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기행
1편
2014. 1. 6~7
해질녘,
장흥을 향해 내려가는 길의 일몰
숙소에서 내려다 본 탐진강의 새벽,
'강진청자축제'와 '장흥물축제'가 어우러지는 여름날.
이곳 일급수 탐진강은 그야말로 인산인해.
산꾼이라면 꼭 걸어 주어야 할 그 길.
멀리, 부산면 계관암에서 수리봉과 수인산을 잇는 환상의 라인이 눈에 들어온다.
탐진강, 장흥읍을 동서로 연결하는 다리
읍내 산책중,
군청 옆, 곡자조합이 사라진 자리에 전에 보지 못했던 건물이...
출전 : 점필재집(佔畢齋集) 김종직(金宗直)
- 湖南李節度使 季仝 寄示冠山東亭四詩要和 -
호남의 이 절도사 계동이 관산 동정에 대한 네 수의 시를 부쳐 보여 주면서 화답하기를 요청하다.
俊彩坤維上
뛰어난 인물은 서남쪽에 있고
孤城馬邑邊
외로운 성은 마읍 가에 있구려
山川無限好
산과 냇물은 한없이 아름다워
花月爲誰姸
꽃과 달은 누굴 위해 고운가
列校從如雨
군교들 빗줄기처럼 뒤 따르니
萌望若仙
먼 백성들을 신선처럼 바라보리
東亭春浩蕩
동정에 봄빛이 하도 호탕한지라
灑謝公篇
사공의 시편을 휘갈겨 쓰네
才罷魚麗陣
어리진을 겨우 파하자마자
行廚灔玉杯
행주에선 옥 술잔 넘치는구나
婦巖紅日側
며느리 바우엔 햇살 빗기고
汭水白蘋開
예양강은 흰 마름꽃 피었네
春事垂垂晩
봄놀이는 점차 늦어만 가는데
徵書鼎鼎來
징서는 자주자주 내려오누나
轅門二十里
군문으로부터 이십 리 일대는
更帶火城回
다시 빙 둘러 화성을 띠었으리
昭德門前路
소덕문 앞으로 난 길은
依然直復斜
여전히 쭉 뻗어 가파르리
名園已梅子
명원엔 매실 열렸을 게고
繡陌盡楊花
화려한 거리 버들 그득하겠다
指日尋幽巷
날짜 정해 그윽한 골목 찾거든
需公坐淺沙
공과 모래사장에 앉아 즐기리
臨逢增戀嫪
만날 때 당해선 그리움 더하니
時訪建除家
때때로 택일하는 집 찾는다오
[注]馬邑마읍 : 장흥도호부(長興都護府)에 속했던 현명(縣名)이다.
謝公사공 : 남조 송(南朝宋)의 문장가인 사영운(謝靈運)을 가리킨 듯하다.
魚麗陣어리진 : 군영(軍營)에서 실시하는 진법(陣法)의 이름이다.
行廚행주 : 본디 도시락을 이른 말인데 전하여 야외(野外)의 연회(宴會)를 뜻한다.
徵書징서 : 군졸을 징발하고 군량을 조달하라는 명령서(命令書)를 말한다.
火城화성 : 횃불로 성(城)을 에워싸서 성을 수비하는 것을 이름. 양(梁) 나라 때 양간(羊侃)이 후경군(侯景軍)의
핍박을 받았을 때 성(城) 주위에 횃불을 많이 던져 화성을 만들어서 적의 진로를 차단했던 데서 온 말이다.
#동정(東亭) : 예양강 동쪽 언덕에 있다. 부사 변포(卞袍)가 세웠다.(역, 김규정)
출처 : cafe.daum.net/jnjhgisan
천도교 한울연대 장흥 접주 박경훈 동덕님 (왼편)의 지극한 환대.
장흥...! 역시 남녘은 남녘이더군요.
겨울날에 피어나고 있는 구골목서의 진한 향.
장흥 천도교당 (天道敎長興敎堂)
전라남도 기념물 218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교촌리 25
1906년 4월에 동학의 후예인 교구장 강봉수(姜琫秀) 등이 중심이 되어 천도교인에게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지어졌다.
천도교장흥군교구역사〉와 교당 내부에 걸린 〈교구실기(敎區室記〉(1920년)를 통하여 당시 개축에는 전남의사원
(全南議事員) 신명희(申明熙), 장흥교구장 김재계, 수령 강봉수, 윤세현 등이 주도하였다는 것과 1917년
(포덕오십육년정사(布德五十六年丁巳) 11월부터 한달여에 걸쳐 2,300원(圓)을 모금하여 1918년 2월 15일에 건축을
시작하여 6개월만인 8월 26일 준공한것. 그리고 건축 실비가 1,600원이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금에 참여한 연조인(捐助人) 169인, 목역인(木役人) 104인, 토역인(土役人) 34명으로 명단이 확인되었다.
토역인은 기숙소(寄宿所) 건립을 주로 하였다. 이처럼 1906년과 1918년의 건립에 발기인과 연조인, 목역인,
토역인까지 기록되고 건축 금액이나 건립 기간까지 알 수 있어 중요하다.
장흥지방에 동학(1905년 천도교로 개칭)이 포교된 연대는 대략 1891년 경이었는데
이인환, 이방언, 문남택 등이 동학에 입문하게 되었다.
천도교당 건물로서 남아 있는 흔하지 않은 건축물이라는 점,
삼일운동 등 항일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들과 연계되는 공간구조로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구조 양식에 있어서 전통 한옥이 개화기의 여러 문화가 변용되면서 공적 근대화 과정을 표상하는 등
근대 이행기의 공공기관의 건물의 변모과정을 알 수 있다는 점 등에서 역사적, 학술적, 향토문화사적 가치가 있다.
