‘재병자윤삼월십이… 란  기록이 있어   

1936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당 입구 계단에 동백 한 그루가 버티고 섰다.

 

 

 

 

 

 

 

 

 

 

 

 

 

 

 

 

 

 

 

 

 

 

 

 

 

 

 

 

 

 

 

 

 

 

 

 

 

 

 

 

 

 

정남진

근자에는 일출 감상 명소로 부상 중이다.

 

 

 

 

 

안중근 상과 정남진 전망대

 

 

 

 

 

초등학생들의 '장흥토요시장' 그림 전

 

 

 

 

 

정남진 전망대에 올랐으나 시야가 별로...

 

 

 

 

 

 

 

 

 

 

 

 

 

 

 

 

 

잠시 후에 들를 예정인 천관산이 건너다 보인다.

 

 

 

 

 

앞에 보이는 해안도로를 시원하게 달려왔다.

 

 

 

 

 

 

 

 

 

 

 

 

 

 

 

 

 

 

 

 

 

 

 

장흥 삼산리 후박나무

(천연기념물 제481호)

 

 

 

 

 

 

 

 

 

천관산 자락 방촌마을 위성탁 가옥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7호)

 

안채와 사랑채는 1910년대에 지은 것으로 보이며 나머지 건물들은 후대에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바깥마당에 연못을 파 정원시설을 꾸미고 있는 이 집은 안채, 사랑채, 곳간채, 아래채,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안쪽에 안채가 있고 사랑채는 안마당 사이로 축을 맞추어 배치하였다.

안채로 통하는 대문을 사랑채의 한 문을 이용해 좌우로 2번 꺾어 들어가 안마당에 이르도록 꾸민 점이

특이하다. 안마당 남서쪽에 곳간채, 동쪽에 아래채가 있다. 안채는 一자형 평면을 가지고 있으며

왼쪽부터 방·대청·방·부엌과 부엌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사랑채 역시 一자형 평면으로 누마루, 방

, 대문, 광을 두었다. 지붕은 모두 옆면에서 볼 때 지붕선이 여덟 팔(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대체로 전통 민가 건축 형식을 잘 갖추고 있는 집이다.

 

- 문화재청 -

 

 

 

 

 

 

 

 

 

 

 

 

 

 

 

 

 

 

 

 

 

이내 시선을 확 끌어당기는 영산홍 한 그루

 

 

 

 

 

 

개체 역시 수령이 만만찮을 듯...

 

 

 

 

 

 

 

 

 

 

 

 

 

 

 

 

 

제데로 된 집은 역시 후원의 풍광이 받쳐주어야...

 

 

 

 

 

 

 

 

 

 

 

이 집에서 내가 주목하는 점은

건물 앞에 조성된 두개의 섬이 있는 작은 연못.

 

 

 

 

 

 

 

 

 

 

천관산 자락의  장천제(長川齊)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72호)

 

원래는 장천암(長川庵)이 있었다고 하는데 장흥위씨(長興魏氏)들이 조선 전기(1450년경)

이곳에 장천재를 세워 오랫동안 한학의 서재로 이용되어왔다고 한다. 현 건물은 1870년경

중건한 건물로서 한때 위백규(魏伯珪)가 수학하였던 곳이다.

위백규는 이곳, 즉 장흥부 계춘동(지금의 관산읍 방촌리)에서 태어나 평생동안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으로만 일생을 마쳤으며, 천문·지리·율력·의학서 등에까지 통달하였다.

 

 

 

 

태고송(太古松)의 주검.

600년 수령의 이 장천재 태고송을 보러왔으나  아뿔싸....

 

 

 

 

이 건물은 8계단의 석재로 높은 기단을 이루고 H자형 평면에 정면 양칸에는

누각형을 하고 난간을 둘렀다. 마루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중앙 3칸은 방을 배치하였다.

결구수법은 4칸에 주두(柱頭)와 첨차(檐遮)를 올려 지붕하중을 지탱하게 하고

지붕은 중간우동의 곡선이 양편날개의 지붕높이와 같게 하였는데

전면에서는 팔작형 합각을 이루고 있으나 배면에는 맞배지붕 형식을 취한 것이 특징이다.

 

 

 

 

 

천관산 동백,  한 개체의 꽃피움도 보지 못하고...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었는데,

 아마도 소나무 에이즈 때문인 듯...

 

 

 

 

강진 전라병영성

(사적 제397호)

 

992년 3월 9일 전라남도기념물 제140호로 지정되었다가 1997년 4월 18일 사적 제397호로 다시 지정되었다.

