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연/산행·여행·풍경

옥산서원 / 독락당

 

 

옥산서원(玉山書院) 앞을 흐르는 계류 세심대 주변

옥산서원은 회재가 독락당 주변 청절(淸絶)한 냇물을 끼고 있는 바위 다섯 곳에 각각

관어대(觀魚臺)·탁영대(濯纓臺)·세심대(洗心臺)·징심대(澄心臺)·영귀대(詠歸臺)라 이름한

오대(五臺) 중 세심대에 위치하고 있다. 세심대에 흐르는 계곡물은 상중하 폭포로 용추를 이루며

서원 오른쪽인 북쪽에서 남쪽으로 감돌아 흘러나간다. 세심대는 용추에서 떨어지는 물로

마음을 씻고 자연을 벗삼아 학문을 구하는 곳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세심대 계류에 놓인 외나무다리

 

옥산서원(玉山書院)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彥迪, 1491∼1553)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기 위해

1573년(선조 6)에 창건되었다. 서원은 1574년(선조 7)에 '옥산(玉山)'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대원군의 서원 철폐시 훼철되지 않은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무변루 아래를 지나면

 

 

 

 

 

 구인당 마당에 올라서게 된다.

 

 

구인당의 '구인(求仁)'은 성현의 학문이 다만 '인(仁)'을 '구(求)'하는 데 있다는

회재 성리학의 핵심을 나타내는 말로, 회재의 저서 『구인록(求仁錄)』에서 취한 것. 

강당 전면에 걸린 '옥산서원' 편액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글씨이고,

강당 대청 전면에 있는 '옥산서원' 편액은 창건 당시 사액받은 편액으로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1538∼1609)의 글씨이며,

'무변루'와 '구인당'의 편액은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의 글씨이다.

 

회재는 중종 때의 성리학자이자 문신으로 주희의 주리론적 입장을 성리학의 정통으로

밝힘으로써 조선시대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정립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호를 '회재'라 한 것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의 호인 '회암(晦庵)'에서 '회(晦)'자를 취함으로써

 주희의 학문을 따랐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회재의 성리학은 그 후 퇴계에게 이어진다.

회재는 1610년(광해군 2) 9월에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황 등과 함께 문묘에 종사되었다.

'동방오현(東方五賢)'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조선조 도학(道學)의 우뚝 선 봉우리로 평가받는다.

 

 

 

때마침 동재에선 다반사가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사단법인 '신라문화원' 회원들께서 마련한 차판.

마침 입이 텁텁하던 차에 넙죽 넙죽 잘도 받아 넘깁니다.

 

 

 

 

 

 

 

 

 

 

 

 

 

 

 

 

일포 선생님께서 들고가신 묵방산 들국화 차맛도 보여 드리고.

 

 

 

 

 

맨 왼편은 '신라문화원장' 진병길 선생

 

 

 

 

 

독락당(獨樂堂) 

회재 이언적의 고택 사랑채로 보물 제413호.

 

작은 계류를 집 앞으로 흐르게 하여 벽사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대문채가 없는 세 칸의 솟을대문은 측간과 마구간을 한 칸씩 두고 가운데에는 두 짝의 대문을 달고

  대문 약 10보 앞에는 하마비를 두어 말에서 내리도록 하였다

 

회재의 고향은 경주 양동마을이다. 회재는 만년에 관직을 그만두고 양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곳 경주시 안강읍 옥산의 시냇가에 안채를 짓고 개울에 면하여 사랑채 독락당(獨樂堂)과

정자 계정(溪亭)을 경영하고 자연을 벗삼으며 약 6년간 성리학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그런고로 회재가 세상을 떠난 후 독락당에서 가까운 계류 아랫쪽에 옥산서원이 세워졌다.

 


 

 

안채와 바깥채의 구획된 담장.

 행랑채 대문 오른편의 협문은 옥산정사로 가는 문이요, 그 옆으로 난 골목길은 자계천으로 연결된다.

이 골목에는 커다란 향나무가 드나드는 사람들을 검문하듯 서 있다.

대체적으로 독락당 내부 공간은 일부러 복잡하게 만들어 놓은 듯 보인다.

뭔가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회재의 후손이 기거하는 안

 

 

 

독락당 구역

 

 

 

 

독락당

 

 

 

 

 살창으로 된 옥산정사 옆 담의 일부는

계류와 바람을 직접 느끼며 소통하고자 했던 징표라 할 수 있겠다.

 

 

 

 

계정에서 내려다 본 계류 자사천.

이곳 풍광이야말로 독락당이 이곳에 들어서게 했음을 잘 알게 해 주는 예.

 

 

 

 

저 계류를 따라 조금 내려간 곳에 옥산서원이 자리한다.

 

 

 

 

 

 

 

 

 

 

이중 담으로 보호되고 있는 사당 모습으로 답답한 느낌.

 

 

 

 

 

 

 

 

 

 

 

자계천과 건너 산이 한 눈에 들어올 수 있도록 배려한 계정에서의 풍광.

 

 

 

 

 

 

 

 

 

 

 

 

 

 

 

 

 

 

 

 

 

 

 

독락당은 이언적 선생이 정치를 접고 낙향하여 지은 집의 당호로,

사랑채로 사용하던 곳은 옥산정사로 명명하고 있다. 독락당은 무엇보다 한옥과 자연의 만남,

그 합일의 궁극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어떻게 건물을 지어야 자연과 가장 잘 어울리는가를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건물이다.

특히 옥산정사 뒤편의 계정을 중심으로 한 영역과 자계천의 어울림은 압권이다.

.

 

 

아마도 방범 설비를 설치 중인 듯.

 

 

 

 

 

회재의 종손께서 집안 내력을 들려주시는 모습.

 

 

 

 

너무도 유명한 독락당 주엽나무

 

 

 

 

 

 

 

 

 

 

 

주엽나무 아랫둥치

 

 

 

 

 

 

'자연 > 산행·여행·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흥기행 2편  (0) 2014.01.09
장흥기행 1편  (0) 2014.01.09
동짓날의 꽃잔치  (0) 2013.12.22
희뫼요 근황  (0) 2013.12.05
서설 감상  (0) 2013.11.28