출처 : 문화재청
문화재청의 의뢰를 받아 실태조사를 나온 사람들
인기척도... 아무런 연락처도...
시대상을 읽을 수 있는 현판
전형적인 일제하의 건물
멀리 억불산과 며느리바위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창호지는 도대체 언제 바른건지...
교당 측면의 돌축대
교촌리 팽나무
교촌리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당연히 향교가...
장흥 향교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07호)
태조 7년(1398)에 세워진 장흥향교는 임진왜란(1592) 때 불에 탄 것을 인조 8년(1630)에 수리하였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고쳤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대성전·명륜당·동재·서재·제기고 등이 있다.
경사지에 위치한 장흥향교는 내삼문을 경계로 배움의 공간과 제사공간을 구분하고 있다.
앞쪽에는 외삼문·명륜당·동재·서재가 있고, 뒤쪽에는 대성전과 전사청이 있어 전학후묘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전사청은 1981년에 지은 것으로 제사를 관리하는 곳이며, 원래 대성전 앞에 동무, 서무가 있었으나 1970년에 철거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노비·책 등을 지급 받아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에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 2차례에 걸쳐 제사만 지낸다.
출처 : 문화재청
장흥 석대들 전적지 성역화 사업 현장.
장흥석대들전적지는 동학농민혁명의 최대·최후 격전지이자 당시 강진현(현 강진군 강진읍, 국도1호선)과
전라병마절도사영(현 강진군 병영면), 벽사역(현 장흥읍 원도리 방면), 장흥도호부(현장흥읍성 남문, 장흥읍 동동리),
자울재(현 장흥읍과 용산면 경계의 고개)를 지나는 길목에 위치한 지리적 요충지로서 동학농민혁명군과 관군사이에
많은 사상자를 배출한 전적지이다. 특히 장흥 석대들 전투는 동학농민 혁명과정에서 전봉준을 중심으로 하는 농민군
주력과는 별개로 이루어진 전투로 전봉준을 비롯한 지도부가 모두 체포된 이후에도 항전이 계속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지로서, 동학농민전쟁의 전체적 현황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유적지이며 반외세·반봉건을 지향하는
민족·민주운동을 지향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장흥석대들전적지는 정읍황토현전적지(사적 제295호)와
공주우금치전적지(사적 제387호), 그리고 장성황룡전적지(사적 제406호)와 더불어 동학농민전쟁 4대 전적지로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뛰어나고 기 지정된 전적지와 비교 연구할 수 있는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
평화제
장흥읍 평화마을 앞에 자리잡은 저수지로 산책하기에 그만.
송백정
이 아름다운 연못을 조성한 의도를 짐작컨데
아마도 저 멀리 보이는 억불(億佛)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돌이켜 보니,
처음 송백정을 찾아왔던 때가 지난 1970년.
이곳 송백정 배롱나무는 붉은색, 분홍, 흰색등의 개체가 혼재되어 있다.
松百井을 한 바퀴 돌아본다.
연지 내부 섬으로...
내 기억으론 한 두 그루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두 그루 소나무만 남아있다.
정자도 사라지고...
장흥 무계고택 (長興 霧溪古宅)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61호)
원래 정화사라는 절터였다고 전하는데 조선 철종 3년(1852) 고재극 씨가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부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一자형 구조를 이루고 있다. 경사가 급해 건물은 3단으로 나누어 구성하였다.
제일 아랫단에 대문과 하인방을, 그 다음 단에 마당·창고·관리사를 두고, 맨 윗단에 본채와 양옥을 배치하였다.
안채는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주변에는 소나무와 느티나무, 배롱나무, 대나무 등이 한데 어울려 한옥의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
비석머리만 따로 떼어져...
고택의 연륜을 느끼게 해 주는 영산홍
언뜻 이 삼백년 수령은 되어 보인다 .
안채
정면 5칸, 측면 2칸에 전퇴를 둔 목조기와 팔작집이다.
건물 전체가 3단을 이루며 장흥읍을 향한 형세의 북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고영완(1914∼1991) 호는 무계.
일본전수학원 수료.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름.
초대 장흥군수. 국회의원, 장흥중학교 설립에 사재 출연. 서예가.
안채 앞에 선 석등인데 거의 일본풍 느낌.
고영환 가옥 맨 뒷편
가옥 뒷편 산으로 이어지는 길
과거 절이었음이 분명한 고택 입구
고택 입구가 이처럼 아름다운 집이 어디 또 있을까?
자연과 인공을 적절히 배치시킨 형태의 고택.
붉은색, 보라색, 분홍색, 흰색등의 木백일홍 메뉴.
그 중에서 송백정 배롱나무를 대표하는 색을 꼽으라면 단연 흰색 백일홍.
육칠십년 대까지만 해도 이 흰색 木백일홍 개체는 정말 귀했기에 하는 말이다.
이런 승경을 놓칠리 없는 시인묵객 제위의
왕성한 송백정 래왕이야 불을 보듯 뻔한 다반사 였을 터.
호남 화단의 거목인 의제, 남농을 비롯 노산 이은상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수목 들 중 상당한 수령의 영산홍에 머무는 이내 눈길.
쥔장을 뵙고 원림 조성과 선대 분들에 관한 이런 저런 말씀을 좀 나누었으면 좋으련만
어디로 출타중이신지 온 집안이 내내 텅 비어있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