면적 93,139㎡로 조선시대 전라도 육군의 총지휘부이다. 1417년(태종 17) 본래 광산현에 설치되어 있던

병마절도사영을 이설한 것이다. 초대 병마절도사 마천목이 전라도 53주 6진을 통치하였을 때 축조하였다.
마천목의 꿈 속에 나타난 대로 눈의 자국을 따라 축조하였다고 하여 ‘설성’이라고도 한다.
당시 남해에 자주

출몰하던 왜구를 막기 위한 것으로 1599년(선조 32) 도위수 권율의 상소로 장흥으로 이설하였다가 1604년

다시 본래의 위치로 옮겼다.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으로 병영성이 함락되어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듬해인 1895년(

고종

32) 복구되지 못하고 폐영되었다. 폐영 당시 1,889개의 가옥과 5,973명이 살고 있었다. 《

대동지지

》 《색지》에 따르면 석축의 둘레 2,820척, 높이 18척, 여첩 302개, 옹성 12개, 포루 2개, 호지 5개, 우물 9개가 있었다.
또 2층 누로 이뤄진 남문·동문·북문 등이 있었고, 각종 관사와 누정은

일제강점기

에 모두 훼철되었다.

 

평지에 축조된 성으로 남북으로 약간 긴 직사각형이며, 총 길이는 1,650m이다. 성의 형태는 남북이 길고 동벽의 길이가 서벽에 비해 약간 짧은 부정형의 형태이다. 성곽의 서북쪽에 개천이 흐르고 있는데, 이 개천을 해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조선시대 서남부의 군사 본부로서 방어기지와 육군 지휘부가 되었고, 제주도에 표류 중이던 네덜란드인 하멜이 이곳으로 압송되어 약 8년 동안 억류되었다.

 

-백과사전 내용 발췌-

 

 

 

 병영성 복원이 시작된지 꽤 오래된 것으로 기억되는데

아직까지도...

 

 

 

 

 

 

 

 

 

 

정면 누각 2층 내부

 

 

 

 

 

3층 누각 내부

 

 

 

 

 

 

 

 

 

 

 성루 3개와 겨우 성벽 일부만...

 

 

 

 

 

예전엔 성벽의 일부가 초등학교 담으로 사용되기도 했었다.

 

 

 

 

 

누각에서 내려다 본 병영성 정면 복원공사 현장

 

 

 

 

 

나주 다도면 홍기헌 가옥(羅州 洪起憲 家屋) 사랑채

(중요민속자료 제165호)

 

 도래마을에서 맨 처음 찾고 싶은 곳이 바로 위 홍기헌 가옥 사랑채인데

2014년 1월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더라는 사실.

그건 아마도 주변 환경의 어수선함과 사랑채 내부 관리 부재에 때문인 듯.

 

 

 

 

 홍기응 가옥(羅州 洪起膺 家屋)

 

 

 

 

 

 

 

 

 

 

 

 

 

 

 

 

 

계은매(溪隱梅)의 안위.

나무를 옥죄고 있는 능소화를 하루빨리 제거해야 할텐데...

 

 

 

 

 

홍기응 가옥의 동백

 

 

 

 

 

 

 

 

 

 

 

 

 

 

 

 

 

 

홍기응 가옥의 사랑채

 

 

 

 

 

 도래마을의 마스코트 猫孃(?)

 

 

 

 

 

 

 

 

 

 

 

 

 

 

 

 

 

 홍기창가옥 (羅州 洪起昌家屋)

민속자료 제9호

 

도래마을에서 내가 제일로 치는 집으로 항시 문이 열려 있었는데

 대문 성형을 기념해서일까? 요번엔  꽁꽁 잠겨있는 문.

 

 

 

 

커다란 굴거리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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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이나 강진 쪽 어떻습니까?"

 

애당초 화학산 수도원으로 발걸음을 예정했었는데

갑자기 기운이  아랫녘으로 옮겨지더라는 일포 선생님의 말씀과 제의.

해질녘, 만사를 제끼고 아랫녘을 향하여 악셀을 밟는다.

 

 

토요시장에 도착, 장흥 접주이신 박경훈 동덕과 합류.

표고, 쇠고기, 키조개로 구성된 장흥 먹거리의 대명사.

 이른바 '장흥삼합'을 쓸어 담으며 담소에 담소를 거듭.

 

이어 강물이 내려다 보이는 커피숍으로 이동, 

 어둠 속, 유장한 탐진강(耽津江)의 일렁임을 탐(耽)는 것으로도 모자라

또다른 '숙면제' 적당량 까지를 탐(探)한 뒤에서야 눈꺼풀을 내려놓게 된다.

 

이튿날의 일정이야 위 사진상에 기록된 그대로니

더 이상의 중언부언은 삼가는게 좋겠고...

 

다만 한 가지.

그 어떤 배움에 앞서는 공부가 바로 유람(遊覽)일진데

그렇다면 금번 장흥을 위시한 남녘 일대 기행은 꽤 성공적이었던 셈.

옛 기억과 현재 실상의 대차대조. 남녘의 미래까지 나름 점쳐 볼 수 있었으니까.

 

 

 

 

 

여행...! 

그거 제가 해볼께요. 느낌 아니까 ~~~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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